10화(5,518자)
재계약
스토커를 스토킹했다 · 서강림
12월 4일 금요일 오후 세 시 십 분, 공덕동 건물 4층 복도 끝 공용 복사실은 필라테스 학원과 안지혜 법률사무소가 같이 쓰는 방이었다. 창문 없는 두 평짜리 방에 복사기 한 대, 파쇄기 한 대, 접이식 의자 둘. 벽에 「복사 용지는 각자. 필라테스」라고 쓴 종이가 붙어 있었다. 사무실과 복사실 사이 벽 위에 환기용 철망이 뚫려 있어서 사무실 믹스커피 냄새가 넘어왔다.
나는 회색 스케치북 둘째 권을 복사기 유리 위에 엎었다. 덮개를 닫고 시작 버튼을 눌렀다. 초록 빛이 4월 9일 장 밑을 지나갔다. 복사본이 나오자 지혜가 받아서 날짜순으로 쌓았다. 낼지 안 낼지는 정하지 않았다. 지혜가 정하기 전에 일단 사본을 만들자고 했다. 원본은 하나뿐이니까.
“4월 16일.”
“응.”
“4월 20일.”
“응.”
지혜는 4월 20일 복사본을 받다가 멈췄다. 「오늘도 위. 오른발 바깥으로」. 김도훈이 낮에 내 이름을 쓴 날 밤에 내가 쓴 글씨였다. 지혜는 복사본을 쌓지 않고 들고 서 있었다.
“예원아. 고2 겨울에 우리 독서실에서 아파트 정문까지 몇 걸음이었는지 기억나?”
“삼백팔십.”
“역시.”
지혜는 복사본을 쌓았다. 손이 조금 떨렸다. 지혜는 손을 재킷 소매 안으로 넣었다.
“너 그때도 걸음 셌어. 입으로. 일, 이, 삼. 이백 넘어가면 숨이 차서 작아지고. 나는 네가 세는 소리 들으면서 걸었어. 뒤를 안 보려고. 네 소리가 들리면 뒤에서 나는 소리가 안 들렸거든.”
복사기가 다음 장을 기다리며 웅 소리를 냈다. 나는 시작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11월 말부터였어. 독서실 끝나고 나오면 남자 하나가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 있었어. 파란 점퍼. 내가 걸으면 일어났어. 아파트 정문까지 따라왔다가 내가 들어가면 갔어. 이 주 동안. 엄마한테 말 못 했어. 엄마가 독서실 끊으라고 할까 봐. 경찰에도 말 안 했어. 뭐라고 해. 따라와요? 다가오지도 않았는데?”
“그래서 나한테 같이 가자고 했구나.”
“이유는 말 안 했지. 너는 안 물었고. 네가 바래다준 지 열흘째부터 그 남자가 안 나왔어. 정류장 의자가 비어 있었어. 너 때문이었어. 근데 나는 끝까지 신고를 안 했어. 그 남자는 이름도 없이 어디론가 갔어. 다른 독서실 앞에 앉았을 수도 있고.”
지혜는 복사본 맨 위 장을 손바닥으로 눌러 폈다.
“나 변호사 되고 처음 맡은 국선이 스토킹 사건이었어. 피고인 쪽. 피고인이 법정에서 그랬어. 다가가지도 연락하지도 않았다고. 나는 그 말을 변호했어. 일 했어. 근데 그날 밤에 삼백팔십 걸음이 생각났어. 그래서 지금 네 사건 맡으면서 내가 겁이 나. 이번에도 내가 덜 다치는 길을 고를까 봐.”
“지혜야.”
“고마워. 9년 늦었어. 그때 말했어야 했는데.”
나는 대답 대신 시작 버튼을 눌렀다. 초록 빛이 5월 14일 장 밑을 지나갔다. 「01:10~01:50 비. 우산 없음」. 지혜는 복사본을 받아 쌓았다. 9년 늦은 인사를 받는 데는 복사 한 장이면 되었다.
*
오후 세 시 사십이 분, 계단에서 소리가 올라왔다.
딱, 따각.
2층 세무회계 앞에서 한 번. 딱, 따각. 3층 필라테스 앞에서 한 번. 나는 복사기 덮개를 든 채 굳었다. 지혜도 들었다. 지혜가 복사실 문을 반쯤 닫고 낮게 말했다.
“여기 있어. 나오지 마. 소리 내지 마.”
“나 지금 백 미터 안이야.”
“네가 온 게 아니고 그 사람이 온 거야. 근데 지금 나가면 마주쳐. 여기 있어.”
지혜가 복사실 문을 닫고 사무실로 갔다. 나는 접이식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복사기와 벽 사이에 등을 붙였다. 4층 복도에서 딱, 따각이 멈췄다. 사무실 문 열리는 소리. 환기 철망으로 목소리가 넘어왔다.
“안 변호사님. 연락 없이 와서 죄송합니다. 전화로 드릴 말씀이 아니라서 왔습니다.”
“앉으세요, 대리님.”
의자 끄는 소리. 서류 가방 지퍼 여는 소리. 종이를 책상에 하나씩 내려놓는 소리가 세 번 났다.
“세 가지입니다. 첫째, 처벌불원서입니다. 윤예원 씨 사건에서 제가 처벌을 바라지 않는다는 서면입니다. 서명과 날인을 했습니다. 법적으로는, 반의사불벌죄가 폐지돼서 이걸 낸다고 재판이 끝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양형에서 피해자 처벌불원은 크게 봅니다. 벌금이 많이 줄어들 겁니다. 둘째, 제가 낸 민사 소송 소 취하서입니다. 셋째, 솔빛물산 채권 소송 재계약서입니다. 1년, 월 쉰 건으로 늘렸습니다. 어제 품의가 통과됐습니다.”
“조건이 있으시겠죠.”
“두 가지입니다. 윤예원 씨가 저를 상대로 낸 고소를 취하하는 것. 그리고 윤예원 씨가 가진 크로키북을 수사기관이나 법원에 내지 않는 것.”
나는 복사기 유리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유리가 아직 따뜻했다. 스케치북 셋째 권이 내 발밑 백팩 안에 있었다.
“크로키북이요?”
“작년 11월 20일에 망원역 승강장에서 봤습니다. 윤예원 씨는 저를 그릴 때 크로키북을 씁니다. 가로등남이 웹툰에 스물여섯 컷 나왔으니까, 밤에도 그렸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리님은 그걸 내면 대리님한테도 불리하니까 막으시는 거고요.”
“그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그걸 내면 윤예원 씨는 작년 가을부터 저를 지켜본 사람이 됩니다. 공소장 변경이 확실해집니다. 저는 이 일이 끝나기를 바랍니다. 둘 다 유죄가 되면 둘 다 잃습니다.”
환기 철망 너머가 잠깐 조용했다. 믹스커피 봉지 뜯는 소리가 났다. 지혜는 어려운 말 앞에서 늘 종이나 컵을 집었다.
“대리님. 피고인 변호인한테 회사 일감을 같이 들고 오셨어요. 이게 합의 제안입니까?”
“법적으로는 합의 제안입니다. 재계약은 원래 일정대로 진행된 겁니다. 별개입니다.”
“별개면 왜 같이 들고 오셨어요?”
환기 철망으로 아무 소리도 넘어오지 않았다. 나는 숨을 넷까지 셌다. 김도훈이 회사 화장실 칸에서 센다던 넷이었다. 다섯이 되었을 때 김도훈의 목소리가 다시 났다. 조사실에서도 법정에서도 들은 적 없는 속도였다. 느렸다.
“같이 들고 와야 받으실 것 같아서 들고 왔습니다.”
“솔직하시네요.”
“4월 20일 메모를 민사에 낸 건 제 실수였습니다. 그 실수를 덮으려고 온 것도 맞습니다. 그래도 제가 겪은 일은 실수가 아닙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압니다. 대리님이 겪은 일은 사실이에요. 법정에서 다 말씀하세요. 저도 그 사실은 안 지울 거예요.”
의자가 밀리는 소리. 지혜가 일어났다. 다음 소리를 나는 처음에 알아듣지 못했다. 무거운 종이 상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였다.
“처벌불원서는 대리님이 원하시면 법원에 직접 내세요. 조건 없이요. 소 취하서도요. 재계약서는 서명 안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진행 중인 지급명령 사건 기록입니다. 열 시간짜리 일을 두 시간 만에 하는 상자들이었어요. 덕분에 월세 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남은 서른아홉 상자는 다음 주 월요일에 퀵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진행 중인 사건은 사임계 내고 인수인계서 써서 회사에 손해 안 가게 하겠습니다.”
“변호사님.”
“대리님 사건에서 저는 고소인 대리인입니다. 이 상자들을 갖고 있으면 대리님 사건도 예원이 사건도 제대로 못 해요. 제가 고르는 거예요. 덜 다치는 길 말고요.”
긴 침묵 뒤에 서류 가방 지퍼 닫는 소리가 났다. 사무실 문이 열렸다. 딱, 따각. 그런데 소리가 이상했다. 발소리 사이에 숨소리가 섞여 있었다. 복사실 문 앞을 지나갈 때 딱, 따각이 반 박자 멈췄다. 나는 복사기 옆 벽에 등을 붙이고 숨을 참았다. 문 밑 틈으로 남색 바짓단과 오른쪽 구두 끝이 보였다. 바깥으로 벌어진 구두 끝. 구두 위로 갈색 상자 모서리가 비스듬히 기울어 있었다. 김도훈은 서류 가방을 어깨에 메고 상자를 두 팔로 안고 있었다. 이 초 뒤에 구두가 움직였다. 딱, 따각이 계단을 한 층씩 내려갔다. 상자 무게 때문에 따각이 평소보다 길었다.
*
복사실 문을 열었을 때 지혜는 사무실 바닥에 앉아 있었다. 등을 돌린 상자 서른아홉 개 사이였다. 책상 위에 처벌불원서와 소 취하서와 재계약서 석 장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김도훈은 서류 석 장을 다 두고 갔다.
“다 들었지?”
“응.”
“월세는 석 달 치 있어. 그다음은 몰라. 필라테스 학원에 복사 용지 값 갚아야 하는데.”
지혜는 웃으려다 말고 상자 하나에 이마를 댔다. 상자 옆면에 「담당 김도훈 대리」가 있었다. 지혜 이마가 대리의 ‘리’ 세로획에 닿았다.
“처벌불원서는 어떻게 해?”
“김도훈 대리가 직접 내면 네 형이 가벼워져. 안 내면 그만이고. 우리가 들고 가서 낼 수도 있는데 그러면 조건 없는 처벌불원서인지 다툼이 생겨. 그냥 두자. 김도훈 대리가 정하게.”
나는 책상 위 처벌불원서를 보았다. 맨 아래 서명란에 김도훈이 있었다. 오른쪽으로 살짝 기운 글씨, 길게 내려온 세로획. 날짜는 12월 3일이었다. 어젯밤에 쓴 서면이었다.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문장 아래 날인이 반듯하게 찍혀 있었다.
오후 네 시 이십 분, 나는 계단을 내려가 1층 순댓국집 문을 밀었다. 건물 밖으로 바로 나갈 수가 없었다. 길 건너 버스 정류장에 남색 정장이 상자를 발밑에 내려놓고 서 있었다. 정류장까지 내 걸음으로 서른 걸음이었다. 순댓국집 사장님이 행주를 들고 물었다.
“혼자세요? 이 시간에?”
“네. 순댓국 하나요. 창가 자리요.”
“순대 많이 드려요?”
“아무렇게나 주세요.”
창가 자리에 앉아 김이 오르는 뚝배기 너머로 정류장을 보았다. 버스 두 대가 지나갔다. 김도훈은 타지 않았다. 세 번째로 빈 택시가 오자 김도훈은 상자를 뒷좌석에 밀어 넣고 서류 가방을 고쳐 멨다. 택시 문을 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건물 4층 창을 보았다. 블라인드도 없는 사무실 창이었다. 고개를 젖히고 위를 보는 각도가 가로등 밑과 같았다. 오른발 끝이 바깥으로 벌어져 있었다. 택시가 떠나고 나서 나는 숟가락을 들었다. 순댓국은 다 식어 있었고, 사장님은 순대를 정말 아무렇게나 많이 넣어 주었다.
*
저녁 여섯 시 이십 분, 망원동으로 돌아가는 6호선 안에서 휴대전화가 울렸다. 마포경찰서 여성청소년수사팀, 황재욱 경위였다. 맞고소 사건도 황 경위에게 배정되어 있었다. 11월 20일 고소인 조사 때 황 경위는 이번에는 양갱 상자를 내 앞에 먼저 놓았다.
“윤예원 씨, 보내 주신 4월 20일 메모 잘 받았어요. 근데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메모는 김도훈 씨가 윤예원 씨 신원을 안 날짜예요. 그날 밤 가로등 밑에 있었다는 증거는 아니에요. 빨래방 결제는 김도훈 씨 카드가 그 시각에 빨래방에서 쓰였다는 거고요. 6월 사진은 얼굴이 안 나오고. 112 출동은 두 번 다 현장에 아무도 없었거나 상호 분리고요. 가로등 밑 남자가 김도훈 씨라는 걸 날짜별로 묶어 줄 게 더 있어야 해요.”
“묶어 줄 거요?”
“네. 예를 들면, 그 남자를 날짜별로 기록해 둔 거요. 시각이랑, 몇 분 있었는지랑. 그런 거 혹시 따로 있으세요?”
열차가 합정역에 멈췄다가 출발했다. 내 무릎 위 백팩 안에 회색 스케치북 세 권과 복사본 백열두 장이 있었다. 백팩 지퍼 손잡이가 열차가 흔들릴 때마다 내 손등을 쳤다.
“경위님. 기록이 있으면, 같은 기록에 다른 것도 같이 나와요?”
“같은 공책이면 다 봐야죠. 일부만 빼서 보면 증거 가치가 떨어져요.”
나는 백팩을 두 팔로 안았다. 김도훈이 상자를 안고 계단을 내려가던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