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020자) · 대회의실

긴급

소리 수집가 · 문가온

토요일 오전 열 시, 금곡동. 서정우 씨는 과일 상자째 테이프를 내주었다. 상자에는 테이프가 하나 더 있었다. 라벨 없는 것. 서정우 씨도 그게 뭔지 모른다고 했다. 이십이 년 동안 한 번도 안 틀어 봤다고. 틀 기계가 없어서.

팀장님이 상자를 받아 들었다. 트렁크에 실으려다 말고 뒷좌석에 놓았다. 트렁크는 덜컹거린다고. 이십이 년 된 테이프한테 덜컹은 나쁘다고. 그러고는 안전벨트를 상자에 걸어 주었다. 서정우 씨는 대문 앞에 서서 우리 차가 골목을 빠져나갈 때까지 봤다. 초록 대문 밑으로 파란색이 비쳤다.

“비디오 플레이어는 월요일 저녁에.”

팀장님이 운전하면서 말했다.

“테이프가 이십이 년 됐어. 다락에서. 여름을 스물두 번 났어. 늘어났을 수도 있어. 헤드 청소부터 해야 돼. 한 번 틀면 끊길 수도 있고. 한 번에 들어야 돼.”

“한 번이면 돼요.”

나는 몸을 돌려 뒷좌석 상자에 손을 얹었다. 안전벨트를 맨 상자. 팀장님은 백미러로 그걸 보고 아무 말도 안 했다. 골판지가 차 진동을 받아 떨었다. 그 안의 테이프도 같이 떨었을 것이다.

일요일 밤, 상자는 내 방 책상 위에 있었다. 나는 테이프를 꺼내지 않았다. 케이스만 손바닥에 올려 보았다. 오래된 플라스틱 냄새가 났다. 다락의 열기가 아직 배어 있는 것 같았다. 케이스를 흔들어 보았다. 안에서 릴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달그락. 그 작은 떨림이 손바닥에 왔다. 이 안에 이 분 사십 초가 감겨 있다. 계산도 합성도 아닌 이 분 사십 초. 나는 케이스를 베개 옆에 두고 왼쪽으로 누웠다. 세상이 다 꺼졌다. 케이스 모서리가 뺨에 닿았다.

월요일 아침, 테이프를 들을 시간은 오지 않았다.

아홉 시에 전 직원 메일이 왔다. 열 시 대회의실. 제목에 긴급이라고 붙어 있었다. 대표는 긴급이라는 말을 한 번도 쓴 적이 없었다. 기적이라는 말은 자주 썼다.

대회의실 슬라이드 첫 장은 까맸다. 글자가 없었다. 우리는 사라진 것을 계산합니다, 그 문장이 없는 첫 장은 십사 년 만이라고 옆자리 선배가 속삭였다. 대표는 그 앞에 서 있었다. 흰 운동화. 재킷은 없었다. 직원 스물둘이 앉았다. 은하준 씨는 맨 끝자리에 앉아서 휴대폰을 탁자 밑으로 쥐고 있었다. 정다혜 씨는 대표 바로 옆자리. 오세훈 씨는 창가. 팀장님은 문 옆에 서 있었다. 앉지 않고. 헤드폰을 목에 걸고.

“지난 금요일, 개인정보보호위원회에서 우리 회사 앞으로 자료 보전 요청이 왔습니다.”

대표가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설교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우리 내부 자료가 밖으로 나갔습니다. 추억 자료 목록, 발송 기록, 개발 기록. 계약서 칠 조 위반입니다. 영업 비밀 유출이고요. 누가 했는지 저는 압니다.”

스물둘의 눈이 흩어졌다. 창밖으로, 탁자 위로, 서로에게로. 그러다 한 사람에게 모였다. 나에게.

“서주 씨.”

나는 일어섰다. 의자가 바닥을 긁었다. 대회의실은 잔향이 길다. 그 긁는 소리가 벽에 부딪혀 세 번 돌아왔다.

“네. 제가 냈습니다.”

대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서주 씨는 오늘부로 직무 정지입니다. 회사는 형사 고소를 검토하겠습니다. 서주 씨가 낸 자료는 맥락이 없는 조각입니다. 우리가 한 일은 복원 품질 향상입니다. 고객 동의를 받았고, 고객은 만족했습니다. 구백열두 통의 감사 답장이 있어요. 불만은 한 건도 없습니다.”

“한 건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서정우 씨가 금요일 청음실에서 취소했습니다. 아들 영상 열한 개를 원본으로 돌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건 개인적인 슬픔 때문이고요.”

“슬퍼서 오는 분들이라면서요. 대표님이.”

대표가 나를 봤다. 그러고는 슬라이드를 넘겼다. 까만 화면에 글자가 떴다. 내가 낸 자료 목록이었다. 스물세 개. 대표는 그 목록을 하나씩 짚어 가며 말하려 했다. 이건 이런 맥락, 저건 저런 맥락. 스물세 개 가운데 셋째 줄에서 문 쪽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 목록에 하나 빠졌어요.”

팀장님이었다. 문 옆에 선 채로.

“이천이십일 년 십일월 이십팔일 대표님이 저한테 보낸 메일. 제목, 이거 자동으로 만들 수 있나. 본문, 오늘 그 부인 우는 거 봤지. 이게 우리 미래야. 한 팀장 걸음처럼, 의뢰인 얘기로 목소리 조금씩 넣는 거. 개발 쪽에 물어봐 줘.”

팀장님은 휴대폰을 보지 않고 외웠다. 오 년 동안 몇 번을 읽었는지 알 수 있었다.

“서주 씨는 이 메일을 모릅니다. 제가 안 줬어요. 금요일 제출분에도 없어요. 오늘 오후에 제가 위원회에 따로 냅니다. 제 이름으로.”

“한 팀장님.”

대표가 불렀다. 처음으로 이름 뒤에 님을 붙였다.

“그 메일은 한 팀장님이 먼저 조작한 걸 제가 본 뒤예요. 복도 발소리. 한 팀장님이 병원 가서 걸어서 넣은 거. 그걸 위원회에 내면 한 팀장님이 제일 먼저 다쳐요.”

“압니다.”

팀장님이 헤드폰을 목에서 벗었다. 스물둘 앞에서. 네 번째였다. 헤드폰을 문 옆 선반에 내려놓았다.

“다들 들어요. 이천이십일 년 병원 복도 발소리는 계산이 아닙니다. 제가 새벽 세 시에 그 복도를 걸었습니다. 세 번. 녹음해서 넣었습니다. 의뢰인은 남편 걸음인 줄 알았습니다.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그게 이 회사 첫 번째 보정입니다. 대표님은 그걸 보고 기계로 만들었고, 기계는 지난 넉 달 동안 천사백 번 가까이 걸었습니다. 처음 걸은 사람은 저예요.”

대회의실이 오래 조용했다. 에어컨 소리만 났다. 스물두 명이 숨을 쉬는 소리. 나는 탁자에 손바닥을 댔다. 긴 원목 탁자. 스물두 명이 탁자에 팔을 올려놓고 있었다. 그 팔들의 떨림이 탁자를 타고 내 손바닥으로 왔다. 누군가는 빠르게, 누군가는 느리게. 누군가의 다리가 탁자 밑에서 계속 떨고 있었다.

정다혜 씨가 일어섰다.

“면담 질문지.”

정다혜 씨가 말했다. 목소리가 작았다. 영업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고인의 버릇, 자주 쓰던 말, 목소리 높낮이, 기침 같은 거. 그 항목을 이월에 제가 넣었어요. 대표님 지시로. 저는 그게 뭐에 쓰이는지 알았어요. 알면서 물었어요. 고객님들이 그 질문에 대답하면서 울었어요. 저는 그 울음을 녹음했어요. 그것도 학습 자료로 들어갔어요.”

정다혜 씨는 그 말을 하고 앉았다. 아무도 보지 않았다.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

은하준 씨가 휴대폰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화면이 켜져 있었다. 위원회 접수증 사진.

“저 커밋 기록 냈어요. post_e. 제 이름으로 짰어요. 저도 같이 냈어요. 연구원님 혼자 낸 거 아니에요.”

영업팀 막내가 손을 들었다. 입사 여섯 달. 목소리가 떨렸다.

“그럼 저희가 받은 감사 메일은요? 저 그거 매일 아침 읽었어요. 힘들 때마다. 그것도 가짜예요?”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나도 못 했다. 메일은 진짜였다. 고마워한 마음도 진짜였다. 가짜는 그 마음이 향한 곳이었다.

오세훈 씨는 창가에서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창밖만 봤다. 그 사람 외장 하드가 어디 있는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대표가 리모컨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까만 슬라이드가 그대로였다. 대표는 한참 그 슬라이드를 봤다. 그러다 우리를 봤다. 스물두 명.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그런데 맑지 않았다. 갈라져 있었다.

“여러분, 올해 적자가 십육억이에요. 재회 패키지 없으면 이 회사 연말에 문 닫아요. 여러분 월급, 대출, 다 날아가요. 천삼백팔십 명이 고맙다고 했어요. 그 사람들한테서 그 목소리를 뺏을 거예요? 누구 좋으라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맞는 말이었으니까. 틀린 데가 없었다. 나는 탁자에서 손을 떼고 말했다.

“뺏지 않습니다. 묻겠습니다.”

대표가 나를 봤다.

“천삼백팔십 명한테 전화하겠습니다. 한 사람씩. 당신이 받은 두 음절은 계산이 아니라 합성이다. 어디서 왔고 누구 목소리로 만들었는지 말씀드리겠다. 지울지, 남길지, 원본 자료만 돌려받을지 정해 달라. 고맙다는 말은 그다음에 해 달라. 그 말이 누구한테 가야 하는지 알고 나서.”

“서주 씨는 직무 정지예요.”

“그럼 퇴근하고 하겠습니다. 제 휴대폰으로.”

대표는 한참 나를 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 사람이 말을 고르는 걸 나는 처음 봤다. 회의 때마다 슬라이드 첫 장의 문장을 외워서 말하던 사람이었다. 오늘은 외워 온 문장이 없었다.

회의는 그걸로 끝났다. 대표가 먼저 나갔다. 흰 운동화가 복도를 걸어가는 소리가 대회의실까지 들렸다. 발소리가 빨랐다. 뒤꿈치를 끌지 않았다.

계단 쪽에서 난간을 짚고 올라가는 소리가 났다. 사 층으로. 조금 뒤 계단 난간이 낮게 떨기 시작했다. 대표실 스피커. 여자 목소리. 노인. 아이고 우리 강아지 왔어. 대표는 혼자 그걸 틀고 있었다. 은하준 씨 할머니 목소리를. 몇 번이고. 나는 대회의실 문간에서 난간에 손을 대고 그 떨림을 들었다. 말끝이 매끈했다. 매번 똑같이 매끈했다.

사람들이 하나둘 나갔다. 백소윤 씨가 내 옆을 지나다 멈췄다. 휴대폰을 꺼내 보여 주었다. 메모장.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할머니 부엌 고객, 폐교 음악실 고객. 스무 명.

“제 담당이었던 분들이요. 제가 전화할게요. 연구원님 혼자 천삼백팔십 통은 못 해요.”

그날 오후 복원팀 여섯 명 가운데 다섯 명이 나한테 메모를 보냈다. 이름 목록. 자기가 전화하겠다는. 여섯 번째는 팀장님이었다. 팀장님은 메모 대신 헤드폰을 내 책상에 올려놓았다.

“이거 쓰고 해. 전화 오래 하면 귀 아파. 서주 씨는 한쪽밖에 없잖아.”

팀장님은 그러고는 가방을 들고 나갔다. 위원회로. 자기 이름으로 메일을 내러. 나는 헤드폰을 들어 보았다. 무거웠다. 쇠 머리띠에 팀장님 머리 온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오 년 동안 목에 걸려 있던 무게. 이어패드가 한쪽만 닳아 있었다. 왼쪽. 팀장님도 한쪽으로 들어 왔던 것이다.

퇴근 무렵 영업팀 창가에서 메일이 한 통 왔다. 정다혜 씨. 첨부 파일 하나. 천삼백팔십 명의 면담 녹취 목록과 연락처. 본문은 한 줄이었다. 제가 물은 사람들이니까 제가 먼저 걸게요. 은하준 씨는 메일 대신 탕비실에서 내 컵에 커피를 타 주었다. 뜨겁지 않게. 손등에 흘리지 않고.

찾아낸 목소리의 주인, 천삼백팔십. 그날 저녁 그 수 옆에 다른 수가 하나 생겼다. 전화하겠다고 손을 든 사람. 여섯. 은하준 씨와 정다혜 씨를 더해 여덟.

8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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