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396자)

아버지의 손

숏폼 드라마 속 악녀로 빙의했다 · 윤솔채

공작저로 가는 마차는 덜컹거리지 않았다⁠. 바퀴는 돌았지만 창밖은 흰 물감이었고⁠, 마차 바닥은 길이 아니라 시간 위를 굴러가는 것처럼 매끄러웠다⁠. 원작에서 공작저는 서재 하나만 나왔다⁠. 공녀가 불려 가 뺨을 맞는 방이었다⁠. 열다섯 번째 화의 쪽대본은 짧았다⁠.

「⁠공작의 서재⁠. 공작⁠, 계약 신부가 된 딸을 칭찬하는 척하다 뺨을 친다⁠. 오른뺨⁠. 반지 낀 손은 건드리지 말 것⁠.⁠」

여백의 빨간 펜은 이번에도 친절했다⁠. 반지 낀 손은 건드리지 말 것⁠. 반지는 서른 번째 화에서 회수해야 하니까⁠.

마차 맞은편에는 에블린이 앉아 있었다⁠. 황후가 계약 신부의 친정 나들이에 말동무를 붙여 보냈다⁠. 원작에서는 에블린이 공작저에 간 적이 없었다⁠. 급수정이 낳은 동행이었다⁠. 에블린은 무릎 위에 손을 모으고 창밖의 흰빛을 보고 있었다⁠.

“⁠시녀장한테 들었어요⁠.⁠” 내가 먼저 말했다⁠. “⁠제가 피하면 아버지가 다른 사람을 때린대요⁠.⁠”

“⁠원래 그래요⁠.⁠” 에블린은 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공작 각하의 손은 어딘가에는 떨어져야 해요⁠. 원작에서는 늘 공녀님 뺨이었고요⁠. 공녀님 뺨이 아니면 다른 뺨이에요⁠.⁠”

“⁠에블린 씨는 어떻게 그렇게 다 알아요⁠?⁠”

“⁠쪽대본을 백 번 읽으면 대본에 없는 것도 보여요⁠.⁠”

*

공작의 서재는 화면에 여러 번 나와서 촘촘했다⁠. 벽에 사냥 그림이 걸려 있었고⁠, 책상 위 은잉크병이 촛불을 받아 번들거렸다⁠. 문 옆에는 첫날 밤 내 침실 문밖에서 같은 말을 되뇌던 시녀가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원작에서 늘 공녀의 뒤를 따라다니던 시녀였다⁠.

공작이 책상에서 일어났다⁠. 회색 수염 아래로 웃음이 번졌다⁠.

“⁠장하다⁠. 황태자의 반지를 네 손에 끼다니⁠. 공작가에 이만한 경사가 없구나⁠.⁠”

막대가 차올랐다⁠. 공작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내 오른뺨을 손등으로 쓸어 보더니 손을 들었다⁠.

“⁠그런데 황후 폐하 앞에서 이 아비를 망신 준 일은⁠, 그건 따로 갚아야지⁠.⁠”

첫 삼 분에 나는 피했다⁠.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났다⁠. 공작의 손바닥이 허공을 갈랐다⁠. 공작은 멈추지 않았다⁠. 손바닥이 그대로 옆으로 돌아 문 옆의 시녀에게 떨어졌다⁠. 짝⁠. 시녀의 고개가 돌아갔다⁠. 시녀는 소리도 내지 않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볼이 금방 붉게 부풀었다⁠.

「⁠시녀가 왜 맞음⁠」 「⁠이건 좀⁠…⁠…⁠」 「⁠불쾌함⁠」

반전이 아니었다⁠. 아무도 「⁠헐⁠」이라고 쓰지 않았다⁠. 막대가 찼다⁠. 슥⁠.

되감긴 서재에서 시녀의 볼은 하얬다⁠. 고개를 숙인 각도도 처음 그대로였다⁠. 하지만 나는 시녀가 숙인 고개 밑에서 왼손으로 오른뺨을 한 번 문지르는 것을 보았다⁠. 시간은 감겨도 얼굴은 기억했다⁠. 시녀장의 손목처럼⁠.

두 번째 삼 분에 공작이 손을 들었을 때 나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왼손을 들었다⁠. 반지 낀 손이었다⁠. 공작의 손목을 반지 낀 손으로 붙잡았다⁠. 금반지가 공작의 손목뼈에 닿았다⁠.

“⁠아버지⁠, 저 반지 꼈어요⁠.⁠”

공작의 손목이 굳었다⁠.

“⁠이 반지 낀 사람을 때리시면 황실 반지를 때리시는 거예요⁠. 반지 낀 손으로 막았으니까 반지가 맞는 거고요⁠. 황태자 전하 반지를 공작이 때렸다고 소문나면 공작가에 좋을까요⁠?⁠”

공작의 눈이 내 손가락으로 내려갔다⁠. 쪽대본의 빨간 펜이 공작의 머릿속에도 쓰여 있는 것처럼⁠, 공작은 반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들린 손에서 힘이 빠졌다⁠. 두둥⁠.

「⁠반지 방패ㅋㅋㅋㅋ⁠」 「⁠법 공부한 악녀⁠」 「⁠공작 손 덜덜 떠는 거 봐⁠」

*

열여섯 번째 화는 같은 서재였다⁠. 원작에서는 공작이 딸을 꾸짖고 내쫓는 장면이었는데⁠, 급수정된 쪽대본에서는 공작이 딸을 달래는 장면으로 바뀌어 있었다⁠. 공작은 책상 서랍에서 엄지만 한 유리병을 꺼냈다⁠. 병 속에 맑은 물 같은 것이 반쯤 차 있었다⁠.

“⁠황후 폐하께서 요즘 차를 드신다지⁠.⁠” 공작이 병을 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유리가 차가웠다⁠. “⁠공작가 영지에서만 나는 귀한 약초를 달인 것이다⁠. 폐하의 찻잔에 네 손으로 한 방울 올려라⁠. 계약 신부가 올리는 정성이니 폐하도 기뻐하실 게다⁠.⁠”

나는 병을 보았다⁠. 쪽대본에서는 「⁠귀한 약초⁠」라고만 적혀 있었다⁠. 마개를 열지 않았는데도 병 주둥이에서 쌉싸름한 냄새가 났다⁠. 살구씨를 깨물었을 때 나는 냄새였다⁠. 1⁠.5배속으로 보던 숏폼에서도 이런 병은 대개 약초가 아니었다⁠.

“⁠제가 직접 올리면 되는 거죠⁠?⁠”

“⁠네 손으로⁠. 꼭 네 손으로⁠.⁠”

공작이 웃었다⁠. 원작 내내 나를 때리던 사람이 이렇게 오래 웃는 것은 처음 보았다⁠. 막대가 반을 넘었다⁠. 나는 병을 쥐고 고개를 들었다⁠.

“⁠그럼 아버지가 먼저 드셔 보세요⁠. 귀한 거면 아버지 몸에도 좋을 거잖아요⁠. 공작가에서만 나는 약초라면서요⁠.⁠”

나는 병마개를 엄지로 밀어 올렸다⁠. 공작이 반 걸음 물러났다⁠. 반 걸음이면 충분했다⁠. 서재의 촛불이 흔들렸고⁠, 공작의 웃음이 지워졌다⁠. 두둥⁠.

「⁠?⁠?⁠?⁠?⁠?⁠」 「⁠약초 아니지 저거⁠」 「⁠공작 표정이 다 말해 줌⁠」

굳은 서재에서 공작의 눈만 나를 노려보았다⁠. 대기실의 배우 눈이 아니었다⁠. 공작도 무언가를 알고 있는 눈이었다⁠. 나는 마개를 다시 닫고 병을 드레스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병은 내 손에 있는 편이 나았다⁠. 내 손을 떠나면 다른 손이 쥘 것이었다⁠.

*

황궁으로 돌아가는 마차에서 에블린이 내 드레스 자락을 보았다⁠. 안쪽 주머니가 병 모양으로 불룩했다⁠.

“⁠그 병⁠, 받으셨네요⁠.⁠”

“⁠이게 뭔지 알아요⁠?⁠”

“⁠대본에는 약초라고 쓰여 있어요⁠.⁠”

“⁠대본 말고요⁠.⁠”

에블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차 바닥이 매끄럽게 굴렀다⁠. 창밖의 흰빛이 에블린의 금발 웨이브를 하얗게 비췄다⁠. 나는 막차에서 본 스물아홉 번째 화를 떠올렸다⁠. 마지막 장면에서 황후가 찻잔을 떨어뜨리고 쓰러졌다⁠. 화면이 까매지고 「⁠다음 화 — 처형⁠」이라는 글자가 떴다⁠. 나는 막차에서 쓰러지는 황후를 보면서 악녀가 끝내 독을 탔구나 하고 생각했다⁠. 공녀는 원작 내내 나쁜 짓만 했으니까⁠. 악녀가 독을 탔다고 믿은 채로 댓글을 달았고⁠, 잠들었다⁠.

“⁠서른 번째 화 죄목⁠, 황후 폐하 독살 미수죠⁠.⁠”

“⁠네⁠.⁠”

“⁠누가 탔어요⁠? 원작에서요⁠.⁠”

“⁠공녀님이요⁠. 대본에 그렇게 나와요⁠.⁠” 에블린이 내 눈을 보았다⁠. 거짓말하는 눈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백 번 운 사람의 눈은 무엇을 담아도 젖어 보였다⁠. “⁠그 병 저 주세요⁠. 공녀님이 들고 계시면 일이 이상하게 꼬여요⁠.⁠”

“⁠에블린 씨가 들고 있으면 안 꼬이고요⁠?⁠”

“⁠원래대로 가요⁠.⁠”

에블린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주머니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마차가 덜컹하지도 않았는데 에블린의 어깨가 한 번 흔들렸다⁠. 내민 손은 오래 허공에 있다가 무릎 위로 돌아갔다⁠. 손바닥 가운데의 굳은살이 촛불도 없는 마차 안에서 희미하게 붉었다⁠.

“⁠그럼 꼭 쥐고 계세요⁠.⁠” 에블린이 다시 창밖을 보았다⁠. “⁠놓치는 순간 서른 번째 화가 와요⁠.⁠”

*

열일곱 번째 화부터는 황궁 무도회였다⁠. 무도회장에 들어서자 웃음부터 나왔다⁠. 영애들이 하나같이 머리가 젖어 있었다⁠.

쪽대본에 새 장면이 끼어 있었다⁠. 「⁠무도회⁠. 요즘 수도 영애들 사이에 와인을 머리에 붓는 유행이 돈다⁠. 편성팀 요청 장면 — 작가⁠」 첫 화의 내 장면이 잘려서 돌아다닌다고 에블린이 말해 주었다⁠. 「⁠악녀 잔 뒤집기⁠」라는 이름으로 짧은 영상이 퍼졌고⁠, 사람들이 집에서 물컵을 머리에 붓고 찍어 올렸다⁠. 화면 밖에서 퍼진 유행이 편성팀을 거쳐 쪽대본으로 들어왔고⁠, 쪽대본에서 무도회장으로 들어왔다⁠. 영애들은 샹들리에 아래에서 잔을 높이 들고 자기 머리에 와인을 부었다⁠. 노란 드레스 영애는 세 번째 잔을 붓고 있었다⁠.

「⁠챌린지 역수입ㅋㅋㅋㅋ⁠」 「⁠드라마가 우리 따라 함⁠」 「⁠나도 어제 물 부었는데⁠」

열여덟 번째 화의 쪽대본은 내게 가혹했다⁠. 영애들이 유행의 원조인 공녀에게 경의를 표한다며 한꺼번에 와인을 끼얹는 장면이었다⁠. 와인 열 잔이 동시에 날아오면 아무리 새빨간 머리라도 갈색이 될 것이었다⁠.

막대가 삼분의 이쯤 찼을 때 영애들이 잔을 들었다⁠. 나는 무도회장 기둥 옆에 세워져 있던 양산을 펼쳤다⁠. 실내에 왜 양산이 있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숏폼 드라마의 무도회장에는 원래 쓸데없이 많은 것이 있었다⁠. 와인 열 잔이 레이스 양산 위로 쏟아져 사방으로 튀었다⁠. 영애들이 자기들 와인을 뒤집어썼다⁠. 두둥⁠.

「⁠양산ㅋㅋㅋㅋㅋㅋㅋ⁠」 「⁠원조는 안 젖는다⁠」

*

열아홉 번째 화에서 카시안이 공작저로 왔다⁠. 원작대로라면 황태자가 공작에게 계약을 통보하러 오는 짧은 장면이었다⁠. 공작은 응접실 상석에서 허리를 숙였고⁠, 시녀는 차를 내왔고⁠, 나는 카시안 옆에 앉아 있었다⁠. 시녀의 볼은 하얬다⁠. 하얀 볼 아래에서 턱이 조금 떨렸다⁠.

카시안의 대사가 나와야 할 자리였다⁠. 카시안은 공작을 보지 않고 시녀를 보았다⁠. 시녀가 찻잔을 내려놓는 손목을⁠, 숙인 고개를⁠, 문지르다 만 볼을⁠. 그러고 나서 나를 보았다⁠.

“⁠공녀⁠.⁠”

응접실의 공기가 멈칫했다⁠. 대본에서 황태자는 공작에게 말을 걸게 되어 있었다⁠.

“⁠당신은 아비의 손을 왜 지금껏 피하지 않았소⁠? 와인을 엎고 주저앉고 양산까지 펼 줄 아는 사람이⁠, 이 집에서는 스물아홉 화 가까이 한 번도 피하지 않았다고 들었소⁠.⁠”

막대가 반을 넘었다⁠. 공작이 상석에서 나를 보았다⁠. 시녀가 쟁반을 든 채 굳었다⁠. 나는 원작의 공녀를 생각했다⁠. 1⁠.5배속으로 넘겨 보던 장면들이었다⁠. 공녀는 서재에서 맞을 때 한 번도 고개를 피하지 않았다⁠. 피할 줄 몰라서 그런 줄 알았다⁠. 오늘 서재에서 피해 보고서야 알았다⁠.

“⁠피하면 다른 사람이 맞으니까요⁠.⁠”

나는 시녀를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보면 시녀가 더 곤란해질 것이었다⁠.

“⁠원래 이 집 공녀도 그거 알았을 거예요⁠. 그래서 그냥 맞았을 거예요⁠. 화면에는 악녀가 맞는 것만 나왔지만요⁠.⁠”

응접실이 조용해졌다⁠. 시녀의 쟁반에서 찻잔 하나가 아주 작게 달각거렸다⁠. 공작의 수염 끝이 떨렸다⁠. 카시안이 고개를 천천히 돌려 공작을 보았다⁠. 금빛 눈이 처음으로 차가웠다⁠. 두둥⁠.

「⁠아 이거 뭐야⁠」 「⁠악녀가 시녀 대신 맞아 온 거였어⁠?⁠?⁠」 「⁠첫 화부터 다시 보러 감⁠」 「⁠원작 공녀 불쌍해서 못 보겠다⁠」

나는 굳은 응접실에서 시녀를 보았다⁠. 쟁반을 든 시녀가 굳은 얼굴 그대로 눈물 한 줄을 흘리고 있었다⁠. 엑스트라가 굳은 채로 우는 것도 처음 보았다⁠.

*

황궁으로 돌아오는 길⁠, 화면이 꺼진 회랑에서 카시안이 나를 따라왔다⁠. 이제는 걸음이 멈칫하지 않았다⁠. 별채 앞에서 카시안이 내 앞을 막았다⁠.

“⁠아까 한 말⁠, 대본에 있던 것이오⁠?⁠”

“⁠아뇨⁠. 전하 질문도 대본에 없었잖아요⁠.⁠”

“⁠그렇겠지⁠.⁠” 카시안이 회색 회랑 끝을 보았다⁠. 연필 선으로 끝나던 복도가 조금 더 길게 그려져 있었다⁠. 카시안이 걸어 다닌 만큼 늘어난 길이었다⁠. “⁠공녀⁠. 에블린이 매일 밤 베개 밑에서 종이를 꺼내더군⁠. 나도 보았소⁠. 문틈으로⁠.⁠”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황태자가 여주인공의 방을 문틈으로 엿보다니⁠, 원작 팬들이 알면 난리가 날 일이었다⁠.

“⁠그 종이에 내 대사도 있소⁠?⁠”

“⁠있어요⁠. 전하 대사가 제일 많아요⁠.⁠”

카시안은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드레스 안쪽 주머니에서 유리병이 허벅지에 차갑게 닿았다⁠.

“⁠보여 주시오⁠. 내가 할 말을 누가 써 놓았는지⁠, 내 눈으로 보고 싶소⁠.⁠”

5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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