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330자)
프린터 너머
숏폼 드라마 속 악녀로 빙의했다 · 윤솔채
에블린의 질문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다음 날 밤 자정에 다시 에블린의 방으로 갔다. 카시안이 먼저 와 있었다. 이번에는 커튼 뒤가 아니라 의자에 앉아 있었고, 무릎 위에 깃펜과 잉크병을 올려놓고 있었다. 집무실에서 가져왔다고 했다.
“볼펜이 없다기에.”
“볼펜을 아세요?”
“모르오. 그래서 이것저것 가져왔소.” 카시안이 제복 주머니에서 붓, 목탄, 봉랍을 차례로 꺼냈다. 봉랍은 왜 가져왔는지 본인도 몰랐다.
에블린은 침대 끝에 앉아 우리를 보았다. 막지는 않았다.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얼굴이었다. 대신 팔짱을 끼고, 베개를 들어 올리는 내 손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베개 밑 매트리스에 손가락 한 마디 너비의 가느다란 틈이 있었다. 틈 안쪽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형광등 빛이었다. 화면 속 황궁에는 촛불과 샹들리에와 햇빛뿐인데, 틈 안의 빛만 사무실처럼 푸르스름하고 납작했다. 틈에 코를 대자 식은 커피 냄새가 났다. 열어 본 곳이 다섯이 되었다. 틈 하나를 연 것치고는 손가락이 무거웠다.
쪽대본 한 장을 뒤집어 깃펜으로 썼다. 깃펜은 처음이라 첫 글자에서 잉크가 뭉쳤다.
「작가님. 2호선막차예요. 저 안 맞을 건데요.」
종이를 틈에 밀어 넣었다. 종이 끝이 틈에 닿는 순간, 지이잉 소리가 거꾸로 났다. 프린터가 종이를 뱉는 소리를 뒤로 감은 소리였다. 종이가 손가락 사이에서 빨려 들어갔다.
우리 셋은 베개 밑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도 숨을 쉬지 않았다. 초침이 열 번쯤 울렸다.
지이잉. 종이 한 장이 밀려 나왔다. 따뜻했다. 손글씨가 아니라 타자로 친 글씨였다.
「헐 뭐야 이거 어떻게 들어옴」
한 장이 더 나왔다.
「프린터 출력함에서 종이가 거꾸로 들어갔어요 지금. 제 눈으로 봤어요. 님 진짜 거기 있는 거 맞아요?」
카시안이 종이를 받아 들고 촛불에 비췄다. “이 사람이 내 대사를 쓰는 자요?”
“네. 지금 엄청 놀라신 것 같아요.”
“글씨가 놀란 것이 보이오?”
“헐이 들어가면 놀란 거예요.”
*
종이가 오갔다. 내가 깃펜으로 쓰면, 초침이 스무 번쯤 울린 뒤 타자 글씨가 나왔다. 작가는 빨랐다. 콜센터 채팅 상담을 하던 동기들보다 빨랐다. 카시안은 종이가 나올 때마다 먼저 받아 코에 댔다. 식은 커피 냄새가 날 때마다 미간을 좁혔다. 황궁에는 커피가 없었다.
“쓰고 탄 냄새요. 작가라는 자는 무엇을 태워 마시오?”
“잠이요. 잠을 태워서 마셔요.”
카시안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농담이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반쯤은 농담이 아니었다.
「서른 번째 화는 왜 못 바꿔요?」
「서른 번째 화부터 유료예요. 처형이 결제 버튼이에요. 사람들이 공녀 목 떨어지는 거 보려고 코인 충전해요. 원작 반응 보면 그래요. 그거 안 하면 결제가 안 나와요. 결제 안 나오면 편성팀이 서른한 번째 화부터 접어요. 그럼 백 번째 화까지 못 가요. 에블린 결말도 없어요.」
에블린이 내 어깨 너머로 종이를 읽었다. 에블린의 숨이 한 번 끊겼다가 이어졌다. 작가와 에블린은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요즘 조회수 엄청 올랐잖아요. 그거 다 공녀 덕이잖아요.」
「조회수는 공짜예요. 결제는 다른 얘기래요. 편성 담당이 그랬어요. 공짜로 웃는 사람이랑 돈 내고 보는 사람은 다르대요. 다르겠죠. 저도 공짜로만 봐요.」
틈 너머에서 소리가 들렸다. 띠링. 메신저 알림 소리였다. 화면 속 세상에는 없는 소리라 카시안이 칼자루를 잡았다. 틈에 눈을 대자 푸른빛 사이로 모니터 가장자리가 보였다. 비스듬하게, 아주 조금. 모니터 구석에 알림 창이 떠 있었다.
「편성 담당 · 작가님 서른 번째 화 원고 오늘 중으로 부탁드려요. 결제 전환 장면 꼭 살려 주시고요」
알림 창 옆에는 다 식은 커피가 든 종이컵이 있었고, 종이컵 옆에 포스트잇이 모니터 테두리를 따라 줄줄이 붙어 있었다. 하나가 읽혔다. 「서른 번째 화 = 공녀 처형 = 결제」 포스트잇 글씨가 쪽대본의 빨간 펜과 같았다.
「작가님은 왜 이거 쓰세요?」
이번에는 초침이 서른 번 넘게 울렸다. 나온 종이는 짧았다.
「남의 이름으로 몇 년 썼어요. 웹소설 대필이랑 숏폼 각색이랑. 이게 처음으로 제 이름 달고 나간 거예요. 백 번째 화까지 다 쓰고 싶어요. 끝까지 쓴 거 하나만 있으면 다음이 있어요.」
나는 종이를 무릎에 내려놓았다. 숏폼 하나 끝까지 보는 것도 1.5배속이 아니면 못 하던 나였다. 백 번째 화까지 쓰고 싶다는 말이 막차 창밖의 터널처럼 길었다.
「에블린 씨 웃는 장면, 진짜 백 번째 화에 있어요?」
이번 답은 빨랐다.
「있어요. 제일 먼저 쓴 장면이에요. 기획안보다 먼저요. 맨날 울기만 하던 애가 마지막에 소리 내서 웃는 거. 그거 하나 쓰고 싶어서 백 번째 화까지 짰어요.」
에블린이 종이를 내 손에서 가져갔다. 두 번 읽고, 접어서 가슴에 댔다. 백 번째 화까지 짠 사람이 자기를 위해 맨 먼저 쓴 장면이 있다는 것을 에블린은 이 밤에 처음 글씨로 보았다.
「그럼 공녀 이름은 왜 안 지어 주셨어요?」
답이 오지 않았다. 초침이 백 번을 넘게 울렸다. 에블린이 졸음을 참으며 눈을 비볐고, 카시안은 봉랍을 만지작거렸다. 마침내 지이잉 소리가 났다. 나온 종이에는 다른 말이 쓰여 있었다.
「님이 안 맞으면 제가 다른 사람을 때리게 쓸 거예요. 진짜로.」
*
스물세 번째 화의 쪽대본은 아침에 에블린이 가져왔다. 에블린은 종이를 내밀며 내 눈을 피했다.
「스물세 번째 화. 황태자궁 회랑. 계약 신부가 황후 폐하께 무례했다는 소문. 카시안, 공녀를 꾸짖고 뺨을 친다. 계약 신부의 자리를 일깨운다.」
여백의 빨간 펜은 한 줄이었다. 「이번엔 진짜」
회랑에 카메라가 켜졌다. 머리 위 테두리에 분홍 막대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카시안이 기둥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 걸음이 이상했다. 다리는 대본대로 걸어오는데, 어깨가 다리를 뒤에서 잡아당기는 것처럼 비틀려 있었다.
“계약 신부.” 카시안의 입에서 대사가 나왔다. 카시안의 목소리였지만 카시안의 말투가 아니었다. “황후 폐하께 무례를 범했다 들었소.”
카시안의 오른손이 올라갔다. 손바닥이 내 왼뺨 옆에서 멈췄다. 멈춘 손이 떨렸다. 손목의 힘줄이 흰 소매 밑에서 불거졌다. 금빛 눈이 나를 보았다. 대본이 손을 들어 올리고, 카시안이 손을 붙들고 있었다.
나는 피하지 않았다. 피하면 손바닥이 어딘가에 떨어질 것이었다. 카시안의 손은 떨어지지도 내려가지도 않았다. 막대가 찼다. 슥.
두 번째 삼 분에도 손이 올라갔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반 뼘 낮은 곳에서 멈췄다. 카시안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슥.
세 번째 삼 분에는 손이 올라가는 속도가 느려졌다. 네 번째에는 카시안의 입술이 깨물려 붉었다. 다섯 번째 삼 분이 시작될 때 회랑 끝에서 시녀장이 쟁반을 들고 지나갔다. 원작에 있는 지나가는 그림이었다. 시녀장의 오른 손목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카시안이 버티는 만큼 시녀장도 다시 걸었다.
카시안의 손이 내 뺨 옆에서 다시 떨렸다. 카시안은 손을 내리려 했고 대본은 손을 내리치려 했다. 둘 다 이기지 못해서 손은 허공에 있었다. 이대로면 둘 중 하나가 지기 전까지 시녀장이 회랑을 걸었다.
막대가 삼분의 이를 넘었을 때 나는 손을 뻗었다. 떨리는 카시안의 손목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붙잡은 손을 천천히 끌어당겨 내 머리 위에 얹었다. 손바닥이 새빨간 머리칼 위에 내려앉았다. 대본이 내리치려던 힘이 갈 곳을 잃고 손바닥 안에서 풀렸다. 카시안의 손가락이 내 머리칼 사이로 아주 조금 움직였다. 쓰다듬는 모양이 되었다.
회랑에 바람 한 점 없었다. 카시안이 숨을 내쉬었다. 드라마 내내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긴 숨이었다. 두둥.
「아니 이거 뭐야ㅠㅠㅠㅠㅠ」 「뺨 치랬더니 쓰다듬음」 「설렘사 직전」 「작가님 이거 의도임?」
굳은 회랑에서 카시안의 손은 내 머리 위에 그대로 있었다. 손바닥이 뜨거웠다. 테두리 아래로 분홍 막대가 꽉 찬 채 반짝였다.
*
카메라가 꺼진 회랑에서 에블린이 나를 기다렸다. 하얀 드레스 자락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화가 난 에블린을 처음 보았다. 대본의 에블린은 화 대신 울었다.
“전하를 깨우지 마세요.”
“제가 깨운 게 아니에요. 전하가 스스로 버틴 거예요. 다섯 번을요.”
“다섯 번 버티는 동안 전하 손목 보셨어요? 시녀장 손목처럼 될 거예요.” 에블린이 한 걸음 다가왔다. “전하는 원래 아프지 않은 분이었어요. 괜찮소, 하고 웃으면 됐어요. 공녀님이 오고 나서 전하가 땀을 흘려요. 대본에 없는 땀이요.”
“에블린 씨는 전하가 땀 흘리는 게 싫어요, 아니면 전하가 에블린 씨 대본에서 멀어지는 게 싫어요?”
에블린의 손이 드레스 자락을 놓았다. 구겨진 자국이 하얀 비단에 남았다. 에블린은 소매에서 낡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다른 쪽대본보다 누렇고, 접힌 자리가 닳아 하얗게 일어나 있었다. 처음 받은 묶음 맨 뒤에 있던 장이라고 했다. 백 번째 화의 마지막 장이었다.
에블린이 소리 내어 읽었다.
「황궁 정원, 저녁. 황후의 관을 쓴 에블린이 카시안의 손을 잡고 분수 앞에 선다. 카시안이 무어라 속삭인다. 에블린,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는다. 웃음소리가 정원 끝까지 간다. 화면, 천천히 어두워진다.」
“이거 하나예요.” 에블린이 종이를 다시 접었다. 접는 손이 익숙했다. 백 번은 넘게 접었다 편 종이였다. “전하가 무어라 속삭이는지 대본에도 안 나와요. 저는 그게 너무 궁금해요. 그걸 들으려면 전하가 원래대로 백 번째 화까지 가셔야 해요.”
나는 할 말을 찾다가 찾지 못했다. 에블린의 행복은 종이 한 장 크기였다. 손바닥에 들어갔다. 너무 작아서 빼앗을 수가 없었다.
*
밤에 카시안이 깃펜을 들고 에블린의 방에 갔다. 나는 문 앞에서 기다렸다. 카시안은 베개 밑 틈 앞에 무릎을 꿇고, 쪽대본 뒷면에 무언가를 오래 썼다. 깃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길었다. 에블린이 침대 끝에서 카시안의 등을 보았다.
카시안이 종이를 틈에 넣기 전에 내게 보여 주었다. 처음 쓰는 사람의 글씨라 획이 굵었다.
「나는 괜찮지 않소. 내 대사는 누가 정하오? 당신이오? 그렇다면 당신은 왜 나에게 묻지 않소?」
종이가 거꾸로 빨려 들어갔다. 우리는 기다렸다. 초침이 울렸다. 에블린이 무릎 위에서 손가락을 꼬았다. 지이잉.
나온 종이는 카시안에게 쓴 것이 아니었다. 맨 위에 「스물네 번째 화 — 수정본」이라고 찍혀 있었고, 장면 대신 빨간 펜 글씨만 있었다.
「2호선막차 님, 카시안까지 건드리지 마세요. 카시안은 남주예요. 남주가 대본 안 따르면 드라마가 무너져요. 다음 화부터 카시안은 원래대로 갑니다. 대사 안 따르면 서른 번째 화 전에 카시안을 내릴 거예요. 진짜로요 — 작가」
카시안이 종이를 받아 읽었다. 금빛 눈이 「내릴 거예요」에서 멈췄다.
“내린다는 것이 무엇이오?”
에블린이 대답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드라마에서 사라진다는 거예요,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