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381자)

읽음 스물셋

싱글대디와 어린이집 선생님 · 탁은담

십칠 층 복도에 아침 햇빛이 길게 들어왔다⁠. 고해준은 외할머니가 문을 닫지 못하게 운동화 끝을 문틀에 댔다⁠. 운동화 끝에 힘을 주는 순간 왼쪽 허리가 먼저 대답했다⁠.

“⁠어머님⁠, 그날 밤 아랫집 할머니가 구급차에 실려 가셨어요⁠. 선생님이 우리 애를 지켰어요⁠. 어머님이 기도 차 기다리시는 동안요⁠.⁠”

“⁠그럼 떳떳하면 됐지⁠. 왜 얼굴이 빨개⁠?⁠”

“⁠빨간 게 아니라 탄 거예요⁠.⁠”

외할머니는 성경 가방을 고쳐 메고 해준을 올려다보았다⁠. 키는 해준의 어깨에 닿았는데⁠, 해준은 결혼하고 다섯 해 동안 이 사람을 한 번도 내려다본 기억이 없었다⁠.

“⁠고 서방⁠, 솔찬이 돌 때까지 누가 키웠어⁠? 다엘이 대학병원 밤 근무 하고 너 택배 할 때⁠. 내가 키웠어⁠. 이유식도 내가 갈았고⁠, 밤에 열 나면 내가 업고 뛰었어⁠. 다엘이 미국 갈 때 애를 너한테 두고 간 건⁠, 아빠한테서 애까지 뺏으면 너 무너진다고 다엘이 그래서야⁠. 그런데 무너진 건 너잖아⁠. 새벽에 남자가 나오는데 할미가 눈을 감아⁠?⁠”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했는데요⁠.⁠”

“⁠그러니까 그걸 모르니까 찍었지⁠. 알면 안 찍었어⁠.⁠”

해준은 대답할 말을 찾다가 찾지 못했다⁠. 외할머니의 말은 거칠었지만 순서가 맞았다⁠. 외할머니가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해준 쪽으로 돌렸다⁠. 글자 크기가 화면의 절반을 차지했다⁠.

“⁠다엘이 나도 하원 보호자로 올렸어⁠. 단톡방 주소도 보내 줬어⁠. 손주 사진 보려고 들어가는 거야⁠. 너도 들어와 있지⁠?⁠”

“⁠저는 단톡방 안 해요⁠. 일하느라⁠.⁠”

“⁠그러니까 네가 모르는 거야⁠.⁠”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가 났다⁠. 외할머니는 해준의 운동화 끝을 슬리퍼 끝으로 툭 밀어냈다⁠.

“⁠기도 차 놓치겠다⁠. 오늘은 수요 예배라 늦으면 앞자리 없어⁠.⁠”

문이 닫혔다⁠. 해준은 복도에 혼자 서서 닫힌 문의 도어락 숫자판을 보았다⁠. 해준은 숫자판 어딘가에 눌려 있을 솔찬의 생일을 떠올렸지만 눌러 보지 않았다⁠.

*

목요일 열두 시 오 분⁠, 추아란은 회사 구내식당 줄에 서서 오른손으로 식판을⁠, 왼손으로 휴대전화를 들었다⁠. 휴대전화 화면은 셋으로 갈라져 있었다⁠. 팀장의 메신저 「⁠아란 씨 오늘 점심 뭐 나왔어요⁠? 줄 길어요⁠?⁠」⁠, 남편의 메시지 「⁠둘째 응가 사진 보내도 돼⁠?⁠」⁠, 그리고 해바라기반 단톡방⁠.

「⁠솔찬이외할머니님이 들어왔습니다⁠.⁠」

입장 알림 아래로 큰 글씨가 올라왔다⁠. 외할머니는 휴대전화 글씨를 가장 크게 키워 쓰는 사람이었고⁠, 단톡방에서는 글씨 크기가 그대로 목소리 크기가 되었다⁠.

「⁠안녕하세요 솔찬이 외할머니입니다 반갑습니다⁠」

「⁠담임선생님 바뀐 이유 아시는분 계십니까⁠」

아란은 식판을 내려놓고 엄지손가락으로 화면을 내렸다⁠. 이 분 사이에 메시지 열넷이 붙었다⁠. 「⁠어제 낮잠 시간에 솔찬이 아빠가 택배 조끼 입고 원장실 들어갔대요⁠」 「⁠신발 신고요⁠?⁠」 「⁠신발 신고요⁠」 「⁠헐⁠」 그리고 다시 큰 글씨⁠.

「⁠새벽 네시에 남자선생이 애아빠 집에서 나오는거 제가 봤습니다 사진도 있습니다⁠」

말풍선 옆 숫자가 스물셋이었다⁠. 스물셋은 아직 안 읽은 사람 수였다⁠. 숫자가 스물둘⁠, 열아홉⁠, 열넷으로 줄었다⁠. 아란은 숫자가 줄어드는 속도가 소문이 퍼지는 속도라는 것을 반대표를 맡고 한 달 만에 배웠다⁠. 일곱이 남았을 때 누군가 썼다⁠. 「⁠사진 올려 주세요⁠」

아란이 공지를 쓰려고 자판을 띄운 순간⁠, 단톡방 한가운데에 춤추는 오리 이모티콘이 떴다⁠. 보낸 사람은 「⁠예찬이아빠⁠」였다⁠. 아란의 남편이었다⁠. 이어서 「⁠앗 잘못 보냄⁠」 「⁠죄송합니다⁠」 「⁠여보 미안⁠」이 올라왔다⁠. 숫자가 다시 스물셋으로 차올랐다⁠. 오리가 사진 이야기를 덮었다⁠.

팀장의 메신저가 다시 울렸다⁠. 「⁠아란 씨⁠?⁠」 회사 메일함 맨 위에는 사내 소식지가 와 있었다⁠. 「⁠아이 있는 3040 가구 56⁠.5%가 맞벌이 — 우리 회사 육아 지원 제도 안내⁠」 아란은 소식지를 닫고 단톡방에 공지를 올렸다⁠.

「⁠[반대표 공지] 사진이나 개인 이야기 올리지 말아 주세요⁠. 운영위원회에 정식으로 안건 내 주시면 제가 원장님께 전달하겠습니다😊⁠」

공지가 올라가고 사 분 뒤⁠, 개인 메시지 창 하나가 열렸다⁠. 「⁠밤톨이엄마⁠」였다⁠. 「⁠반대표님 운영위원회 서명 받을게요⁠. 지금 여섯 집 모였어요⁠」 아란은 식판 위에서 식어 가는 된장국을 보며 달력 앱을 열었다⁠. 6월 7일 칸에 「⁠남편 복직⁠」이 빨간 글씨로 박혀 있었고⁠, 그다음 날부터 아란의 퇴근 시간 칸은 비어 있었다⁠.

*

목요일 오후 한 시⁠, 남궁기윤은 영아반 매트에 앉아 한 살배기 셋을 차례로 재웠다⁠. 하나는 등에 업혔고⁠, 하나는 무릎에 머리를 댔고⁠, 하나는 기윤의 앞치마 끈을 입에 문 채 잠들었다⁠. 영아반 담임이 기저귀 가방을 정리하며 낮게 웃었다⁠.

“⁠남궁 선생님⁠, 애들이 선생님을 다 엄마라고 불러요⁠.⁠”

“⁠아까 하나는 아빠라고 했어요⁠.⁠”

“⁠그럼 반반이네⁠.⁠”

기윤은 웃다가 무릎 위의 아이가 깰까 봐 웃음을 삼켰다⁠. 앞치마 주머니에 반으로 접은 경위서가 들어 있었다⁠. 낮잠 시간마다 꺼내 한 줄씩 썼다⁠. 「⁠3월 12일 23시 40분⁠, 해당 아동 보호자로부터 긴급 연락을 받고⁠」까지는 쉽게 나갔다⁠.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어떻게 써야 할지에서 사흘째 멈춰 있었다⁠. 「⁠퇴실 시 해당 가정의 생활 폐기물을 대신 반출함⁠」이라고 쓰고 보니 이삿짐 업체 보고서 같았다⁠.

원장의 메시지가 왔다⁠. 「⁠학부모 운영위원회 소집 요청 들어올 것 같아요⁠. 서명 일곱⁠. 소집되면 회의록이 시청으로 가요⁠. 오늘 하원 때 현관 근처에도 나오지 말아요⁠.⁠」

일곱 시 십사 분⁠, 기윤은 연장반 창가에 서지 않으려고 일부러 교구장을 정리했다⁠. 블록 통을 세 번 옮기고 나서 결국 창가로 갔다⁠. 계단 아래에 해준이 서 있었다⁠. 해준은 연장반 창문을 올려다보지 않았다⁠. 원장이 시킨 대로였다⁠. 해준은 새 담임에게 고개를 숙이고⁠, 가방 끈을 받고⁠, 솔찬을 안아 올리고⁠, 허리를 왼손으로 짚었다⁠. 연장반 창문을 한 번도 보지 않고 주차장까지 걸었다⁠.

보지 않는 것이 보는 것보다 오래 걸렸다⁠. 기윤은 창틀에 손바닥을 대고 탑차 문이 닫힐 때까지 서 있었다⁠.

*

목요일 저녁 여덟 시⁠, 표다엘은 퇴근하자마자 식탁 앞에 서서 어머니의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화면에는 큰 글씨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사진도 있습니다⁠.

“⁠엄마⁠, 이걸 단톡방에 쓰면 어떡해⁠.⁠”

“⁠있으니까 있다고 했지⁠. 거짓말했어⁠?⁠”

“⁠거기 엄마들 스물넷이야⁠. 스물넷이 다 자기 남편한테 말하고⁠, 남편들이 회사에서 말해⁠. 저녁이면 행신동이 다 알아⁠.⁠”

외할머니는 냉장고에서 반찬통을 꺼내며 대답했다⁠. 반찬통 뚜껑마다 매직으로 날짜가 쓰여 있었다⁠. 외할머니는 반찬에도 날짜를 썼고⁠, 서운한 일에도 날짜를 썼다⁠.

“⁠너 비행기 표 끊은 날이 3월 13일이야⁠. 내가 사진 보낸 날⁠. 너도 그 사진 보고 온 거잖아⁠.⁠”

“⁠그 사진 보고 온 건 맞아⁠. 그 선생님 자르려고 온 건 아니야⁠.⁠”

“⁠그럼 누구 편이야⁠, 너는⁠.⁠”

“⁠솔찬이 편⁠.⁠”

“⁠애 아빠 집에서 새벽에 남자가 나오는 게 솔찬이 편이야⁠?⁠”

다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려고 열었던 입으로 물을 마셨다⁠. 열람한 관찰 기록 사본이 가방 안에서 무겁게 느껴졌다⁠. 외할머니가 반찬통을 식탁에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그 선생 편들 거면 변호사는 왜 샀어⁠. 돈 아깝게⁠.⁠”

다엘은 휴대전화를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 단톡방에서 나가라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나가라고 하면 어머니가 지금까지 한 일이 다 틀린 일이 되었고⁠, 어머니가 틀리면 다엘이 비행기를 탄 까닭도 같이 틀려졌다⁠.

금요일 일곱 시 이십 분⁠, 해준은 어린이집 옆 놀이터 그네 앞에서 추아란과 마주 섰다⁠. 아란은 오늘 남편이 육아휴직 아빠 모임에 가는 바람에 회사에서 반차를 쓰고 아들을 늦게까지 맡겼다고 했다⁠. 솔찬과 아란의 아들은 미끄럼틀 위에서 누가 먼저 내려가는지 가위바위보를 열한 번째 하고 있었다⁠. 미끄럼틀은 그네에서 스무 걸음 떨어져 있었고⁠, 아이들 귀에 어른 말이 닿지 않는 거리였다⁠.

“⁠아버님⁠, 저 돌려 말하는 거 못해요⁠. 반대표라서요⁠.⁠”

“⁠네⁠.⁠”

“⁠선생님이랑 사귀세요⁠?⁠”

“⁠아니요⁠.⁠”

해준의 대답은 빨랐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둘은 한 번도 현관 밖에서 만나지 않았고⁠, 한 번도 하원 이야기 말고 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3월 12일 밤에도 기윤은 부엌 바닥에 앉아 있었고 해준은 일하러 나가 있었다⁠.

아란이 그네 쇠사슬을 한 손으로 잡았다⁠.

“⁠그럼 좋아하세요⁠?⁠”

해준은 미끄럼틀을 보았다⁠. 솔찬이 가위바위보에서 졌는지 두 팔을 하늘로 뻗고 억울해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잘못한 거 없어요⁠.⁠”

“⁠그건 대답이 아니잖아요⁠.⁠”

“⁠반대표님이 물을 일도 아니잖아요⁠.⁠”

아란은 웃지 않았다⁠. 아란이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해준에게 보여 주었다⁠. 「⁠운영위원회 소집 요청서 — 서명 학부모 7인⁠. 안건⁠: 연장보육 담당 교사 교체 요청⁠」

“⁠저 6월에 남편 복직해요⁠. 그럼 우리 애도 일곱 시까지 연장반이에요⁠. 일곱 시 넘어서 남는 반에 선생님이 남궁 선생님 하나예요⁠. 선생님 빠지면 연장반 여섯 시에 닫혀요⁠. 그럼 저 회사 그만둬야 돼요⁠.⁠”

“⁠그럼 반대표님이 막아 주세요⁠.⁠”

“⁠제가 막으면 다음 날 단톡방 안건이 저예요⁠. 「⁠반대표님은 왜 그 선생님 편이에요⁠?⁠」 그거 반나절이면 나와요⁠.⁠”

아란이 그네를 한 번 밀었다⁠. 빈 그네가 앞뒤로 흔들렸다⁠.

“⁠아버님이 사귀면 차라리 쉬워요⁠. 사귀는 거면 선생님이 담임 그만두고 끝나요⁠. 좋아하는데 숨기면 소문이 혼자 커요⁠. 단톡방은 빈 데를 제일 좋아해요⁠.⁠”

“⁠저는 숨기는 거 없어요⁠.⁠”

“⁠아버님⁠, 지금 그네보다 아버님 목이 더 흔들려요⁠.⁠”

미끄럼틀에서 솔찬이 소리쳤다⁠. 아빠⁠, 이번엔 내가 이겼어⁠. 해준은 손을 들어 엄지를 세웠다⁠. 아란은 그네 쇠사슬을 놓았다⁠.

“⁠다음 주 수요일 일곱 시 반⁠, 강당이요⁠. 저 공지 올려야 해요⁠. 반대표라서⁠.⁠”

*

금요일 밤 아홉 시⁠, 해바라기반 단톡방에 공지가 올라왔다⁠. 「⁠[공지] 학부모 운영위원회 — 4월 21일 수요일 저녁 일곱 시 반⁠, 어린이집 강당⁠. 안건⁠: 연장보육 담당 교사 교체 요청⁠. 참석 가능하신 분은 댓글로😊⁠」 숫자 스물셋이 빠르게 줄었다⁠. 댓글이 열하나 달렸고⁠, 열두 번째 댓글은 큰 글씨였다⁠. 「⁠참석합니다 솔찬이 외할머니⁠」

같은 시각 원장실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남궁기윤은 반으로 접힌 경위서를 원장 엄미금의 책상 위에 올렸다⁠. 음식물 쓰레기봉투 이야기는 결국 「⁠제가 버렸습니다⁠」 한 줄로 썼다⁠.

“⁠원장님⁠, 운영위원회에 제가 나가겠습니다⁠.⁠”

원장이 안경을 벗었다⁠.

“⁠선생님이 나가면 불난 데 기름이에요⁠.⁠”

“⁠불은 이미 났어요⁠. 제 이름으로요⁠. 제 이름이 걸린 회의에 제가 없으면⁠, 다른 사람들이 제 얘기를 제 대신 해요⁠.⁠”

“⁠학부모들 앞에서 뭐라고 할 건데요⁠?⁠”

“⁠3월 12일 밤에 있었던 일 그대로요⁠. 열두 시 십 분부터 네 시 칠 분까지⁠.⁠”

원장은 경위서를 펼쳐 마지막 줄을 읽었다⁠. 제가 버렸습니다⁠. 원장이 경위서를 내려놓고 오래 기윤을 보았다⁠.

“⁠그러다 마지막에 누가 무슨 마음이냐고 물으면요⁠?⁠”

기윤은 안경을 고쳐 썼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원장은 대답하지 않는 얼굴을 보고 서랍에서 강당 열쇠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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