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636자)

선고

스토커를 스토킹했다 · 서강림

12월 24일 목요일 오전 아홉 시 이십 분⁠, 나는 골목을 나서기 전에 지도 앱을 열었다⁠. 감나무빌라에서 백 미터 원 밖으로만 가는 길⁠. 시장 동쪽 입구 정류장 대신 골목을 거꾸로 걸어 망원역까지⁠. 두 달 동안 하루 두 번씩 걸은 길이었다⁠. 판사가 선고 날 서로의 집 앞을 지나지 말고 오라고 했다⁠. 나는 원 밖으로 걸었다⁠. 골목 입구에서 시장 서쪽 입구를 한 번 돌아보았다⁠. 영희 사장님이 가게 셔터에 종이를 붙여 두었다고 은비가 아침에 사진을 보내 주었다⁠. 「⁠오늘 오전 선고 갑니다⁠. 호떡은 오후에⁠」⁠.

서울서부지방법원 304호 앞 복도는 크리스마스 장식 하나 없이 조용했다⁠. 오른쪽 끝 긴 의자에 지혜와 내가⁠, 우리 옆으로 영희 사장님과 은비와 박수진 작가가 앉았다⁠. 왼쪽 끝 긴 의자에 김도훈이 혼자 앉아 있었다⁠. 서류 가방 바깥 주머니가 아직 불룩했다⁠. 지혜는 운동화를 신고 왔다⁠. 뒤축을 꺾지 않았다⁠. 선고 날은 할 말이 없어서 구두를 안 신어도 된다고 했다⁠.

“⁠지혜야⁠. 오늘 무슨 말이 나와도 일어나면 안 되지⁠?⁠”

“⁠오늘은 일어나야 돼⁠. 선고는 서서 들어⁠.⁠”

*

오전 열 시 사 분⁠, 판사가 들어왔다⁠. 판사는 판결문 두 묶음을 법대 위에 나란히 놓고 안경을 코끝에 걸었다⁠.

“⁠두 사건을 함께 선고합니다⁠. 피고인 둘 다 앞으로 나오세요⁠. 피고인석 양 끝에 그대로 서 계시면 됩니다⁠.⁠”

나는 오른쪽 끝 갈색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났다⁠. 김도훈은 왼쪽 끝 회색 의자 앞에서 일어났다⁠. 나무판 스물두 장⁠. 판사가 먼저 내 판결문을 폈다⁠.

“⁠피고인 윤예원⁠. 피고인은 2026년 7월 14일부터 9월 30일까지 쉰세 차례에 걸쳐 피해자 김도훈의 출근길과 직장 앞⁠, 운동 시설 앞까지 따라가 사진을 찍었습니다⁠. 피고인은 봄부터 자기 집 앞에서 겪은 일 때문에 증거를 모으려 했고 그것이 정당한 이유라고 주장합니다⁠. 피고인이 겪은 두려움은 이 법정에서 여러 증거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나 석 달 동안 쉰세 번⁠, 피해자의 직장과 운동 시설까지 따라간 것은 증거를 모으는 데 필요한 정도를 넘었습니다⁠. 정당한 이유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판사가 판결문을 한 장 넘겼다⁠.

“⁠공소장 변경으로 더해진 부분을 봅니다⁠. 피고인이 자기 집 창문에서 골목을 지나는 피해자를 보고 그린 일은 피해자의 집이나 직장 부근에서 기다리거나 지켜본 행위로 보기 어렵습니다⁠. 2025년 11월 20일 역까지 따라간 일은 한 차례이고⁠, 이후 일곱 달 넘게 이어지지 않았으므로 2026년 7월의 행위와 하나로 묶을 수 없습니다⁠. 이 부분은 무죄입니다⁠. 다만 나머지 부분과 하나의 죄로 기소되었으므로 주문에서 따로 무죄를 선고하지는 않습니다⁠.⁠”

지혜가 책상 밑에서 내 손목을 잡았다⁠. 판사의 목소리는 같은 속도로 이어졌다⁠.

“⁠다만 피고인이 그린 그림이 웹툰에 실려 모르는 사람들이 피해자를 찾아가 따라다니게 된 일은⁠, 범죄가 되지 않는 부분이라도 피해자가 입은 피해로서 형을 정하는 데 고려합니다⁠. 한편 피고인은 앞서 여섯 달 동안 집 앞에서 겪은 두려움이 컸고⁠, 첫 신고가 불송치로 끝났으며⁠, 자기에게 불리한 스케치북을 스스로 냈고⁠, 잘못을 사과했습니다⁠. 피해자도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서면을 냈습니다⁠.⁠”

김도훈이 처벌불원서를 새로 써서 낸 것을 나는 판사의 입으로 처음 들었다⁠. 지혜도 몰랐던 얼굴이었다⁠. 판사가 판결문을 읽는 속도를 처음으로 늦췄다⁠.

“⁠주문⁠. 피고인 윤예원을 벌금 2⁠,000⁠,000원에 처한다⁠. 피고인에게 스토킹 치료 프로그램 40시간의 이수를 명한다⁠.⁠”

벌금 이백만 원⁠. 마흔 시간⁠. 판사가 내 판결문을 덮고 두 번째 묶음을 폈다⁠.

“⁠피고인 김도훈⁠. 피고인은 2026년 4월 9일부터 10월 23일까지 예순한 차례 피해자 윤예원의 집 앞에서 피해자의 창을 지켜보고⁠, 10월 13일 피해자 집 공동현관 앞에 영수증을 두고⁠, 10월 23일 결정문을 들고 집 앞에서 기다렸습니다⁠. 피고인은 공공장소에서 빨래방을 이용했고⁠, 소송 증거를 모으려 했으므로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피고인의 결제는 일흔두 번 모두 건조기였고 세탁기는 한 번도 쓰지 않았습니다⁠. 피고인은 4월 20일 이미 피해자의 신원을 확인하고 소장까지 준비해 법으로 해결할 길이 열려 있었습니다⁠. 4월 넷째 주부터 피해자가 낮에도 창을 가린 것을 보아 피해자의 두려움을 알았습니다⁠. 그 뒤로도 다섯 달 넘게 찾아갔습니다⁠. 피고인 스스로 법정에서⁠, 피해자가 알게 하려고 갔다고 진술했습니다⁠. 정당한 이유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김도훈은 서 있었다⁠. 오른발 끝이 바깥으로 벌어져 있었다⁠. 판사는 판결문을 한 장 넘겼다⁠.

“⁠다만 피고인은 이 사건 전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 아침마다 지켜보이고 그려졌으며⁠, 그 그림을 본 낯선 사람들에게 쫓기고 회사 게시판에 얼굴이 퍼지는 일을 먼저 겪었습니다⁠. 공황장애 진단도 받았습니다⁠. 피고인이 먼저 겪은 일은 이 범행을 정당하게 만들지는 못하지만⁠, 범행에 이른 사정으로서 형을 정하는 데 참작합니다⁠. 주문⁠. 피고인 김도훈을 징역 8월에 처한다⁠. 다만 이 판결 확정일부터 2년간 위 형의 집행을 유예한다⁠. 피고인에게 보호관찰을 받을 것과 스토킹 치료 프로그램 40시간의 이수를 명한다⁠. 보호관찰 기간 동안 피해자의 주거로부터 100미터 이내에 접근하지 말 것을 특별준수사항으로 정한다⁠.⁠”

판사가 판결문을 덮었다⁠. 안경을 코끝에서 올렸다⁠.

“⁠두 피고인 모두 유죄입니다⁠. 그리고 두 피고인 모두 피해자입니다⁠. 법원은 두 사람 중 누가 먼저였는지를 들었고⁠, 누가 무엇을 했는지로 판결했습니다⁠. 항소는 오늘부터 이레 안에 할 수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판사는 일어나서 나갔다⁠. 크리스마스이브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

오전 열 시 사십 분⁠, 304호 앞 복도⁠. 오른쪽 끝 정수기 앞에 나와 지혜가⁠, 왼쪽 끝 엘리베이터 앞에 김도훈이 서 있었다⁠. 복도 길이는 내 걸음으로 쉰여섯 걸음이었다⁠. 사십 미터쯤⁠. 결정문 기한은 1월 15일까지였다⁠. 지혜가 낮게 말했다⁠. 여기서 더 가면 안 돼⁠. 나는 가지 않았다⁠.

김도훈이 복도 저편에서 서류 가방을 고쳐 메고 나를 보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한 번 열렸다가 아무도 타지 않아 닫혔다⁠. 김도훈은 다가오지 않았다⁠. 사십 미터 저편에서 말했다⁠. 복도가 조용해서 소리가 다 왔다⁠.

“⁠항소하지 않겠습니다⁠. 민사 소송은 오늘 오후에 취하서를 냅니다⁠.⁠”

“⁠저도 항소 안 해요⁠.⁠”

“⁠보호관찰 기간에 윤예원 씨 집 백 미터 밖으로 출근합니다⁠. 감나무빌라에서 시장 뒤로 돌아 망원역까지 칠 분이 더 듭니다⁠. 3월부터 걷던 길입니다⁠. 이제는 법원이 정해 준 길입니다⁠.⁠”

“⁠저는 십일 분 돌았어요⁠. 두 달 동안⁠.⁠”

“⁠알고 있습니다⁠.⁠”

김도훈은 서류 가방 바깥 주머니에 손을 얹었다⁠. 수건이 든 비닐봉지가 손바닥 밑에서 바스락거렸다⁠.

“⁠윤예원 씨⁠. 출근남 자리는 어떻게 됩니까⁠? 마흔한 컷⁠.⁠”

“⁠다시 그려요⁠. 30일 마감이에요⁠. 마지막 회에 같이 실려요⁠.⁠”

“⁠누구를 그립니까⁠?⁠”

나는 정수기 옆 유리창에 비친 나를 보았다⁠. 커다란 회색 후드 집업⁠, 턱까지 내린 검은 마스크⁠, 정수리에 대충 틀어 올린 짙은 갈색 머리⁠. 등에 멘 검은 백팩⁠.

“⁠저요⁠. 감나무 담장 앞을 여덟 시 십이 분에 지나가는 사람 자리에 저를 그려요⁠. 오른발은 안으로 조금 모이게요⁠. 제 발이 그래요⁠. 실제 사람이지만 허락받았어요⁠. 제가 했어요⁠.⁠”

김도훈이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김도훈이 문에 손을 대고 닫히지 않게 잡았다⁠.

“⁠법적으로는⁠…⁠…⁠.⁠”

김도훈은 말을 멈췄다⁠. 고개를 한 번 젓고⁠, 다시 시작했다⁠.

“⁠법은 누가 먼저였는지도 들었습니다⁠. 저는 그거면 됩니다⁠. 잘 그리십시오⁠.⁠”

김도훈이 엘리베이터에 탔다⁠. 문이 닫혔다⁠. 딱⁠, 따각이 안에서 한 번 울리고 끊겼다⁠. 복도 오른쪽 끝에서 영희 사장님이 「⁠아이고⁠」 하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은비는 울었고⁠, 박수진 작가는 은비에게 휴지를 건네다가 자기 눈부터 닦았다⁠. 지혜가 내 백팩 어깨끈을 당겨 바로 해 주었다⁠.

“⁠벌금은 나눠 낼 수 있어⁠. 이수명령은 보호관찰소에서 연락 와⁠. 마흔 시간이면 일주일에 네 시간씩 열 주⁠.⁠”

“⁠변호사비는⁠?⁠”

“⁠국선이야⁠. 영 원⁠. 고소 대리도 영 원⁠. 대신 너 나중에 내 사무실 간판 그려 줘⁠. 아크릴 명패 테이프 감은 거 창피해⁠.⁠”

*

12월 26일 토요일부터 30일 수요일까지 나는 마흔한 컷을 다시 그렸다⁠. 작업실 수박밭 창가 자리였다⁠. 작가님이 근로계약서를 먼저 내밀었고⁠, 나는 서명했다⁠. 서명 칸 옆에 수박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1회 첫 컷⁠. 감나무 두 그루⁠, 전봇대⁠, 소실점이 하나로 모이는 골목⁠. 은비가 지운 자리에 보도블록 줄눈만 남아 있었다⁠. 줄눈 위에 회색 후드를 그렸다⁠. 반쯤 숨은 몸이 아니라 골목 한가운데를 걷는 몸⁠. 검은 백팩⁠, 턱까지 내린 마스크⁠, 정수리에 틀어 올린 머리⁠. 오른발 끝을 안으로 조금 모았다⁠. 오른손 손날에 연필 자국을 손톱만 하게 넣었다⁠. 마흔한 번째 컷을 넘긴 것은 30일 밤 열한 시 오 분이었다⁠. 은비가 채색을 마치고 단톡방에 올렸다⁠. 나는 다시 수박밭 단톡방에 있었다⁠.

「⁠은비⁠: 언니 마흔한 컷 다 언니예요ㅋㅋㅋ 독자들이 출근녀래요⁠」

「⁠수박씨⁠: 컷 수 맞음⁠. 수고함⁠」

*

12월 31일 목요일 아침 일곱 시 오십 분⁠, 나는 블라인드 줄을 잡았다⁠. 4월 9일 새벽에 내린 뒤로 한 번도 끝까지 올린 적 없는 줄이었다⁠. 당기자 날개가 하나씩 접히며 위로 올라갔다⁠. 드르륵 소리가 방 안에 크게 났다⁠. 겨울 아침 햇빛이 창가 책상과 라이트 패드와 새 스케치북 위로 한꺼번에 들어왔다⁠. 새 스케치북은 흰 표지였다⁠. 표지 모서리에 연필로 「⁠2026⁠. 12 ~⁠」라고 적었다⁠.

길 건너 뽀송 빨래방 유리문 안에서 1번 세탁기가 돌고 있었다⁠. 정만수 사장님이 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가로등 밑은 비어 있었다⁠. 나는 창을 한 번 열었다가 닫고⁠, 스케치북과 연필 한 자루를 백팩에 넣고 계단을 내려갔다⁠. 현관 번호판을 닦지 않았다⁠. 3층 복도 끝은 한 번 보았다⁠. 한 번만 보았다⁠.

여덟 시 사 분⁠, 골목 바닥 보도블록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차가웠다⁠. 전봇대에 등을 기댔다⁠. 숨는 자리가 아니라 앉는 자리로 쓰는 전봇대는 처음이었다⁠. 감나무 가지에 덜 딴 감 두 개가 얼어 있었다⁠. 망원역으로 가는 사람들이 골목을 지나갔다⁠. 운동화⁠, 구두⁠, 털신⁠. 나는 발을 그리지 않았다⁠. 여덟 시 십이 분이 되어도 남색 정장은 지나가지 않았다⁠. 감나무빌라에서 시장 뒤로 칠 분을 더 돌아가는 길은 이 골목에서 보이지 않았다⁠.

여덟 시 십이 분⁠, 골목 끝 집 대문이 열렸다⁠. 영희 사장님이 빨간 고무장화를 신고 장바구니 끌개를 끌며 나왔다⁠. 앞치마를 벌써 두르고 있었다⁠. 시장 문 열러 가는 시각이었다⁠. 사장님이 바닥에 앉은 나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얘⁠, 거기서 뭐 해⁠? 엉덩이 얼어⁠.⁠”

“⁠사장님⁠.⁠”

“⁠왜⁠?⁠”

“⁠그려도 돼요⁠?⁠”

“⁠뭘⁠?⁠”

“⁠사장님이요⁠. 지금 걸어가시는 거⁠.⁠”

사장님은 고무장화 한 짝을 들었다 놓았다⁠. 장화 바닥에 붙은 눈이 보도블록에 떨어졌다⁠.

“⁠얘⁠, 그런 걸 왜 물어⁠? 그냥 그려⁠.⁠”

“⁠물어보고 그리려고요⁠. 이제부터는요⁠.⁠”

사장님은 나를 오래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장바구니 끌개 손잡이를 고쳐 잡고 목소리를 시장 끝까지 보낼 것처럼 키웠다⁠.

“⁠그럼 얼굴은 예쁘게⁠, 발은 작게⁠.⁠”

사장님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장바구니 끌개 바퀴가 보도블록 줄눈마다 덜컹거렸다⁠. 나는 스케치북을 무릎에 펴고 연필을 쥐었다⁠. 손날이 흰 종이에 닿았다⁠. 회색 자국이 묻었다⁠. 나는 빨간 고무장화부터 그렸다⁠. 작게⁠.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작가를 구독하면 다음 화가 올라올 때 알려 드립니다.

15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선고 · 스토커를 스토킹했다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