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15자)
폐위
숏폼 드라마 속 악녀로 빙의했다 · 윤솔채
스물일곱 번째 화의 알현실은 백 화짜리 드라마를 통틀어 가장 넓은 곳이었다. 기둥이 양옆으로 끝없이 늘어서 있었고, 기둥마다 귀족들이 서열대로 붙어 서 있었다. 높은 창으로 오후 햇빛이 비스듬히 떨어져 붉은 융단 위에 금빛 사다리를 걸쳐 놓았다. 옥좌에는 황후가 앉아 있었다. 황제는 원작에서 병상에만 있는 사람이라 옥좌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공작은 맨 앞줄에 있었고, 에블린은 황후의 발치에 있었다.
쪽대본은 간단했다.
「스물일곱 번째 화. 알현실. 황태자 카시안, 조정 앞에서 계약 신부의 무례를 꾸짖고 뺨을 친다. 계약 신부의 자리가 어디인지 모두에게 보인다.」
여백의 빨간 펜도 짧았다. 「카시안 님, 고르세요.」
카메라가 켜졌다. 머리 위 테두리의 분홍 막대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융단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왼뺨의 부기는 빠졌지만 에블린의 손바닥이 닿았던 자리가 아직 뜨끈했다. 허공에 하얀 글자들이 평소보다 촘촘하게 떠 있었다. 「오늘 그 화임」 「카시안 친다 안 친다」 「친다에 만 원」 「안 친다에 이만 원」
카시안이 알현실 문으로 들어왔다. 흰 제복의 금 견장이 걸음마다 흔들렸다. 어깨가 비틀리지 않았다. 대본이 끌어당기는 걸음이 아니었다. 카시안이 걷고 싶어서 걷는 걸음이었다. 나는 대본 밖의 걸음이 더 무서웠다. 어느 쪽으로 걸어올지 몰랐다.
카시안이 내 앞에 멈췄다. 금빛 눈이 나를 보았다. 손이 올라갔다. 귀족들이 숨을 들이켰다. 「친다」 「친다친다」 하는 글자가 지나갔다. 카시안의 손은 어깨높이까지 올라갔다. 복도 끝에서 혼자 연습하던 높이였다.
손이 멈췄다. 떨리지 않았다. 지난번처럼 대본과 싸우는 손이 아니었다. 카시안이 스스로 멈춘 손이었다.
카시안이 고개를 들었다. 나를 보지 않았다. 내 머리 위, 테두리 너머, 하얀 글자들이 흘러가는 허공을 보았다. 알현실의 누구도 허공을 보지 않았다. 보이지 않으니까. 카시안은 보였다.
“묻겠소.”
카시안의 목소리가 알현실 천장까지 올라갔다.
“이 손을 드는 사람은 누구요? 내가 드는 것이오, 저 종이에 글을 쓰는 자가 드는 것이오, 아니면 거기서 우리를 보며 돈을 거는 당신들이 드는 것이오?”
허공의 글자들이 멈칫했다. 정말로 멈칫했다. 흘러가던 「친다」 몇 개가 제자리에 멈췄다가 흐려졌다. 대신 「??」가 떠올랐고, 「우리한테 말한 거임?」이 떠올랐고, 「소름」이 떠올랐다.
카시안은 손을 내렸다. 내린 손으로 왼쪽 어깨의 금 견장을 붙잡았다. 실밥이 뜯기는 소리가 났다. 오른쪽 견장도 뜯었다. 금실로 짠 견장 두 개가 카시안의 손바닥에 놓였다. 카시안은 견장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견장은 생각보다 무거웠고, 카시안의 체온이 남아 있었다.
“맞을 사람이 정해져 있다면, 정한 사람에게 이것을 돌려주시오. 나는 정하지 않겠소.”
알현실이 소리 없이 무너졌다. 귀족들의 부채가 떨어졌다. 공작의 수염이 떨렸다. 황후가 옥좌에서 반쯤 일어났다. 에블린이 황후의 발치에서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이번에는 웃음을 막는 손이 아니었다. 두둥.
「미쳤다」 「남주가 시청자한테 질문함」 「이 드라마 뭔데 진짜」 「견장 떼는 소리 계속 돌려 듣는 중」 「안 친다 이만 원 받으러 갑니다」
북이 울린 뒤에도 하얀 글자는 한참 쏟아졌다. 숫자가 굴렀다. 「조회수 312만」 굳은 알현실에서 카시안만 숨을 쉬고 있었다. 견장을 뗀 어깨가 홀가분해 보였다. 처음으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어깨였다.
*
카메라가 꺼진 밤, 에블린의 방 베개 밑에서 종이가 한 장 나왔다. 한 줄이었다.
「알겠어요. 스물여덟 번째 화, 폐위 — 작가」
검은 타자 글씨였다. 여백에 빨간 펜은 한 획도 없었다. 작가는 화를 내지 않았다. 약속한 대로 썼을 뿐이었다. 약속을 지키는 글씨가 화내는 글씨보다 더 아팠다.
에블린이 종이를 손에 쥐고 카시안을 보았다. 카시안은 견장 없는 제복을 입고 창가에 서 있었다. 에블린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갈라졌다.
“전하가 무어라 속삭이는지 듣고 싶었어요.”
“알고 있소.”
“백 번째 화 마지막 장에요. 분수 앞에서요. 대본에도 안 쓰여 있어서, 전하가 직접 하셔야 하는 말이었어요. 저는 그 말 하나 들으려고—” 에블린의 말이 끊겼다. 눈물이 나지 않았다. 대본이 없는 데서는 눈물도 쉽게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제 전하는 백 번째 화에 안 계세요. 저는 누구 손을 잡고 분수 앞에 서요?”
카시안은 대답을 고르는 얼굴이었다. 백열두 번의 괜찮소 말고는 고를 대답이 없는 사람이었다.
“미안하오.”
대본에 없는 말이었다. 에블린의 어깨가 떨렸다. 에블린은 카시안에게서 눈을 돌려 나를 보았다.
“공녀님이 다 가져가요. 반지도, 전하도, 제 마지막 장도.”
“저는 아무것도 안 가져갔어요. 반지는 빠지지가 않고, 전하는 전하가 고르셨고요.”
“알아요. 그래서 더 싫어요.” 에블린이 쪽대본을 가슴에 대고 접었다. 접는 손끝이 하얬다. “초하루 찻잔은 원래대로 가요. 그것만은 제가 지켜요. 황후 폐하는 안 돌아가세요. 기획안에 미수라고 쓰여 있어요. 공녀님은 서른 번째 화에서 집에 가세요. 그거라도 원래대로 가야 해요. 그래야 저한테 뭐라도 남아요.”
에블린이 방을 나갔다. 창가의 카시안이 견장 뗀 자리를 손가락으로 만졌다. 실밥이 삐죽 나와 있었다.
“후회하세요?”
“아직 모르겠소. 후회라는 것은 해 본 적이 없어서.” 카시안이 나를 보았다. “당신은 내가 손을 들까 봐 무서웠소?”
“네.”
“나도 무서웠소. 내 손이 어느 쪽으로 갈지 몰라서.”
*
스물여덟 번째 화는 다시 알현실이었다. 같은 기둥, 같은 융단, 같은 햇빛. 달라진 것은 옥좌 앞에 펼쳐진 두루마리 하나였다. 황후가 두루마리를 읽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대본이 시키는 목소리였다.
“황태자 카시안은 조정을 능멸하고 황실의 위엄을 버렸으니, 오늘로 황태자의 자리를 거둔다.”
카시안이 융단 위에 무릎을 꿇었다. 견장 없는 흰 제복이 햇빛에 하얗게 바랬다. 짧은 은발이 숙여졌다.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공작이 맨 앞줄에서 수염을 쓸었다. 웃음을 감추는 손이었다.
황후가 두루마리를 다 읽었을 때 내 왼손이 가벼워졌다.
약지가 시원했다. 내려다보니 금반지가 손가락 마디를 타고 스르륵 올라가고 있었다. 황태자의 반지였다. 황태자가 없어지니 반지가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버터로도 비누로도 소금으로도 꿈쩍하지 않던 반지가, 두루마리의 한 문장에 혼자 빠졌다.
반지가 손끝에서 떨어졌다. 대리석에 한 번 튀고, 붉은 융단 가장자리를 따라 굴렀다. 금빛이 햇빛 사다리를 하나씩 지나며 반짝였다. 아무도 줍지 않았다. 반지는 옥좌 계단 아래, 하얀 드레스 자락 앞에서 멈췄다.
에블린이 내려다보았다. 무릎을 굽혀 반지를 집었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오래 보았다. 첫 계단이었다. 첫 계단은 이제 아무 데로도 이어지지 않았다. 황태자가 없는 반지는 그냥 금이었다. 에블린은 반지를 손가락에 끼지 않고 주먹 안에 쥐었다. 두둥.
「반지 빠짐」 「여주한테 돌아갔는데 왜 슬프지」 「폐위 실화냐」 「작가님 화났네」
붉은 글자가 떠올랐다. 「다음 화 — 초하루의 찻잔」
굳은 알현실에서 나는 내 왼손을 보았다. 약지에 반지 자국이 하얗게 남아 있었다. 공작이 나를 보고 있었다. 반지 방패가 없는 딸을 보는 눈이었다.
*
카메라가 꺼지자 나는 카시안을 찾아 정원으로 나갔다. 카시안은 밤의 분수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계약 반지를 내밀던 자리였다. 견장 없는 어깨가 달빛에 하얬다. 황태자가 아니게 된 카시안은 이상하게 키가 더 커 보였다.
“무릎 아프지 않으세요? 융단 위에 오래 계셨잖아요.”
“아프오.” 카시안이 무릎을 문질렀다. “아프다는 말을 당신에게 배웠소. 회랑에서.”
나는 분수 가장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물소리가 났다. 화면이 수없이 비춘 분수라 물방울 하나하나가 촘촘했다. 카시안이 물에 손가락을 넣었다 뺐다.
“당신이 집에 가면, 무엇을 먹소?”
뜻밖의 질문이었다. 원작에도, 지금까지의 질문 가운데에도 없던 종류였다. 큰 질문만 하던 사람이 작은 것을 물었다.
“김치찌개요. 엄마가 김치를 보냈거든요. 현관에 상자째 있을 거예요. 익으면 찌개 해 먹으라고 했어요.”
“김치찌개는 무엇이오?”
“맵고 시고 뜨거운 거요. 먹으면 땀이 나고 코가 빨개져요.”
카시안은 진지하게 듣다가 고개를 저었다. “황궁에는 매운 것이 없소. 화면이 매운 것을 보여 준 적이 없어서인지.”
“그럼 전하는 평생 안 매운 것만 드신 거예요?”
“이제 전하가 아니오.” 카시안이 웃었다. 입꼬리에서 시작해 금빛 눈까지 번지는 웃음을 처음 보았다. “카시안이라고 부르시오. 이름은 남았소. 자리는 거둬 가도 이름은 거둬 가지 않더군.”
나는 손가락을 접어 보았다. 침실, 에블린의 방, 주방, 뒷계단, 틈, 작가의 방. 여섯이었다. 화면이 보여 준 적 없는 곳을 여섯 군데 열었고, 여는 동안 내 이름은 한 번도 불리지 않았다. 카시안은 내 이름을 몰랐다. 묻지 않았다. 나는 묻지 않는 것이 고마웠다. 물으면 대답해야 했고, 대답하면 여기에 이름을 하나 두고 가야 했다.
*
밤에 문이 열렸다. 노크는 없었다.
에블린인 줄 알았다. 에블린은 노크를 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회색 복도에서 들어온 것은 하얀 드레스가 아니었다. 회색 수염이었다.
공작이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걸음이 멈칫하지 않았다. 대기실의 배우 얼굴이 아니었다. 카메라가 꺼진 세상에서 공작도 움직이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었다. 서재에서 내가 병마개를 밀어 올리던 날부터인지도 몰랐다. 들리지 못한 손이 오래 남으면 사람이 깨는 모양이었다.
“반지가 빠졌구나.”
공작이 내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반지 자국을 엄지로 쓸었다. 서재에서 내 뺨을 쓸어 보던 손이었다.
“병은 아직 가지고 있느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드레스 안쪽 주머니가 허벅지에 차가웠다.
“가지고 있어라. 네 방에서 나와야 하니까.” 공작이 웃었다.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원작 내내 화가 나면 손을 들던 사람이, 깨어나고 나서는 손 대신 목소리를 낮췄다. “초하루에 네 손으로 폐하께 차를 올려라. 시녀장이 쟁반을 들고, 네가 잔을 올린다. 네가 올리지 않으면 시녀장 딸이 내일 아침 세탁장에서 나온다. 나와서 어디로 갈지는 내가 정한다.”
공작이 손을 들었다. 나는 몸을 굳혔다. 손은 내 뺨이 아니라 머리 위로 갔다. 새빨간 머리칼을 한 번 쓰다듬었다. 아비가 딸을 쓰다듬듯이. 손바닥이 차가웠다.
“장하다, 내 딸. 끝까지 쓸모 있구나.”
문이 닫혔다. 공작의 발소리가 회색 복도 끝 연필 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숨을 쉬지 않았다. 머리칼에 공작의 손바닥 온기가 남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머리 위의 테두리가 비어 있었다. 초침이 귓속에서 째깍거렸다. 하나 남은 화와 처형대 사이에서, 초침 소리가 처음으로 내 심장보다 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