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611자)

가로등남

스토커를 스토킹했다 · 서강림

11월 12일 목요일 오전 열한 시 십 분⁠, 「⁠골목 끝 집⁠」 57회가 올라간 지 한 시간 십 분이 지났다⁠. 작업실 수박밭의 모니터 여섯 대 중 네 대에 같은 화면이 떠 있었다⁠. 툰다락 댓글창이었다⁠. 은비가 새로 고침을 누를 때마다 숫자가 올라갔다⁠. 댓글 2⁠,108⁠. 별점 4⁠.1⁠. 지난주까지 9⁠.8이었다⁠.

베스트 댓글 첫 줄에 공감 삼천사백 개가 붙어 있었다⁠. 「⁠이 웹툰 배경 어시가 회사원 스토킹하다 고소당한 거 실화임⁠? 회사 게시판에 얼굴 다 돌았음⁠」⁠. 둘째 줄은 「⁠출근남 실존 인물이었음ㅋㅋ 작가님 해명 좀⁠」⁠. 셋째 줄은 「⁠가로등남도 실제 사람이면 이거 웹툰 말고 범죄 일지 아님⁠?⁠」⁠. 넷째 줄은 조금 달랐다⁠. 「⁠어시도 집 앞에 누가 서 있었다는 말 있던데 확인 안 된 얘기로 몰아가지 맙시다⁠」⁠. 넷째 줄 공감은 이백 개였다⁠.

“⁠언니⁠, 넷째 줄 쓴 사람 닉네임 봐요⁠. ‘⁠호떡은꿀이지⁠’⁠. 이거 영희 사장님 아니에요⁠?⁠”

“⁠사장님은 툰다락 안 해⁠.⁠”

“⁠그럼 사장님 아들이요⁠. 사장님이 시켰을 거예요⁠.⁠”

창가 자리에서 박수진 작가가 프린터에서 종이 한 장을 뽑아 들고 일어났다⁠. 작가님은 마감 날 말고는 일어나서 걷지 않았다⁠. 작가님이 내 책상까지 오는 데 일곱 걸음이 들었다⁠. 종이가 내 키보드 위에 놓였다⁠.

「⁠「⁠골목 끝 집⁠」 연재와 관련하여 독자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작품 속 모든 인물과 배경은 창작이며 실제 인물과 관계가 없습니다⁠. 배경 작업 중 참고한 사진 자료에 특정인이 담겼을 가능성이 있어 해당 컷을 수정하겠습니다⁠. 작가 수박씨 · 배경 어시스턴트 윤예원 확인⁠」

내 이름 옆에 서명할 줄이 그어져 있었다⁠. 볼펜도 같이 놓여 있었다⁠. 작가님 책상 위 볼펜이었다⁠. 뚜껑에 수박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툰다락 담당이 오늘 세 시까지 해명문 올리래⁠. 안 올리면 다음 주 휴재 건대⁠. 계약서 11조⁠. 실존 인물의 초상이나 사생활을 침해하는 내용이 들어가면 연재를 멈출 수 있다⁠.⁠”

“⁠가로등남은 창작이 아니에요⁠.⁠”

“⁠알아⁠.⁠”

“⁠작가님은 5월에 알았잖아요⁠.⁠”

“⁠알아⁠. 5월에 네가 말했을 때 계속 넣으라고 한 거 내가 잘못했어⁠. 댓글이 좋아서 그랬어⁠. 지금 그 얘기 하면 독자들은 가로등남이 실화고⁠, 그 실화 그린 어시가 스토커고⁠, 그걸 알고도 넣은 작가가 나야⁠. 휴재가 아니라 연재 종료야⁠.⁠”

작가님은 숫자로 말했다⁠. 작업실 월세 이백팔십만 원⁠, 은비 월급⁠, 선 따기 어시 둘 월급⁠, 내 월급⁠. 다섯 사람⁠. 미리 그려 둔 비축분 세 회⁠. 비축분이 다 떨어지는 날까지 세 주⁠.

“⁠서명 하나면 세 주가 일 년이 돼⁠. 너 다른 데 가서 배경 그릴 수 있겠어⁠? 포트폴리오에 「⁠골목 끝 집⁠」 쓸 수 있겠어⁠? 지금⁠?⁠”

나는 볼펜을 들었다⁠. 뚜껑을 열었다⁠. 서명 줄 위에 펜 끝을 대자 내 이름 석 자의 첫 획이 손에 먼저 떠올랐다⁠. 연필 자국이 묻은 손날이 종이에 닿았다⁠. 해명문 종이에 회색 자국이 생겼다⁠.

“⁠작가님⁠. 4월 9일 새벽 한 시 십 분이었어요⁠. 가로등 밑에 검은 패딩 입은 남자가 서서 사십 분 동안 내 창을 봤어요⁠. 나는 블라인드를 반년 동안 못 올렸어요⁠. 그 남자를 그린 게 가로등남이에요⁠. 창작 인물이라고 쓰면 그 반년도 내가 지어낸 거예요⁠.⁠”

“⁠예원아⁠.⁠”

“⁠내가 지어낸 게 아니면⁠, 내 재판에서도 지어낸 게 아니어야 해요⁠.⁠”

나는 펜 뚜껑을 닫았다⁠. 작가님은 해명문을 집어 들고 한참 서 있다가⁠, 내 이름이 있던 줄 밑에 자기 이름만 남기고 내 줄은 볼펜으로 두 번 그어 지웠다⁠. 오후 세 시⁠, 해명문은 작가 이름 하나로 올라갔다⁠. 오후 세 시 사 분⁠, 해명문 댓글 첫 줄이 달렸다⁠. 「⁠어시는 왜 확인 안 함⁠?⁠」

*

오후 네 시⁠, 은비가 나를 비상계단으로 불렀다⁠. 10층과 11층 사이 계단참이었다⁠. 창문 틈으로 찬바람이 들어왔고⁠, 소화기 위에 누가 마시다 둔 바나나우유가 있었다⁠.

“⁠언니⁠, 이거요⁠.⁠”

은비가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단톡방 수박밭의 5월 대화였다⁠. 은비는 단톡방 대화를 날마다 캡처해서 클라우드에 올려 두는 버릇이 있었다⁠. 작가님이 지시를 바꿀 때마다 은비가 혼나서 생긴 버릇이었다⁠.

「⁠예원⁠: 5/14 01⁠:22 작가님 가로등남 있잖아요 그거 진짜 사람이에요 우리 집 창밖에 지금도 서 있어요⁠」

「⁠예원⁠: 01⁠:23 무서워서 그린 거예요⁠」

「⁠수박씨⁠: 01⁠:41 댓글 좋음 계속 넣어⁠」

「⁠은비⁠: 01⁠:42 언니 괜찮아요⁠?⁠? 경찰 부르세요ㅠ⁠」

「⁠예원⁠: 01⁠:44 블라인드 내렸어⁠」

나는 화면을 오래 보았다⁠. 5월 14일 새벽 한 시 이십이 분의 나는 마침표를 하나도 찍지 않았다⁠. 배경 어시는 대사 말고도 마침표를 찍는다⁠. 5월 14일의 나는 찍을 손이 없었다⁠.

“⁠변호사님한테 이거 보내세요⁠. 언니가 무서웠던 거⁠, 날짜 박혀 있는 거잖아요⁠. 5월에⁠.⁠”

“⁠작가님 답도 같이 나와⁠.⁠”

“⁠알아요⁠. 작가님이 ‘⁠댓글 좋음⁠’ 한 것도 나와요⁠.⁠”

은비는 바나나우유를 집어 들었다가 남의 것이라는 걸 알고 도로 놓았다⁠.

“⁠저 사실 5월에 작가님한테 따졌어요⁠. 언니 진짜 무서워한다고⁠. 작가님은 컷 수만 세셨어요⁠. 근데 언니⁠. 이거 내도 작가님 안 미워할 거죠⁠? 작가님도 무서운 거예요⁠. 작업실 없어질까 봐⁠.⁠”

“⁠안 미워해⁠.⁠”

“⁠그럼 보내요⁠. 지금요⁠. 제가 마음 바뀌기 전에⁠.⁠”

나는 캡처 다섯 장을 지혜에게 보냈다⁠. 전송 표시 옆에 숫자 1이 떴다가 사라지기까지 십 초가 들었다⁠.

*

11월 13일 금요일 오전 열 시⁠, 공덕동 사무실 벽의 상자 마흔 개는 여전히 등을 돌리고 있었다⁠. 지혜는 책상 위에 서류 두 장을 나란히 놓았다⁠. 왼쪽은 고소장 초안⁠, 오른쪽은 위임장이었다⁠.

“⁠고소장은 네 이름으로 내⁠. 나는 고소 대리인이고⁠. 이건 국선 일이 아니라서 따로 맡는 거야⁠. 위임장에 수임료 칸 있지⁠? 영 원이라고 써⁠.⁠”

“⁠영 원⁠?⁠”

“⁠변호사가 공짜로 일하는 거 법으로 막혀 있지 않아⁠. 국선 사건 피고인한테 돈 받는 건 막혀 있고⁠. 그러니까 영 원이 제일 깨끗해⁠.⁠”

지혜는 위임장 수임료 칸에 숫자 0을 쓰고 동그라미를 한 번 더 그렸다⁠. 고소장 초안은 열한 장이었다⁠. 피고소인 김도훈⁠, 1995년생⁠, 솔빛물산 법무팀⁠. 범죄 사실 첫 줄은 2026년 4월 9일 새벽 한 시 십 분이었다⁠. 증거 목록에 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1⁠. 6월 18일 112 신고 처리 내역(⁠정보공개 결과⁠)⁠. 2⁠. 10월 23일 112 출동 내역(⁠정보공개 결과⁠)⁠. 3⁠. 10월 13일 23⁠:04 뽀송 빨래방 영수증 원본⁠. 4⁠. 7월 6일 불송치 결정 통지서⁠. 5⁠. 5월 14일 작업실 단톡방 대화⁠. 6⁠. 참고인 최영희 진술 예정⁠. 7⁠. 고소인 진술서⁠」

112 처리 내역 두 장은 일주일 전 우편으로 왔다⁠. 10월 24일에 지혜가 시킨 대로 정보공개 청구를 냈고⁠, 열사흘 만에 왔다⁠. 6월 18일 장에는 「⁠현장 도착 시 행위자 없음⁠. 종결⁠」⁠, 10월 23일 장에는 「⁠상호 분리 조치⁠. 종결⁠」이라고 쓰여 있었다⁠. 두 장 다 마지막 낱말이 같았다⁠.

“⁠병원은 다녔어⁠?⁠”

“⁠아니⁠. 시간이 없었어⁠.⁠”

“⁠시간 내⁠. 김도훈은 진단서가 있어⁠. 네 무서움은 지금 단톡 캡처 다섯 장이 전부야⁠. 다음 주 월요일로 예약해⁠. 내가 아는 병원 있어⁠. 공덕역 근처⁠.⁠”

지혜는 고소장 마지막 장을 넘기다가 손을 멈췄다⁠. 손가락이 피고소인 이름 위에 있었다⁠.

“⁠이거 내면 나는 김도훈 대리를 직접 상대로 하는 고소를 대리하는 거야⁠. 재계약 품의가 27일이고⁠. 그 전에 내면 끝이라고 봐야 해⁠.⁠”

“⁠그럼 27일 뒤에 내⁠.⁠”

“⁠아니⁠. 오늘 내⁠.⁠”

지혜는 위임장에 도장을 찍었다⁠. 도장 인주가 묻은 손가락을 재킷 소매에 닦으려다가 휴지에 닦았다⁠.

“⁠월세는 내가 생각할 거야⁠. 너는 진술서만 생각해⁠.⁠”

*

오후 두 시 사십 분⁠, 마포경찰서 민원실 번호표 기계 앞에서 나는 번호표를 뽑았다⁠. 「⁠047⁠」⁠. 이번에는 아무도 내 앞에서 먼저 뽑지 않았다⁠. 전광판에는 「⁠044⁠」가 떠 있었다⁠. 파란 의자 세 번째 줄에 앉았다가 일어나 맨 앞줄로 옮겼다⁠. 지혜가 웃음을 참으며 내 옆에 앉았다⁠.

3번 창구에 돋보기를 목걸이 줄에 건 경사가 그대로 있었다⁠. 경사는 고소장 첫 장을 보고⁠, 나를 보고⁠, 돋보기를 코에 걸었다가 다시 내렸다⁠.

“⁠아⁠, 그 칸막이⁠.⁠”

“⁠네⁠. 이번엔 제가 고소하러 왔어요⁠.⁠”

“⁠지난번에도 고소하러 오셨잖아요⁠.⁠”

“⁠지난번엔 신고하러 왔다가 고소당했어요⁠.⁠”

경사는 대답 대신 접수 도장을 찍었다⁠. 도장이 찍히는 소리가 민원실에 크게 났다⁠. 접수증을 받아 들고 나오는데 지혜가 칸막이를 손가락으로 톡 쳤다⁠. 4번 창구는 비어 있었다⁠.

*

11월 14일 토요일 저녁 일곱 시⁠, 고향떡집 맨홀 위 분필 줄은 비에 반쯤 지워져 있었다⁠. 영희 사장님이 새 분필로 줄을 다시 긋고 나서야 호떡 봉투를 내밀었다⁠. 이름 없는 봉투였다⁠.

“⁠사장님⁠, 경찰서에서 연락 갈 거예요⁠. 참고인으로요⁠. 제가 고소했어요⁠.⁠”

“⁠얘⁠, 나는 본 거 다 말한다고 했지⁠. 너 낮에 따라간 것도 말하고⁠, 그 양반 밤에 서 있던 것도 말해⁠. 둘 다⁠.⁠”

“⁠네⁠. 둘 다 말해 주세요⁠.⁠”

사장님은 누르개를 앞치마 주머니에 꽂고 팔짱을 꼈다⁠. 시장 통로 끝으로 목소리가 갔다⁠.

“⁠하나 생각났다⁠. 5월인가⁠, 비 오던 밤이야⁠. 열한 시 반에 장사 접고 들어가는데 그 양반이 가로등 밑에 또 서 있더라고⁠. 내가 총각 추운데 들어가라 했지⁠. 그랬더니 빨래 기다린다는 거야⁠. 빨래방에 건조기가 돌고 있었어⁠.⁠”

“⁠네⁠.⁠”

“⁠근데 얘⁠, 그 양반 손에 빨래 가방이 없었어⁠. 빨래 넣어 온 가방이 없는데 빨래를 어떻게 가져가⁠? 나는 그게 이상해서 기억해⁠. 비닐봉지 하나도 없었어⁠. 빈손으로 위만 보더라⁠.⁠”

고향떡집 아주머니가 가래떡을 썰다가 칼을 멈췄다⁠.

“⁠언니⁠, 그거 경찰한테 꼭 말해⁠. 빈손⁠.⁠”

“⁠너는 떡이나 썰어⁠.⁠”

나는 휴대전화 메모장을 열어 적었다⁠. 「⁠5월 비 오는 밤 23⁠:30 영희 사장님 목격⁠. 건조기 돌아감⁠. 빨래 가방 없음⁠. 빈손⁠」⁠. 10월 23일 밤의 김도훈은 망사 빨래 가방을 들고 있었다⁠. 셔츠 한 장이 든 가방이었다⁠. 5월의 김도훈은 빈손이었다⁠. 분필 줄 너머로 호떡 봉투를 받는 손바닥이 뜨거웠다⁠.

*

11월 17일 화요일 오후 다섯 시 십 분⁠, 지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공덕역 근처 정신건강의학과 대기실 의자에서 문진표를 쓰다가 밖으로 나왔다⁠. 문진표 질문 하나에 오 분을 썼다⁠. 「⁠최근 2주 동안 밖에 나가는 것이 두려웠던 날이 며칠입니까⁠?⁠」 나는 열넷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다시 열넷이라고 썼다⁠.

“⁠첫 공판 날짜 나왔어⁠. 11월 26일 목요일 오전 열 시 반⁠, 서울서부지법 형사단독⁠. 조민석 판사⁠.⁠”

“⁠응⁠.⁠”

“⁠그리고 김도훈 대리가 피해자 의견 진술을 신청했어⁠. 법정에 직접 나와서 피해 입은 얘기를 하겠다는 거야⁠. 판사가 받아 줄 거야⁠. 피해자 권리니까⁠.⁠”

“⁠알았어⁠.⁠”

“⁠참고자료도 냈어⁠. 진단서⁠, 회사 게시판 캡처⁠, 그리고 웹툰 캡처⁠. 「⁠골목 끝 집⁠」 장면 캡처가 마흔한 장이야⁠. 장마다 컷 하나씩 빨간 동그라미가 쳐져 있대⁠. 기록 복사는 다음 주에 될 거래⁠.⁠”

나는 대기실 유리문에 이마를 댔다⁠. 유리가 차가웠다⁠.

“⁠마흔한 장이라고⁠?⁠”

“⁠응⁠. 왜⁠?⁠”

내가 그린 가로등남은 스물여섯 컷이었다⁠. 4월부터 9월까지 밤 배경마다 손톱만 하게⁠, 하나도 빼지 않고 세어 두었다⁠. 스물여섯⁠. 열다섯 장이 남았다⁠. 김도훈이 자기 피해라고 내민 그림에서 열다섯 장은 밤 골목이 아니었다⁠. 「⁠골목 끝 집⁠」에서 마흔한 컷을 채운 인물은 따로 있었다⁠. 작년 가을 아침마다 우리 골목을 지나 역으로 가던 남색 정장⁠. 독자들이 일곱 달째 실종됐다고 기다리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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