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308자)
기획안
숏폼 드라마 속 악녀로 빙의했다 · 윤솔채
종이가 오갈수록 틈이 넓어졌다. 처음에는 손가락 한 마디였는데, 이레 밤이 지나자 손바닥이 들어갔고, 스물다섯 번째 화를 앞둔 밤에는 얼굴이 들어갈 만했다. 매트리스에 난 틈이 아니라 커다란 프린터 출력구가 베개 밑에 누워 있는 모양이었다. 틈 가장자리에서 플라스틱 냄새가 났다.
“들어가 보겠어요.”
“머리를 넣는 것이오?” 카시안이 물었다.
“발목 잡아 주세요. 빨려 들어가면 당기시고요.”
카시안이 무릎을 꿇고 내 두 발목을 잡았다. 에블린은 침대 머리맡에서 촛대를 들고 비춰 주었다. 막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에블린도 틈 너머가 궁금한 얼굴이었다. 나는 엎드려 새빨간 머리칼을 한쪽으로 모아 쥐고, 고개부터 틈에 밀어 넣었다.
빛이 바뀌었다. 촛불의 주황이 사라지고 형광등의 흰빛이 얼굴을 덮었다. 나는 프린터 출력함 안에서 바깥을 보고 있었다. 눈앞에 종이 몇 장이 비뚤게 쌓여 있었고, 종이 너머로 방 하나가 비스듬히 보였다.
작은 원룸이었다. 책상 하나, 의자 하나, 접이식 매트리스 하나. 창문에는 암막 커튼이 반쯤 쳐져 있었고, 커튼 틈으로 새벽 가로등 빛이 들어왔다. 바닥에 빈 종이컵이 탑처럼 쌓여 있었다. 열어 본 곳이 여섯이 되었다. 처음으로 화면 밖의 세상이었다.
책상에 작가가 엎드려 자고 있었다. 회색 후드티를 입었고, 머리는 연필 한 자루로 틀어 올려 꽂았다. 이마가 키보드 위에 얹혀 있어서 모니터 위로 「ㅁㅁㅁㅁㅁㅁㅁㅁ」이 끝없이 늘어나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ㅁ」이 한 줄씩 늘었다. 쪽대본의 빨간 펜을 쓴 사람이, 공녀에게 백 번 손바닥을 날린 사람이, 이마로 「ㅁ」을 치며 자고 있었다.
모니터 위쪽에 창이 여러 개 떠 있었다. 하나는 메신저였다. 「편성 담당 · 작가님?」 「편성 담당 · 작가님 주무세요?」 「편성 담당 · 서른 번째 화 결제 전환 장면 확인 부탁드립니다」 또 하나는 문서 창이었다. 제목 칸에 파일 이름이 찍혀 있었다. 「황태자의계약신부_기획안_최종_진짜최종_이게진짜.hwp」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기획안은 화마다 한두 줄씩 적혀 있었다. 스크롤이 중간쯤에 멈춰 있었다.
「스물아홉 번째 화 — 황후, 계약 신부가 올린 차를 마시고 쓰러진다. 미수.」 「서른 번째 화 — 공녀 처형. 결제 시작.」 「서른한 번째 화 — 에블린, 반지를 돌려받는다.」
스크롤 아래로 한참 내려간 자리에 한 줄만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일흔 번째 화 — 공녀는 누명이었다. 황후의 찻잔에 독을 탄 것은 공작, 찻잔을 나른 것은 시녀장. 에블린, 공녀의 무덤 앞에서 운다. 여기서 시청자 다 울어야 함.」
작가가 잠결에 몸을 뒤척였다. 연필이 머리에서 빠져 책상에 떨어졌다. 나는 숨을 삼켰다. 발목이 당겨졌다. 카시안이 나를 끌어냈다. 얼굴에 다시 촛불의 주황이 닿았다.
*
나는 매트리스 위에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머리칼에 토너 가루가 묻어 있었다. 에블린이 촛대를 내려놓았다. 내 얼굴을 보고 무엇을 읽었는지 알아차린 얼굴이었다.
“알고 있었죠.”
에블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공녀 누명인 거. 공작이 탔고 시녀장이 날랐다는 거. 에블린 씨 처음 받은 묶음에 기획안도 있었다면서요.”
“알았어요.” 에블린이 말했다. 목소리가 평평했다. 백 번 연습한 대사처럼. “첫 화 전부터 알았어요.”
“알면서 서른 번째 화에 공녀가 죽어야 한다고 했어요? 누명인데?”
“누명이니까요.” 에블린이 나를 똑바로 보았다. 젖은 눈이 마르고 있었다. “공녀님이 서른 번째 화에서 죽고, 사람들이 시원하다고 쓰고, 마흔 화 동안 공녀님을 잊어요. 그러다 일흔 번째 화에 누명이 밝혀지면 사람들이 울어요. 미안해하고, 첫 화부터 다시 봐요. 「공녀 불쌍해」 「공녀 사랑해」 하고 써요. 원작 공녀님한테 그게 제일 좋은 대접이에요. 살아서는 뺨만 맞던 사람이 죽고 나서는 사람들 눈물을 받아요.”
“죽고 나서 받는 거 말고요.”
나는 내 목소리가 이렇게 큰 줄 몰랐다. 카시안이 문을 돌아보았다. 시녀들은 눈을 반쯤 감은 채 다음 대사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살아 있을 때 받는 거요. 죽고 나서 우는 건 우는 사람 마음 편하자고 우는 거잖아요.”
“그럼 공녀님은요?” 에블린이 일어났다. “공녀님은 살아서 받으려고 남으시게요? 2호선 자리 버리고요? 공녀님이 남으면 작가님은 서른 번째 화를 못 써요. 결제가 안 나오면 일흔 번째 화도 없어요. 누명은 영영 안 밝혀져요. 공녀님은 악녀인 채로 살아요. 저는 백 번째 화를 못 가요. 시녀장은 쟁반을 들고, 전하는 괜찮소를 하고요. 공녀님이 원하는 게 그거예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에블린의 계산이 맞았다. 에블린은 바보가 아니었다. 백 화짜리 대본을 백 번 읽은 사람이었다.
*
스물다섯 번째 화는 원작대로 갔다. 카시안이 대본대로 걸어 들어왔다. 어깨가 비틀리지 않았다. 금빛 눈이 나를 지나쳐 에블린에게 갔다.
“괜찮소?”
에블린이 대본대로 울었다. 백열두 번째 괜찮소였다. 카시안은 대사를 따르기로 한 얼굴이었다. 아니면 따르는 연습을 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쪽대본의 반전은 내 뺨이었다. 「에블린, 계약 신부의 자리를 훔친 공녀의 뺨을 친다.」 에블린이 손을 들었다. 나는 피했다. 슥. 다시 피했다. 슥. 장미 덤불 뒤에 숨었다. 슥. 회랑 끝에서 시녀장이 쟁반을 들고 지나갔다. 손목에 감은 수건이 다시 깨끗했고, 손목은 다시 떨렸다. 네 번째 삼 분이 시작될 때 나는 시녀장의 쟁반 위 찻잔들이 달각거리는 소리를 셌다. 셀 수 없을 만큼 빨랐다.
다섯 번째 삼 분에 나는 피하지 않았다.
에블린의 손이 올라갔다. 손바닥 가운데 굳은살이 보였다. 백 번 연습한 손이었다. 나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기다렸다.
짝.
왼뺨이 뜨거워졌다. 귓속에서 초침 소리가 잠깐 지워졌다가 돌아왔다. 고개가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돌아간 시선 끝에서 시녀장이 쟁반을 들고 회랑을 지나갔다. 다시 오지 않는 걸음이었다. 두둥.
「드디어 맞음」 「근데 왜 안 시원하지」 「공녀 지금 시녀장 보고 맞은 거임?」 「사이다 맛이 이상함」
굳은 정원에서 에블린의 손바닥이 허공에 떠 있었다. 에블린은 자기 손바닥을 보고 있었다. 백 번 친 손인데 처음 친 손처럼 보았다.
*
스물여섯 번째 화를 앞둔 밤, 나는 뒷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왼뺨이 아직 부어 있었다. 시녀장이 나를 보고 일어났다가, 내 뺨을 보고 도로 앉았다. 찬물에 적신 수건을 내밀었다. 수건이 손목에서 내 뺨으로 옮겨 왔다.
“맞으셨습니까?”
“한 번이요. 계단 덜 오르시라고요.”
시녀장은 말없이 수건 끝을 접어 내 뺨에 다시 대 주었다. 나는 기획안의 노란 줄을 떠올렸다. 찻잔을 나른 것은 시녀장.
“시녀장님. 스물아홉 번째 화에 황후 폐하 차를 누가 날라요?”
시녀장의 손이 내 뺨에서 멈췄다.
“공작 각하가 생일 연회 때 뭐라고 하셨는지 알아요. 제가 봤어요. 그 차를 시녀장님이 나르면, 서른 번째 화에 제가 죽어요. 일흔 번째 화에 사람들이 시녀장님을 미워해요. 그 전에 말해 주시면—”
“공작저 세탁장에 제 딸이 있습니다.” 시녀장이 내 말을 끊었다. 목소리가 낮고 고르게 깔렸다. “스물두 살입니다. 빨래를 잘합니다. 제가 각하 말씀을 안 들으면 딸이 세탁장에서 나옵니다. 나와서 어디로 갈지는 대본에 없습니다. 대본에 없으면 아무 데도 없는 겁니다.”
나는 수건을 쥐었다. 찬물이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
“공녀님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시녀장이 덧붙였다. “그래도 딸 대신 공녀님을 고를 수는 없습니다. 공녀님도 저 대신 2호선을 고르시겠지요. 다들 자기 것을 고릅니다.”
시녀장은 2호선이 무엇인지 몰랐다. 어디선가 내 혼잣말을 들었을 것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고르지 못한 채 계단을 올라왔다.
*
스물여섯 번째 화는 황후의 다실이었다. 쪽대본에서는 공작이 황후에게 아뢰는 장면이었다. 다음 달 초하루에 계약 신부가 손수 차를 올리는 의식을 열자는 것이었다. 기획안의 스물아홉 번째 화가 바로 이 의식이었다. 황후가 쓰러질 찻잔은 초하루의 다실에 놓일 차례였다.
공작이 황후 앞에 허리를 숙였다. 수염 끝까지 공손했다.
“계약 신부가 폐하의 차 시중을 자청했다 들었사옵니다. 기특한 마음이니 초하루에 정식으로 자리를 마련하심이 어떠하올지. 신부가 손수 달인 차를 손수 올리면, 황실과 공작가가 한 잔에 담기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막대가 반을 넘었다. 황후가 나를 보았다. 대본대로라면 나는 고개를 숙여 「영광이옵니다」 하고 받아야 했다. 시녀장이 문 옆에서 쟁반을 든 채 굳어 있었다. 쟁반 위의 찻잔이 아주 작게 떨렸다.
나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공작에게로 몸을 돌렸다. 반지 낀 손을 가슴에 얹었다.
“아버지, 그렇게 좋은 자리면 첫 잔은 아버지가 올리세요. 공작가가 먼저 마시고, 황실이 다음에 마시고요. 한 잔에 담긴다면서요. 딸이 아버지 몫까지 다 차지하면 안 되죠.”
공작의 수염 끝이 멈췄다. 황후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황후의 눈이 공작에게로 천천히 옮겨 갔다. 한 달 동안 차를 마셔 본 사람의 눈이었다. 차 맛을 알게 된 사람은 차를 올리는 손도 보았다. 두둥.
「공작 독 마셔라ㅋㅋㅋㅋ」 「공녀가 판 다 읽고 있음」 「일흔 번째 화 스포 아님?」
마지막 글자가 내 눈에 오래 남았다. 누군가 이미 냄새를 맡고 있었다. 굳은 다실에서 공작이 나를 보았다. 공작의 눈에는 노여움보다 계산이 많았다. 판이 바뀐 줄을 아는 사람의 눈이었다.
*
자정에 에블린의 방에서 종이 한 장이 나왔다. 받는 사람의 이름이 맨 위에 적혀 있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카시안 님께.
스물일곱 번째 화에서 공녀 뺨 치시면 백 번째 화까지 가십니다. 황태자로, 남주로, 에블린 옆에서. 안 치시면 스물여덟 번째 화에서 폐위입니다. 황태자 자리 내려놓고 드라마에서도 내려가세요.
고르세요. 카시안 님이 처음으로 고르시는 거예요. 원하셨잖아요 — 작가」
카시안은 종이를 오래 들고 있었다. 촛불이 종이 뒤에서 비쳐 글씨가 금빛 눈에 거꾸로 어렸다. 에블린은 침대 끝에서 숨을 죽였다. 나는 부은 뺨에 수건을 댄 채 서 있었다. 수건이 미지근해져 있었다.
카시안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하나 묻겠소. 내가 당신을 치지 않으면, 나는 어떻게 되오?”
“폐위되고, 내려가요. 사라져요.”
“당신은?”
“저는 어차피 서른 번째 화예요.”
카시안이 종이를 접어 제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금 견장이 촛불에 흔들렸다.
“생각해 보겠소.”
카시안이 방을 나갔다. 나는 한참 뒤에 복도로 나갔다. 회색 복도 끝, 연필 선이 끝나는 자리에 흰 제복이 혼자 서 있었다. 카시안은 오른손을 천천히 어깨높이까지 들었다가 내렸다. 다시 들었다가 내렸다. 허공에 대고, 아무도 없는 자리에 대고. 연습하는 손이었다. 치는 연습인지 버티는 연습인지, 복도 끝까지는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