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778자)

하청

스토커를 스토킹했다 · 서강림

11월 3일 화요일 오전 열 시 반⁠, 공덕역 5번 출구에서 사 분을 걸어 순댓국집이 있는 건물에 닿았다⁠.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계단 벽에 층마다 간판이 붙어 있었다⁠. 2층 세무회계⁠, 3층 필라테스⁠, 4층 「⁠안지혜 법률사무소⁠」⁠. 아크릴 명패 모서리에 투명 테이프가 두 번 감겨 있었다⁠.

문을 열자 믹스커피 냄새가 났다⁠. 책상 둘⁠, 철제 책장 하나⁠, 창가에 화분 하나⁠. 벽을 따라 갈색 서류 상자가 사람 키만큼 쌓여 있었는데⁠, 상자들은 전부 등을 돌리고 있었다⁠. 문 앞에 선 나를 보고 지혜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나는 사람을 발로 먼저 알아본다⁠. 지혜는 흰 운동화 뒤축을 꺾어 신고 있었다⁠. 고2 때도 독서실 실내화를 그렇게 신었다⁠. 발에서 위로 올라가자 짧은 단발과 회색 재킷이 있었다⁠. 재킷 소매가 길어서 손등을 반쯤 덮었다⁠.

“⁠야⁠, 윤예원⁠. 너 그대로다⁠. 후드도 그대로고⁠.⁠”

“⁠너는 변호사 됐네⁠.⁠”

“⁠이 년 차⁠. 앉아⁠. 커피 마셔⁠. 이 건물에서 제일 비싼 게 이 커피야⁠.⁠”

지혜는 종이컵 두 개에 믹스커피를 타고 내 맞은편에 앉았다⁠. 책상 위에 서류 묶음이 세 덩이 있었다⁠. 공소장⁠, 수사 기록 복사본⁠, 출력한 사진 묶음⁠. 사진 묶음 맨 위에 망원역 3번 계단의 남색 등이 있었다⁠.

“⁠기록은 어제 공소청 가서 복사해 왔어⁠. 사진 사백열두 장⁠. 지도 캡처 쉰세 장⁠. 날짜는 7월 14일부터 9월 30일까지⁠.⁠”

지혜는 손가락으로 사진 묶음 옆면을 훑었다⁠. 종이가 사르륵 소리를 냈다⁠.

“⁠국선 변호인으로서 먼저 말할게⁠. 자백하는 게 나아⁠. 초범이고⁠, 직접 다가가거나 연락한 적은 없고⁠. 반성문 쓰고 재판부에 잘 보이면 벌금으로 끝날 수도 있어⁠. 수강명령은 각오하고⁠.⁠”

“⁠수강명령이 뭔데⁠?⁠”

“⁠스토킹 재범 예방 교육⁠. 몇십 시간 듣는 거⁠.⁠”

“⁠나는 무서워서 따라간 거야⁠.⁠”

“⁠알아⁠. 공소장에도 그 말은 없지만 너 진술 조서에는 있어⁠. 증거를 모으려고 따라갔다⁠. 법에서 그걸 정당한 이유로 다툴 수는 있어⁠. 근데 판사는 목적만 안 봐⁠. 몇 번⁠, 얼마나 오래⁠, 어떻게⁠. 석 달 동안 쉰세 번⁠, 회사 앞이랑 헬스장까지⁠. 이걸 증거 수집이라고 하면 판사가 웃지는 않아도 표정은 지어⁠.⁠”

“⁠부인하면⁠?⁠”

“⁠피해자가 법정에 나와서 진술해⁠. 김도훈 대리가 판사 앞에서 엘리베이터 혼자 못 타는 얘기를 하는 거야⁠.⁠”

김도훈 대리⁠. 지혜는 피해자 이름에 직급을 붙였다⁠. 공소장에는 직급이 없었다⁠. 나는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화장실 어디야⁠?⁠”

“⁠나가서 왼쪽⁠. 열쇠는 문고리에 걸어 둔 거⁠.⁠”

*

화장실은 계단참에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사무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문틈으로 서류 상자들의 옆면이 보였다⁠. 등을 돌린 상자들도 옆면은 감추지 못했다⁠. 옆면마다 같은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초록색 나뭇잎 모양 회사 로고⁠, 로고 밑에 인쇄된 글씨⁠.

「⁠솔빛물산 채권 회수 · 지급명령 · 2026⁠. 10⁠. · 40건⁠」

인쇄된 글씨 밑에 매직으로 손글씨가 한 줄 더 있었다⁠. 「⁠담당 김도훈 대리⁠」⁠. 오른쪽으로 살짝 기운 글씨였다⁠. 대리의 ‘⁠리⁠’ 세로획이 길게 내려와 있었다⁠. 상자 하나에 한 줄씩⁠, 손글씨는 상자 높이를 따라 층층이 올라가 천장 가까이까지 닿았다⁠. 나는 상자 개수를 세었다⁠. 배경 어시는 반복되는 물건을 보면 센다⁠. 마흔 개였다⁠.

“⁠이거 뭐야⁠?⁠”

지혜가 의자에서 몸을 돌렸다⁠. 내가 가리킨 상자를 보고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그게 내가 먼저 말하려던 거야⁠.⁠”

“⁠전화에서 먼저 말할 게 있다고 한 거⁠, 이거야⁠? 먼저 말한다면서 자백 얘기를 먼저 했잖아⁠.⁠”

“⁠응⁠. 미뤘어⁠. 미안⁠.⁠”

지혜는 상자 하나를 끌어내려 책상 위에 놓았다⁠. 뚜껑을 열자 지급명령 신청서 사본이 클립으로 묶여 있었다⁠. 첫 장 채권자 칸에 솔빛물산 주식회사⁠, 맨 끝 장 연락 담당자 칸에 법무팀 김도훈⁠.

“⁠작년 겨울부터 솔빛물산 채권 소송을 받아⁠. 물건 대금 안 낸 거래처들한테 지급명령 신청하는 일이야⁠. 한 달에 마흔 건⁠, 건당 십오만 원⁠. 한 달 육백만 원⁠. 이 사무실 월세가 백팔십만 원이고⁠. 계약은 1년짜리라 12월에 끝나⁠. 재계약 품의를 올리는 사람이 김도훈 대리야⁠.⁠”

“⁠너는 그걸 알고 내 국선을 받았어⁠?⁠”

“⁠국선은 내가 고르는 게 아니야⁠. 법원 명단에 이름을 올려 두면 법원이 정해⁠. 어제 사건 기록 첫 장을 열고 피해자 이름을 봤어⁠. 그다음 네 이름을 봤고⁠. 그 순서였어⁠.⁠”

지혜는 종이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재킷 소매가 컵을 반쯤 덮었다⁠.

“⁠어젯밤에 변호사 윤리 규정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어⁠. 변호사가 맡으면 안 되는 사건이 정해져 있어⁠. 지금 맡은 사건의 상대방이 맡기는 다른 사건⁠, 지금 맡은 사건과 이해가 충돌하는 사건⁠. 근데 내 의뢰인은 솔빛물산이야⁠. 김도훈 대리는 회사 직원이고 나한테 일을 넘기는 창구고⁠. 김도훈 개인이 나한테 사건을 맡긴 적은 한 번도 없어⁠. 그래서 법으로 막히는 사이는 아니야⁠.⁠”

“⁠법으로 안 막히면 괜찮은 거야⁠?⁠”

“⁠안 괜찮지⁠. 네가 나를 못 믿을 이유는 충분해⁠. 내가 너를 열심히 변호할수록 내 월세를 내 주는 사람이 법정에서 곤란해지니까⁠.⁠”

지혜는 책상 서랍에서 서류 한 장을 꺼냈다⁠. 제목 칸이 이미 채워져 있었다⁠. 「⁠국선변호인 사임 허가 신청서⁠」⁠.

“⁠어젯밤에 써 놨어⁠. 네가 원하면 오늘 오후에 법원에 내⁠. 재판부가 허가하면 다른 국선이 와⁠. 재판은 이삼 주 늦어지고⁠.⁠”

나는 신청서를 보았다⁠. 사건 번호⁠, 피고인 윤예원⁠, 신청 이유 칸에 「⁠피해자와 업무상 거래 관계가 있어 피고인과의 신뢰 관계에 영향을 줄 우려⁠」⁠. 지혜 글씨였다⁠. 고2 때 내 수학 노트에 공식을 적어 주던 동글동글한 글씨가 법률 문장을 쓰고 있었다⁠.

“⁠다른 국선은 그 사람이 우리 집 앞에 여섯 달 서 있었다는 말을 믿어 줄까⁠?⁠”

“⁠믿는 건 판사 일이야⁠. 변호사는 믿는 척을 안 해도 돼⁠.⁠”

“⁠너는⁠?⁠”

지혜는 대답하지 않고 커피를 마셨다⁠. 다 식은 커피였다⁠. 나는 신청서를 지혜 앞으로 밀었다⁠.

“⁠너로 해⁠.⁠”

“⁠왜⁠?⁠”

“⁠너는 밤 열한 시에 뒤에서 발소리 들리는 게 어떤 건지 알잖아⁠.⁠”

지혜의 종이컵이 책상 위에서 반 바퀴 돌았다⁠. 지혜는 컵을 바로 세우고 사진 묶음을 집었다⁠. 고2 겨울 얘기는 거기서 끝났다⁠. 지혜는 어려운 말 앞에서 늘 종이를 집었다⁠.

“⁠대신 조건 하나⁠. 너 앞으로 김도훈 근처에 가지 마⁠. 원 밖에서만 살아⁠. 내가 이길 방법을 찾는 동안 네가 지는 일을 만들면 안 돼⁠.⁠”

“⁠원 밖에서 사는 거 벌써 이 주째야⁠. 호떡도 맨홀 위에서 받아⁠.⁠”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분필 줄과 백육십두 걸음과 맨홀 뚜껑 얘기를 했다⁠. 지혜가 처음으로 웃었다⁠. 웃다가 소매로 입을 가렸다⁠. 고2 때도 웃을 때 입을 가렸다⁠.

“⁠사장님 증인으로 쓸 수 있겠다⁠. 목소리 크시지⁠?⁠”

“⁠시장 끝까지 가⁠.⁠”

나는 백팩에서 지퍼 백 두 개를 꺼내 책상에 올렸다⁠. 하나에는 10월 13일 밤 현관 매트에서 주운 감열지 영수증이 들어 있었다⁠. 글씨가 벌써 조금 바래 있었다⁠. 다른 하나에는 7월에 우편으로 온 불송치 결정 통지서가 접혀 있었다⁠. 「⁠불송치 이유⁠: 혐의없음(⁠증거불충분⁠)⁠. 피의자는 공공장소인 빨래방 앞에 머물렀고⁠, 고소인에게 접근하거나 연락한 사실이 확인되지 않음⁠」⁠. 피의자 이름 칸은 비어 있지 않고 「⁠피의자⁠」 석 자였다⁠.

“⁠이 영수증⁠, 김도훈이 놓고 갔다는 증거 있어⁠?⁠”

“⁠없어⁠. 매트 위에 있었어⁠.⁠”

“⁠카드로 냈으면 빨래방 결제 기록이랑 맞춰 볼 수는 있어⁠. 그건 수사기관이 해야 하고⁠.⁠”

지혜는 통지서를 펴서 날짜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의신청은 했어⁠?⁠”

“⁠그런 게 있어⁠?⁠”

“⁠불송치 통지를 받은 고소인은 경찰서장한테 이의신청할 수 있어⁠. 그러면 사건이 공소청으로 넘어가⁠. 기간 제한도 없어⁠. 근데 6월에는 이름도 모르는 남자였잖아⁠. 지금은 이름이 있고⁠, 10월 일도 있어⁠. 영수증⁠, 112 출동⁠, 영희 사장님⁠. 새로 고소하는 게 나을 수도 있어⁠.⁠”

“⁠그럼 해 줘⁠.⁠”

“⁠국선이 할 수 있는 건 네 재판 변호까지야⁠. 고소를 대신 내 주는 건 국선 일이 아니야⁠. 따로 맡아야 해⁠.⁠”

“⁠변호사비는⁠?⁠”

지혜는 대답 대신 영수증 지퍼 백을 창문 불빛에 비춰 보았다⁠. 감열지 위 숫자 23⁠:04가 비닐 너머로 흐릿하게 떴다⁠. 책상 위에서 지혜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화면에 이름이 떴다⁠. 「⁠솔빛물산 김도훈 대리⁠」⁠.

*

진동이 네 번 울리는 동안 지혜는 휴대전화를 보기만 했다⁠. 다섯 번째에 나를 보았다⁠.

“⁠받을게⁠. 스피커로⁠. 너 들으라고⁠. 숨길 거 없다는 거 보여 주려고⁠. 대신 너는 한마디도 하면 안 돼⁠.⁠”

“⁠왜⁠?⁠”

“⁠너 지금 이 전화에 대고 말하면 전기통신으로 접근한 거야⁠. 결정문 3번⁠.⁠”

지혜가 통화 버튼을 누르고 휴대전화를 책상 가운데에 놓았다⁠. 스피커에서 사무실 소음이 먼저 나왔다⁠. 복사기 소리⁠, 젊은 남자 목소리로 「⁠대리님 품의 올렸어요⁠」 하는 소리⁠.

“⁠안 변호사님⁠, 솔빛물산 김도훈입니다⁠. 지금 통화 괜찮으십니까⁠?⁠”

나는 이 목소리를 조사실 탁자 건너에서 들었고⁠, 민원실 칸막이 너머에서 들었고⁠, 가로등 밑에서 들었다⁠. 스피커로 들으니 더 반듯했다⁠.

“⁠대리님⁠, 먼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지금 제 옆에 의뢰인이 계십니다⁠. 제가 윤예원 씨 사건 국선 변호인으로 선정됐습니다⁠.⁠”

스피커가 삼 초 동안 조용했다⁠. 복사기 소리만 났다⁠.

“⁠알고 있었습니다⁠.⁠”

지혜와 나는 서로를 보았다⁠. 지혜가 물었다⁠.

“⁠어떻게 아셨는지 여쭤봐도 됩니까⁠?⁠”

“⁠그 질문에는 답하지 않겠습니다⁠. 전화드린 건 두 가지 때문입니다⁠. 첫째⁠, 재계약 품의는 예정대로 11월 27일에 올라갑니다⁠. 변호사님 일과 이 사건은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법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지혜의 손가락이 상자 스티커 위에 얹혀 있었다⁠. 「⁠담당 김도훈 대리⁠」의 길게 내려온 ‘⁠리⁠’ 세로획 위였다⁠.

“⁠둘째⁠. 저희 회사 익명 게시판에 윤예원 씨 사진이 올라와 있습니다⁠. 10월 8일에 제가 골목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로비 보안팀에 출입 주의 공문을 보내면서 첨부했는데 그게 새어 나갔습니다⁠. 제가 올린 사진이 아닙니다⁠. 게시판 운영사에 삭제 요청을 했고⁠, 아직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피고인 쪽에서 나중에 이걸 두고 저를 문제 삼으실 수 있어서 미리 말씀드립니다⁠.⁠”

나는 지혜의 메모지에 볼펜으로 썼다⁠. 「⁠왜 우리 집 앞에 있었는지 물어봐⁠」⁠. 지혜는 메모지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대리님⁠, 피고인이 궁금해하는 게 있지만 그건 법정에서 여쭙겠습니다⁠.⁠”

“⁠법정에서 답하겠습니다⁠. 그럼⁠.⁠”

통화가 끊겼다⁠. 스피커에서 뚜 소리가 세 번 났다⁠. 지혜는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가 십 초 만에 다시 뒤집었다⁠. 카카오톡 알림이 와 있었다⁠. 보낸 사람 이름은 「⁠솔빛 법무 막내⁠」였다⁠.

「⁠변호사님 혹시 이거 보셨어요⁠? 김대리님 사건이랑 관련 있는 것 같아서요ㅠ 저 보냈다고 하지 말아 주세요⁠」

밑에 캡처 석 장이 붙어 있었다⁠. 사내 익명 게시판 한마디의 글이었다⁠. 제목은 「⁠법무팀 김대리 스토커 얼굴 공개 ㄷㄷ (⁠보안팀 공지 유출⁠)⁠」⁠. 조회 3⁠,412⁠. 댓글 214⁠.

사진은 10월 8일 오후 두 시 칠 분의 나였다⁠. 전봇대 뒤에 반쯤 숨은 몸⁠, 양옆으로 삐져나온 회색 후드와 검은 백팩⁠, 정수리에 틀어 올린 갈색 머리⁠, 턱까지 내려간 검은 마스크⁠. 왼손에 든 종이봉투에 빨간 글씨가 또렷했다⁠. 「⁠영희네 호떡⁠」⁠.

지혜가 손가락으로 화면을 밀었다⁠. 댓글이 줄줄이 올라왔다⁠.

「⁠봄에 실물 박제 그분 아님⁠? 출근남⁠?⁠」

「⁠김대리 형님 올해 무슨 일이냐 웹툰에 박제되고 스토커 붙고⁠」

「⁠얼굴 보니까 그림 그리게 생겼네⁠」

「⁠호떡 봉투 검색해 봄 망원시장임⁠」

「⁠또 오면 내가 찍어 줌⁠」

마지막 댓글에 공감이 백십이 개 붙어 있었다⁠. 나는 화면 속 내 왼손을 보았다⁠. 10월 8일 오후⁠, 식어 가던 호떡 두 개가 든 봉투였다⁠. 영희 사장님이 씨앗을 두 개씩 넣어 주던 봉투가 낯선 사람 이백십네 명에게 우리 동네 이름을 알려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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