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336자)
2호선막차
숏폼 드라마 속 악녀로 빙의했다 · 윤솔채
황태자가 커튼 뒤에 숨는 모습은 원작 백 화짜리 드라마를 통틀어 없었다. 키가 커서 커튼이 정강이까지밖에 안 내려왔고, 커튼 밑으로 흰 제복 바지와 검은 군화가 고스란히 보였다. 나는 침대 옆 협탁 밑에 쪼그리고 앉아 양파 접시 냄새를 맡고 있었다. 눈이 따가웠다.
에블린은 침대에 누워 있지 않았다. 침대 끝에 앉아 우리 둘이 숨은 자리를 차례로 보았다.
“두 분 다 나오세요. 커튼 밑으로 군화 보여요.”
카시안이 커튼을 걷고 나왔다. 군화를 내려다보는 얼굴이 진지했다. 나는 협탁 밑에서 기어 나오다 정수리를 찧었다.
“공녀님은 그 밑에서 뭐 하셨어요?”
“양파가 눈에 들어와서 울고 있었어요.”
에블린의 입술 끝이 움찔했다. 아주 잠깐이었다. 에블린은 이를 깨물어 입꼬리를 도로 눌렀다.
자정이 되자 베개 밑에서 지이잉 소리가 났다. 카시안이 소리 나는 데를 보며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종이가 혀처럼 밀려 나오자 칼자루에서 손을 떼고 몸을 숙였다. 토너 냄새에 미간이 좁혀졌다. 에블린이 종이를 모아 들었다가, 잠깐 망설이더니 맨 위 장을 카시안에게 내밀었다.
카시안은 종이를 받아 촛불에 비춰 읽었다. 금빛 눈이 줄을 따라 내려갔다.
「스무 번째 화. 황후의 생일 연회. 카시안, 에블린을 바라본다(눈빛으로 사랑). 카시안: 괜찮소?」
「스물한 번째 화. 연회장 발코니. 공녀가 에블린을 밀친다. 카시안, 에블린을 부축한다. 카시안: 괜찮소?」
카시안은 종이를 한 장 더 달라고 했다. 에블린이 묶음에서 한 장을 더 빼 주었다. 카시안이 읽었다. 또 한 장. 카시안의 손끝이 같은 자리에서 멈췄다. 세 장 모두 같은 대사가 있었다.
“괜찮소.” 카시안이 소리 내어 읽었다. “괜찮소. 괜찮소.”
“전하 대사 중에 제일 많아요.” 에블린이 말했다. “드라마 내내 백열한 번이요.”
“그걸 세었소?”
“전하가 그 말을 하실 때마다 제가 울어야 하니까요.”
카시안은 종이를 내려놓았다. 창밖의 흰빛을 오래 보았다. 나는 카시안이 연회장에서 처음 내게 던진 질문을 떠올렸다. 어째서 잔을 제 머리에 엎었소. 괜찮소 백열한 번 사이에 끼어 있던 단 하나의 다른 문장이었다.
“나는 드라마 내내 괜찮냐고만 묻는 사람이었구려.” 카시안이 말했다. “대답은 한 번도 듣지 않고.”
“대본에는 대답도 있어요. ‘에블린, 괜찮다며 운다.’”
“그것도 대답이오?”
에블린은 말이 없었다. 카시안이 종이를 협탁에 내려놓고 에블린 앞으로 갔다. 무릎을 조금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 대본에서 수없이 하던 자세였는데, 손에 종이가 없으니 다른 사람의 자세 같았다.
“그럼 지금 묻겠소. 카메라도 대본도 없는 데서. 에블린, 당신은 괜찮소?”
에블린의 입이 열렸다. 대본대로라면 괜찮다며 울어야 했다. 눈가가 붉어졌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입술이 두 번 달싹였다.
“……모르겠어요.”
백열한 번의 괜찮소 끝에 처음 나온 대답이었다. 에블린은 대답한 자기 입을 손등으로 눌렀다. 방 안이 너무 무거워져서 나는 공작 흉내를 냈다. 수염 끝을 꼬는 손가락, 반지 앞에서 굳은 손목, 「공작가의 체면을—」 하고 입만 벙긋거리는 얼굴. 카시안이 고개를 돌렸다. 어깨가 떨렸다. 에블린의 입꼬리가 다시 움찔했다. 이번에는 더 오래였다. 에블린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지 마세요.”
“웃어도 돼요. 카메라 꺼졌어요.”
“안 돼요.” 에블린의 목소리가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왔다. “대본에 없는 데서 웃으면 백 번째 화 웃음이 닳아요. 반전이 닳는 것처럼요. 저는 그 웃음 하나만 보고 백 번째 화까지 와요.”
손을 내린 에블린의 얼굴은 다시 평평했다. 웃음을 참느라 깨문 입술 안쪽이 붉었다. 나는 더는 흉내를 내지 않았다.
*
스무 번째 화의 생일 연회는 황궁에서 가장 큰 장면이었다. 연회장의 샹들리에가 전부 켜졌고, 높은 창으로 들어오는 오후 햇빛이 금빛 커튼을 통과해 바닥에 꿀색으로 고였다. 원작에서 가장 비싼 화였다고, 막차에서 본 댓글이 그랬다. 귀족들이 줄지어 황후에게 선물을 바쳤다.
나는 반전보다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연회장 구석, 시녀들이 드나드는 작은 문 옆이었다. 공작이 시녀장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화면 가장자리라 원작에서는 지나가는 그림이었을 자리였다. 시녀장은 고개를 숙이고 듣고 있었고, 쟁반을 든 오른 손목이 떨렸다. 공작이 말을 마치고 시녀장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 번 두드렸다. 서재에서 내 뺨을 쓸어 보던 손이었다.
나는 드레스 안쪽 주머니를 만졌다. 유리병은 그대로 있었다. 병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공작 뭐 함?」 「저 구석 뭔데 왜 자꾸 비춰」
반전은 의외의 데서 왔다. 귀족들이 차례로 선물을 바치는 사이 내 차례가 왔는데, 나는 준비한 것이 없었다. 원작의 공녀는 이 자리에서 에블린의 선물을 깎아내리다 뺨을 맞았다. 나는 황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손에 든 것이 없어서 손바닥을 펴 보였다.
“폐하. 제 선물은 다음 달 차 시중이에요. 한 달 동안 폐하 차는 제가 올리고 제가 먼저 한 모금씩 맛볼게요. 식었는지, 쓴지.”
황후의 눈이 가늘어졌다. 시녀장의 쟁반이 아주 작게 달각거렸다. 공작이 연회장 구석에서 고개를 들었다. 나는 공작과 눈을 맞추지 않았다. 두둥.
「?? 독 시식 담당 자처함??」 「공녀 뭘 알고 있는 거지」 「공작 표정 또 나옴ㅋㅋ」
스물한 번째 화의 발코니에서는 에블린이 먼저 난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번에는 붙잡지 않았다. 대신 내가 먼저 난간을 넘을 듯이 몸을 기울였다. 놀란 에블린이 반사적으로 내 팔을 잡았다. 여주인공이 악녀를 붙잡아 구하는 장면이 되었다. 에블린이 내 팔을 쥔 채로 나를 노려보았다. 내가 했던 그대로 돌려받은 얼굴이었다.
“치사해요.”
“배웠어요. 에블린 씨한테.”
두둥. 굳은 발코니에서 카시안이 우리 둘을 보고 있었다. 대본에 있던 「괜찮소?」를 카시안은 하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문 채 서 있었다. 대본에 쓰인 말을 한 번 건너뛴 입이었다.
*
카메라가 꺼진 뒤 나는 뒷계단을 내려갔다. 마흔 칸은 이제 끝까지 나무 결이 그려져 있었다. 시녀장은 주방 옆 작은 방에서 찻잔을 닦고 있었다. 내가 감아 준 수건이 아직 손목에 있었다. 수건은 닳아서 실밥이 보였다.
“아까 연회장 구석에서 공작 각하가 뭐라고 하셨어요?”
시녀장의 손이 찻잔 안쪽에서 멈췄다. 행주가 같은 자리를 두 번 돌았다.
“차 시중을 잘 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다음 달 차는 제가 올린다고 했잖아요. 시녀장님은 안 올리셔도 돼요.”
“공녀님 말씀은 연회장 안의 말씀입니다.” 시녀장이 찻잔을 엎어 선반에 올렸다. “공작 각하 말씀은 연회장 밖의 말씀이고요. 저는 밖에 사는 사람입니다.”
“공작가에 뭐가 잡혀 있어요? 돈이요? 사람이요?”
시녀장은 대답 대신 다음 찻잔을 집었다. 원작에서 시녀장은 대사가 하나뿐인 사람이었다. 대사가 하나뿐인 사람에게 사연이 없을 리 없었다. 화면이 묻지 않았을 뿐이었다.
“공녀님.” 시녀장이 찻잔을 닦으며 말했다. 나를 보지 않았다. “모르시는 게 낫습니다. 저도 몰랐을 때가 나았습니다. 계단이 무겁다는 것을 알기 전에는요.”
나는 에블린의 말을 떠올렸다. 깨어난 사람은 아프다. 시녀장은 아팠고, 아픈 채로 찻잔을 닦았다. 나는 행주를 하나 더 집어 시녀장 옆에서 찻잔을 닦았다. 둘이 닦으니 선반이 금방 찼다. 시녀장은 내 행주질을 곁눈으로 보고 한마디 했다.
“공녀님은 잔 안쪽을 안 닦으십니다.”
“집에서도 맨날 혼났어요. 겉만 닦는다고.”
시녀장이 다시 입꼬리만 움직여 웃었다. 공작이 무엇을 속삭였는지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
다음 날 밤 에블린이 내 방으로 왔다. 노크는 없었다. 손에 종이 한 장을 들고 있었다. 쪽대본 묶음과 따로 나온 종이였다. 에블린의 손이 떨렸다. 드라마 내내 떨지 않던 손이었다.
“공녀님 거예요.”
종이는 쪽대본이 아니었다. 맨 위에 휴대전화 화면이 그대로 인쇄되어 있었다. 숏폼 앱의 댓글 창이었다. 회색 프로필 동그라미 옆에 낯익은 아이디가 찍혀 있었다.
「2호선막차 · 악녀도 이름은 있어야죠. 백 번 맞다 죽는 동안 이름 한 번을 안 불러 주네」
바로 아래에 답글이 달려 있었다. 아이디 옆에 작은 연필 표시가 붙어 있었다. 작가 표시였다.
「└ 작가 · 그럼 님이 들어가서 살아 보세요^^」
막차의 진동이 발바닥으로 올라왔다. 덜컹, 덜컹. 화면 속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덜컹거리지 않는데, 내 발바닥은 2호선 바닥을 기억했다. 졸음 속에서 엄지로 댓글을 쓰고, 「등록」을 누르고, 휴대전화를 무릎에 내려놓던 순간. 답글 알림은 보지 못했다. 잠이 먼저 왔다.
인쇄된 화면 아래 여백에 빨간 펜 글씨가 빽빽했다. 지금까지 본 빨간 펜 가운데 가장 길었다.
「2호선막차 님. 거기 계신 거 알아요. 님 댓글 시각이랑 촬영본이 처음 바뀐 시각이 같아요. 제가 장난으로 단 답글이에요. 진짜로 들어가실 줄 몰랐어요. 미안해요.
그런데 서른 번째 화는 못 바꿔요. 바꾸면 이 드라마가 끝나요. 대신 하나 써 뒀어요. 대본에 쓴 건 거기서 진짜가 되니까.
서른 번째 화에서 공녀 목이 떨어지는 순간, 공녀 안에 든 사람은 2호선 그 자리로 돌아간다.
휴대전화 아직 거기서 돌아가고 있을 거예요. 1.5배속으로. 안 떨어지면 못 돌아가요. 원래대로 가면 다 집에 가요. 님도, 에블린도, 저도. 그러니까 제발 맞으세요 — 작가」
나는 종이를 두 번 읽었다. 세 번째에는 「2호선 그 자리」만 읽었다. 시청역에서 탄 막차의 맨 끝 칸, 노약자석 바로 옆 자리. 내 자리였다. 막차를 타기 전에 엄마한테서 온 음성 메시지를 들었다. 「이레야, 김치 보냈다. 냉장고 맨 아래 넣어라. 익으면 찌개 해 먹고.」 김치는 아직 택배 상자째 현관에 있을 것이었다. 무릎 위에서 휴대전화가 1.5배속으로 돌아가는 소리가 귓속에서 났다. 공녀의 목소리가 빠르게, 가늘게.
카시안이 문 앞에 와 있었다. 언제 왔는지 몰랐다. 대본 밖의 걸음은 소리가 작았다. 카시안이 내 어깨 너머로 종이를 읽었다. 금빛 눈이 맨 위의 아이디에서 멈췄다.
“2호선막차.” 카시안이 처음 보는 낱말을 발음했다. “그게 당신 이름이오?”
“닉네임이에요. 이름은 아니고요.”
“그럼 이름은—”
“전하.” 에블린이 카시안의 말을 끊었다. 에블린은 나를 보았다. 떨리던 손이 멎어 있었다. 젖은 눈이 처음으로 웃음에 가까운 모양을 하고 있었다. “들으셨죠. 원래대로 가면 공녀님도 집에 가요. 아무도 안 죽어요. 공녀님은 2호선에서 깨고, 저는 백 번째 화에서 웃고, 작가님은 드라마를 끝까지 쓰고요. 다 행복해요.”
머리 위 테두리의 분홍 막대는 비어 있었다. 그런데도 왼쪽 귀에서 초침이 째깍거렸다. 째깍, 째깍. 아홉 화가 남아 있었다. 아홉 번의 삼 분 뒤에 처형대가 있었고, 처형대 너머에 2호선 막차의 맨 끝 칸이 있었다.
“이제 맞으실 거죠, 공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