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753자)

같은 사람

스토커를 스토킹했다 · 서강림

11월 27일 금요일 새벽 네 시 십 분⁠, 나는 창가 책상에 라이트 패드를 켰다⁠. 어제 법정에서 김도훈은 자기가 출근남이라고 했다⁠. 나는 법정에서 들은 말을 내 종이로 확인하고 싶었다⁠. 배경 어시는 선을 옮길 때 빛 위에 종이를 겹친다⁠. 하얀 빛이 블라인드 날개에 닿아 방 안이 수족관처럼 밝아졌다⁠.

왼쪽에 첫 권⁠, 2025년 10월 14일 여덟 시 십이 분의 장을 폈다⁠. 남색 정장의 오른발이 감나무 담장 앞 보도블록을 밟고 있었다⁠. 오른쪽에 둘째 권⁠, 2026년 4월 9일 새벽 한 시 십 분의 장을 폈다⁠. 가로등 밑⁠, 검은 패딩⁠, 모자⁠, 운동화⁠. 고개를 젖히고 위를 보는 남자⁠. 장 아래 내 글씨가 있었다⁠. 「⁠4/9 01⁠:10 가로등 밑 남자⁠. 40분⁠. 운동화⁠. 오른발 바깥으로⁠」⁠.

나는 무서운 것을 그릴 때도 발부터 그렸다⁠. 4월의 나는 남자의 얼굴을 그릴 수 없어서 발을 그렸다⁠. 모자 그늘 밑은 연필로 까맣게 칠했고⁠, 운동화는 끈 구멍까지 그렸다⁠. 오른발 끝이 바깥으로 벌어져 있었다⁠.

두 장을 뜯지 않고 스케치북째 겹쳤다⁠. 종이가 두꺼워 선이 흐릿하게 비쳤다⁠. 첫 권의 오른발 위에 둘째 권의 오른발을 맞췄다⁠. 크기가 달라서 휴대전화로 두 장을 찍어 그림 프로그램에서 크기를 맞췄다⁠. 투명도 오십 퍼센트⁠. 두 발의 각도가 한 장처럼 포개졌다⁠. 십오 도⁠. 아침 남자의 구두와 밤 남자의 운동화가 같은 십오 도로 땅을 디뎠다⁠.

운동화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4월부터 9월까지 가로등 밑 남자는 한 번도 딱⁠, 따각 소리를 내지 않았다⁠. 7월에 빨래방에서 나온 남자를 따라갔을 때도 남자는 운동화였다⁠. 남색 정장과 구두는 이튿날 아침 감나무빌라 대문에서 처음 보았고⁠, 딱⁠, 따각도 감나무빌라 대문 앞에서부터 들렸다⁠. 나는 낮의 김도훈과 밤의 가로등남을 같은 사람이라고 알고 따라갔지만⁠, 작년 가을의 출근남은 두 사람 어디에도 넣지 않았다⁠. 출근남은 내 그림 속 사람이었다⁠. 그림 속 사람은 우리 집 앞에 오지 않는다고 믿었다⁠.

나는 레이어 두 장을 합쳤다⁠. 합친 그림에는 발이 하나만 남았다⁠. 작년 가을 내가 창가에서 아침마다 그린 사람이 올봄 밤마다 가로등 밑에서 내 창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먼저 보았고⁠, 김도훈이 돌아와 보았다⁠. 새벽 네 시 사십 분⁠, 라이트 패드 빛이 블라인드 날개 사이로 새어 나가 가로등 불빛과 섞였다⁠. 나는 라이트 패드를 껐다⁠.

*

오전 열한 시⁠, 합정 작업실 수박밭의 모니터 여섯 대가 하나도 켜져 있지 않았다⁠. 박수진 작가는 창가 자리에서 컵라면에 물을 붓고 있었다⁠. 은비가 내 책상으로 의자를 굴려 와 휴대전화를 보여 주었다⁠. 툰다락 공지였다⁠.

「⁠「⁠골목 끝 집⁠」은 작품 내용과 관련한 확인을 위해 당분간 휴재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새벽 다섯 시에 올라왔어요⁠. 담당자님이 작가님한테 전화로 먼저 말했대요⁠. 계약서 11조 검토 중이래요⁠. 언니⁠, 저 휴재 공지 처음 봐요⁠. 독자들이 공지에 댓글 칠천 개 달았어요⁠. 반은 ‘⁠어시 잘라라⁠’⁠, 반은 ‘⁠가로등남 실화 맞냐⁠’⁠.⁠”

작가님이 컵라면 뚜껑 위에 나무젓가락을 얹어 눌렀다⁠. 삼 분을 재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예원⁠. 할 말 있으면 지금 해⁠. 라면 불기 전에⁠.⁠”

나는 백팩에서 회색 스케치북 첫 권을 꺼내 작가님 책상에 펴 놓았다⁠. 10월 14일 여덟 시 십이 분⁠. 휴대전화에는 새벽에 합친 그림을 띄웠다⁠.

“⁠출근남이 가로등남이에요⁠. 둘 다 김도훈이에요⁠. 작년 가을 출근남은 제 창 아래를 지나던 김도훈이고⁠, 올봄부터 가로등 밑에 서 있던 것도 김도훈이에요⁠. 발이 같아요⁠.⁠”

은비가 의자를 굴려 와 휴대전화 화면을 들이밀었다⁠. 끝집러 게시판이었다⁠. 「⁠[이론] 출근남=가로등남 (⁠4월 기준 정리⁠)⁠」⁠. 공감 천이백⁠.

“⁠언니⁠, 이거 끝집러에 4월부터 있던 이론이에요⁠. 3월에 출근남 없어지고 4월에 가로등남 나왔으니까⁠, 출근남이 밤에 숨어서 언니네 창 본다고⁠. 저 처음부터 봤어요⁠. 독자들이 지어낸 웃긴 글인 줄 알았어요⁠. 언니한테 말하면 언니가 웃을 줄 알고 말 안 했어요⁠.⁠”

“⁠웃을 일 아니었어⁠.⁠”

“⁠이제 알아요⁠.⁠”

작가님은 그림을 오래 보았다⁠. 컵라면에서 김이 올라왔다⁠.

“⁠스케치북 이거⁠, 낼 거야⁠?⁠”

“⁠경찰에 내면 가로등 밑 여섯 달이 날짜별로 나와요⁠. 4월 9일부터⁠.⁠”

“⁠작년 가을도 나오지⁠.⁠”

“⁠네⁠.⁠”

“⁠그럼 내지 마⁠.⁠”

작가님은 나무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출근남 매주 넣자고 한 거 나야⁠. 작년 가을에 네가 아침마다 지나는 남자 걸음이 좋다고 했을 때⁠, 내가 그럼 매주 넣자고 했어⁠. 독자들이 이름 붙이니까 신났고⁠. 1월에 독자 하나가 이 골목 어디냐고 물었을 때 망원동 느낌이라고 답글 단 것도 나야⁠. 3월에 성지순례 간다는 글 보고도 그냥 뒀어⁠. 그 사람이 실제로 있다는 거⁠, 나도 알았어⁠.⁠”

“⁠그럼 작가님도 같이 말해 주세요⁠.⁠”

“⁠말하면 「⁠골목 끝 집⁠」은 실제 사람을 허락 없이 그린 작품이 돼⁠. 11조로 연재 끝나고⁠, 김도훈이 우리 작업실한테도 소송 걸 수 있어⁠. 은비 월급⁠, 선 따기 애들 월급⁠, 다 끝이야⁠.⁠”

작가님은 책상 서랍에서 명함 한 장을 꺼냈다⁠. 「⁠법무법인 ○○ 변호사⁠」⁠. 낯선 이름이었다⁠.

“⁠네 재판⁠, 내가 사선 변호사 사 줄게⁠. 국선 말고⁠. 착수금 내가 낼게⁠. 대신 스케치북은 내지 마⁠. 사선 변호사도 그렇게 하라고 할 거야⁠.⁠”

“⁠지혜는요⁠?⁠”

“⁠국선은 바꿀 수 있잖아⁠.⁠”

은비가 의자를 반 바퀴 돌려 등을 보였다⁠. 나는 명함을 집지 않았다⁠. 스케치북을 덮어 백팩에 다시 넣었다⁠. 컵라면은 이야기하는 동안 불어서 면이 뚜껑까지 올라와 있었다⁠.

“⁠작가님⁠. 5월에 제가 가로등남 진짜 사람이라고 했을 때⁠, 작가님은 댓글 좋으니 계속 넣으라고 했어요⁠. 오늘은 내지 말라고 하시네요⁠. 둘 다 작업실 때문이에요⁠.⁠”

“⁠둘 다 작업실 때문이야⁠. 맞아⁠.⁠”

작가님은 말을 마치고 나서야 나무젓가락을 쪼갰다⁠. 반듯하게 갈라지지 않고 젓가락 한 짝이 길게 남았다⁠.

“⁠그래도 너는 그 작업실에서 일 년 동안 월급 받았어⁠.⁠”

*

오후 네 시⁠, 공덕역 근처 정신건강의학과 접수대에서 진단서를 받았다⁠. 발급 비용은 이만 원이었다⁠. 지난주 문진표를 낸 뒤 두 번 상담했고⁠, 두 번 다 의사는 내 손을 보았다⁠. 상담하는 동안 나는 오른손 손날을 왼손 엄지로 계속 문질렀다⁠.

“⁠블라인드는 언제부터 내리셨어요⁠?⁠”

“⁠4월 9일이요⁠.⁠”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시네요⁠.⁠”

“⁠적어 놨어요⁠. 다 적어 놔요⁠. 시각까지⁠.⁠”

의사는 키보드를 치다가 손을 멈췄다⁠.

“⁠적어 두는 것도 불안할 때 많이 하는 행동이에요⁠. 적어 두면 덜 무섭거든요⁠. 근데 적은 걸 다시 확인하느라 더 못 자기도 해요⁠. 요즘 몇 시에 주무세요⁠?⁠”

“⁠네 시요⁠. 오늘은 네 시 십 분에 일어났어요⁠.⁠”

진단서에는 병명 한 줄과 소견 세 줄이 있었다⁠. 「⁠2026년 4월경부터 야간 수면 곤란⁠, 귀가 시 복도·도어락 반복 확인⁠, 낮 시간에도 창을 가림⁠」⁠. 김도훈의 진단서보다 석 달 늦은 날짜였다⁠. 무서웠던 날짜는 김도훈보다 다섯 달 빨랐는데⁠, 종이에 적힌 날짜는 늦었다⁠. 나는 진단서를 클리어 파일에 넣어 백팩 맨 안쪽 칸에 꽂았다⁠. 공덕역 계단을 내려가면서 뒤를 두 번 돌아보았다⁠. 의사가 말한 행동이었다⁠. 알고 나서도 멈춰지지 않았다⁠.

*

11월 28일 토요일 저녁 일곱 시 반⁠, 지혜가 처음으로 우리 집에 왔다⁠. 현관 번호판을 물티슈로 닦는 나를 보고 지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3층 복도 끝까지 한 번 더 보는 나를 따라 지혜도 복도 끝을 보았다⁠. 302호에 들어서자 지혜가 블라인드를 보았다⁠.

“⁠올려도 돼⁠?⁠”

“⁠안 돼⁠.⁠”

지혜는 손을 내리고 창가 책상 앞 바닥에 앉았다⁠. 나는 스케치북 세 권을 바닥에 펼쳤다⁠. 첫 권의 작년 가을⁠, 둘째와 셋째 권의 올봄부터 9월까지⁠. 지혜는 장을 하나씩 넘기면서 날짜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지혜 손가락이 4월 9일⁠, 4월 16일⁠, 4월 20일⁠, 5월 14일에서 멈췄다⁠. 5월 14일 장에는 「⁠01⁠:10⁠~01⁠:50 비⁠. 우산 없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게 다 날짜가 있어⁠. 여섯 달⁠. 그림이라서 얼굴은 안 나오지만⁠, 날짜랑 시각이 112 출동 내역이랑 맞고⁠, 단톡방 5월 14일이랑 맞고⁠, 빨래방 결제랑도 맞춰 볼 수 있어⁠. 이건 김도훈 사건에 좋은 증거야⁠.⁠”

“⁠근데⁠?⁠”

“⁠근데 같은 스케치북에 작년 가을이 있어⁠. 아침마다 시각까지 적었고⁠, 11월 20일에는 역까지 따라갔다고 네 글씨로 적었어⁠. 이걸 내면 공소장 변경은 거의 확실해⁠. 네 사건은 작년 11월부터가 되고⁠, 김도훈이 법정에서 한 말이 전부 맞는 게 돼⁠. 누가 먼저였는지⁠.⁠”

“⁠안 내면⁠?⁠”

“⁠김도훈 사건은 증거가 모자라⁠. 경찰은 가로등 밑 남자가 김도훈이라는 걸 묶어 줄 게 더 있어야 한대⁠. 빨래방 결제는 김도훈이 빨래했다는 증거로만 읽혀⁠. 불송치가 또 나올 수 있어⁠. 그러면 김도훈은 아무 일 없이 돌아와⁠. 그리고 다시 가로등 밑에 설 수 있어⁠. 법적으로 아무것도 안 막혀 있으니까⁠.⁠”

지혜는 마지막 말을 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김도훈의 말투가 자기 입에서 나온 것을 들은 얼굴이었다⁠.

“⁠재계약은⁠?⁠”

“⁠어제 품의 올라갔대⁠. 김도훈 대리가 올렸대⁠. 자기를 고소한 대리인인 줄 알면서⁠. 결과는 다음 주⁠.⁠”

“⁠그 사람 왜 그래⁠?⁠”

“⁠법적으로 별개라서⁠. 그 사람한테는 그게 이유야⁠.⁠”

지혜는 바닥에서 일어나 블라인드 앞으로 갔다⁠. 손가락으로 날개 하나를 눌렀다⁠. 길 건너 빨래방 불빛과 가로등이 보였다⁠. 지혜는 한참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서 보면 다 보이네⁠. 저기 서 있으면 여기서 다 보이고⁠.⁠”

“⁠응⁠.⁠”

“⁠나는 독서실 끝나고 뒤를 한 번도 안 봤어⁠. 보면 진짜가 될까 봐⁠.⁠”

지혜는 날개에서 손을 뗐다⁠. 블라인드가 탁 소리를 내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지혜는 고2 겨울 얘기를 거기서 멈추고 바닥에 다시 앉아 휴대전화를 꺼냈다⁠.

“⁠다른 증거 찾자⁠. 네 스케치북 말고⁠. 네가 그린 거 말고 남이 본 거⁠.⁠”

*

밤 열한 시 이 분⁠, 지혜는 바닥에 엎드려 휴대전화로 끝집러 게시판을 넘기고 있었다⁠. 회원 가입을 하는 데 칠 분이 들었다⁠. 가입 질문이 있었다⁠. 「⁠「⁠골목 끝 집⁠」 1회 첫 컷에 감나무는 몇 그루⁠?⁠」 지혜가 휴대전화를 내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몇 그루야⁠?⁠”

“⁠두 그루⁠. 담장 안에 하나⁠, 담장 밖으로 가지만 넘어온 거 하나⁠. 가지만 넘어온 것도 세야 돼⁠.⁠”

지혜는 「⁠2⁠」를 쳤고 가입 승인이 떴다⁠. 그린 사람이 푼 문제였다⁠. 닉네임은 「⁠법은꿀이지⁠」였다⁠. 은비가 알려 준 대로 「⁠가로등남⁠」을 검색하고 날짜를 6월로 좁혔다⁠. 글이 마흔두 개 떴다⁠. 대부분은 그림 캡처에 동그라미를 친 글이었다⁠. 서른여섯 번째 글에서 지혜의 손가락이 멈췄다⁠.

「⁠[목격담] 가로등남 실물 봤다 (⁠사진 있음⁠)⁠」⁠. 6월 27일 새벽 한 시 삼십삼 분에 올라온 글이었다⁠. 글쓴이 닉네임은 「⁠하늘하늘⁠」⁠.

「⁠성지 골목 밤에도 가 보고 싶어서 갔는데 진짜 가로등 밑에 사람 서 있음ㄷㄷ 웹툰이랑 똑같이 3층 창 올려다보고 있었음⁠. 무서워서 편의점 앞에서 한 장만 찍고 튐⁠」

사진은 편의점 모퉁이에서 찍은 것이었다⁠. 가로등 불빛 밑에 검은 패딩과 모자⁠. 휴대전화를 든 손⁠, 화면 불빛이 턱을 밝히고 있었다⁠. 사진 위 모서리에 우리 건물 3층 창 하나가 들어와 있었다⁠. 블라인드가 내려진 창이었다⁠. 내 창이었다⁠. 6월 27일이면 112를 누른 지 아흐레⁠, 불송치 문자가 오기 아흐레 전이었다⁠. 경찰차가 왔다 간 다음에도 남자는 왔다⁠.

지혜가 사진을 두 손가락으로 벌려 키웠다⁠. 가로등 밑 아스팔트 위의 운동화가 화면에 가득 찼다⁠. 오른발 끝이 바깥으로 벌어져 있었다⁠.

댓글은 열한 개였다⁠. 맨 아래 댓글 하나가 지혜와 나를 동시에 숨 멈추게 했다⁠. 「⁠이거 출근남 아님⁠? 서 있는 발 똑같은데⁠」⁠. 글쓴이 하늘하늘이 단 답글이 바로 밑에 달려 있었다⁠. 「⁠ㅇㅇ 나 봄에 출근남 따라가 봤잖아 걸음 알아⁠」⁠.

8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같은 사람 · 스토커를 스토킹했다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