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331자)

같은 진술서

싱글대디와 어린이집 선생님 · 탁은담

목요일 열두 시 반⁠, 표다엘은 호수대학병원 구내식당 창가 자리에서 변호사의 메모를 읽으며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아침에 응대한 미국인 환자가 물었다⁠. 한국 병원에서는 왜 다들 빨리⁠, 빨리라고 하느냐고⁠. 다엘은 웃으며 대답했다⁠. 여기서는 빨리가 안녕하세요예요⁠. 환자는 다엘에게 고맙다며 빨리⁠, 빨리라고 인사하고 갔다⁠.

변호사의 메모에는 진술서에 받아야 할 항목이 번호를 달고 늘어서 있었다⁠. 하원 지연 날짜⁠. 낮잠 시간 외 졸음⁠. 병원 예약 불이행⁠. 보호자의 부상 징후⁠. 그리고 맨 끝에 「⁠담임과 부 사이의 정서적 친밀도⁠」

“⁠마지막 거는 빼 주세요⁠.⁠”

맞은편에서 돈가스를 썰던 변호사가 칼을 멈췄다⁠.

“⁠어머님⁠, 마지막 게 제일 셉니다⁠.⁠”

“⁠세니까 빼 달라는 거예요⁠. 우리 애 담임한테 우리 애 아빠를 얼마나 좋아하느냐고 묻는 진술서를 어떻게 내밀어요⁠.⁠”

“⁠담임이 안 써 주면 우리가 쓸 게 없어요⁠.⁠”

다엘은 휴대전화를 열어 은행 앱의 이체 내역을 내렸다⁠. 삼 년 동안 매달 같은 날 같은 이름으로 보낸 돈이 화면을 끝없이 채웠다⁠. 받는 사람은 고해준이었다⁠. 내리고 내려도 끝나지 않았다⁠. 다엘은 시애틀 요양병원의 밤 근무 수당으로 결혼 때 같이 진 빚을 갚았고⁠, 남는 것을 이 이름으로 보냈다⁠. 해준은 끝내 빚을 모른 척해 주었다⁠. 고맙다는 말을 해 본 적은 없었다⁠.

“⁠변호사님⁠, 저는 그 사람이 나쁜 아빠라고 쓰고 싶은 게 아니에요⁠. 내가 이제 화면 밖에 있다고 쓰고 싶은 거예요⁠.⁠”

“⁠그 말은 진술서로 못 받습니다⁠. 그건 어머님이 판사 앞에서 하셔야 해요⁠.⁠”

변호사가 돈가스를 다시 썰었다⁠. 다엘은 식은 국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짰다⁠. 어머니가 끓였으면 덜 짰을 것이고⁠, 어머니가 끓인 국을 아이에게 먹이고 싶어서 다엘은 비행기를 탔다⁠.

*

금요일 오후 네 시⁠, 고해준은 시청 일층 무료 법률 상담실 앞 대기 의자에 마봉칠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 봉칠은 오후 배송을 한 시간 당겨 끝내고 해준을 태워 왔다⁠. 대기 의자 맞은편에 「⁠상담 시간 이십 분⁠」이 붙어 있었다⁠.

“⁠해준아⁠, 나도 물어볼 거 하나 있다⁠.⁠”

“⁠형님 무슨 일 있어요⁠?⁠”

“⁠편의점 알바가 나보고 영포티라고 한 거⁠, 그거 명예훼손 되냐⁠?⁠”

“⁠형님⁠, 그거 사실 적시예요⁠.⁠”

봉칠이 해준의 어깨를 쳤다⁠. 허리가 울려 해준이 숨을 삼켰고⁠, 봉칠은 쳤던 손으로 해준의 등을 문질렀다⁠.

상담 변호사는 서른 살쯤 되어 보였고⁠, 상담 사이사이 김밥 한 알씩을 입에 넣었다⁠. 해준이 내민 서류를 빠르게 넘기다가 갑 제4호증 사진에서 김밥을 씹는 속도가 느려졌다⁠.

“⁠아버님⁠, 이 선생님 진술서 하나면 판이 달라져요⁠. 애가 일곱 시 십사 분마다 유리문에 이마 대고 기다린다⁠, 아빠가 한 번도 안 늦었다⁠, 그런 거⁠. 판사들은 그런 문장 읽으면 서류를 다시 앞으로 넘겨요⁠.⁠”

“⁠선생님한테 부탁 못 해요⁠. 서약서 썼어요⁠. 개인 연락 금지⁠.⁠”

“⁠서약서는 개인 연락 금지지 법원 서류 부탁 금지가 아니에요⁠. 공문 형식으로 어린이집 통해서 요청하시면 돼요⁠.⁠”

“⁠그 사람이 우리 편으로 쓰면 또 찍혀요⁠. 아빠랑 친한 선생이 아빠 편 들었다고⁠.⁠”

변호사는 김밥을 삼키고 해준을 오래 보았다⁠. 해준은 「⁠그 사람⁠」이라는 말이 입에서 먼저 나간 것을 알아차렸다⁠. 변호사도 알아차렸다⁠.

변호사가 김밥 한 알을 집어 해준 쪽으로 내밀었다⁠.

“⁠드실래요⁠? 상담 시간 이십 분에 밥 먹을 시간이 없어서요⁠.⁠”

“⁠괜찮습니다⁠.⁠”

“⁠아버님 얼굴이 김밥보다 말랐어요⁠. 이혼 사건 아버님들은 다 김밥보다 말라서 오세요⁠.⁠”

해준은 김밥을 받아먹었다⁠. 단무지가 질겼다⁠. 변호사는 해준이 다 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었다⁠.

“⁠아버님⁠, 하나만 여쭤볼게요⁠. 상대방이 그 부분 파고들면 아버님 대답 준비돼 있으세요⁠?⁠”

“⁠무슨 부분이요⁠.⁠”

“⁠아버님이 지금 그 사람이라고 부르신 부분이요⁠.⁠”

해준은 대답 대신 서류를 챙겼다⁠. 상담실을 나오자 봉칠이 대기 의자에서 일어나 물었다⁠. 명예훼손 되냐고 물어봤냐고⁠. 해준은 고개를 저었다⁠. 봉칠은 실망했고⁠, 실망한 김에 해준의 서류 봉투를 대신 들어 주었다⁠.

*

금요일 밤 열한 시⁠, 남궁기윤은 원룸 책상 위에 관찰 기록 사본과 진술서 양식 두 장을 나란히 놓았다⁠. 하나는 다엘이 셔츠 주머니에 꽂아 준 것이었고⁠, 하나는 원장을 통해 공문으로 온 해준 측 요청이었다⁠. 양식은 같았다⁠. 위쪽에 사건번호가 있었고⁠, 아래쪽에 서명 칸이 있었다⁠. 기윤은 한 장을 서랍에 넣었다⁠. 두 장을 쓰면 두 개의 진술이 되었다⁠.

관찰 기록을 처음부터 넘겼다⁠. 기윤은 사실만 골랐다⁠.

아버님은 넉 달 동안 하원 시각에 늦은 적이 없다⁠. 일곱 시 십일 분에서 십사 분 사이에 온다⁠. 아동은 일곱 시 십사 분이면 운동화를 신고 현관 유리문에 이마를 댄다⁠. 아동은 운동화 매듭을 아버지가 지어 줘야 집에 간다⁠.

아동은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 두 시쯤 자주 존다⁠.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덜 존다⁠. 기윤은 이 줄을 쓰다가 펜을 내려놓았다⁠. 화요일과 목요일은 해준이 새벽 배송을 한 다음 날이었다⁠. 기윤은 날짜를 대조하지 않고도 알았다⁠. 펜을 다시 들었다⁠.

2월에 아동의 중이염 재진 예약 두 번이 지켜지지 않았다⁠. 담임이 알림장으로 두 번 안내했다⁠. 세 번째에 아버님이 오전 배송을 빼고 데려갔다⁠.

아동은 엄마를 화면 속 사람이라고 부른다⁠. 엄마가 잘 때 깨우면 안 된다고 낮에 조용히 논다⁠. 엄마가 귀국한 뒤로 그림 속 집에 사람이 하나 늘었다⁠.

기윤은 오늘의 한 줄은 쓰지 않았다⁠. 숲⁠, 지렁이⁠, 눈이 두 번 사는 집⁠. 현관에서 한 말들은 서류로 옮기면 다른 말이 되었다⁠.

마지막 장 서명 칸 위에 빈 줄이 넉넉하게 남아 있었다⁠. 기윤은 한참 빈 줄을 보다가 펜으로 한 줄을 썼다⁠. 쓰고 나서 지우지 않았다⁠. 출력하고 서명하고⁠, 같은 종이를 두 부 더 복사해 봉투 두 개에 넣었다⁠. 봉투 겉에는 아무 이름도 쓰지 않았다⁠.

원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진술서 두 부 같은 것으로 썼습니다⁠. 두 분께 같은 자리에서 같이 드리고 싶습니다⁠.⁠」 답장은 밤 열한 시 사십 분에 왔다⁠. 「⁠공원 벤치⁠. 토요일 열 시⁠. 둘 다 오면 개인 연락 아니고 공개예요⁠. 나도 멀리서 봐요⁠.⁠」

*

토요일 아침 아홉 시⁠, 해준은 빌라 공동 현관 앞에서 솔찬의 배낭을 다엘에게 넘겼다⁠. 배낭은 지퍼가 다 닫히지 않았다⁠. 솔찬은 엄마 집 가는 날을 화면 밖 날이라고 불렀고⁠, 화면 밖 날에 데려갈 공룡을 열여덟 마리 골랐다⁠. 다엘은 배낭의 무게에 놀라 한쪽 어깨가 내려갔다⁠.

“⁠이게 다 뭐야⁠.⁠”

“⁠공룡들도 엄마 집 구경해야 돼⁠.⁠”

솔찬이 진지하게 말했고⁠, 다엘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길가에 세워 둔 다엘의 차에서 경적이 짧게 두 번 울렸다⁠. 운전석에 앉은 외할머니가 창문을 내리고 손목시계를 두드렸다⁠. 해준은 외할머니를 향해 고개를 숙였고⁠, 외할머니는 보지 못한 척 창문을 올렸다⁠.

다엘이 솔찬을 카시트에 앉히고 돌아와 해준 앞에 멈췄다⁠. 목소리를 낮췄다⁠.

“⁠원장님이 전화했어⁠. 열 시에 공원⁠. 선생님이 진술서를 둘한테 같이 준대⁠.⁠”

“⁠나도 들었어⁠.⁠”

“⁠너는 선생님이 뭐라고 썼을 것 같아⁠?⁠”

“⁠우리 애 얘기⁠.⁠”

“⁠그거 말고⁠.⁠”

해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엘은 대답하지 않는 해준을 잠깐 보다가 차로 걸어갔다⁠. 출발하기 전에 뒷좌석 창문이 내려가고 솔찬의 손바닥 하나가 창틀에 붙었다⁠. 해준은 손바닥이 골목 끝에서 사라질 때까지 공동 현관 앞에 서 있었다⁠.

*

토요일 열 시⁠, 해준은 어린이집 뒤 공원 벤치에 혼자 앉아 있었다⁠. 솔찬은 지금쯤 호수공원 오리들에게 공룡 열여덟 마리를 소개하고 있을 것이었다⁠. 공원 저편 운동기구에서 어르신 둘이 허리 돌리기를 하고 있었다⁠. 해준은 허리 돌리기 기구에 올라가 보고 싶었지만⁠, 지금 허리로 올라가면 내려올 때는 구급차가 필요했다⁠.

기윤이 운동화에 회색 후드티 차림으로 걸어왔다⁠. 앞치마가 없으니 이름표도 없었다⁠. 해준은 이름표가 없는 기윤을 넉 달 만에 처음 보았다⁠. 3월 12일 밤에는 해준이 일을 나가느라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어머님은 차가 막힌대요⁠. 십 분 늦으신대요⁠.⁠”

“⁠그럼 십 분 동안 우리 개인 연락 중이에요⁠?⁠”

“⁠원장님이 저기 계세요⁠.⁠”

기윤이 턱으로 공원 입구를 가리켰다⁠. 원장 엄미금이 운동복 차림으로 정자 그늘에 서서 스트레칭을 하는 척하고 있었다⁠. 원장은 왼팔을 오른쪽으로 당기면서 고개는 벤치 쪽으로 돌려 두었다⁠.

해준이 웃음을 터뜨렸다가 허리를 잡았다⁠. 기윤은 벤치 끝에 앉았다⁠. 둘 사이에 사람 하나가 앉을 자리가 비었다⁠.

“⁠쓰지 마요⁠.⁠”

“⁠이미 썼어요⁠.⁠”

“⁠선생님 다쳐요⁠. 어느 쪽으로 써도⁠.⁠”

“⁠그래서 아무 편으로도 안 썼어요⁠.⁠”

“⁠나 우리 편으로 써 달라는 말 못 해요⁠. 상담실 변호사가 해 보라고 했는데 못 해요⁠.⁠”

“⁠알아요⁠. 그 말 하는 얼굴이 어떤지도 알아요⁠. 지금 그 얼굴이에요⁠.⁠”

해준은 고개를 돌렸다⁠. 운동기구 위의 어르신 하나가 허리 돌리기를 멈추고 이쪽을 보다가 다시 돌렸다⁠. 해준은 공원의 모든 사람이 단톡방에 들어 있는 것처럼 느꼈다⁠.

구두 소리가 났다⁠. 다엘이 솔찬을 외할머니에게 맡기고 왔다며 숨을 고르며 벤치 앞에 멈췄다⁠. 다엘은 벤치의 빈자리를 보고 앉지 않았다⁠.

기윤이 봉투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해준에게⁠, 하나는 다엘에게⁠. 똑같은 흰 봉투였다⁠.

“⁠같은 내용입니다⁠. 법원에는 제가 직접 내겠습니다⁠. 두 분이 먼저 읽으시라고 드려요⁠.⁠”

해준과 다엘은 동시에 봉투를 열었다⁠. 해준은 첫 장에서 손이 멈췄다⁠.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 두 시⁠. 중이염 재진 예약 두 번⁠. 해준은 두 줄을 두 번씩 읽었다⁠. 기윤은 해준이 읽는 자리를 보지 않고도 알았다⁠.

“⁠선생님 눈에도 내가 모자란 아빠였네요⁠.⁠”

“⁠제 눈에는 화요일 목요일에 피곤한 아빠였어요⁠. 그건 모자란 거랑 달라요⁠.⁠”

다엘은 둘째 장에서 손이 멈췄다⁠. 아동은 일곱 시 십사 분이면 운동화를 신고 현관 유리문에 이마를 댄다⁠. 다엘은 진술서를 무릎 위에 내려놓고 공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자 그늘의 원장이 오른팔을 왼쪽으로 당기다가 멈추었다⁠.

해준이 마지막 장을 넘겼다⁠. 다엘도 넘겼다⁠. 서명 칸 위에 기윤의 손글씨가 있었다⁠. 인쇄한 글자들 사이에서 손으로 쓴 줄은 조금 기울어 있었다⁠.

「⁠진술인은 고해준 씨에게 사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 진술은 이 마음을 밝힌 상태에서 썼습니다⁠.⁠」

해준이 고개를 들었다⁠. 다엘도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기윤을 보았고⁠, 기윤은 벤치 끝에서 운동화 끈을 내려다보았다⁠. 끈이 풀려 있었다⁠.

“⁠숨겨 두면 남이 꺼내서 무기로 써요⁠. 제가 먼저 꺼내 놓으면 그냥 사실이에요⁠.⁠”

다엘이 진술서를 봉투에 도로 넣었다⁠. 넣는 손이 느렸다⁠.

“⁠선생님⁠, 이거 법원에 내면 담임 다시는 못 하세요⁠.⁠”

“⁠네⁠.⁠”

해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해준의 무릎 위에서 진술서 마지막 장이 바람에 들렸다가 내려앉았다⁠. 기윤이 몸을 숙여 자기 운동화 끈을 묶었다⁠. 매듭을 한 번 감고⁠, 한 번 더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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