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465자)

알게 하고 싶었습니다

스토커를 스토킹했다 · 서강림

12월 17일 목요일 오후 네 시 삼십 분⁠, 휴정이 끝났다⁠. 십 분 동안 나는 법정 앞 복도 정수기에서 종이컵에 물을 세 번 받아 마셨다⁠. 지혜는 물 대신 메모지를 넘겼다⁠. 메모지에는 질문이 아홉 줄 적혀 있었다가 세 줄로 줄어 있었다⁠. 복도 반대편 끝 의자의 김도훈은 아무것도 마시지 않았고 아무것도 넘기지 않았다⁠. 두 손을 무릎 위에 포개고 앉아 있었다⁠. 서류 가방은 지퍼가 닫혀 있었다⁠.

법정 문이 다시 열렸다⁠. 판사가 들어와 앉았다⁠.

“⁠피고인 김도훈에 대한 피고인신문을 하겠습니다⁠. 피고인은 진술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진술하면 증거로 쓰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김도훈은 피고인석 왼쪽 끝 회색 의자에서 일어나 진술석으로 나왔다⁠. 클리어 파일을 들고 나오지 않았다⁠. 빈손이었다⁠. 진술석 책상에 두 손을 올려놓았다⁠.

검사가 날짜를 물었다⁠. 김도훈은 날짜마다 짧게 답했다⁠. 4월 9일⁠, 네⁠. 4월 20일⁠, 네⁠. 5월 14일⁠, 비가 왔습니다⁠, 우산은 없었습니다⁠. 10월 13일⁠, 영수증을 공동현관 앞 매트에 놓았습니다⁠. 10월 23일⁠, 결정문을 들고 갔습니다⁠. 검사가 신문을 마치자 판사가 펜을 내려놓았다⁠.

“⁠피고인⁠. 하나 묻겠습니다⁠. 4월 20일에 이름도 알고 작업실도 알고 소장도 썼습니다⁠. 피고인은 법을 아는 사람입니다⁠. 왜 소장을 내지 않았습니까⁠?⁠”

김도훈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진술석 책상 위의 오른손이 왼손을 덮었다⁠.

“⁠소장을 내면 윤예원 씨는 그림을 내렸을 겁니다⁠. 플랫폼이 내리게 했을 겁니다⁠. 돈을 물었을 겁니다⁠. 그런데 몰랐을 겁니다⁠.⁠”

“⁠무엇을 몰랐을 거라는 겁니까⁠?⁠”

“⁠아침마다 누가 자기를 보고 있다는 게 어떤 건지요⁠.⁠”

김도훈은 판사를 보다가 피고인석 오른쪽 끝을 보았다⁠. 나를 보았다⁠.

“⁠2025년 가을에 저는 3층 창을 알았습니다⁠. 아침마다 같은 시각에 같은 창에서⁠. 처음에는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출근 시각을 일 분 늦춰 봤습니다⁠. 다음 날 그 창에 그림 그리는 손이 보였습니다⁠. 일 분 늦게 나와도 손은 있었습니다⁠. 11월 20일에 승강장 의자에서 크로키북에 제 발이 그려지는 걸 봤습니다⁠. 그날부터 출근길에 발소리가 신경 쓰였습니다⁠. 제 발소리를요⁠. 3월에 모르는 사람 셋이 따라왔을 때⁠, 상수역 승강장에서 열차가 떠날 때까지 서 있으면서 생각했습니다⁠. 저 창 안의 사람은 이게 어떤 건지 모를 거라고⁠.⁠”

김도훈의 목소리가 한 번도 높아지지 않았다⁠. 문장도 한 번도 끊기지 않았다⁠. 다만 「⁠법적으로는⁠」이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알게 하고 싶었습니다⁠.⁠”

법정이 조용했다⁠. 속기사의 자판 소리만 났다⁠. 방청석 맨 앞줄에서 영희 사장님이 「⁠아이고⁠」 하려다가 입을 막았다⁠.

*

판사가 지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동피고인의 변호인으로 신문하라는 뜻이었다⁠. 지혜는 메모지를 집지 않고 일어났다⁠. 세 줄은 이미 외운 얼굴이었다⁠.

“⁠피고인은 피고인 윤예원이 알게 됐다고 확인한 날이 있습니까⁠?⁠”

“⁠4월 넷째 주입니다⁠. 일요일 낮에 처음 골목에 가 봤습니다⁠. 작년 가을 아침마다 올라가 있던 블라인드가 낮에도 내려가 있었습니다⁠.⁠”

“⁠그 뒤에도 갔습니다⁠. 9월 29일까지⁠. 왜 계속 갔습니까⁠?⁠”

“⁠가로등남이 계속 그려졌습니다⁠.⁠”

“⁠그게 이유입니까⁠?⁠”

“⁠윤예원 씨는 무서워하면서도 저를 그렸습니다⁠. 4월부터 9월까지 스물여섯 컷⁠. 매주 목요일 웹툰을 열면 제가 가로등 밑에 서 있었습니다⁠. 그림이 멈추면 저도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그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저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지혜가 나를 보지 않고 다음 줄로 갔다⁠.

“⁠피고인이 가로등 밑에 서 있었기 때문에 피고인 윤예원은 가로등남을 그렸습니다⁠. 피고인 윤예원이 가로등남을 그렸기 때문에 피고인은 가로등 밑에 섰습니다⁠. 둘 중 누가 먼저 멈출 수 있었습니까⁠?⁠”

“⁠제가 먼저 멈출 수 있었습니다⁠.⁠”

김도훈은 대답을 고르지 않았다⁠. 지혜는 메모지에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9월 29일에 왜 멈췄습니까⁠?⁠”

“⁠9월 29일 밤에 3번 건조기 앞에서 휴대전화로 웹툰을 열었습니다⁠. 50회였습니다⁠. 가로등남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손에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습니다⁠. 저는 휴대전화를 든 제 손을 내려다봤습니다⁠. 윤예원 씨는 7월부터 낮에 저를 따라와 찍었고⁠, 저는 밤에 윤예원 씨 창 밑에 서 있었습니다⁠. 둘 다 서로를 보면서 아무도 끝내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날 수건을 꺼내지 않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4월에 못 낸 소장을 10월에 형사 고소장으로 썼습니다⁠. 법으로 끝내려고요⁠.⁠”

“⁠법으로 끝내려고 쓴 고소장에⁠, 먼저 따라온 사람이 피고인 윤예원이라고 썼습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지금도 사실입니다⁠. 제가 먼저 당했습니다⁠.⁠”

“⁠네⁠. 사실입니다⁠. 이상입니다⁠.⁠”

지혜가 앉았다⁠. 김도훈은 진술석에서 내려와 왼쪽 끝 회색 의자로 돌아갔다⁠. 딱⁠, 따각⁠. 오른쪽 굽이 나무 바닥에 닿는 소리가 길었다⁠.

*

오후 다섯 시 십 분⁠, 공소청 검사가 일어났다⁠. 구형이었다⁠.

“⁠피고인 윤예원에게 벌금 삼백만 원과 스토킹 치료 프로그램 이수명령을 구합니다⁠. 피고인 김도훈에게 징역 1년과 스토킹 치료 프로그램 이수명령을 구합니다⁠.⁠”

방청석 셋째 줄 솔빛물산 사람 하나가 숨을 들이켰다⁠. 지혜가 일어나 짧게 변론했다⁠. 피고인 윤예원이 따라가기 전 여섯 달 동안 겪은 일⁠, 6월의 112와 7월의 불송치⁠, 증거를 모으려 했던 이유⁠, 그리고 스케치북을 스스로 낸 것⁠. 김도훈은 변론하지 않았다⁠. 판사가 최후진술을 들었다⁠.

“⁠피고인 김도훈⁠,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하세요⁠.⁠”

김도훈이 일어났다⁠. 서류 가방에 넣은 다섯 번째 클리어 파일 「⁠최후⁠」를 꺼내지 않았다⁠.

“⁠써 온 것이 있었는데 읽지 않겠습니다⁠. 저는 먼저 당했습니다⁠. 그건 바뀌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알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둘 다 제 것입니다⁠. 판결을 받겠습니다⁠.⁠”

김도훈은 앉았다⁠. 판사가 나를 보았다⁠.

“⁠피고인 윤예원⁠.⁠”

나는 일어났다⁠. 피고인석 책상 모서리를 손날로 짚었다⁠. 연필 자국이 책상에 묻지 않았다⁠. 해고된 날부터 연필을 잡지 않은 손이었다⁠.

“⁠저는 작년 가을부터 일 년 동안 김도훈 씨를 봤어요⁠. 창에서 아침마다⁠, 승강장에서⁠, 7월부터는 등 뒤에서요⁠. 그리고 그렸어요⁠. 일 분 늦은 것까지 적었어요⁠. 김도훈 씨의 아침을 제가 가져갔어요⁠. 제가 그린 그림 때문에 모르는 사람들이 김도훈 씨를 따라갔어요⁠. 그 일 년을 사과합니다⁠. 죄송합니다⁠.⁠”

김도훈은 앞을 보고 있었다⁠. 나는 김도훈의 옆얼굴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삼 미터였다⁠. 고개를 들고 판사를 보았다⁠.

“⁠그리고 4월 9일부터 9월 29일까지⁠, 제가 블라인드 뒤에서 보낸 여섯 달이 있어요⁠. 김도훈 씨한테 사과를 받고 싶은 건 아니에요⁠. 김도훈 씨 말도 사실이니까요⁠. 그 여섯 달에 무슨 이름이 붙는지는 판결로 듣겠습니다⁠.⁠”

판사는 한참 나를 보다가 기록 두 묶음을 포개 놓았다⁠.

“⁠선고는 12월 24일 오전 열 시에 하겠습니다⁠. 두 사건 같이 합니다⁠. 크리스마스이브입니다⁠. 피고인들은 그날 각자 집에서 나올 때 서로의 집 앞을 지나지 않는 길로 오세요⁠.⁠”

판사는 웃지 않았다⁠. 방청석에서 은비만 웃었다가 손으로 입을 막았다⁠.

*

오후 다섯 시 사십 분⁠, 304호 법정 앞 복도⁠. 지혜가 나를 복도 오른쪽 끝 정수기 앞에 세워 두고 김도훈이 엘리베이터를 탈 때까지 기다리게 했다⁠. 김도훈은 왼쪽 끝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만수 사장님이 비닐봉지를 들고 김도훈에게 걸어갔다⁠.

“⁠이거 가져가요⁠. 판사님이 안 받는대요⁠. 우리 가게 분실물 바구니에 석 달 있었어요⁠.⁠”

김도훈은 봉지를 내려다보았다⁠. 헬스장 이름이 박힌 흰 수건이 비닐 안에서 접혀 있었다⁠. 김도훈은 두 손으로 봉지를 받았다⁠. 서류 가방 바깥 주머니를 열어 봉지를 밀어 넣었다⁠. 고소장 봉투가 꽂혀 있던 주머니였다⁠. 주머니가 불룩해졌다⁠.

“⁠감사합니다⁠. 빨래방 매출 줄어든 것도 죄송합니다⁠.⁠”

“⁠그건 아가씨도 사과했어요⁠. 둘이 똑같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김도훈이 탔다⁠. 문이 닫히기 전에 초록색 사원증 줄을 손에 감은 젊은 여자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내게로 왔다⁠. 방청석 셋째 줄에 있던 사람이었다⁠.

“⁠윤예원 씨죠⁠? 저 솔빛 법무팀이에요⁠. 안 변호사님한테 캡처 보낸 사람이요⁠.⁠”

“⁠아⁠, 막내⁠.⁠”

“⁠네⁠. 그 막내요⁠.⁠”

여자는 휴대전화를 열어 화면을 보여 주었다⁠. 한마디 게시판이었다⁠. 「⁠법무팀 김대리 스토커 얼굴 공개 ㄷㄷ⁠」 글이 회색으로 가려져 있었다⁠. 「⁠권리 침해 신고로 게시가 임시 중단되었습니다⁠」⁠.

“⁠윤예원 씨가 11월에 낸 신고는 회원이 아니라고 반려됐대요⁠. 대리님이 지난주에 회사 이름으로 운영사에 공문 보내면서 윤예원 씨 신고서를 같이 붙였어요⁠. 대리님 사진 글이랑 윤예원 씨 사진 글⁠, 둘 다 내려 달라고요⁠. 오늘 오전에 둘 다 가려졌어요⁠.⁠”

“⁠삼십 일 지나면 다시 올라와요⁠?⁠”

“⁠올린 사람이 이의를 내야 다시 올라오는데요⁠, 올린 사람이 보안팀 사람이었어요⁠. 이번 주에 징계위 열려요⁠. 이의는 안 낼 거예요⁠.⁠”

여자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계단으로 내려갔다⁠. 나는 휴대전화로 한마디 화면 캡처를 찍었다⁠. 찰칵⁠. 회색으로 가려진 내 얼굴 위에 셔터 소리가 났다⁠.

*

법원 정문 앞에서 영희 사장님은 시장으로⁠, 지혜는 사무실로 갔다⁠. 지혜 사무실 벽에는 이제 상자가 하나도 없었다⁠. 지혜는 남은 월세를 국선 사건 열한 건으로 채워 보겠다고 했다⁠. 나는 공덕역에서 6호선을 타고 망원역에서 내려 골목으로 걸어 들어왔다⁠. 시장 동쪽 입구 정류장에 서는 버스는 두 달째 타지 않았다⁠.

밤 여덟 시 사십 분⁠, 가로등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가로등 밑은 비어 있었다⁠. 뽀송 빨래방 3번 건조기도 비어 있었다⁠. 3번 건조기 안에도 분실물 바구니에도 이제 흰 수건은 없었다⁠. 수건은 김도훈의 서류 가방 바깥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현관 번호판을 물티슈로 닦다가 손을 멈췄다⁠. 번호판 위에 회색 자국이 없었다⁠. 연필을 안 잡은 지 열이틀이었다⁠. 나는 번호를 누르고 이번에는 닦지 않았다⁠. 3층 복도 끝은 한 번 더 보았다⁠. 복도 끝을 보는 버릇은 아직 멈춰지지 않았다⁠.

밤 열한 시 이 분⁠,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수박씨 작가님⁠」이 떴다⁠. 단톡방에서 나를 내보낸 지 아흐레 만이었다⁠.

“⁠예원아⁠. 자니⁠?⁠”

“⁠아니요⁠.⁠”

“⁠툰다락이 연락 왔어⁠. 완결 한 회는 열어 주겠대⁠. 마지막 회⁠. 조건이 있어⁠. 지난 회차 마흔한 컷⁠, 출근남 지운 자리를 그냥 비워 두면 안 되고⁠, 실제 사람이 아닌 걸로 다시 채워야 한대⁠. 지운 골목이 너무 비어 보인다고 독자 문의가 많대⁠.⁠”

“⁠네⁠.⁠”

“⁠네가 그려 줘⁠. 프리랜서 말고 근로계약으로⁠. 내가 제대로 다시 쓸게⁠. 그리고 마흔한 컷에 누구를 넣을지는 네가 정해⁠. 나는 이번엔 컷 수만 셀게⁠.⁠”

나는 블라인드 앞으로 갔다⁠. 날개 하나를 눌렀다⁠. 빈 가로등 밑⁠, 빈 3번 건조기⁠, 감나무 담장이 있는 아침 골목⁠. 마흔한 컷의 아침 골목에 넣을 사람을 생각했다⁠. 실제 사람이 아닌 사람⁠. 허락 없이 그려도 아무도 따라가지 않을 사람⁠.

“⁠작가님⁠. 마감 언제예요⁠?⁠”

“⁠크리스마스 지나고⁠. 12월 30일⁠.⁠”

“⁠그릴게요⁠. 누구 넣을지는 선고 듣고 정할게요⁠.⁠”

14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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