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314자)
초하루의 찻잔
숏폼 드라마 속 악녀로 빙의했다 · 윤솔채
초하루 아침, 나는 거울 앞에서 드레스 안쪽 주머니를 만졌다. 유리병이 그대로 있었다. 공작이 가지고 있으라고 한 병이었다. 버릴 수도 있었다. 버리면 다른 병이 다른 주머니에서 나올 것이었다. 공작가 서재 서랍에는 병이 하나만 있지 않을 것이었다.
거울 속 공녀는 오늘도 새빨간 웨이브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어깨가 드러난 붉은 드레스, 목의 검은 리본 초커. 보랏빛 눈 밑이 조금 꺼져 있었다. 잠을 못 잔 얼굴이었다. 공녀가 잠을 못 자는 얼굴은 원작에 없었다. 나는 초커 매듭을 손끝으로 한 번 더 당겨 보았다. 첫날 밤처럼 꿈쩍하지 않았다. 리본은 처형대까지 같이 갈 생각인 모양이었다.
나는 기획안의 한 줄을 떠올렸다. 「황후, 계약 신부가 올린 차를 마시고 쓰러진다. 미수.」 미수. 죽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차를 마신 사람은 쓰러지지만 살아난다. 작가가 그렇게 썼고, 대본에 쓴 것은 여기서 진짜가 되었다.
마시는 사람만 바꾸면 되었다.
*
스물아홉 번째 화의 다실은 첫 화의 연회장처럼 햇빛이 좋았다. 높은 창으로 들어온 빛이 찻잔 테두리마다 금빛을 얹었다. 황후가 상석에 앉아 있었고, 공작은 황후의 오른편에, 에블린은 황후의 발치에 있었다. 에블린의 주먹 안에 무언가가 쥐여 있었다. 금반지였다.
다실 문이 열렸다. 시녀장이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쟁반 한가운데에 금테 찻잔 하나가 놓여 있었다. 시녀장의 손목에는 수건이 없었다. 손목이 떨렸다. 찻잔 속 차가 떨림을 따라 작게 물결쳤다.
머리 위의 분홍 막대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쪽대본은 간단했다. 「계약 신부, 찻잔을 받아 황후께 올린다. 황후, 마시고 쓰러진다.」
첫 삼 분에 나는 쟁반을 엎었다. 찻잔이 대리석에 떨어져 깨졌다. 공작이 혀를 찼다.
「또 엎음」 「재탕」
슥. 다실 문이 다시 열렸고, 시녀장이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시녀장은 뒷계단 마흔 칸을 다시 올라온 것이었다. 들어오는 걸음이 한 박자 느렸다.
두 번째 삼 분에 나는 찻잔을 집지 않았다. 손을 등 뒤로 감추고 버텼다. 공작이 웃었다. 막대가 반을 넘었을 때 에블린이 일어났다. 쟁반에서 찻잔을 집어 들었다. 내가 올리지 않으면 자기가 올리겠다는 손이었다. 원래대로. 황후가 마시고, 쓰러지고, 미수로 깨어나고, 서른 번째 화가 오도록.
나는 에블린의 손목을 붙잡았다. 찻잔이 기울어 차가 에블린의 하얀 소매에 튀었다. 에블린이 나를 노려보았다.
“놓으세요.”
“에블린 씨가 놓으세요.”
둘 다 놓지 않았다. 반전도 아니었다. 슥.
세 번째 삼 분이 시작되었다. 시녀장이 문지방에서 비틀거렸다. 쟁반이 기울었다가 겨우 바로잡혔다. 시녀장의 얼굴이 하얬다. 세 번을 올랐으니 마흔 칸을 백스무 번 오른 다리였다.
막대가 삼분의 일쯤 찼을 때 나는 쟁반 앞으로 걸어갔다. 찻잔을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공작의 수염 끝이 풀렸다. 에블린이 숨을 멈췄다. 나는 황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대본대로였다. 여기까지는.
“폐하. 생일 연회 때 약속드렸잖아요. 한 달 동안 폐하 차는 제가 먼저 한 모금씩 맛본다고요. 식었는지, 쓴지.”
황후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찻잔을 내 입술에 댔다.
공작이 반 걸음 다가왔다. 에블린이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 시녀장의 쟁반이 손에서 미끄러져 대리석에 떨어졌다. 빈 쟁반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소리가 다실을 채웠다.
나는 마셨다. 한 모금.
차는 미지근했고, 끝맛이 썼다. 살구씨를 깨물었을 때 나는 냄새가 목구멍 안쪽을 긁고 내려갔다. 혀끝이 저렸다.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았다. 숨을 두 번 쉬었을 때 다실의 햇빛이 기울었다. 찻잔 테두리의 금빛이 둘로 갈라졌다. 속이 불편해졌고, 무릎이 내 것이 아니었다. 손에서 찻잔이 빠져나갔다. 바닥이 빠르게 다가왔다.
쓰러지면서 나는 보았다. 황후가 옥좌에서 일어나 나에게 손을 뻗는 것을. 시녀장이 두 손으로 입을 막는 것을. 공작의 얼굴이 굳었다가, 아주 짧은 사이에, 다른 얼굴로 바뀌는 것을. 두둥.
「공녀가 마심????」 「독 시식 진짜 했어」 「황후 대신 쓰러짐ㅠㅠ」 「일흔 번째 화 스포 각 아님?」
북이 울린 뒤에도 장면은 끝나지 않았다. 대본이 아직 남아 있었다. 공작이 굳은 다실에서 혼자 움직였다. 깨어난 사람이었다. 공작이 손을 들어 근위병들을 불렀다. 목소리가 크고 떨렸다. 떨림까지 연기였다.
“보시었사옵니까, 폐하! 공녀가 폐하를 해하려다 제 꾀에 넘어갔사옵니다. 독인 줄 알기에 먼저 마셔 의심을 피하려다 양을 잘못 잰 것이옵니다. 저 아이의 품을 뒤져라!”
근위병의 손이 내 드레스 안쪽 주머니로 들어왔다. 유리병이 빛 속에 들어 올려졌다. 반쯤 빈 병이었다. 공작이 병을 받아 들고 고개를 저었다. 아비가 딸의 죄를 슬퍼하는 얼굴이었다.
붉은 글자가 떠올랐다. 「다음 화 — 처형」
눈이 감기기 전에 나는 에블린을 보았다. 에블린은 반지를 쥔 주먹을 가슴에 대고 서 있었다. 울고 있지 않았다.
*
돌바닥이 차가웠다. 눈을 뜨자 짚 냄새가 먼저 들어왔다. 습기 먹은 짚과 녹슨 쇠 냄새였다. 천장이 낮았고, 벽은 회색이었다. 원작은 감옥을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다. 공녀는 다실에서 체포되고, 다음 화에 바로 처형대로 끌려 나갔다. 감옥은 화면과 화면 사이에 있었다. 내가 보는 동안 벽에 돌 결이 그려지고, 쇠창살에 녹이 그려지고, 구석에 물동이가 그려졌다. 열어 본 곳이 일곱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연 곳이 감옥이라니, 손가락을 접으면서 웃음이 났다. 웃으니 속이 다시 불편해졌다.
창살 너머에 하얀 드레스가 서 있었다. 에블린이 물 한 잔을 들고 있었다. 소매에 찻물 자국이 아직 있었다.
“드세요. 물이에요. 진짜로요.”
창살 사이로 잔을 받았다.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살구씨 냄새가 조금 씻겼다. 에블린은 창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하얀 드레스 자락이 젖은 돌바닥에 닿았다. 에블린은 개의치 않았다.
“왜 드셨어요.”
“미수라면서요. 기획안에. 폐하가 마시면 폐하가 쓰러지고, 제가 마시면 제가 쓰러지고요. 쓰러지는 사람만 바꿨어요.”
“그래서 바뀐 게 뭐예요? 공녀님은 여전히 내일 처형대에 올라가요. 병까지 나왔어요. 아버님이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셨어요.”
“폐하는 안 쓰러지셨잖아요. 시녀장님 찻잔으로 폐하가 안 쓰러지셨어요. 일흔 번째 화에 사람들이 시녀장님을 미워할 일 하나는 줄었어요.”
에블린이 나를 보았다. 젖은 눈이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젖어 있었다.
“내일 가만히 계세요.” 에블린의 목소리가 낮았다. “세 시간도 아니고 삼 분이에요. 삼 분만 가만히 계시면 2호선이에요. 막차 맨 끝 칸이요. 김치도 있다면서요. 전하한테 하신 말 다 들었어요.”
“에블린 씨는 제가 가면 좋아요?”
“좋아요.” 에블린은 망설이지 않았다. 망설이지 않은 것이 이상하게 아팠다. “공녀님은 갈 데가 있잖아요. 저는 없어요. 대본 밖에는 아무 데도 없어요. 화면이 안 비추는 데는 회색이에요. 저한테는 백 번째 화 마지막 장이 집이에요. 공녀님한테는 진짜 집이 있는데, 왜 안 가요? 왜 남의 집에 와서 남의 장을 찢어요?”
나는 물잔을 내려놓았다. 손이 떨렸다. 독 때문인지 에블린 때문인지 몰랐다.
“가면 여기 공녀는 죽어요. 이름도 없이. 누명 쓰고. 사람들은 시원하다고 쓰고, 마흔 화 뒤에 울어요.”
“원래 그래요.”
“원래가 싫다니까요.”
에블린이 주먹을 폈다. 금반지가 손바닥 가운데 굳은살 위에 놓여 있었다. 다실에서 내내 쥐고 있던 반지였다. 쥔 자국이 손바닥에 동그랗게 남아 있었다.
“이거 이제 그냥 금이에요. 전하가 전하가 아니니까요. 끼워도 아무 데도 안 데려가요.” 에블린이 반지를 다시 쥐었다. “그래도 버릴 수가 없어요. 드라마 내내 이거 하나 보고 왔으니까요. 공녀님한테 2호선이 그런 거잖아요. 버릴 수 없는 거요.”
“공녀님이 싫은 거지, 원래가 나쁜 건 아니에요.” 에블린이 일어났다. 드레스 자락에서 물이 떨어졌다. “내일 제 대사는 ‘공녀가 찻잔에 무언가를 타는 것을 보았습니다’예요. 저는 할 거예요. 원래대로 할 거예요. 공녀님이 집에 갈 수 있게요. 저라도 원래대로 해야, 공녀님 등이라도 밀어 드리죠.”
에블린이 복도로 걸어갔다. 하얀 드레스가 회색 속으로 들어가 흐려졌다. 에블린이 지나간 자리만 돌 결이 촘촘했다가 다시 성겨졌다.
*
카시안은 자정 무렵에 왔다. 견장 없는 흰 제복에 망토를 걸쳤고,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깃펜도 봉랍도 없었다. 카시안은 창살 앞에 앉았다. 에블린보다 가까이, 창살에 어깨가 닿을 만큼.
“속은 괜찮소?”
나는 웃음이 터졌다. 웃으니 속이 아팠다. 아파서 웃음이 더 났다.
“백열세 번째예요.”
“세지 마시오.” 카시안도 웃었다. “이번 것은 내가 하고 싶어서 한 말이오. 그러니 세지 마시오.”
짚 냄새 속에서 둘이 한참 웃었다. 웃음이 잦아들자 감옥이 조용해졌다. 물동이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만 났다. 카시안이 창살 너머로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이 위로 향해 있었다. 나는 반지 자국이 남은 손을 카시안의 손바닥 위에 올렸다. 손바닥이 따뜻했다. 다실에서 쓰러질 때 바닥이 다가오던 속도가 이제야 조금 늦춰졌다.
“하나 묻겠소.”
“네.”
“집에 가고 싶소?”
대답이 목에서 막혔다. 살구씨 냄새보다 깊은 데서 막혔다. 막차 맨 끝 칸. 1.5배속으로 돌아가는 휴대전화. 현관의 택배 상자. 엄마의 음성 메시지. 「익으면 찌개 해 먹고.」 김치는 지금쯤 익고 있었다. 내가 없는 원룸에서, 아무도 안 여는 상자 안에서.
“가고 싶어요.”
말하자 눈물이 났다. 공녀의 눈으로 처음 흘리는 눈물이었다. 대본에 없는 데서 나는 눈물은 뜨거웠다. 카시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손을 쥔 손에 힘을 조금 더 주었을 뿐이었다. 괜찮소도 하지 않았다.
“근데 가기 싫어요. 둘 다예요.”
“둘 다라는 대답도 대답이오?”
“네. 제일 솔직한 대답이에요.”
카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외워 두는 얼굴이었다. 무언가 더 묻고 싶은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카시안이 일어나 망토 자락을 털었다.
“나머지 질문은 내일 하겠소. 화면 앞에서.”
카시안이 떠났다. 나는 짚 위에 등을 대고 누웠다. 머리 위 테두리가 낮은 천장에 거의 닿아 있었다. 분홍 막대는 비어 있었다.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났다. 카시안의 군화 소리가 아니었다. 에블린의 구두 소리도 아니었다. 고무 밑창이 젖은 돌을 밟는 소리였다. 찍, 찍. 황궁에는 고무가 없었다.
감옥 복도 허공에 흰 자막이 떠올랐다. 원작 내내 한 번도 본 적 없는 자막이었다.
「특별 출연 — 숏폼 드라마 작가」
회색 후드티를 입은 여자가 노트북을 옆구리에 끼고 걸어왔다. 머리에 연필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여자는 내 창살 앞에 멈춰, 식은 커피가 든 종이컵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안녕하세요, 2호선막차 님. 실물이 더 빨갛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