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528자)

빨래는 밤에 마릅니다

스토커를 스토킹했다 · 서강림

휴대전화는 10월 12일 월요일 오전에 돌아왔다⁠. 민원실 경사가 지퍼 봉투째 내밀며 필요한 것만 뽑았다고 했다⁠. 사진첩은 그대로였는데 손에 쥔 전화기가 남의 것처럼 차가웠다⁠. 망원역으로 걸어가며 사진첩을 처음부터 넘겼다⁠. 7월 15일 망원역 3번 계단⁠, 7월 16일 여의도역 환승 통로⁠, 8월 2일 헬스장 유리창⁠. 사백 장을 넘기는 동안 김도훈의 얼굴은 다섯 장에만 있었다⁠. 나머지는 등과 어깨와 구두 뒤축이었다⁠. 경사가 무엇을 뽑아 갔는지는 목록 한 장으로 받았다⁠. 「⁠사진 412건⁠, 지도 캡처 53건⁠」⁠. 단톡방에는 안 읽은 메시지가 삼백 개 넘게 쌓여 있었고⁠, 그중 백 개쯤이 은비의 「⁠언니⁠?⁠」였다⁠. 오후 네 시 십오 분⁠, 합정역 앞 오피스텔 10층 작업실 수박밭에서 돌아온 전화기가 울렸다⁠.

「⁠[마포경찰서 여성청소년수사팀] 윤예원 님⁠, 스토킹범죄의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 사건(⁠피의자⁠)과 관련하여 10월 13일(⁠화⁠) 14⁠:00 출석을 요청드립니다⁠. 신분증을 지참하시기 바랍니다⁠. 변호인과 함께 출석하실 수 있습니다⁠. 담당 경위 황재욱⁠」

괄호 안의 피의자라는 낱말을 세 번 읽었다⁠. 세 번 다 내 이름 뒤에 붙어 있었다⁠.

모니터에는 「⁠골목 끝 집⁠」 53회 밤 배경이 떠 있었다⁠. 빨래방 유리문⁠, 전봇대⁠, 가로등⁠. 나는 가로등 갓을 다섯 번 다시 그렸다⁠. 원근 격자를 켜 놓고도 갓이 자꾸 소실점을 비켜 갔다⁠. 옆자리 고은비가 채색 파일을 열다가 의자를 굴려 왔다⁠.

“⁠언니⁠, 가로등남 선이 두 줄이에요⁠. 손 떨렸어요⁠?⁠”

“⁠레이어 합치다 밀렸어⁠.⁠”

“⁠언니는 레이어 안 밀리잖아요⁠. 벽돌 줄눈도 자로 재는 사람이⁠.⁠”

창가 책상의 박수진 작가가 모니터 너머로 고개를 들었다⁠. 마감 날의 작가님은 말끝을 다 잘랐다⁠.

“⁠예원⁠. 53회 배경 몇 컷 남았어⁠.⁠”

“⁠열한 컷이요⁠.⁠”

“⁠내일 경찰서 몇 시⁠.⁠”

“⁠두 시요⁠. 은비가 단톡에 올렸어요⁠?⁠”

“⁠은비가 안 올리는 게 있어⁠?⁠”

은비가 두 손을 들었다⁠. 작가님은 의자를 돌려 나를 똑바로 보았다⁠.

“⁠경찰서에서 웹툰 얘기 꺼내지 마⁠. 가로등남이 실화가 되면 우리 작품이 실제 사람 그린 작품 돼⁠. 툰다락 계약서에 그 조항 있어⁠.⁠”

“⁠무서워서 그린 거예요⁠.⁠”

“⁠알아⁠. 그러니까 무서운 얘기만 해⁠.⁠”

작가님은 다시 모니터로 돌아갔다⁠. 나는 가로등 갓을 여섯 번째로 지웠다⁠. 10월 12일 밤 53회 배경은 열한 컷 중 일곱 컷만 넘어갔고⁠, 나머지 네 컷은 은비가 지난 회 배경을 뒤집어 붙였다⁠. 연재 일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

10월 13일 오후 두 시⁠, 마포경찰서 여성청소년수사팀 조사실은 생각보다 좁았다⁠. 회색 철제 책상 하나⁠, 등받이가 곧은 의자 셋⁠, 벽에 붙은 녹화 안내문⁠. 내가 앉은 의자는 다리 하나가 짧아서 몸을 기울일 때마다 딸깍 소리가 났다⁠. 황재욱 경위는 마흔 후반으로 보였고⁠, 책상 귀퉁이에 낱개 양갱 상자를 두고 있었다⁠.

“⁠시작 전에 알려 드릴게요⁠. 진술하지 않으셔도 되고⁠, 하지 않아도 불이익은 없어요⁠. 변호인 도움 받을 수 있고요⁠. 변호인 있으세요⁠?⁠”

“⁠없어요⁠.⁠”

“⁠지금 단계에선 국선이 자동으로 붙진 않아요⁠. 재판 가면 신청하실 수 있고⁠.⁠”

황 경위는 내 휴대전화에서 뽑은 자료를 출력해 책상에 놓았다⁠. 지도 캡처 맨 위에 내가 그은 빨간 선이 보였다⁠. 감나무빌라에서 망원역⁠, 망원역에서 여의도역 3번 출구⁠. 배경 어시는 선을 그으면 끝을 둥글게 맺는다⁠. 빨간 선 끝마다 동그란 마침이 찍혀 있었다⁠.

“⁠7월 14일부터 9월 30일까지⁠, 날짜가 찍힌 게 쉰세 번이에요⁠. 맞아요⁠?⁠”

“⁠맞아요⁠. 이유가 있어요⁠.⁠”

“⁠들을게요⁠. 그 전에⁠, 고소인과 대질 원하세요⁠? 싫으면 안 하셔도 돼요⁠.⁠”

김도훈의 얼굴을 보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하겠다고 했다⁠. 이 시 삼십 분에 문이 열리고 남색 정장이 들어와 책상 반대편 끝에 앉았다⁠. 김도훈의 의자는 딸깍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나는 4월 9일부터 말했다⁠. 새벽 한 시 십 분⁠, 가로등⁠, 사십 분⁠, 블라인드⁠, 택배의 가짜 이름⁠, 도어락의 물티슈⁠, 6월 18일의 112⁠. 황 경위가 자판을 치다가 물었다⁠.

“⁠그 남자가 김도훈 씨라는 건 어떻게 알아요⁠?⁠”

“⁠7월에 빨래방에서 나오는 걸 따라갔어요⁠.⁠”

“⁠법적으로는⁠, 방금 하신 말씀도 진술입니다⁠.⁠”

김도훈이 말했다⁠. 황 경위가 손바닥을 들었다⁠.

“⁠정리는 제가 할게요⁠, 고소인⁠.⁠”

김도훈은 클리어 파일 두 개를 책상에 올렸다⁠. 첫 파일에는 카드 결제 내역이 날짜순으로 출력돼 있었다⁠. 「⁠뽀송 빨래방⁠」이 한 장에 열네 줄씩⁠, 다섯 장이었다⁠.

“⁠4월 9일부터 9월 29일까지 일흔 번입니다⁠. 제가 그 골목에 있었던 이유입니다⁠. 지난 6월에도 같은 자료를 냈습니다⁠.⁠”

“⁠일흔 번이면⁠, 셔츠가 남아나요⁠?⁠”

“⁠그래서 셔츠를 많이 삽니다⁠. 법적으로 빨래 횟수에 제한은 없습니다⁠.⁠”

“⁠새벽 한 시에도요⁠?⁠”

내가 물었다⁠. 김도훈은 나를 보지 않고 황 경위에게 대답했다⁠.

“⁠빨래방은 스물네 시간 엽니다⁠. 빨래는 밤에 마릅니다⁠.⁠”

“⁠그럼 왜 우리 창을 봤어요⁠? 빨래 안 보고⁠.⁠”

“⁠건조기가 도는 사십 분 동안 사람은 고개를 듭니다⁠. 그 골목에서 불 켜진 창이 그 창 하나였습니다⁠.⁠”

“⁠불 끈 다음에도 왔잖아요⁠.⁠”

“⁠그다음부터는 가로등을 봤습니다⁠. 가로등도 위에 있습니다⁠.⁠”

황 경위의 자판 소리가 잠깐 멎었다⁠. 김도훈은 두 번째 파일을 열었다⁠. 정신건강의학과 진단서였다⁠. 9월 3일⁠, 공황장애⁠.

“⁠형사님⁠. 7월 15일 아침 망원역 3번 계단에서 등 뒤로 셔터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다음부터 출근길마다 들었습니다⁠. 헬스장 시간을 저녁 일곱 시에서 아홉 시로 바꿨는데 아홉 시에도 들었습니다⁠. 저는 지금 엘리베이터를 혼자 못 탑니다⁠. 회사 화장실 칸에서 문을 잠그고 숨을 넷까지 셉니다⁠.⁠”

듣는 동안 김도훈이 거짓말을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내 의자가 딸깍 소리를 냈다⁠.

“⁠저는 증거를 모으려고 따라간 거예요⁠. 경찰이 증거가 없다고 해서요⁠.⁠”

“⁠증거는 수사기관이 모읍니다⁠.⁠”

김도훈이 처음으로 나를 보았다⁠. 쌍꺼풀 없는 눈이 서류를 넘길 때처럼 한 번 아래로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피의자가 석 달 동안 모은 건 증거가 아니라 제 출근 시각입니다⁠. 제가 몇 시에 집을 나서는지⁠, 어느 칸에 타는지⁠, 헬스장 사물함이 몇 번인지⁠. 그걸 아는 사람이 등 뒤에 있으면 사람은 무섭습니다⁠.⁠”

“⁠나는 당신이 우리 집 몇 호인지 아는 게 무서웠어요⁠.⁠”

“⁠그 두려움은 피의자가 6월에 고소한 사건에서 이미 판단을 받았습니다⁠.⁠”

“⁠불송치 문자 한 줄이요⁠.⁠”

“⁠법적으로는 그 한 줄이 판단입니다⁠.⁠”

황 경위가 자판에서 손을 떼고 양갱 상자를 책상 가운데로 밀었다⁠. 둘 다 손대지 않았다⁠. 황 경위는 상자를 도로 끌어갔다⁠.

“⁠제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요⁠?⁠”

“⁠그 질문에는 답하지 않겠습니다⁠. 고소인은 답할 의무가 없습니다⁠.⁠”

“⁠우리 집 창이 302호라는 건요⁠?⁠”

“⁠같은 대답입니다⁠.⁠”

김도훈은 클리어 파일을 덮고 황 경위 쪽으로 몸을 조금 돌렸다⁠.

“⁠한 가지만 덧붙이겠습니다⁠. 피의자는 저를 먼저 봤습니다⁠. 작년 가을부터입니다⁠.⁠”

“⁠그건 고소장에 없는데요⁠.⁠”

“⁠아직은 없습니다⁠.⁠”

조서를 읽는 데 삼십 분이 들었다⁠. 나는 「⁠따라갔다⁠」를 「⁠확인하러 갔다⁠」로 고쳐 달라고 했다⁠. 황 경위는 고쳐 주면서 말했다⁠. 고칠 수는 있는데 뜻은 같다고⁠. 김도훈이 먼저 나가고 문이 닫힌 뒤⁠, 황 경위가 양갱 하나를 까서 내 앞에 놓았다⁠.

“⁠신고하신 건도 같이 볼게요⁠. 근데 지금은 사진이 전부 윤예원 씨가 김도훈 씨를 찍은 거라서요⁠. 그리고 알려 드릴 게 있어요⁠. 고소인이 잠정조치를 요청해서 어제 저희가 신청했고⁠, 오늘 오전에 검사가 법원에 청구했어요⁠.⁠”

“⁠그 사람한테요⁠?⁠”

황 경위는 양갱 껍질을 반으로 접었다⁠.

“⁠윤예원 씨한테요⁠. 법원이 받아 주면 석 달 동안 고소인과 집⁠, 회사 백 미터 안에 못 가시고⁠, 전화나 문자도 안 돼요⁠.⁠”

“⁠저는 그 사람한테 연락한 적 한 번도 없어요⁠.⁠”

“⁠그럼 어렵지 않으실 거예요⁠.⁠”

양갱은 끝까지 손대지 못했다⁠.

*

다섯 시 사십 분⁠, 망원시장 동쪽 입구에 해가 비스듬히 누웠다⁠. 영희네 호떡 철판 앞에 줄이 다섯 사람 있었다⁠. 영희 사장님이 줄을 무시하고 종이봉투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

“⁠경찰서 갔다며⁠. 시장 상인회 단톡에 벌써 돌았어⁠. 떡집이 올렸어⁠.⁠”

“⁠떡집 사장님이 어떻게 아세요⁠?⁠”

“⁠얘⁠, 떡집은 다 알아⁠. 먹어⁠. 씨앗 두 개 넣었어⁠.⁠”

사장님이 앞치마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보여 주었다⁠. 「⁠망원시장 상인회⁠」 단톡방이었다⁠. 「⁠고향떡집⁠: 302호 예원이 오늘 경찰서 조사 갔대요⁠」 「⁠망원정육⁠: 그 정장 양반 감나무빌라 사는 사람 맞지⁠?⁠」 「⁠영희네호떡⁠: 다들 장사나 해⁠」 「⁠고향떡집⁠: 언니가 제일 먼저 물어봤잖아요⁠」⁠. 마지막 줄에 사장님은 답을 달지 않았다⁠.

줄에 선 아저씨가 왜 저 사람은 먼저 주냐고 했고⁠, 사장님은 저 사람은 오늘 경찰서 갔다 왔다고 했다⁠. 아저씨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이 누르개로 호떡을 꾹 누르며 목소리를 낮췄다⁠. 낮춘 목소리도 시장 끝까지 갔다⁠.

“⁠그 양반⁠, 밤에 빨래방 앞에 서 있던 양반이지⁠. 나 열한 시 반에 장사 접고 골목 들어갈 때 몇 번 봤어⁠. 위를 보더라⁠. 너네 3층⁠.⁠”

“⁠경찰한테 그대로 말해 주실 수 있어요⁠?⁠”

“⁠나는 본 거 다 말하는 사람이야⁠. 너 낮에 그 양반 따라가는 것도 봤어⁠. 그것도 말해⁠?⁠”

나는 호떡 봉투를 쥔 채 대답하지 못했다⁠. 사장님은 다음 손님 호떡을 뒤집었다⁠. 흑설탕이 철판에 흘러 탔다⁠.

*

밤 열한 시 이십 분에 작업실에서 돌아왔다⁠. 골목 입구 편의점 불빛을 지나 우리 건물까지 내 걸음으로 백 걸음이었다⁠. 가로등 밑은 비어 있었다⁠. 길 건너 뽀송 빨래방 유리문 안에서 3번 건조기 하나가 돌고 있었고⁠, 빨래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동그란 창 안에서 흰 셔츠 소매가 위로 올라갔다 내려왔다⁠.

건물 현관 고무 매트 위에 종이 한 장이 떨어져 있었다⁠. 감열지 영수증이었다⁠. 나는 쪼그려 앉아 휴대전화 불빛을 비췄다⁠.

「⁠뽀송 빨래방 · 건조 40분 · 4⁠,000원 · 2026-10-13 23⁠:04⁠」

십육 분 전이었다⁠. 현관 매트는 공동현관 유리문 바로 앞⁠, 골목에서 계단 두 칸을 올라와야 닿는 자리였다⁠. 손가락이 저절로 도어락 번호판으로 갔다가 멈췄다⁠. 나는 백팩에서 물티슈를 꺼내 영수증을 집었다⁠. 맨손으로 만지면 안 된다는 것은 반년 동안 배운 것이었다⁠. 지퍼 백에 영수증을 넣고⁠, 번호판을 닦고⁠, 번호를 누르고⁠, 번호판을 다시 닦았다⁠. 3층 복도 끝까지 한 번 더 본 다음 302호 문을 열었다⁠.

현관에 서서 112를 눌렀다가 통화 버튼 앞에서 엄지를 멈췄다⁠. 경찰차가 오면 젊은 경찰관은 6월처럼 물을 것이었다⁠. 직접적인 위협은 없었죠⁠. 연락은 몇 번이나 왔어요⁠. 영수증 한 장은 위협도 연락도 아니었다⁠. 나는 숫자 세 개를 지우고 메모장을 열어 썼다⁠. 「⁠10/13 23⁠:04 건조 40분⁠. 현관 매트⁠. 23⁠:20 발견⁠. 가로등 밑 없음⁠. 3번 건조기 돌아감⁠」⁠. 그리고 영수증이 든 지퍼 백을 사진으로 찍었다⁠. 찰칵 소리가 빈방에 크게 났다⁠.

블라인드는 아침에 내린 그대로였다⁠. 나는 불을 켜지 않고 블라인드 날개 하나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3번 건조기는 아직 돌고 있었다⁠. 사십 분짜리 건조기였다⁠. 남은 이십사 분 동안 아무도 빨래를 찾으러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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