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421자)

조정실

싱글대디와 어린이집 선생님 · 탁은담

6월 8일 화요일 오전 열 시⁠, 고해준은 법원 고양지원 조정실 앞 대기 의자에 앉아 김밥을 받아 들었다⁠. 시청 무료 법률 상담실에서 김밥을 먹던 변호사가 소송구조 대리인으로 나왔다⁠. 변호사는 은박지에 싼 김밥 한 줄을 반으로 갈라 반을 해준에게 주었다⁠.

“⁠조정 들어가기 전에 드세요⁠. 조정실은 배고프면 집니다⁠.⁠”

“⁠변호사님 그거 경험이에요⁠?⁠”

“⁠제 경험은 아니고 제 의뢰인들 경험입니다⁠. 저는 늘 먹고 들어가서 안 져 봤어요⁠. 진 적은 있는데 배고파서 진 적은 없어요⁠.⁠”

대기실 탁자에 오늘 자 신문이 펼쳐져 있었다⁠. 생활면 머리기사 제목이 해준의 눈에 들어왔다⁠. 「⁠아침은 엄마⁠, 저녁은 아빠 — 시간을 나누는 이혼 부모들⁠」 해준은 기사를 읽지 않고 신문을 접었다⁠. 접힌 신문을 맞은편 다엘이 펼쳤다⁠. 다엘은 기사를 끝까지 읽었다⁠.

다엘 옆에는 다엘의 변호사가 앉아 있었다⁠. 변호사는 서류 가방을 무릎에 올리고 휴대전화로 다른 사건의 일정을 보고 있었다⁠. 해준은 변호사를 처음 보았다⁠. 다엘의 입을 통해서만 들은 목소리가 생각보다 낮았다⁠.

조정실 안에는 둥근 탁자가 있었다⁠. 조정위원은 예순쯤 된 여자였고⁠, 탁자 위에 손뜨개 가방을 올려놓았다⁠. 가방에서 사탕 통이 나왔다⁠. 조정위원은 서류를 펼치기 전에 말했다⁠.

“⁠두 분 다 아이 사진부터 보여 주세요⁠. 휴대폰에 있는 거 아무거나⁠.⁠”

해준이 휴대전화를 열었다⁠. 사진첩에 솔찬이 천이백 장 넘게 있었다⁠. 탑차 조수석⁠, 어린이집 현관 계단⁠, 운동화 끈⁠, 브로콜리를 노려보는 얼굴⁠. 해준은 무엇을 골라야 할지 몰라 엄지로 내리기만 했다⁠. 다엘이 휴대전화를 열었다⁠. 다엘의 사진첩에는 영상 통화 화면을 캡처한 사진이 끝없이 이어졌다⁠. 화면 속 솔찬은 언제나 작은 네모 안에 있었다⁠. 가장 최근 사진 몇 장만 네모 밖이었다⁠. 공룡 칫솔을 문 솔찬⁠.

조정위원은 두 화면을 번갈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 다 애를 오래 보셨네⁠. 한 분은 가까이서⁠, 한 분은 멀리서⁠.⁠”

*

조정위원이 서류를 펼치자 다엘의 변호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청구인의 요구는 분명했다⁠. 주 양육자를 모로 변경⁠. 부는 격주 주말과 수요일 저녁 면접교섭⁠. 해준의 변호사가 받아쳤다⁠. 주 양육자 유지⁠. 모는 매주 토요일과 수요일 저녁⁠. 숫자가 탁자 위를 오갔다⁠. 해준은 숫자들 사이에서 일곱 시 십사 분을 찾았지만 숫자들 어디에도 없었다⁠.

“⁠상대방은 물류센터 주간직으로 옮겼습니다⁠. 야간 공백은 없습니다⁠.⁠”

“⁠수습 석 달입니다⁠. 수습에서 떨어지면 다시 택배로 돌아갑니다⁠. 허리 시술 이력도 있습니다⁠.⁠”

다엘의 변호사가 서류를 한 장 넘겼다⁠. 목소리가 한 단계 낮아졌다⁠.

“⁠그리고 위원님⁠, 정서적 환경도 보셔야 합니다⁠. 상대방은 아동의 전 담임교사와 관계를 이어 가고 있는 정황이 있습니다⁠. 전 담임교사는 진술서에서 상대방에 대한 사적 감정을 밝혔고⁠, 상대방은 혼인 중에도⁠…⁠”

“⁠변호사님⁠.⁠”

다엘이 변호사의 말을 잘랐다⁠. 짧게 끊었다⁠. 해준은 다엘이 짧게 끊는 목소리를 처음으로 반가워했다⁠.

“⁠그 얘기 철회했어요⁠. 서면에서⁠.⁠”

“⁠어머님⁠, 서면 철회와 조정 자리 발언은 다릅니다⁠. 조정에서는 다 꺼내 놓아야 위원님이⁠…⁠”

“⁠변호사님⁠, 나가 주세요⁠.⁠”

조정실이 조용해졌다⁠. 조정위원이 손뜨개 가방 위에 손을 얹었다⁠. 변호사가 다엘을 보았다⁠.

“⁠어머님⁠, 지금 조정 중에 대리인을⁠…⁠”

“⁠오늘 비용은 제가 계산할게요⁠. 나가 주세요⁠.⁠”

변호사는 서류 가방을 닫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가는데 조정위원이 사탕 통을 내밀었다⁠. 변호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사탕 하나를 집어 들고 나갔다⁠. 문이 닫혔다⁠.

해준의 변호사가 김밥 은박지를 접다가 손을 멈추고 해준에게 속삭였다⁠.

“⁠저도 나갈까요⁠?⁠”

“⁠계세요⁠. 변호사님은 아직 배불러 보이세요⁠.⁠”

*

표다엘은 변호사가 나간 자리의 빈 의자를 보지 않았다⁠. 다엘은 해준을 보았다⁠. 둥근 탁자라 정면이 따로 없었는데⁠, 다엘이 해준을 보니 탁자가 정면이 되었다⁠.

“⁠이제 내 말로 할게⁠.⁠”

“⁠해⁠.⁠”

“⁠네가 상차장 바닥에 누워 있던 날⁠, 일곱 시 십사 분에 내가 갔어⁠. 그날 애가 현관에서 처음 한 말이 뭔 줄 알아⁠? 아빠는⁠, 이었어⁠. 두 번째로 한 말이 선생님한테 오늘의 한 줄 알려 줘야 된다는 거였어⁠. 해준아⁠, 그 선생님 이제 없어⁠. 네가 또 쓰러지면 부를 선생님이 없어⁠. 그럼 남는 건 나야⁠. 남는 사람이 처음부터 데리고 있는 게 맞잖아⁠.⁠”

“⁠내가 또 쓰러지면 너한테 전화할 거야⁠. 이번처럼⁠.⁠”

“⁠애는 그동안 유리문에 이마 대고 기다려⁠. 이 분만 늦어도 울어⁠.⁠”

“⁠그러니까 저녁은 내가 해야 돼⁠. 걔가 기다리는 사람이 나야⁠.⁠”

“⁠아침은 나야⁠. 네가 깨우면 걔가 울어⁠. 내가 깨우면 노래 두 곡 부르고 일어나⁠.⁠”

“⁠그건 이 주밖에 안 했으니까 신기해서 그런 거야⁠.⁠”

“⁠너는 넉 달 했잖아⁠. 넉 달 신기했잖아⁠, 현관⁠.⁠”

해준은 말문이 막혔다⁠. 다엘이 현관 이야기를 꺼낼 줄 몰랐다⁠. 조정위원이 사탕 통을 둘 사이에 놓고 물었다⁠.

“⁠그럼 아침은 어머님⁠, 저녁은 아버님⁠. 신문 기사처럼⁠. 그건 어떠세요⁠?⁠”

“⁠밤은요⁠?⁠”

해준과 다엘이 동시에 물었다⁠. 같은 말이 두 번 났다⁠. 조정위원은 사탕 하나를 까서 입에 넣었다⁠.

“⁠밤이 문제네⁠. 아침과 저녁 사이에 밤이 있어서⁠.⁠”

“⁠밤에 애가 누구 옆에서 자느냐⁠, 그거 하나로 여기까지 왔어요⁠.⁠”

다엘이 말했다⁠. 해준도 같은 말을 하려다 다엘이 먼저 해서 하지 않았다⁠.

조정위원은 두 사람을 오래 보았다⁠. 그러고는 서류에 「⁠조정 불성립⁠」이라고 썼다⁠. 볼펜 소리가 짧았다⁠.

“⁠심리기일은 6월 24일로 잡힐 거예요⁠. 가사조사 보고서는 오늘 오후에 기록으로 올라가요⁠. 두 분 다 열람하실 수 있어요⁠. 읽어 보시고⁠, 판사님 앞에서는 오늘보다 덜 똑같이 말씀하세요⁠. 오늘 두 분이 같은 말을 일곱 번 했어요⁠.⁠”

*

같은 날 저녁 일곱 시 십사 분⁠, 남궁기윤은 볕뜰어린이집 건너편 문구점 처마 밑에 서 있었다⁠. 들어가지 않았다⁠. 퇴직한 교사가 하원 시간에 현관을 기웃거리면 그것도 민원이 되었다⁠. 기윤은 문구점에서 산 크레파스 한 통을 손에 쥐고 길 건너 유리문을 보았다⁠.

현관 문턱에 원장 엄미금이 서 있었다⁠. 연두색 앞치마는 원장에게 짧았다⁠. 원장은 아이 하나에게 가방을 건네고⁠, 계단에 앉아 운동화 끈을 묶어 주고⁠, 일어서려다 계단 난간을 붙잡았다⁠. 한 번에 일어나지 못했다⁠. 두 번째에 일어났다⁠. 기윤은 크레파스 통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계단을 내려오던 추아란이 길 건너편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아란은 예찬이의 손을 잡은 채 건널목을 건너왔다⁠. 예찬이 기윤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현관 선생님이다⁠. 아란이 예찬의 입을 손바닥으로 살짝 막았다가 뗐다⁠.

“⁠선생님⁠, 여기서 뭐 하세요⁠?⁠”

“⁠크레파스 샀어요⁠.⁠”

“⁠크레파스 사러 일곱 시 십사 분에 오셨어요⁠?⁠”

기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란은 그것도 대답으로 받았다⁠.

“⁠어디서 일하세요⁠, 이제⁠?⁠”

“⁠알아보고 있어요⁠. 원장님들 단톡방에 제 얘기가 돌았대요⁠.⁠”

아란이 휴대전화를 꺼냈다⁠. 화면에 새 단체 대화방이 있었다⁠. 「⁠연장반 여섯 집⁠」

“⁠선생님⁠, 단톡방 이기는 법 아세요⁠? 단톡방 하나 더 만드는 거예요⁠. 우리 여섯 집이 시청에 의견서 냈어요⁠. 재심사 때 읽어 달라고⁠. 원장님이 연장반 직접 하신다는 거⁠, 남궁 선생님이 넉 달 동안 일곱 시 반까지 계셨던 거⁠. 예찬이아빠가 또 직함 붙여서 서명했어요⁠.⁠”

“⁠육아휴직 중인 아빠요⁠?⁠”

“⁠이번엔 복직한 아빠요⁠. 직함이 바뀌었대요⁠.⁠”

기윤이 웃었다⁠. 퇴직하고 처음 웃는 웃음이었다⁠. 아란은 예찬이의 손을 고쳐 잡고 건널목 쪽으로 돌아서다가 한마디를 남겼다⁠.

“⁠선생님⁠, 그 크레파스 솔찬이 주시려고 산 거죠⁠. 솔찬이 이제 엄마 집에 살아요⁠. 수요일 저녁엔 아빠 집 가고요⁠. 그냥 아시라고요⁠.⁠”

*

밤 아홉 시 반⁠, 해준은 빌라 부엌 바닥에 앉아 전자소송 화면을 열었다⁠. 솔찬이 다엘의 집에 간 뒤로 해준은 식탁보다 부엌 바닥에 오래 앉았다⁠. 3월에 기윤이 앉아 있던 자리였다⁠. 냉장고 맨 아래 칸에는 바나나우유 빈 통 열여섯 개가 그대로 줄지어 있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추아란이었다⁠. 아란은 해준에게 처음으로 개인 메시지를 보냈다⁠. 「⁠아버님⁠, 원장님이 어제 연장반 의자에서 세 번 만에 일어나셨대요⁠. 재심사는 모레래요⁠. 그냥 아시라고요😊⁠」 해준은 웃는 얼굴 이모티콘을 오래 보았다⁠. 아란의 이모티콘이 처음으로 웃는 얼굴로 보였다⁠.

가사조사 보고서는 열네 장이었다⁠. 해준은 처음부터 읽었다⁠. 석애리의 문장은 목소리처럼 높낮이가 없었다⁠.

「⁠아동은 부와 모 모두에게 안정적인 애착을 보임⁠.⁠」

「⁠부의 야간 공백은 주간직 전환으로 해소된 것으로 보이나⁠, 수습 기간 및 건강 상태를 고려할 필요가 있음⁠.⁠」

「⁠모의 주거 및 경제적 여건은 양호하며⁠, 외조모의 양육 보조가 가능함⁠. 다만 외조모가 학부모 단체 대화방에 사건 관련 자료를 게시한 사실이 있음⁠.⁠」

해준은 열한 장째에서 멈췄다⁠.

「⁠부는 조사 과정에서 전 담임교사와의 관계에 대해 ‘⁠아무 사이 아니다⁠’라고 진술함⁠. 전 담임교사는 별도 면담에서 ‘⁠아버님을 좋아한다⁠. 아버님은 대답한 적 없다⁠’고 진술함⁠. 두 진술은 서로 어긋나지 않을 수도 있으나⁠, 부가 조사 과정에서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여긴 사실을 축소해 진술했을 가능성이 있어⁠, 부 진술 전반의 신빙성을 판단할 때 참작함⁠.⁠」

해준은 화면을 끄지 않았다⁠. 냉장고 모터가 웅웅 울렸다⁠. 아무 사이 아닙니다⁠. 해준이 한 대답이 석애리의 평평한 문장 안에서 해준에게 돌아왔다⁠. 기윤은 조사실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해준은 했다⁠. 기윤이 지키려고 한 것을 해준이 깎아 먹었다⁠.

솔찬의 밤을 가져올 수 있는 말은 하원 시각과 주간직과 허리 보조대였다⁠. 모든 말이 이제 한 문장 때문에 덜 믿기게 되었다⁠.

*

6월 9일 아침 여덟 시 오십 분⁠, 해준은 법원 고양지원 가사조사관실 앞 복도에 서 있었다⁠. 출근 전이었다⁠. 물류센터 팀장에게 한 시간 늦는다고 메시지를 보냈고⁠, 팀장은 「⁠영서른여덟 선배님 화이팅⁠」이라고 답했다⁠.

석애리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한 손에 커피⁠, 다른 손에 털이 빠진 거북이 인형이 든 가방을 들고 있었다⁠. 해준을 보고도 걸음이 느려지지 않았다⁠.

“⁠아버님⁠, 사건 관계인이 조사관을 따로 찾아오시면 안 됩니다⁠.⁠”

“⁠알아요⁠. 하나만 말씀드리고 갈게요⁠.⁠”

석애리가 멈췄다⁠. 커피 뚜껑 구멍에서 김이 올라왔다⁠.

“⁠제가 거짓말했습니다⁠. 아무 사이 아니라고 한 거요⁠. 아무 사이 아닌 거 아니에요⁠.⁠”

석애리는 해준을 보았다⁠.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해준이 들은 석애리의 목소리 가운데 가장 평평한 목소리가 나왔다⁠.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님⁠. 오븐에 빨래 넣는 집보다 알기 쉬웠어요⁠.⁠”

“⁠그럼 보고서 고쳐 주세요⁠.⁠”

“⁠보고서는 제가 본 대로 씁니다⁠. 아버님이 그날 저한테 하신 말은 그날 하신 말이에요⁠. 고치시려면 판사님 앞에서 고치세요⁠. 저한테 말고⁠.⁠”

석애리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다가 돌아보았다⁠. 가방 지퍼 사이로 거북이의 머리가 반쯤 나와 있었다⁠.

“⁠아버님⁠, 6월 24일에는 김밥 드시고 오세요⁠. 그 변호사님 말이 맞아요⁠. 배고프면 다 똑같이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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