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713자)

백일 미터

스토커를 스토킹했다 · 서강림

11월 6일 금요일 오후 다섯 시 이 분⁠, 고향떡집 맨홀 앞에서 영희 사장님이 호떡 봉투 대신 흰 종이 한 장을 흔들었다⁠. A4 용지에 매직으로 쓴 글씨였다⁠. 「⁠사진 촬영 금지 · 호떡만 파는 집⁠」⁠.

“⁠얘⁠, 이거 철판 앞에 붙였어⁠. 오늘 낮에 젊은 남자 셋이 와서 호떡 여섯 개 사면서 묻더라⁠. 스토커 여자 단골집 여기 맞냐고⁠. 휴대전화로 내 철판을 찍고⁠, 간판을 찍고⁠, 나를 찍으려고 하길래 누르개를 들었지⁠.⁠”

“⁠누르개로 때렸어요⁠?⁠”

“⁠들기만 했어⁠. 나는 들기만 해도 사람들이 가⁠.⁠”

사장님은 종이를 접어 앞치마 주머니에 넣고⁠, 반대쪽 주머니에서 호떡 봉투를 꺼냈다⁠. 봉투에는 가게 이름이 없었다⁠. 빨간 글씨 「⁠영희네 호떡⁠」 자리에 흰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봉투도 바꿨어⁠. 오늘부터 이름 없는 봉투야⁠. 너 때문 아니고 장사 때문이야⁠.⁠”

“⁠죄송해요⁠.⁠”

“⁠죄송하면 많이 사 먹어⁠. 원 밖에서⁠.⁠”

사장님은 분필 줄 너머로 봉투를 건네고 철판으로 돌아갔다⁠. 백육십두 걸음을 세는 목소리가 오늘은 작았다⁠. 망원정육 사장님이 칼을 든 채 나를 보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시장 사람들이 나를 보는 눈이 하루 사이에 반 뼘쯤 멀어져 있었다⁠.

나는 우리 골목으로 돌아가는 동안 모자를 두 번 고쳐 썼다⁠. 편의점 앞에서 대학생 둘이 휴대전화를 들고 골목 안을 찍고 있었다⁠. 나를 찍은 것인지 골목을 찍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편의점에 들어가 컵라면 진열대 앞에서 칠 분을 서 있다가 나왔다⁠. 대학생들은 가고 없었다⁠. 현관 번호판을 닦으면서 생각했다⁠. 4월부터 나는 누가 나를 볼까 봐 블라인드를 내렸다⁠. 11월부터는 누가 나를 찾을까 봐 모자를 썼다⁠. 보는 사람은 한 사람이었는데 찾는 사람은 몇 명인지 셀 수가 없었다⁠.

밤 열한 시 반⁠, 단톡방이 울렸다⁠.

「⁠은비⁠: 언니 한마디 2탄 올라옴 ‘⁠망원시장 호떡집 가 봤는데 사장님 개무서움⁠’ㅋㅋ 사장님 레전드⁠」

「⁠은비⁠: 근데 댓글에 ‘⁠스토커 여자 웹툰 어시라는 썰⁠’ 있어요 언니 이거 어떡해요⁠?⁠」

「⁠수박씨⁠: 은비 단톡에 그런 거 퍼 오지 마⁠」

「⁠수박씨⁠: 예원 내일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57회 배경 해⁠」

나는 「⁠네⁠」라고 쳤다⁠. 블라인드 날개 사이로 가로등 밑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

주말 이틀 동안 집에서 57회 배경 열여섯 컷을 그렸다⁠. 창밖을 보지 않고 그리는 골목은 처음이었다⁠. 자료 사진 폴더에서 작년 가을 사진을 꺼내 원근 격자 위에 얹었다⁠. 편의점 간판 글씨를 확인했다⁠. 똑바로였다⁠. 토요일 밤에는 새벽 세 시 십이 분에 깼다⁠. 건조기 도는 소리에 깨어 블라인드 날개를 눌렀는데 빨래방 불은 켜져 있고 건조기는 하나도 돌지 않았다⁠. 일요일에는 택배를 받으러 현관까지 내려갔다가 송장에 적힌 「⁠김철수⁠」를 보고 상자를 들고 계단을 뛰어 올라왔다⁠. 내가 붙인 가짜 이름을 내가 무서워했다⁠.

일요일 밤 열 시⁠, 한마디 3탄 캡처가 은비에게서 왔다⁠. 댓글 하나에 공감이 이백 개 붙어 있었다⁠. 「⁠스토커 여자 또 회사 앞에 오면 우리가 인증샷 찍어 줌⁠」⁠. 나는 공감 이백 개짜리 문장을 보면서 크로키북을 폈다⁠. 작업실에서 쓰는 A3 흰 크로키북이었다⁠. 회색 스케치북은 침대 밑 상자에 그대로 두었다⁠. 흰 장에 검은 매직으로 썼다⁠.

「⁠한마디에 올라간 사진 속 사람입니다⁠. 사진을 내려 주세요⁠. 재판은 법정에서 받겠습니다⁠. 법정 밖에서 저를 찾지 마세요⁠.⁠」

글씨를 다 쓰고 매직 뚜껑을 닫는 데 손이 세 번 미끄러졌다⁠.

*

11월 9일 월요일 오전 열한 시 사십 분⁠, 여의도역 3번 출구로 나왔다⁠. 7월부터 쉰세 번 나온 출구였다⁠. 나는 휴대전화 지도 앱의 거리 재기를 켜고 솔빛물산 본사 정문 회전문에 첫 점을 찍었다⁠. 광장을 가로질러 손가락을 끌었다⁠. 화면 숫자가 98⁠, 99⁠, 100으로 올라가다가 여의도공원 앞 길가 은행나무 앞에서 101이 되었다⁠. 나는 은행나무 옆으로 걸어가서 내 걸음으로 다시 쟀다⁠. 정문 회전문까지 백사십두 걸음⁠. 백 미터는 내 걸음으로 백사십 걸음이니까 두 걸음이 남았다⁠. 두 걸음이 일 미터 반이었다⁠. 나는 남은 일 미터 반을 믿고 은행나무 옆에 자리를 잡았다⁠.

출발하기 전에 지혜에게 문자를 보냈고⁠, 지혜는 열한 시 사십삼 분에 전화했다⁠.

“⁠너 지금 어디야⁠?⁠”

“⁠솔빛물산 정문에서 백일 미터⁠.⁠”

“⁠윤예원⁠. 결정문 위반이 아닐 수는 있어⁠. 백 미터 밖이니까⁠. 근데 피해자 직장 근처에서 기다리는 건 그 자체로 새 스토킹이 될 수 있어⁠. 오늘 일로 고소 하나 더 받을 수 있다고⁠.⁠”

“⁠기다리는 거 아니야⁠. 팻말 드는 거야⁠. 1인 시위는 신고 안 해도 되잖아⁠.⁠”

“⁠법 공부 언제 했어⁠?⁠”

“⁠어젯밤에⁠.⁠”

“⁠어젯밤에 한 공부로 판사 앞에 서지 마⁠. 지금 와⁠. 아니⁠, 지금 와도 늦었으면 사진만 찍히지 마⁠.⁠”

열두 시 정각에 회전문이 돌기 시작했다⁠. 목에 사원증 줄을 건 사람들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사원증 줄 색이 초록색이었다⁠. 나뭇잎 모양 로고가 줄마다 찍혀 있었다⁠. 나는 팻말을 가슴 높이로 들었다⁠. 열두 시 사 분에 첫 찰칵 소리가 났다⁠. 커피를 든 여자 둘 중 한 사람이었다⁠. 열두 시 십 분까지 찰칵 소리를 서른한 번 셌다⁠. 정면에서⁠, 옆에서⁠, 은행나무 뒤에서⁠. 우리나라 휴대전화는 카메라 소리를 끌 수 없어서 나는 찍히는 횟수를 정확히 알았다⁠. 석 달 동안 내 휴대전화가 김도훈의 등 뒤에서 낸 소리가 십 분 동안 내 앞으로 몰려왔다⁠. 팻말을 든 손가락 끝이 하얘졌다⁠. 은행 열매가 발밑에서 터지면서 냄새가 올라왔다⁠.

「⁠은비⁠: 언니ㅠㅠ 한마디에 언니 사진 실시간으로 올라와요 ‘⁠은행나무랑 같이 시위함⁠’⁠」

열두 시 이십삼 분⁠, 회전문에서 남색 정장 하나가 나왔다⁠. 오른손에 테이크아웃 컵⁠, 왼손은 비어 있었다⁠. 남자는 광장 한가운데에서 잠깐 멈추더니 은행나무를 향해 걸어왔다⁠. 딱⁠, 따각⁠. 광장 바닥이 돌이라 소리가 골목보다 크게 났다⁠.

나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김도훈이 한 걸음 왔다⁠. 나는 두 걸음 물러났다⁠. 은행나무 뒤에서 찍던 남자가 「⁠오⁠, 온다⁠」라고 했다⁠.

“⁠가지 마십시오⁠.⁠”

김도훈이 열 걸음 앞에서 멈췄다⁠.

“⁠법적으로는⁠, 지금 다가온 사람은 저입니다⁠. 윤예원 씨는 거기 서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접근은 움직인 사람이 한 겁니다⁠.⁠”

“⁠그걸 당신이 정해요⁠?⁠”

“⁠법원이 정합니다⁠. 저는 결정문을 읽기만 했습니다⁠.⁠”

김도훈은 내 팻말을 읽었다⁠. 눈이 첫 줄에서 마지막 줄까지 한 번 내려갔다⁠. 서류를 읽는 속도였다⁠.

“⁠삭제 요청은 제가 했습니다⁠. 운영사 답은 사진 속 당사자가 직접 신청해야 한다는 겁니다⁠. 권리를 침해받은 사람이 직접⁠. 신청하면 삼십 일 동안 가려집니다⁠. 그다음에 올린 사람이 이의를 내면 다시 올라옵니다⁠.⁠”

“⁠어떻게 알아요⁠?⁠”

“⁠3월에 제가 직접 했습니다⁠.⁠”

광장 바람이 불어 팻말이 내 가슴으로 휘었다⁠. 김도훈은 컵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종이컵이 조금 찌그러졌다⁠.

“⁠3월에 제 사진이 한마디에 올라왔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 골목에서 누가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제목은 실물 박제였습니다⁠. 저는 삼십 일 동안 가려 두었고⁠, 삼십일 일째에 다시 올라왔습니다⁠. 그때부터 회사 사람들은 저를 박제 대리라고 불렀습니다⁠. 지금은 윤예원 씨 사진 밑에 제 사진이 다시 붙어 있습니다⁠. 같은 글에 둘이⁠.⁠”

“⁠그래서 4월부터 우리 집 앞에 섰어요⁠? 그 사진 때문에⁠?⁠”

“⁠그 질문은 법정에서 답하겠습니다⁠.⁠”

“⁠그럼 지금 여기는 왜 왔어요⁠?⁠”

김도훈은 대답하기 전에 광장을 한 번 돌아보았다⁠. 찰칵⁠, 찰칵⁠. 사원증 줄을 건 사람들이 우리 둘을 같이 찍고 있었다⁠. 김도훈은 다시 나를 보았다⁠.

“⁠윤예원 씨가 오늘 처음으로 저를 마주 보고 서 계셔서 왔습니다⁠. 석 달 동안 등만 보셨으니까요⁠.⁠”

“⁠나는 작년에 당신 몰랐어요⁠. 민원실에서도 말했어요⁠.⁠”

“⁠작년 11월 20일 목요일 아침⁠, 망원역 승강장 세 번째 의자에 앉으셨습니다⁠. 크로키북을 무릎에 올려놓고 제 발을 그리셨습니다⁠. 오른쪽 굽이 바깥으로 닳은 것까지 그리셨습니다⁠.⁠”

“⁠나는 그 역에서 사람 발을 수백 개 그렸어요⁠. 배경 어시는 다 그래요⁠.⁠”

“⁠저는 그중 하나였습니다⁠.⁠”

김도훈은 찌그러진 컵을 바로 펴 보려다 그만두었다⁠.

“⁠저한테는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날 처음 알았습니다⁠. 누가 아침마다 저를 보고 있었다는 걸⁠.⁠”

딱⁠, 따각⁠. 김도훈이 돌아서서 광장을 건너갔다⁠. 오른쪽 굽이 바닥에 두 번 닿는 소리가 회전문까지 이어졌다⁠. 나는 딱⁠, 따각을 백 번 넘게 들었다고 생각했다⁠. 7월부터였다고 생각했다⁠. 소리는 7월보다 앞에 있었다⁠. 어디쯤 앞인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팻말 위로 은행잎 하나가 떨어졌다⁠. 열두 시 삼십일 분⁠, 지혜에게서 문자가 왔다⁠. 「⁠끝났으면 바로 집에 가⁠. 오늘 그 사람이 한 말 전부 적어 놔⁠. 그 사람도 지금 적고 있어⁠.⁠」

여의도역에서 5호선을 타고 공덕에서 6호선으로 갈아탔다⁠. 갈아타는 계단에서 한마디 운영사 홈페이지의 권리 침해 신고 양식을 찾았다⁠. 사진 속 사람이 나라고 적고⁠, 신분증 사진을 붙이는 칸에서 엄지가 멈췄다가 붙였다⁠. 메모장에 김도훈의 말을 적었다⁠. 「⁠가지 마십시오⁠」 「⁠접근은 움직인 사람이 한 겁니다⁠」 「⁠저한테는 하나뿐이었습니다⁠」⁠. 적다가 엄지가 멈췄다⁠. 김도훈의 말을 받아 적는 손이 석 달 동안 김도훈의 출근 시각을 받아 적던 손과 같은 손이었다⁠.

오후 한 시 이십 분⁠, 망원역에서 내렸다⁠. 개찰구로 올라가지 않고 승강장 의자로 갔다⁠. 합정 방향 승강장⁠, 계단에서 세 번째 의자⁠. 파란 플라스틱 의자 네 개가 붙어 있었고⁠, 나는 왼쪽에서 두 번째에 앉았다⁠. 작년 가을에도 이 자리에 앉았다⁠. 작업실 가는 길에 열차 두 대를 그냥 보내고⁠, 내리는 사람들 발을 그리던 자리였다⁠. 운동화⁠, 구두⁠, 슬리퍼⁠, 등산화⁠. 사람은 얼굴보다 발이 덜 꾸민다⁠. 그래서 배경에 넣는 사람은 발부터 그렸다⁠.

열차가 한 대 들어왔다가 나갔다⁠. 내 앞으로 발 서른몇 개가 지나갔다⁠. 오른발 끝이 바깥으로 벌어진 구두는 없었다⁠. 딱⁠, 따각도 없었다⁠. 작년 11월 20일 아침을 떠올리려고 했지만 떠오르는 것은 열차 바람에 넘어가던 종이 소리뿐이었다⁠. 2025년 가을 크로키는 전부 회색 스케치북에 있었다⁠. 회색 스케치북은 침대 밑 상자 안에 있었다⁠. 상자를 열면 무엇이 나올지⁠, 나는 반쯤 알았고 반쯤 몰랐다⁠. 두 번째 열차가 들어왔을 때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열차에 탔다⁠. 합정까지 한 정거장이었다⁠. 상자는 열지 않기로 했다⁠. 11월 9일 오후에는 그렇게 정했다⁠.

*

밤 열 시 십칠 분⁠, 은비가 전화를 걸어왔다⁠. 단톡방에 올리지 않고 전화를 건 것은 처음이었다⁠.

“⁠언니⁠. 한마디 4탄이요⁠. 이번엔 링크가 붙었어요⁠.⁠”

캡처가 왔다⁠. 제목은 「⁠여의도에 팻말 들고 온 그 여자 정체 찾음⁠」⁠. 본문에 사진 두 장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왼쪽은 오늘 낮 은행나무 옆의 나⁠. 커다란 회색 후드⁠, 정수리에 틀어 올린 갈색 머리⁠, 검은 백팩⁠, 팻말⁠. 오른쪽은 박수진 작가가 지난여름 인스타그램에 올린 작업실 사진이었다⁠. 「⁠수박밭 식구들 마감 중⁠」⁠. 모니터 앞에 앉은 등 넷 중 하나가 회색 후드였다⁠. 사진 창밖으로 합정역 사거리의 약국 간판이 보였다⁠.

「⁠후드 똑같음⁠. 이 사람 웹툰 골목 끝 집 배경 어시임⁠. 작업실 수박밭 합정⁠. 출근남 가로등남 그린 사람이 스토커였네⁠」

댓글이 사백 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은비 목소리가 떨렸다⁠.

“⁠언니⁠, 작가님이 지금 인스타 사진 내리고 있어요⁠. 근데 벌써 캡처가 돌아요⁠. 끝집러 게시판에도 퍼졌어요⁠. 언니가 그린 출근남이 이 아저씨 아니냐는 글도 있어요⁠.⁠”

휴대전화 너머로 은비가 숨을 넷까지 세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블라인드 날개를 눌렀다⁠. 가로등 밑은 비어 있었다⁠. 비어 있는 가로등 밑을 보면서도 나는 블라인드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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