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598자)
엎은 잔
숏폼 드라마 속 악녀로 빙의했다 · 윤솔채
왼쪽 귀 안쪽에서 초침이 째깍거렸다. 손목시계를 차 본 적 없는 귀였다. 눈을 뜨자 샹들리에가 먼저 들어왔고, 높은 창으로 쏟아진 오후 햇빛이 크리스털 장식마다 부서져 대리석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오른손에는 와인 잔이 들려 있었다. 잔을 든 팔 위로 드러난 어깨가 서늘했다. 내 어깨는 어제까지 회사 조끼 속에 있었다.
앞에는 긴 금발 웨이브에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겁먹은 눈이 잔과 내 얼굴을 번갈아 오갔다. 둘레로는 부채를 든 귀족 영애들이 둥글게 모여 있었고, 맨 뒤에서 회색 수염의 남자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는 장면이었다. 백 화짜리 세로 숏폼 로판 「황태자의 계약 신부」의 첫 화였다. 나는 어젯밤 2호선 막차에서 스물아홉 번째 화까지 1.5배속으로 봤다. 콜센터 야간 상담을 마치고 타는 막차에서는 무엇이든 1.5배속으로 봐야 집에 가기 전에 한 편이 끝났다.
첫 화의 줄거리는 외우고 있었다. 악녀 공녀가 에블린의 하얀 드레스에 와인을 끼얹는다. 에블린이 공녀의 뺨을 친다. 연회장이 숨을 들이켜고, 황태자 카시안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공녀는 서른 번째 화에서 처형될 때까지 나오는 화마다 누군가에게 뺨을 맞았고, 댓글창은 뺨 소리가 날 때마다 「사이다」로 덮였다. 공녀에게는 이름도 없었다. 출연진 자막에도 「악녀 공녀」 넉 자뿐이었다. 막차에서 졸다 깨다 하면서 나는 스물아홉 번째 화 밑에 댓글을 하나 달았다. 「악녀도 이름은 있어야죠. 백 번 맞다 죽는 동안 이름 한 번을 안 불러 주네」 답글이 달렸는지는 모른다. 잠이 먼저 왔다.
지금 내 손에 와인 잔이 있었다.
눈을 치켜뜨자 머리 위 한 뼘 높이에 휴대전화 화면 테두리 같은 것이 떠 있었다. 얇고 둥근 모서리의 테두리였고, 아래 변을 따라 분홍 막대가 깔려 있었다. 휴대전화로 영상을 볼 때 화면 아래에 뜨는 재생 막대와 똑같았다. 막대는 왼쪽에서부터 천천히 분홍으로 차올랐고, 초침이 한 번 울릴 때마다 한 올씩 길어졌다. 오른쪽 위 허공에는 흐린 글씨가 떠 있었다. 「조회수 31만」
나는 잔을 내렸다. 와인을 안 뿌리면 뺨도 없다. 계산은 간단했다.
에블린이 눈을 깜박였다. 영애들의 부채가 멈췄다. 회색 수염은 한 발 내딛다가 멈췄다. 연회장 공기 위로 하얀 글자들이 둥둥 떠올랐다.
「?」 「버퍼링 걸렸나」 「악녀 왜 가만히 있음」
글자들은 영애들 머리 위를 천천히 흘러가다가 샹들리에 근처에서 녹아 없어졌다. 댓글이었다. 누군가 지금 이 장면을 보고 있었다.
초침이 빨라졌다. 막대가 끝에 닿자 휴대전화 화면을 손가락으로 쓸어 올릴 때 나는 소리가 귀를 훑었다. 슥.
다음 순간 내 손에 와인 잔이 들려 있었다. 잔은 다시 가득 차 있었다. 에블린의 겁먹은 눈, 멈추지 않은 부채, 회색 수염의 노려봄까지 처음 그대로였다. 왼편의 노란 드레스 영애가 아까와 같은 높이로 부채를 들었다.
“어머, 공녀님이 또.”
방금 들은 대사였다.
*
두 번째 삼 분에는 잔을 쟁반에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이 년 동안 하루 백 통씩 화난 전화를 받은 몸이었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제가 확인해 보고 바로 조치해 드릴게요.”
에블린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댓글이 쏟아졌다.
「상담원이냐ㅋㅋㅋ」 「갑자기 고객센터됨」
나는 걸었다. 연회장을 나가면 장면도 끝날 줄 알았다. 대리석을 밟고 큰 문까지 갔다. 문은 금박 무늬가 화려했는데, 손잡이를 잡는 순간 손바닥에 닿은 것은 차가운 쇠가 아니라 마른 종이였다. 문은 벽에 그려져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금박도 붓 자국이었다. 창 너머 정원도, 기둥 뒤 복도도 전부 납작했다. 카메라가 보여 준 적 없는 곳은 처음부터 만들어져 있지 않았다.
슥. 나는 다시 잔을 들고 있었다.
세 번째 삼 분에는 와인을 내가 마셨다. 단숨에 비우고 잔을 거꾸로 들어 흔들었다. 「목말랐나 봄ㅋㅋ」 「이건 반전 아님」 같은 글자가 지나갔고, 막대는 끝까지 무심하게 찼다. 슥.
네 번째 삼 분이 시작될 때 규칙이 손에 잡혔다. 이 세계의 한 장면은 삼 분이었다. 숏폼 드라마가 다 그렇듯 삼 분 끝에는 무언가가 뒤집혀야 했다. 원작에서 뒤집히는 것은 언제나 내 뺨이었다. 뺨을 내주지 않으려면 다른 것을 뒤집어야 했고, 보는 사람들이 「헐」이라고 쓸 만큼 세게 뒤집어야 했다.
잔을 쥔 채 에블린을 보았다. 에블린도 나를 보고 있었다. 겁먹은 눈이 아니었다. 같은 밥을 네 번째 데우는 사람의 눈이었다. 입술이 작게 움직였다.
“또.”
대본에 없는 한 글자였다. 소리가 나지 않았는데도 나는 알아들었다.
막대가 삼분의 이쯤 찼을 때 연회장 큰 문이 열렸다. 원작대로라면 내가 뺨을 맞고 고개가 돌아간 순간에 황태자가 들어와야 했다. 짧은 은발이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고, 흰 제복의 금 견장이 걸음마다 흔들렸다. 카시안이었다. 1.5배속으로 볼 때는 몰랐는데 제 속도로 보니 걸음이 느렸다.
초침이 귀를 쪼았다. 남은 시간은 이십 초 남짓이었다.
나는 잔을 높이 들었다. 에블린이 반사적으로 드레스 앞섶을 가렸다. 영애들이 숨을 들이켰다. 나는 손목을 돌려 잔을 내 머리 위에서 뒤집었다.
차가웠다. 와인은 정수리에서 갈라져 새빨간 머리칼을 타고 흘렀고, 목의 검은 리본을 적시고 드러난 어깨와 쇄골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단내와 쇠 냄새가 섞여 콧속을 찔렀다. 대리석 바닥에 붉은 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연회장에 아무 소리도 없었다.
카시안이 내 앞에서 멈췄다. 보랏빛 눈과 금빛 눈이 마주쳤다. 원작의 카시안은 이 장면에서 에블린의 붉어진 손바닥만 보고 「괜찮소?」라고 물었다. 지금 카시안은 와인이 뚝뚝 떨어지는 내 턱을 보고 있었다.
“공녀. 어째서 잔을 제 머리에 엎었소?”
대본에 없던 질문이었다.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북소리가 울렸다. 두둥. 연회장 전체가 제자리에 멈췄다. 영애들의 부채가 허공에 굳었고, 에블린의 손이 앞섶에 붙은 채 굳었다. 허공 한가운데에 붉은 글자가 큼직하게 떠올랐다.
「다음 화에 계속」
붉은 글자 밑으로 하얀 글자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 「악녀 미쳤냐ㅋㅋㅋㅋㅋ」 「이거 원래 이런 내용이었음??」 「나만 첫 화 다르게 보임?」
오른쪽 위의 숫자가 한꺼번에 뛰었다. 「조회수 34만」
멈춘 연회장에서 움직이는 것은 글자뿐이었다. 나는 눈알만 굴려 둘레를 보았다. 회색 수염이 오른손을 어깨높이까지 든 채 굳어 있었다. 공작이었다. 공녀의 아버지였고, 원작에서는 에블린 다음 차례로 내 뺨을 치는 사람이었다. 들린 손바닥이 넓었다. 머리 위 테두리 안쪽에는 작은 띠가 깜박였다. 「서른 번째 화부터 코인 결제」 내 목이 떨어지는 화가 돈을 받기 시작하는 화였다. 띠가 꺼지면서 분홍 막대도 비었고, 귓속 초침도 멎었다.
*
눈앞이 한 번 까맣게 꺼졌다가 켜졌다. 허공에 흐린 자막이 지나갔다. 「같은 날 밤」
나는 처음 보는 방에 서 있었다. 회색 방이었다. 벽지에 무늬가 없었고, 침대에는 이불 대신 이불 모양의 회색 덩어리가 놓여 있었고, 창밖에는 하늘 대신 덜 마른 흰 물감 같은 빛이 고여 있었다. 원작은 공녀의 침실을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다. 공녀는 연회장과 정원과 처형대에만 나왔다.
오래 보고 있으니 벽에 장미가 돋아났다. 처음에는 연필 선 같더니 곧 붉은 물이 들었다. 침대 위 회색 덩어리는 보는 동안 자수 놓인 벨벳 이불로 바뀌었다. 내가 들어온 곳은 내가 보는 만큼 채워졌다. 손가락 하나를 접었다. 화면에 나온 적 없는 곳을 처음으로 하나 열었다.
벽에 큰 거울이 있었다. 거울 속에 공녀가 서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새빨간 웨이브 머리가 와인에 젖은 채 마르다 만 결로 엉켜 있었다. 눈은 보랏빛이었다. 어깨가 드러난 붉은 드레스 위로 검은 리본 초커가 목을 한 바퀴 감고 있었다. 머리 위에는 휴대전화 화면 테두리가 막대를 비운 채 흐리게 떠 있었다. 거울에도 비쳤다. 매듭을 풀려고 손을 댔지만 리본은 살갗에 그려 넣은 듯 꿈쩍하지 않았다. 스물다섯의 얼굴이었다. 나도 스물다섯이었다. 같은 나이인데 거울 속 얼굴이 나보다 많이 맞아 본 얼굴이었다.
볼을 꼬집어 보았다. 아팠다. 꿈에서 깨는 법으로 아는 것이 꼬집기밖에 없어서 두 번 더 꼬집었고, 거울 속 공녀의 하얀 볼에 손톱자국만 붉게 남았다. 창가로 가서 창밖의 흰빛에 손가락을 대 보았다. 손끝에 물감 같은 것이 묻어났다. 냄새도 없고 온도도 없었다. 2호선 창밖의 깜깜한 터널이 차라리 그리웠다. 거기에는 적어도 다음 역이 있었다.
문밖에 시녀가 서 있었다. 눈을 반쯤 감고, 입술만 움직여 같은 말을 되뇌고 있었다.
“공녀님, 공작 각하께서 찾으십니다. 공녀님, 공작 각하께서 찾으십니다.”
어깨를 두드려 봤지만 시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 눈앞에서 손뼉을 쳐도, 귀에 대고 “고객님?” 하고 불러도 같은 말만 돌아왔다. 상담 대기열 안내 방송과 박자까지 비슷했다. 카메라가 꺼진 세상에서 사람들은 다음 대사를 입에 문 채 기다리고 있었다. 촬영장 대기실의 배우들 같았다. 아니면 통화 연결음을 듣는 나 같았다.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났다. 움직이는 소리는 발소리 하나뿐이었다.
하얀 드레스가 문턱을 넘어왔다. 에블린은 시녀를 비켜 들어와 침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벽의 장미를 손끝으로 쓸어 보고는 눈썹을 올렸다.
“여기는 원래 없던 방인데.”
“지금은 있어요. 제가 봤으니까.”
에블린이 나를 보았다. 긴 금발 웨이브는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하얀 드레스에는 얼룩 하나 없었다. 아까 연회장에서 와인을 맞지 않은 드레스였다.
“네 번 돌리셨죠. 삼 분을.”
“보셨어요?”
“저는 다 봐요. 첫 화부터 지금까지, 한 장면도 빠짐없이요. 공녀님이 처음으로 잔을 내려놓았을 때 저는 백 번쯤 연습한 손바닥을 들고 서 있었어요.” 에블린은 오른손을 펴 보였다. 손바닥 가운데가 발갛게 굳어 있었다. “원래대로 하면 한 번에 넘어가요. 공녀님이 뿌리고, 제가 때리고, 전하가 들어오시고. 삼 분이면 끝이에요.”
“맞기 싫은데요.”
“공녀님은 서른 번째 화에서 죽어요.”
“알아요. 거기 바로 앞까지 봤어요.”
“그다음은 못 보셨죠.” 에블린은 침대 끝에 앉아 드레스 자락을 가지런히 폈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저는 백 번째 화에서 황후가 돼요. 마지막 삼 분에 처음으로 소리 내서 웃어요. 그 삼 분까지 가려면 서른 번째 화가 원래대로 가야 해요. 공녀님이 죽고, 사람들이 시원하다고 쓰고, 다음 화를 보려고 돈을 내야 해요. 그래야 백 번째 화가 나와요.”
“그러니까 저더러 죽으라고요.”
“원래대로 해 달라는 거예요.” 에블린은 공손했다. 연회장의 겁먹은 눈보다 공손한 말투가 더 무서웠다. “공녀님 행복은 대본에 없어요. 제 행복은 있어요. 백 번째 화 마지막 장에요.”
나는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 공녀가 젖은 머리를 하고 서 있었다. 이 몸으로 스물아홉 화 동안 맞은 뺨이 몇 대인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숫자가 얼굴보다 커질까 봐서였다.
“에블린 씨는 처음부터 이걸 알았어요? 여기가 드라마라는 거.”
“처음부터 알았어요. 주인공이니까요.” 에블린이 일어났다. 문턱에서 몸을 돌렸다. 시녀는 여전히 같은 말을 되뇌고 있었다. “다음 화는 황후 폐하의 정원 다과회예요. 공녀님이 제 찻잔을 엎고 제가 때려요. 이번에는 공녀님이 뒤집기 전에 제가 먼저 뒤집을게요.”
하얀 드레스가 복도로 사라졌다. 왼쪽 귀 안쪽에서 초침이 다시 한 번, 아주 작게 째깍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