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487자)

출근남

스토커를 스토킹했다 · 서강림

11월 26일 목요일 오전 열 시 칠 분⁠, 서울서부지방법원 정문 보안 검색대에서 내 검은 백팩이 엑스레이 벨트를 지나갔다⁠. 백팩 속 필통이 화면에 하얗게 떴다⁠. 검색대 직원이 필통을 열어 보라고 했다⁠. 연필 열두 자루⁠, 지우개 둘⁠, 커터칼 하나⁠. 직원은 커터칼을 보관함에 넣고 번호표를 주었다⁠. 「⁠17⁠」⁠. 법원에서 받은 번호표는 민원실 번호표보다 작았다⁠.

내 뒤에서 영희 사장님이 검색대에 종이봉투를 올렸다⁠. 직원이 봉투를 들어 냄새를 맡았다⁠.

“⁠음식물은 법정에 못 들고 들어가세요⁠.⁠”

“⁠이거 호떡이야⁠. 다 식었어⁠. 냄새 안 나⁠.⁠”

“⁠냄새가 지금 나는데요⁠.⁠”

“⁠그럼 여기 맡겨⁠. 끝나고 찾아갈게⁠. 하나는 아가씨 먹어⁠.⁠”

직원은 봉투를 받지도 거절하지도 못하고 들고 서 있었다⁠. 사장님은 시장 쉬는 날도 아닌데 가게 셔터를 내리고 왔다⁠. 셔터에 「⁠오늘 오전 재판 갑니다⁠」라고 써 붙였다고 했다⁠. 은비는 오전 반차를 쓰고 왔고⁠, 작가님은 오지 않았다⁠.

3층 304호 법정 앞 복도는 병원 대기실처럼 조용했다⁠. 회색 긴 의자에 사람들이 띄엄띄엄 앉아 있었다⁠. 법정 문 옆에 붙은 개정표 열 시 반 칸에 「⁠스토킹범죄의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 · 피고인 윤○○⁠」이 있었다⁠. 내 이름이 동그라미 두 개가 되어 있었다⁠. 지혜는 재킷 소매를 걷고 서류 가방에서 기록 묶음을 꺼내 무릎에 올렸다⁠. 법원에 오는 날이라 운동화가 아니라 굽 낮은 검은 구두였다⁠. 뒤축은 꺾지 않았다⁠.

복도 끝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딱⁠, 따각⁠. 김도훈은 남색 정장에 검은 가죽 서류 가방을 어깨에 메고 복도 반대편 끝 의자에 앉았다⁠. 우리 사이에 긴 의자가 다섯 개 있었다⁠. 백 미터가 안 되는 거리였다⁠. 지혜가 내 손목을 잡았다⁠.

“⁠법정은 괜찮아⁠. 법원이 부른 거니까⁠. 대신 쳐다보지 마⁠.⁠”

나는 복도 바닥 타일을 세었다⁠. 줄눈이 정확한 격자였다⁠. 김도훈까지 타일이 마흔두 장이었다⁠.

*

열 시 사십일 분에 우리 사건 이름이 불렸다⁠. 304호 법정은 생각보다 작았다⁠. 법대가 높았고⁠, 법대 앞에 속기 자리⁠, 속기 자리 앞으로 왼쪽에 검사석⁠, 오른쪽에 피고인석과 변호인석⁠. 가운데에 증인과 피해자가 앉는 진술석이 있었다⁠. 법정 뒤쪽 방청석 세 줄 중 맨 앞줄에 영희 사장님과 은비가 앉았다⁠. 사장님은 앉자마자 앞치마를 안 하고 온 게 어색한지 무릎을 두 번 쓸었다⁠.

조민석 판사는 마흔 중반으로 보였다⁠. 안경을 코끝에 걸고 기록을 넘기면서 나를 보지 않고 물었다⁠.

“⁠피고인 이름⁠, 생년월일⁠, 주소⁠, 직업 말씀하세요⁠.⁠”

“⁠윤예원⁠. 2000년 3월 2일⁠. 서울 마포구 망원동⁠. 웹툰 배경 어시스턴트요⁠.⁠”

“⁠배경 어시스턴트는 무슨 일을 합니까⁠?⁠”

“⁠만화 속 골목이랑 건물을 그려요⁠.⁠”

“⁠사람은 안 그립니까⁠?⁠”

“⁠배경에 들어가는 사람은 그려요⁠.⁠”

판사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진술거부권을 알려 주었다⁠. 검사석의 공소청 검사가 일어나 공소장을 읽었다⁠. 2026년 7월 14일부터 9월 30일까지 쉰세 차례⁠. 피해자의 출근길과 직장 앞과 운동 시설 앞⁠. 내가 지도에 그은 빨간 선이 검사의 목소리로 다시 그어졌다⁠. 지혜가 일어났다⁠.

“⁠피고인은 공소사실에 적힌 행위를 한 사실 자체는 인정합니다⁠. 다만 피고인은 봄부터 집 앞에서 겪은 일 때문에 증거를 모으려고 피해자를 따라갔고⁠, 이것이 정당한 이유에 해당하는지 다투겠습니다⁠. 피고인이 피해자를 상대로 낸 고소 사건이 마포경찰서에서 수사 중입니다⁠.⁠”

“⁠알겠습니다⁠. 피해자 의견 진술 신청이 있지요⁠. 피해자 나오셨습니까⁠?⁠”

“⁠네⁠.⁠”

김도훈이 방청석 둘째 줄에서 일어나 진술석으로 걸어 나왔다⁠. 딱⁠, 따각⁠. 법정 바닥은 나무였다⁠. 소리가 둥글게 울렸다⁠.

*

“⁠피해자는 하고 싶은 말을 하시면 됩니다⁠. 증거로 쓰지는 않고⁠, 형을 정할 때 참고합니다⁠.⁠”

“⁠감사합니다⁠. 법적으로는⁠…⁠…⁠.⁠”

“⁠피해자⁠.⁠”

판사가 안경을 코끝에서 올렸다⁠. 얼굴은 그대로였다⁠.

“⁠여기는 법정입니다⁠. 여기서 하는 말은 전부 법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앞에 안 붙이셔도 됩니다⁠.⁠”

방청석에서 은비가 웃음을 참다가 기침을 했다⁠. 김도훈은 한 박자 쉬고 다시 시작했다⁠.

“⁠자료를 화면에 띄워도 되겠습니까⁠?⁠”

법정 벽의 대형 화면에 「⁠골목 끝 집⁠」 컷이 떴다⁠. 1회 아침 장면이었다⁠. 골목⁠, 전봇대⁠, 감나무 담장⁠, 그리고 골목 끝으로 걸어가는 손가락만 한 남색 정장⁠. 컷 귀퉁이에 빨간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김도훈이 실물화상기 위 종이를 넘겼다⁠. 3회⁠. 5회⁠. 8회⁠. 장마다 빨간 동그라미 안에 남색 정장이 있었다⁠. 비 오는 아침⁠, 낙엽 진 아침⁠, 입김 나는 아침⁠. 나는 컷마다 그린 날을 알았다⁠. 3회 컷은 창틀에 커피를 쏟은 날이었다⁠. 8회 컷은 처음으로 원근 격자 없이 그린 날이었다⁠.

“⁠독자들이 출근남이라고 부르는 인물입니다⁠. 마흔한 컷에 나옵니다⁠. 이게 저입니다⁠.⁠”

김도훈은 종이 한 장을 화면 옆에 붙여 띄웠다⁠. 2026년 3월 12일 끝집러에 올라왔다가 회사 게시판까지 퍼진 사진이었다⁠. 감나무 담장 앞을 지나다 돌아본 남색 정장⁠. 컷과 사진이 나란히 떴다⁠. 담장 높이⁠, 감나무 가지⁠, 남자의 기운 어깨까지 같았다⁠.

“⁠제 오른쪽 구두 굽은 바깥이 먼저 닳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걸었습니다⁠.⁠”

김도훈이 오른발을 들어 구두를 벗으려고 했다⁠. 판사가 손바닥을 들었다⁠.

“⁠피해자⁠, 구두는 신고 계세요⁠. 말로 해도 알아듣습니다⁠.⁠”

“⁠네⁠. 컷에도 그렇게 그려져 있습니다⁠. 화면 왼쪽 아래 컷⁠, 오른발 끝이 바깥으로 벌어져 있고 굽 바깥 모서리가 땅에 먼저 닿습니다⁠. 저를 아침마다 본 사람만 그릴 수 있는 발입니다⁠.⁠”

화면 왼쪽 아래 컷은 내가 가장 공들인 컷이었다⁠. 굽 모서리를 세 번 고쳐 그렸다⁠. 손날이 저절로 무릎 위에서 움직였다⁠. 피고인석 책상 밑에서 나는 손을 꽉 쥐었다⁠.

“⁠2025년 가을⁠, 출근길에 3층 창에서 사람이 저를 보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침마다 같은 창이었습니다⁠. 11월 20일에는 그 사람이 망원역 승강장까지 따라와 의자에 앉아서 제 발을 그렸습니다⁠. 올해 1월에 회사 동료가 이 웹툰을 보여 주면서 대리님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3월에 독자들이 골목에 왔습니다⁠. 성지순례라고 했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이 감나무 담장 앞에서 제 출근길을 기다렸다가 찍었습니다⁠. 그 사진이 회사 익명 게시판에 실물 박제라는 제목으로 올라왔습니다⁠. 저는 출근길을 바꿨습니다⁠. 시장 뒤로 돌아서 칠 분이 더 듭니다⁠. 9월에 공황장애 진단을 받았습니다⁠.⁠”

김도훈은 문장을 하나씩 끝까지 맺었다⁠. 판사는 고개를 숙이고 메모를 하다가 볼펜을 내려놓았다⁠.

“⁠피해자는 피고인에게 바라는 것이 있습니까⁠? 처벌 말고요⁠.⁠”

“⁠제 발이 그려진 컷 마흔한 장을 내려 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누가 먼저였는지를 피고인이 알기를 바랍니다⁠.⁠”

“⁠처벌은요⁠?⁠”

“⁠법이 정한 만큼이면 됩니다⁠. 더도 덜도 바라지 않습니다⁠.⁠”

판사는 대답을 받아 적고 다시 기록을 넘겼다⁠. 피고인석에서 보이는 김도훈의 옆얼굴은 조사실에서 본 얼굴과 같았다⁠. 서류를 넘길 때처럼 눈이 한 번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검사가 손을 들었다⁠.

“⁠재판장님⁠, 피해자 진술 가운데 2025년 11월 20일 행위는 공소사실에 없습니다⁠. 피해자가 그 무렵부터 피고인의 행위로 불안을 느꼈다면 행위가 이어져 있는지 살펴서 공소장 변경을 검토하겠습니다⁠.⁠”

“⁠검토하시고 서면으로 내세요⁠.⁠”

지혜가 일어났다⁠.

“⁠재판장님⁠, 피해자에게 한 가지만 여쭙고 싶습니다⁠. 피해자는 2026년 4월부터 피고인의 집 앞 가로등 밑에 간 사실이 있습니까⁠?⁠”

“⁠변호인⁠, 피해자 의견 진술은 신문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 일은 피고인 측이 낸 고소 사건에서 보면 됩니다⁠.⁠”

김도훈이 판사를 보고⁠, 처음으로 피고인석을 보았다⁠.

“⁠그 질문에는 그 사건에서 답하겠습니다⁠.⁠”

나는 일어나 있었다⁠. 언제 일어났는지 몰랐다⁠. 피고인석 의자가 뒤로 밀려 나무 바닥을 긁었다⁠.

“⁠가로등 밑에는 왜 있었어요⁠? 여섯 달 동안⁠.⁠”

“⁠피고인⁠, 앉으세요⁠.⁠”

판사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커졌다⁠. 얼굴은 여전히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았다⁠.

“⁠피고인은 지금 말할 차례가 아닙니다⁠. 다음에 또 일어나면 퇴정을 명하겠습니다⁠.⁠”

지혜가 내 팔을 잡아 앉혔다⁠. 진술석의 김도훈은 고개를 다시 판사에게 돌렸다⁠. 방청석에서 영희 사장님이 「⁠아이고⁠」 하는 소리가 법정 끝까지 갔다⁠. 다음 기일은 12월 10일 오후 두 시로 잡혔다⁠.

*

법원 정문 앞 계단에서 영희 사장님이 보안 검색대에서 찾아온 호떡 봉투를 열었다⁠. 호떡은 돌처럼 식어 있었다⁠. 사장님은 하나를 은비에게⁠, 하나를 지혜에게 주고⁠, 남은 하나를 반으로 갈라 나에게 주었다⁠.

“⁠얘⁠, 그 양반 말 잘하더라⁠. 미워하기가 어렵게 해⁠.⁠”

“⁠사장님 편이 어디예요⁠?⁠”

“⁠나는 호떡 편이야⁠.⁠”

지혜는 호떡을 한 입 먹고 기록 묶음을 가슴에 끌어안았다⁠. 은비가 가고 사장님이 버스를 타러 간 다음⁠, 지혜가 계단 난간에 기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작년 11월 20일⁠. 진짜야⁠?⁠”

“⁠나는 망원역에서 발을 수백 개 그렸어⁠.⁠”

“⁠그거 말고⁠. 따라갔어⁠?⁠”

“⁠모르겠어⁠. 생각이 안 나⁠.⁠”

“⁠공소장 변경이 받아들여지면 네 사건 시작이 작년 11월이 돼⁠. 김도훈이 가로등 밑에 처음 온 게 올해 4월이고⁠. 그러면 법정에서 순서는 네가 먼저야⁠. 내가 그걸 알고 있어야 막든 받든 할 수 있어⁠. 집에 그 무렵 그린 거 있어⁠?⁠”

“⁠있어⁠.⁠”

“⁠봐⁠. 오늘 밤에⁠. 그리고 나한테 말해⁠. 좋은 거든 나쁜 거든⁠.⁠”

*

밤 열한 시 이십 분⁠, 나는 침대를 벽에서 한 뼘 떼어 냈다⁠. 침대 다리가 장판을 긁는 소리가 법정 의자 소리와 비슷했다⁠. 침대 밑에 이사 올 때 쓴 라면 상자가 있었다⁠. 상자 위에 먼지가 손가락 마디 하나만큼 쌓여 있었다⁠. 테이프를 뜯자 회색 스케치북 세 권이 나왔다⁠. 2025년 9월부터 2026년 9월까지⁠, 표지 모서리에 연필로 기간을 적어 둔 스케치북이었다⁠.

첫 권을 폈다⁠. 9월의 골목⁠. 전봇대⁠, 감나무⁠, 빨래방 간판⁠. 10월로 넘어가자 남색 정장이 나왔다⁠. 처음에는 등만⁠, 다음에는 다리만⁠, 다음에는 발만⁠. 장마다 날짜와 시각이 있었다⁠. 「⁠10/14 08⁠:12⁠」 「⁠10/21 08⁠:12⁠」 「⁠10/28 08⁠:13 오늘 일 분 늦음⁠」⁠. 나는 스케치북을 무릎에 놓고 블라인드를 보았다⁠. 블라인드 날개 사이로 가로등 불빛이 가늘게 들어왔다⁠. 일 분 늦은 것까지 적어 둔 손은 내 손이었다⁠.

11월로 넘어갔다⁠. 「⁠11/20⁠」이 적힌 장은 다른 장보다 종이가 더 울어 있었다⁠. 지하철 승강장의 습기였다⁠. 장 한가운데에 오른발이 있었다⁠. 구두 끝이 바깥으로 십오 도쯤 벌어져 있었고⁠, 굽 바깥 모서리에 연필 선이 몇 번이나 덧칠되어 있었다⁠. 오른발 옆에 플랫폼 노란 선⁠, 열차 문 가장자리⁠, 승강장 의자 다리가 대충 그려져 있었다⁠. 맨 아래에 내 글씨가 있었다⁠. 배경 어시는 글씨도 반듯하게 쓴다⁠. 반듯한 글씨였다⁠.

「⁠11/20 역까지 따라와 봄⁠. 오른쪽 굽 소리 두 번⁠. 딱⁠, 따각⁠」

나는 소리 내어 읽었다⁠. 딱⁠, 따각⁠. 석 달 동안 김도훈의 등 뒤에서 들으며 어디서 들었는지 떠올리지 못했던 소리가 일 년 전 내 글씨로 종이 위에 있었다⁠. 블라인드 너머 가로등 밑은 비어 있었다⁠. 나는 휴대전화를 들어 지혜에게 문자를 썼다⁠. 「⁠있어⁠. 나쁜 거야⁠.⁠」 전송 버튼을 누르기까지 이 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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