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360자)

작은 의자

싱글대디와 어린이집 선생님 · 탁은담

4월 21일 수요일 일곱 시 십사 분⁠, 고해준은 현관 계단 맨 아래 칸에서 처음으로 옆자리를 내주었다⁠. 표다엘이 회사에서 바로 왔다며 정장 차림으로 계단을 올라왔다⁠. 하원 보호자가 둘이 된 첫날이었다⁠. 유리문 안쪽에서 솔찬이 이마를 댄 채 눈을 크게 떴다⁠. 이마 자국 옆으로 손바닥 둘이 붙는 대신 손가락 하나가 해준을⁠, 다른 손가락 하나가 다엘을 가리켰다⁠.

새 담임이 문을 열고 노란 가방과 노란 모자를 양손에 들었다⁠. 담임은 어느 손을 누구에게 내밀어야 할지 몰라 두 손을 다 든 채 멈췄다⁠. 솔찬이 신발장 앞에서 결정했다⁠.

“⁠가방은 아빠⁠. 모자는 엄마⁠.⁠”

“⁠왜⁠?⁠”

다엘이 물었다⁠. 솔찬은 운동화 끈을 풀면서 진지하게 대답했다⁠.

“⁠엄마는 처음이니까 가벼운 거⁠.⁠”

다엘이 모자를 받아 들고 한참 들여다보았다⁠. 모자 안쪽에 해준의 글씨로 「⁠고솔찬⁠」이 써 있었다⁠. 담임이 오늘은 회의 동안 아이를 연장반에서 맡아 준다고 하자 솔찬은 운동화를 도로 벗고 들어갔다⁠. 끈은 풀린 채였다⁠.

계단에 어른 둘이 남았다⁠. 해준이 먼저 물었다⁠.

“⁠회의 와서 뭐라고 할 건데⁠?⁠”

“⁠사실⁠. 너는⁠?⁠”

“⁠몰라⁠.⁠”

“⁠너는 늘 몰라서 손해 봐⁠.⁠”

다엘이 모자를 핸드백에 넣었다가 도로 꺼내 손에 들었다⁠. 해준은 핸드백에 들어갔다 나온 모자를 보았다⁠. 다엘도 모자를 어디에 둬야 하는지 몰랐다⁠.

*

같은 날 일곱 시 이십오 분⁠, 추아란은 강당 바닥에 어린이 의자를 둥글게 펼치다가 의자 높이가 자기 정강이에도 못 미친다는 것을 깨달았다⁠. 볕뜰어린이집 강당에 어른 의자는 원장 의자 하나뿐이었다⁠. 아란은 원장에게 어른 의자를 빌려 올 데가 있느냐고 물었고⁠, 원장 엄미금은 경로당에 전화했다가 이미 문을 닫았다는 대답을 들었다⁠.

“⁠작은 의자에 앉으면 다들 말을 좀 작게 할 거예요⁠.⁠”

원장의 말은 반만 맞았다⁠. 일곱 시 반이 되자 학부모 열넷이 들어와 작은 의자에 앉았고⁠, 앉는 순간 무릎이 턱 밑까지 올라왔다⁠. 밤톨이엄마는 무릎을 모으고 앉아 서명지를 무릎 위에 올렸다⁠. 예찬이아빠는 아기띠에 둘째를 매단 채 들어와 의자 앞에서 한참 망설이다가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아란과 눈이 마주치자 남편이 입 모양으로 말했다⁠. 오리는 진짜 실수였어⁠.

외할머니는 떡 상자를 들고 왔다⁠. 상자 뚜껑에 매직으로 「⁠4/21 솔찬이 외할머니⁠」라고 써 있었다⁠. 외할머니는 의자 사이를 돌며 꿀떡을 하나씩 나눠 주었다⁠. 받은 사람들은 떡을 손에 든 채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마지막으로 해준과 다엘이 거의 같은 시각에 강당 문을 열었다⁠. 남은 의자는 둘이었고⁠, 둘은 나란히 붙어 있었다⁠. 해준이 의자 하나를 조금 떨어뜨리려고 끌자 의자 다리가 마룻바닥을 긁으며 끼익 소리를 냈다⁠. 강당 안의 열네 명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해준은 의자를 제자리에 두고 앉았다⁠. 다엘도 앉았다⁠. 작은 의자 둘에 어른 둘이 무릎을 세우고 앉으니 이혼 조정실보다 가까웠다⁠.

아이들은 연장반에서 보조교사와 함께 그림책을 보고 있었다⁠. 강당까지 복도 두 개를 지나야 했다⁠. 아란은 출입문을 닫고 반대표 수첩을 펼쳤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안건은 하나예요⁠. 연장보육 담당 교사 교체 요청⁠.⁠”

*

남궁기윤은 앞치마를 벗은 채 강당 앞에 섰다⁠. 의자에 앉지 않았다⁠. 앉으면 무릎이 올라와 턱을 받치게 될 것이고⁠, 턱을 받친 채로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기윤은 열일곱 사람의 무릎을 보았다⁠. 무릎 위에 놓인 꿀떡과 서명지와 휴대전화와 아기띠 끈⁠. 아이들이 앉던 의자에 어른들이 앉으니 어른들이 조금씩 아이처럼 보였고⁠, 아이처럼 보이는 어른들이 제일 겁을 냈다⁠.

“⁠해바라기반 담임이었고⁠, 지금은 영아반 보조와 연장반을 맡고 있는 남궁기윤입니다⁠. 3월 12일 밤 일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기윤은 원장실에서 한 말을 순서대로 다시 했다⁠. 열한 시 사십 분의 전화⁠, 아랫집 할머니와 구급차⁠, 새벽 배송의 위약금⁠, 열두 시 십 분⁠, 부엌 바닥⁠, 빨래⁠, 네 시 칠 분⁠, 음식물 쓰레기봉투⁠. 음식물 쓰레기봉투에서 누군가 짧게 웃었다가 기침으로 덮었다⁠.

“⁠규정 위반입니다⁠. 경위서를 냈고⁠, 담임에서 물러났습니다⁠. 징계가 더 있으면 받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만 부탁드립니다⁠. 지금 저녁 일곱 시 넘어서까지 연장반에 남는 아이가 셋이고⁠, 6월이 되면 다섯이 됩니다⁠. 연장반은 제가 계속 맡게 해 주십시오⁠.⁠”

밤톨이엄마가 손을 들었다⁠. 무릎 위의 서명지가 미끄러졌다⁠.

“⁠선생님⁠, 하나만 여쭤볼게요⁠. 우리 애가 밤에 혼자 있게 되면 선생님이 우리 집에도 오실 거예요⁠? 공평하게⁠?⁠”

강당이 조용해졌다⁠. 기윤은 대답을 바로 하지 않았다⁠. 질문이 옳았기 때문이었다⁠.

“⁠안 갑니다⁠. 3월 12일에도 가면 안 됐습니다⁠.⁠”

“⁠그럼 왜 그 집은 가셨어요⁠?⁠”

“⁠전화가 왔고⁠, 제가 갔습니다⁠. 그날 받은 전화가 다른 집 전화였어도 갔을 거라고 말씀드리면 거짓말이 될 수도 있어서⁠, 그 말은 안 하겠습니다⁠.⁠”

예찬이아빠가 양반다리를 한 채 둘째의 등을 토닥이다가 손을 멈췄다⁠. 외할머니가 꿀떡 상자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사진 있어요⁠. 보여 드릴까요⁠?⁠”

원장 엄미금이 원장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고 말했다⁠.

“⁠어머님⁠, 사진은 여기서 안 봅니다⁠. 사진은 법원이 봐요⁠. 여기서는 연장반 얘기만 해요⁠.⁠”

외할머니는 다시 앉았다⁠. 앉으면서 떡 상자를 무릎에 올렸고⁠, 상자 뚜껑의 날짜가 강당 형광등 아래 반짝였다⁠.

*

고해준은 작은 의자에서 일어나는 데 두 번 힘을 주어야 했다⁠. 첫 번째에 허리가 막혔고⁠, 두 번째에야 일어섰다⁠. 열네 명의 눈이 해준의 왼손이 짚은 허리에 먼저 갔다⁠.

“⁠솔찬이 아빠입니다⁠. 제가 졸랐습니다⁠.⁠”

다엘이 옆에서 해준의 조끼 자락을 아주 작게 당겼다⁠. 해준은 당기는 손을 무시했다⁠.

“⁠저는 낮에 택배 하고 밤에 새벽 배송을 했습니다⁠. 개인사업자라 육아휴직이 없어요⁠. 현관에 붙어 있는 부모 교육 포스터 보면 아빠 육아휴직이 역대 최고라는데⁠, 저는 휴직할 회사가 없습니다⁠. 그날 밤 갈 데가 없어서 선생님한테 전화했어요⁠. 선생님은 제가 전화한 사람 중에 유일하게 받은 사람이에요⁠.⁠”

“⁠몇 명한테 전화하셨는데요⁠?⁠”

밤톨이엄마가 물었다⁠. 해준은 손가락을 접어 보다가 그만두었다⁠.

“⁠두 명이요⁠. 한 명은 대리점 형님이었는데 그 형님은 밤 열한 시면 자요⁠. 영포티라서⁠.⁠”

예찬이아빠가 웃음을 참다가 아기띠가 흔들렸다⁠. 아기가 깨서 칭얼거렸고⁠, 강당의 공기가 조금 풀렸다⁠.

“⁠밤 배달은 지난주에 그만뒀습니다⁠. 이제 밤에는 제가 애 옆에 있어요⁠. 선생님은 그 일로 담임을 잃었습니다⁠. 연장반까지 빼앗지 말아 주세요⁠.⁠”

해준이 앉으려는데 다엘이 일어났다⁠. 다엘은 해준보다 한 번에 일어섰다⁠. 다엘은 회의실이 아닌 곳에서도 회의하듯 말하는 사람이었다⁠.

“⁠솔찬이 엄마입니다⁠. 저는 선생님 자르자고 여기 온 게 아니에요⁠.⁠”

외할머니가 딸을 올려다보았다⁠. 다엘은 어머니를 보지 않았다⁠.

“⁠관찰 기록 열람했어요⁠. 우리 애를 제일 잘 아는 분이에요⁠. 제가 법원에 낸 건 선생님 일이 아니라 우리 애가 밤에 누구 옆에서 자느냐는 거예요⁠. 그 사람이 밤일을 그만뒀다는 건 오늘 처음 들었네요⁠.⁠”

다엘이 해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만둔 거 나한테 말하는 게 그렇게 어려웠어⁠?⁠”

“⁠네가 전화를 하면 변호사 목소리가 나와서⁠.⁠”

“⁠내 목소리야⁠.⁠”

“⁠변호사 목소리랑 똑같아⁠.⁠”

학부모 몇이 숨을 들이켰다⁠. 아란이 반대표 수첩을 탁 덮었다⁠. 덮는 소리가 회의를 반대표에게 돌려주었다⁠.

*

추아란은 일어서지 않고 작은 의자에 앉은 채 손을 들었다⁠. 손을 든 반대표를 보고 몇 사람이 따라 손을 들 뻔했다⁠.

“⁠손 들기 하나만 해 볼게요⁠. 6월부터 저녁 여섯 시 넘어서 연장반 써야 하는 집⁠, 손 들어 주세요⁠.⁠”

아란이 먼저 들었다⁠. 예찬이아빠가 아기띠 위로 손을 들었다가⁠, 아란과 눈이 마주치고 한 번 더 높이 들었다⁠. 밤톨이엄마는 서명지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손은 다섯 개였다⁠. 해준까지 여섯이었다⁠.

뒷줄에서 누군가 손을 반쯤 든 채 물었다⁠.

“⁠반대표님⁠, 회의록에 제 이름 들어가요⁠? 우리 시어머니가 이 동네 살아서요⁠.⁠”

“⁠회의록에는 손 숫자만 들어가요⁠. 이름은 제 머릿속에만 들어가요⁠.⁠”

“⁠그게 더 무서운데요⁠.⁠”

“⁠여섯 집이에요⁠. 볕뜰에 일곱 시 넘어서 남는 선생님은 지금 한 분이에요⁠. 원장님⁠, 새 선생님 구하는 데 얼마나 걸려요⁠?⁠”

“⁠연장보육 전담은 지원자가 잘 없어요⁠. 빨라야 두 달⁠.⁠”

“⁠그럼 두 달 동안 여섯 집은 여섯 시에 회사에서 나와야 해요⁠. 저는 팀장님한테 그 말 못 해요⁠. 우리 팀장님은 퇴근을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로 하면 그다음 날 말을 안 해요⁠.⁠”

몇 사람이 웃었다⁠. 밤톨이엄마가 서명지를 접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저도 여섯 시는 못 나와요⁠. 근데 그냥 넘어가면 안 되잖아요⁠.⁠”

“⁠그냥 안 넘어가요⁠. 조건 붙여요⁠.⁠”

아란은 반대표 수첩에 쓰면서 소리 내어 읽었다⁠. 연장반은 남궁 선생님이 계속 맡는다⁠. 솔찬이 하원 인계는 다른 선생님이 한다⁠. 교사와 보호자는 개인 연락을 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낸다⁠. 6월 위탁 재심사 전까지 새 연장보육 교사를 뽑는다⁠.

원장이 원장 의자에서 처음으로 일어났다⁠.

“⁠서약서는 오늘 받을게요⁠. 선생님⁠, 아버님⁠, 두 분 다⁠.⁠”

기윤과 해준은 강당 양 끝에서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서로를 보지 않았다⁠. 아란은 둘이 서로를 보지 않으려고 같은 시각에 다른 곳을 보는 것을 보았다⁠. 반대표 수첩 귀퉁이에 아란은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을 한 줄을 썼다⁠. 좋아하네⁠.

*

여덟 시 사십 분⁠, 기윤은 강당 의자를 접어 벽에 세우고 복도로 나왔다⁠. 서약서에 서명한 손에 볼펜 잉크가 묻어 있었다⁠. 연장반 문 앞에서 해준이 잠든 솔찬을 어깨에 걸치고 서 있었다⁠. 해준은 기윤을 보았다가 서약서가 생각났는지 연장반 게시판을 보았다⁠. 게시판에는 「⁠봄 소풍 준비물⁠」이 붙어 있었다⁠. 해준은 준비물 목록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척했다⁠.

복도 반대편에서 구두 소리가 왔다⁠. 다엘이었다⁠. 다엘은 해준과 솔찬을 지나쳐 기윤 앞에 섰다⁠.

“⁠선생님⁠, 잠깐 말씀 나눌 수 있을까요⁠?⁠”

“⁠어머님⁠, 저 오늘 서약서 썼습니다⁠. 보호자와 개인적으로⁠…⁠”

“⁠개인적인 얘기 아니에요⁠. 법원 얘기예요⁠.⁠”

다엘이 핸드백에서 서류 봉투를 꺼냈다⁠. 봉투에 「⁠진술서 양식⁠」이라는 견출지가 붙어 있었다⁠.

“⁠법원에 진술서 써 주세요⁠. 선생님이 본 것만요⁠. 몇 시에 데리러 왔는지⁠, 애가 낮에 졸았는지⁠, 병원 예약을 놓쳤는지⁠. 사실만요⁠.⁠”

“⁠어머님 편 진술서요⁠?⁠”

“⁠아니요⁠. 사실 편이요⁠.⁠”

기윤은 봉투를 받지 않았다⁠. 다엘은 봉투를 내민 손을 거두지 않았다⁠. 연장반 문 앞에서 해준이 준비물 목록 읽는 척을 그만두고 고개를 돌렸다⁠. 해준의 어깨 위에서 솔찬이 잠결에 아빠 목에 감긴 수건을 끌어당겼다⁠.

다엘이 봉투를 기윤의 앞치마 대신 셔츠 앞주머니에 꽂았다⁠. 종이 모서리가 기윤의 가슴께를 찔렀다⁠.

“⁠선생님이 안 쓰시면⁠, 제 변호사가 다른 사람을 찾아요⁠. 그 사람은 사실 편이 아닐 거예요⁠.⁠”

5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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