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53자)

노란 이름표

싱글대디와 어린이집 선생님 · 탁은담

5월 27일 목요일 오후 한 시⁠, 남궁기윤은 원장실 소파에 처음으로 앉았다⁠. 원장 엄미금이 앉으라고 했고⁠, 앉으라고 하는 원장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책상 위에 시청 공문 한 장이 있었다⁠. 「⁠국공립 어린이집 위탁 재심사 관련 보완 요청 — 민원 관련 교직원 조치 결과를 6월 4일까지 제출할 것⁠」

“⁠다른 길을 두 개 찾았어요⁠. 둘 다 막혔어⁠.⁠”

원장은 손가락을 하나 접었다⁠.

“⁠하나⁠. 시 인사로 다른 국공립에 옮겨 주는 거⁠. 시청에서 안 된대요⁠. 민원 걸린 교사를 다른 국공립에 보내면 민원도 같이 이사 간대⁠.⁠”

손가락을 하나 더 접었다⁠.

“⁠둘⁠. 고양 원장들 단톡방에 물어봤어요⁠. 경력 좋은 연장보육 선생님 있는데 받을 데 있느냐고⁠. 아무도 대답을 안 해⁠. 대답 안 하는 게 대답이지⁠. 한 원장이 개인 메시지로 그러더라⁠. 그 선생님 얘기 우리 단톡방에도 돌았어요⁠, 원장님⁠.⁠”

“⁠원장님도 단톡방 하세요⁠?⁠”

“⁠원장들 단톡방은 해요⁠. 학부모 단톡방보다 무서워요⁠. 거기는 이모티콘도 안 붙여⁠.⁠”

원장이 서랍을 열었다⁠. 맨 아래에 눕혀 두었던 흰 봉투가 나왔다⁠. 사흘 동안 비를 머금었다 마른 자리가 봉투 귀퉁이에 얼룩으로 남아 있었다⁠. 원장은 봉투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한참 손바닥으로 덮고 있었다⁠.

“⁠선생님⁠, 이거 열면 연장반 여섯 집이 6월부터 여섯 시에 나와야 해요⁠. 새 선생님은 빨라야 두 달⁠.⁠”

“⁠그러니까 연장반만 대신할 분 오실 때까지⁠…⁠”

“⁠시청은 그날까지 정리하래요⁠. 정리라는 말 또 쓰네⁠, 내가⁠.⁠”

원장이 봉투를 열었다⁠. 사직서를 펼쳐 날짜 칸을 보았다⁠. 기윤은 5월 31일이라고 써 두었다⁠.

“⁠월요일이네요⁠.⁠”

“⁠금요일로 쓰면 아이들한테 인사를 못 할 것 같아서요⁠. 주말이 끼면 애들이 잊어버려요⁠.⁠”

원장이 사직서를 접었다⁠. 그리고 책상 위 연장반 시간표를 끌어당겨 일곱 시 반 칸에 볼펜으로 자기 이름을 썼다⁠. 엄미금⁠. 원장은 이름을 쓰고 나서도 볼펜을 내려놓지 않았다⁠.

“⁠6월부터 연장반은 내가 해요⁠. 일곱 시 반까지⁠. 새 선생님 올 때까지⁠.⁠”

“⁠원장님이요⁠? 원장님 무릎으로 연장반 의자에⁠…⁠”

“⁠알아요⁠. 두 번 만에 일어나요⁠. 세 번 만에 일어나도 돼⁠. 여섯 집이 여섯 시에 나오는 것보다는 나아요⁠.⁠”

원장은 그제야 안경을 벗었다⁠. 기윤은 원장이 화를 낼 때가 아닌데 안경을 벗는 것을 처음 보았다⁠.

“⁠선생님⁠, 나 선생님 뽑을 때 면접에서 물었잖아요⁠. 왜 연장반 하고 싶으냐고⁠. 선생님이 그랬어⁠. 마지막 아이가 마지막 어른 손에 넘어가는 걸 보고 싶다고⁠. 나 그 말 때문에 뽑았어요⁠. 그 말 때문에 지금 이걸 받아⁠.⁠”

*

5월 28일 금요일 아침⁠, 추아란은 해바라기반 단톡방에 올라온 원장 명의의 공지를 읽다가 출근 버스 정류장을 지나쳤다⁠. 「⁠연장보육 담당 교사 변경 안내 — 6월 1일부터 연장보육은 원장이 직접 담당합니다⁠. 남궁기윤 선생님은 5월 31일자로 퇴직합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말풍선 옆 숫자가 스물셋에서 줄었다⁠. 줄어드는 속도가 지난달보다 느렸다⁠. 읽고 나서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한참 뒤 첫 댓글이 붙었다⁠. 「⁠…원장님이 일곱 시 반까지요⁠?⁠」 다음 댓글은 밤톨이엄마였다⁠. 「⁠선생님께 인사드리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다음은 큰 글씨가 아니었다⁠. 외할머니는 이 방에 없었다⁠.

남편의 메시지가 왔다⁠. 「⁠나 다음 주 복직이잖아⁠. 예찬이 일곱 시까지 원장님이랑 있으면 애가 원장님 무서워서 일찍 잘 듯⁠」 아란은 남편 창에 처음으로 이모티콘을 보냈다⁠. 우는 오리였다⁠.

아란은 정류장으로 되돌아 걸으며 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원장은 첫 신호에 받았다⁠.

“⁠원장님⁠, 이거 꼭 이렇게 해야 돼요⁠? 서명도 여섯 받아 법원에 냈는데요⁠.⁠”

“⁠반대표님⁠, 서명은 법원에 냈죠⁠. 시청은 서명을 안 받아요⁠. 민원을 받아⁠.⁠”

“⁠원장님이 일곱 시 반까지 하시면 원장님은 언제 퇴근하세요⁠?⁠”

“⁠여덟 시⁠. 원장은 원래 맨 나중에 나가요⁠. 이제 맨 나중이 좀 늦어지는 거지⁠.⁠”

아란은 대답하지 못했다⁠. 버스가 왔고⁠, 아란은 버스에 오르면서 반대표 수첩을 꺼내 한 줄을 지웠다⁠. 「⁠6월부터 연장반 일곱 시 — 남궁 쌤⁠」 지운 자리 위에 「⁠원장님(⁠무릎⁠)⁠」이라고 썼다⁠.

*

5월 28일 오후 네 시⁠, 고해준은 바름택배 고양 허브 분류장 이층 관제실에서 태블릿 화면을 손가락으로 밀고 있었다⁠. 아래층 레일 위로 상자들이 흘러갔고⁠, 화면 속에서는 같은 상자들이 초록 점이 되어 흘렀다⁠. 초록 점이 빨간 점으로 바뀌면 해준이 무전기로 아래층에 알렸다⁠. 상자를 들지 않는 일은 처음이었다⁠. 손이 할 일이 없어서 해준은 자꾸 목의 수건을 만졌다⁠.

옆자리의 관리팀장은 스물아홉이었다⁠. 팀장은 해준을 선배님이라고 불렀다⁠. 첫날 해준이 나이를 말하자 팀장은 감탄했다⁠.

“⁠선배님은 영포티도 아니시고 영서른여덟이시네요⁠.⁠”

“⁠그건 칭찬이에요⁠?⁠”

“⁠저희 팀에서는 칭찬이에요⁠. 영포티는 젊어 보이려고 애쓰는 거고⁠, 선배님은 애를 안 쓰시잖아요⁠. 그냥 피곤해 보이세요⁠.⁠”

해준은 웃었다⁠. 웃어도 허리가 덜 울렸다⁠. 시술한 지 석 주가 지났다⁠. 태블릿 화면 위쪽에 개인 일정 칸이 있었다⁠. 해준은 첫날 거기에 한 줄을 넣어 두었다⁠. 「⁠19⁠:14⁠」 팀장이 그게 뭐냐고 물었을 때 해준은 퇴근 뒤 일정이라고만 했다⁠. 사전처분 결정이 나고 나서 해준은 일곱 시 십사 분에 갈 데가 없었다⁠. 일정은 지우지 않았다⁠. 날마다 일곱 시 십사 분이 되면 태블릿이 짧게 울렸고⁠, 해준은 울림이 끝날 때까지 화면을 보았다⁠.

*

5월 28일 밤 아홉 시⁠, 고해준은 행신동 끝 원룸 건물 계단 아래에 서 있었다⁠. 주소는 진술서 첫 장 진술인 칸에 있었다⁠. 해준은 진술서를 한 달 동안 열 번쯤 읽었고⁠, 주소는 첫 번째 읽을 때 외웠다⁠. 허리 보조대가 조끼 안에서 배를 조였다⁠. 솔찬은 사전처분 결정으로 지난주부터 다엘의 집에서 살았다⁠. 해준의 빌라는 저녁마다 소리가 하나도 나지 않았다⁠.

계단 위 삼 층에서 문이 열렸다⁠. 기윤이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들고 내려오다가 계단참에서 멈췄다⁠. 회색 후드티였다⁠. 해준은 웃음이 나오려다 말았다⁠. 기윤은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등 뒤로 감추려다 감출 데가 없어서 그냥 들고 있었다⁠.

“⁠어떻게 왔어요⁠.⁠”

“⁠진술서에 주소 썼잖아요⁠.⁠”

“⁠법원 서류를 그런 데 쓰면 안 돼요⁠.⁠”

“⁠알아요⁠. 그래서 열 번 참았어요⁠.⁠”

기윤이 계단을 끝까지 내려왔다⁠. 둘 사이에 계단 세 칸이 있었다⁠. 어린이집 현관 계단과 같은 수였다⁠. 이번에는 해준이 아래에 서 있었고 기윤이 위에 서 있는 것도 같았다⁠. 무릎을 꿇지 않은 것만 달랐다⁠.

“⁠그만두지 마요⁠.⁠”

“⁠이미 냈어요⁠. 원장님이 받으셨어요⁠.⁠”

“⁠나 때문이잖아요⁠.⁠”

“⁠아니요⁠.⁠”

“⁠나 때문이잖아요⁠. 내가 밤에 전화했고⁠, 내가 원장실에 신발 신고 들어갔고⁠, 내가 법원에서⁠…⁠”

해준이 말을 멈췄다⁠. 법원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윤에게 할 수 없었다⁠. 아무 사이 아닙니다⁠. 해준은 조사실에서 한 대답을 석 주 동안 입에 물고 다녔다⁠.

“⁠선생님으로는 당신 옆에 못 서요⁠. 담임은 아이 편에 서야 하고⁠, 아이 편이 아빠 편이랑 같은 날도 있고 다른 날도 있어요⁠. 다른 날이 오면 나는 당신한테 아무 말도 못 해요⁠. 공원 벤치에서처럼 진술서 뒤에 숨어서 한 줄 쓰는 게 다예요⁠. 그래서 그만둬요⁠. 당신 때문이 아니라 내가 서고 싶어서⁠.⁠”

해준은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다⁠. 나는⁠, 하고 한 글자가 나왔다⁠. 그다음 글자가 나오지 않았다⁠. 계단 센서 등이 꺼졌다⁠. 둘 다 팔을 흔들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기윤이 한 칸 내려왔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마요⁠. 말할 수 있을 때 해요⁠. 나는 기다리는 거 잘해요⁠. 일곱 시 반까지 넉 달 기다렸잖아요⁠.⁠”

기윤의 손바닥이 해준의 조끼 아래로 들어와 허리 보조대 끈을 찾았다⁠. 해준은 숨을 멈췄다⁠. 기윤의 손가락이 찍찍이를 뜯었다가 다시 붙였다⁠.

“⁠이거 거꾸로 찼어요⁠. 넓은 데가 뒤로 가야 돼요⁠. 영아반 선생님이 허리 시술하셔서 제가 매일 채워 드렸어요⁠.⁠”

해준은 기윤의 손바닥이 허리에 닿아 있는 동안 아무 데도 아프지 않았다⁠. 석 달 만이었다⁠. 기윤의 손이 떨어지고 나서야 허리가 다시 아팠다⁠.

“⁠월요일 일곱 시 십사 분에 오지 마요⁠. 그날은 어머님이 오세요⁠. 지금은 아버님이 보호자 아니잖아요⁠.⁠”

“⁠주차장은 보호자 아니어도 서 있을 수 있잖아요⁠.⁠”

기윤이 고개를 저었다가⁠,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센서 등이 다시 켜졌다⁠. 기윤의 손에 음식물 쓰레기봉투가 아직 들려 있었다⁠. 해준이 봉투를 받아 들었다⁠.

“⁠이건 내가 버릴게요⁠. 3월에 빚진 거⁠.⁠”

*

5월 31일 월요일 일곱 시 십사 분⁠, 기윤은 현관 유리문 안쪽에 솔찬과 나란히 서 있었다⁠. 솔찬은 이마를 유리에 댔고⁠, 기윤은 솔찬의 노란 가방을 들고 있었다⁠. 오늘은 보조교사가 없었다⁠. 원장이 마지막 날은 혼자 하라고 했다⁠.

계단 아래에 다엘이 손을 흔들었다⁠. 이 주 사이에 다엘의 손 흔드는 모양이 해준을 닮아 있었다⁠. 솔찬의 손바닥 둘이 유리에 납작하게 붙었다⁠.

주차장 끝⁠, 가로등 옆에 해준이 서 있었다⁠. 탑차가 아니라 오래된 승용차 옆이었다⁠. 물류센터 주간직은 탑차를 몰지 않았다⁠. 해준은 남색 조끼 대신 회색 작업복을 입고 있었고⁠, 목에 수건은 그대로 감겨 있었다⁠. 해준은 주차장 끝에서 한 걸음도 다가오지 않았다⁠.

기윤이 문을 열었다⁠.

“⁠어머님⁠, 오늘의 한 줄 들으실래요⁠?⁠”

“⁠네⁠.⁠”

“⁠오늘 솔찬이가 선생님 이제 다른 데 간다니까 이렇게 말했어요⁠. 현관 선생님은 현관에 있어야지⁠, 다른 데 가면 이름이 바뀌잖아⁠.⁠”

다엘은 웃지 못했다⁠. 솔찬이 운동화 끈을 풀어 발을 내밀었다⁠. 다엘이 무릎을 꿇고 토끼 귀 두 개를 만들어 뽀뽀를 시켰다⁠. 매듭이 바르게 묶였다⁠.

기윤이 노란 가방 끈을 한 번 접어 내밀었다⁠. 다엘이 접힌 끈을 받았다⁠. 솔찬이 계단을 내려가다가 돌아서서 기윤을 올려다보았다⁠.

“⁠선생님⁠, 다른 데 가도 현관 있어⁠?⁠”

“⁠응⁠. 어디든 현관은 있어⁠.⁠”

“⁠그럼 됐어⁠.⁠”

솔찬은 다엘의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갔다⁠. 주차장 쪽으로 걷다가 끝에 서 있는 아빠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해준이 손을 흔들었다⁠. 다엘이 솔찬을 차에 태우며 주차장 끝을 한 번 보았고⁠, 해준에게 고개를 아주 작게 숙였다⁠. 다엘의 차가 골목을 빠져나갔다⁠.

현관에 기윤 혼자 남았다⁠. 기윤은 유리문을 닫으려다 손을 멈췄다⁠. 유리 아래쪽⁠, 아이 이마 높이에 둥근 자국이 남아 있었다⁠. 넉 달 반 동안 같은 자리에 찍힌 자국이었다⁠. 청소 선생님이 날마다 닦았지만 저녁이면 다시 생겼다⁠.

기윤은 앞치마 가슴의 노란 이름표 핀을 풀었다⁠. 「⁠해바라기반 남궁기윤⁠」 담임을 내려놓은 지 일곱 주가 지났지만 이름표는 바꾸지 않았다⁠. 이름표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참 보다가⁠, 유리문 안쪽 신발장 맨 위 칸⁠, 솔찬의 운동화가 있던 자리에 내려놓았다⁠.

주차장 끝의 해준이 이름표를 내려놓는 기윤을 보고 있었다⁠. 기윤은 고개를 들어 해준을 보았다⁠. 이번에는 둘 다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일곱 시 반까지 이 분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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