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07자)

특별 출연

숏폼 드라마 속 악녀로 빙의했다 · 윤솔채

작가는 창살 앞 돌바닥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노트북을 무릎에 펼치고⁠, 후드티 소매를 손등까지 끌어내렸다⁠. 발에는 삼선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맨발이었다⁠.

“⁠여기 왜 이렇게 추워요⁠?⁠”

“⁠감옥이잖아요⁠. 작가님이 춥게 쓰셨겠죠⁠.⁠”

“⁠감옥 온도는 안 썼는데⁠.⁠” 작가가 입김을 불어 보았다⁠. 하얗게 나왔다⁠. “⁠안 쓴 건 회색이고 추운 거구나⁠. 메모해 둬야지⁠.⁠”

작가는 노트북 옆에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식은 커피에서 잠 대신 태운 냄새가 났다⁠. 복도 끝 근위병은 창을 든 채 눈을 반쯤 감고 “⁠누구냐⁠”를 중얼거렸다⁠. 작가가 근위병을 돌아보았다⁠.

“⁠쟤 대사 저거 하나예요⁠. 미안하네⁠.⁠”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썼어요⁠.⁠” 작가가 노트북 화면을 내 쪽으로 돌렸다⁠. 문서 맨 아래에 한 줄이 있었다⁠. 「⁠특별 출연 — 숏폼 드라마 작가⁠. 감옥 복도를 걸어온다⁠.⁠」 “⁠쓰고 저장 눌렀더니 출력함에서 제 손이 빨려 들어가더라고요⁠. 반신반의했는데⁠. 님 댓글이 진짜였으니 이것도 진짜겠지 했죠⁠.⁠”

나는 작가를 오래 보았다⁠. 연필 꽂은 머리⁠, 눈 밑의 그늘⁠, 키보드에 이마를 대고 자던 사람⁠. 공녀에게 백 번 손바닥을 날린 사람치고는 손이 작았다⁠. 손톱이 짧게 깎여 있었다⁠. 타자를 많이 치는 손이었다⁠.

“⁠공녀 얼굴 실물로 보니까 어때요⁠?⁠”

“⁠빨개요⁠. 제가 머리 색 「⁠새빨강⁠」이라고 써서 그런가⁠.⁠” 작가가 웃다가 말았다⁠. “⁠눈 밑은 제가 그렇게 안 썼어요⁠. 그건 님 거네요⁠.⁠”

작가가 후드티 주머니에서 삼각김밥을 꺼냈다⁠. 비닐을 1⁠, 2⁠, 3 순서대로 벗기는 손이 능숙했다⁠.

“⁠드실래요⁠? 참치마요예요⁠. 독은 안 들었어요⁠.⁠”

창살 사이로 반을 받았다⁠. 김이 바삭했다⁠. 화면 속 세상에서 처음 먹는 편의점 맛이었다⁠. 살구씨 냄새가 남은 혀에 마요네즈가 닿자 눈물이 날 뻔했다⁠. 제국 수도의 감옥에서 망원동 편의점 맛이 났다⁠.

*

노트북에서 띠링 소리가 났다⁠. 메신저 창이 떠올랐다⁠.

「⁠편성 담당 · 작가님 서른 번째 화 원고 들어왔나요⁠? 처형 컷 썸네일로 쓸게요⁠. 도끼 올라가는 순간으로요⁠」

작가는 창을 닫지 않았다⁠. 내가 보게 두었다⁠.

“⁠이게 제 사정이에요⁠.⁠” 작가가 말했다⁠. “⁠서른 번째 화가 결제 버튼이에요⁠. 처형 컷이 썸네일이고요⁠. 썸네일 보고 사람들이 코인 충전해요⁠. 거기서 결제가 안 터지면 편성팀이 서른한 번째 화부터 안 받아요⁠. 저는 남의 이름으로 몇 년 쓰다가 처음으로 제 이름 단 작품이에요⁠. 끝까지 못 쓰면 다음이 없어요⁠. 에블린 마지막 장도 없어요⁠. 제가 제일 먼저 쓴 장이요⁠.⁠”

“⁠알아요⁠. 에블린 씨가 읽어 줬어요⁠.⁠”

“⁠에블린이요⁠?⁠” 작가의 눈이 커졌다⁠. “⁠걔가 그걸 소리 내서 읽었어요⁠?⁠”

“⁠백 번은 접었다 편 종이로요⁠.⁠”

작가가 입을 다물었다⁠. 종이컵을 들었다가 마시지 않고 내려놓았다⁠.

“⁠하나만 물어볼게요⁠.⁠” 내가 말했다⁠. “⁠공녀 이름은 왜 안 지어 주셨어요⁠? 종이로 물었을 때 대답 안 하셨잖아요⁠.⁠”

작가는 노트북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한참 뒤에 대답했다⁠.

“⁠대필할 때 배웠어요⁠. 죽일 애한테는 이름을 안 준다⁠. 이름 붙이면 정이 들어서 못 죽인다⁠. 정이 들면 원고가 늦고⁠, 원고가 늦으면 잘려요⁠.⁠” 작가가 나를 보았다⁠. “⁠그래서 안 지었어요⁠. 그런데 님이 들어와서 저보다 먼저 정이 들어 버렸네요⁠.⁠”

“⁠저는 2호선막차라는 이름도 있는데요⁠.⁠”

“⁠그건 닉네임이잖아요⁠.⁠” 작가가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음이 감옥 천장에 부딪혀 돌아왔다⁠.

*

“⁠이제 제 차례예요⁠.⁠”

나는 창살 사이로 손을 넣어 노트북 터치패드를 끌어당겼다⁠. 작가가 말리지 않았다⁠. 숏폼 앱 관리자 화면이 떠 있었다⁠. 화마다 댓글이 숫자와 함께 쌓여 있었다⁠. 나는 스물다섯 번째 화를 눌렀다⁠. 내가 처음으로 맞은 화였다⁠.

「⁠드디어 맞음⁠」 「⁠근데 왜 안 시원하지⁠」 「⁠사이다 맛이 이상함⁠」 「⁠공녀 그만 때려 이제⁠」

스물아홉 번째 화를 눌렀다⁠. 몇 시간 전의 다실이었다⁠.

「⁠공녀 살려⁠」 「⁠결제할 테니까 공녀 살려 주세요⁠」 「⁠서른 번째 화 처형이면 안 봄⁠」 「⁠처형이어도 봄 근데 울면서 봄⁠」

“⁠보세요⁠.⁠” 내가 말했다⁠. “⁠저 같은 사람은 뺨 보려고 결제 안 해요⁠. 막차에서 1⁠.5배속으로 보는 사람이 코인을 왜 충전하는지 아세요⁠? 다음이 궁금해서요⁠. 첫 화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이 궁금했던 건 공녀가 언제 맞냐였어요⁠. 지금은 공녀가 뭘 할지가 궁금해요⁠. 그게 결제 버튼이에요⁠.⁠”

“⁠궁금한 거랑 돈 내는 건 달라요⁠.⁠” 작가가 바로 받았다⁠. 편성 담당의 말투였다⁠. 그러다 자기 말투를 알아차렸는지 입술을 깨물었다⁠. “⁠…⁠…편성 담당이 그랬어요⁠.⁠”

“⁠작가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작가는 대답하지 않았다⁠. 노트북 화면의 댓글들을 오래 내려다보았다⁠. 화면 불빛이 작가의 눈 밑 그늘을 푸르게 비췄다⁠. 띠링⁠. 「⁠편성 담당 · 작가님⁠?⁠」 작가는 메신저 창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화면을 손으로 덮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처형 빼고 쓴 원고는 편성팀이 안 받아요⁠.⁠” 작가가 천천히 말했다⁠. “⁠제가 아무리 우겨도요⁠. 증명이 돼야 받아요⁠. 화면에서요⁠. 숫자로요⁠.⁠”

“⁠그럼 증명할게요⁠.⁠”

“⁠어떻게요⁠?⁠”

“⁠삼 분이요⁠. 제가 삼 분 안에 하는 거 보시고 정하세요⁠.⁠”

작가가 노트북을 무릎에서 내려놓았다⁠. 손을 비볐다⁠. 추워서인지 다른 이유인지 몰랐다⁠.

“⁠좋아요⁠. 서른 번째 화는 제가 써 둔 대로 갑니다⁠. 죄목 낭독⁠, 에블린 증언⁠, 도끼까지⁠. 대본에 있는 사람들은 대본대로 움직여요⁠. 대신 삼 분 드릴게요⁠. 그 삼 분 안에 님이 제가 써 둔 거보다 센 걸 만들면⁠, 저는 보고 있다가 고칠게요⁠. 그 자리에서요⁠.⁠” 작가가 노트북 화면을 톡톡 쳤다⁠. “⁠못 만들면 도끼 내려가고⁠, 님은 2호선에서 깨요⁠. 김치 드시러 가세요⁠.⁠”

“⁠김치는 어떻게 아세요⁠?⁠”

“⁠카시안이 종이로 물어봤어요⁠. 김치찌개가 무엇이오⁠. 맵고 시고 뜨겁다던데 무엇이오⁠.⁠” 작가가 하오체를 흉내 냈다⁠. “⁠제가 쓴 남주가 저한테 질문을 보내요⁠. 원작에 없던 질문을⁠.⁠”

*

작가가 일어서려 할 때 나는 창살을 잡았다⁠.

“⁠하나만 써 주세요⁠.⁠”

“⁠뭘요⁠?⁠”

“⁠시녀장님 딸이요⁠. 공작저 세탁장에서 일한대요⁠. 스물두 살이고 빨래를 잘한대요⁠. 황후궁 세탁장으로 옮긴다고 한 줄만요⁠.⁠”

작가가 눈을 가늘게 떴다⁠. 대본을 백 번 고친 사람의 눈이었다⁠.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금방 읽었다⁠.

“⁠그럼 시녀장이 공작 눈치 안 보고 입을 열 수 있잖아요⁠. 님한테 유리하게 판을 깔아 달라는 거네요⁠.⁠”

“⁠네⁠.⁠”

작가는 웃었다⁠. 이번에는 오래 웃었다⁠.

“⁠솔직하네⁠. 상담원 출신이라더니⁠.⁠” 작가가 다시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그 딸⁠, 원래 대본에 없던 애예요⁠. 시녀장 대사 하나 줬더니 님이 사연을 붙여 놨더라고요⁠. 대본에 없던 애는 제 마음대로 해도 돼요⁠. 편성팀도 엑스트라 딸까지는 안 봐요⁠.⁠”

작가가 타자를 쳤다⁠. 손가락이 빨랐다⁠. 나는 창살 너머로 화면을 보았다⁠.

「⁠공작저 세탁장의 시녀장 딸⁠, 황후궁 세탁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초하루 오후부터⁠.⁠」

저장⁠. 작가가 엔터를 누르는 순간 감옥 벽의 돌 결이 한 번 떨렸다⁠. 대본이 진짜가 되는 소리는 생각보다 작았다⁠.

“⁠이건 제가 그냥 해 드리는 거예요⁠. 시녀장이 입을 열지 말지는 시녀장 몫이고요⁠. 대본에 없는 데서 사람이 뭘 고를지는 저도 몰라요⁠. 님 오고 나서 알았어요⁠.⁠”

작가가 노트북을 옆구리에 끼고 일어났다⁠. 슬리퍼가 젖은 돌에 찍 소리를 냈다⁠. 작가는 걸어가다가 돌아보았다⁠.

“⁠님⁠, 집에 가고 싶죠⁠?⁠”

“⁠둘 다요⁠.⁠”

“⁠저도요⁠.⁠” 작가가 후드티 모자를 썼다⁠. “⁠저도 이거 끝내고 싶고⁠, 안 끝내고 싶어요⁠. 백 번째 화까지 다 쓰고 싶은데⁠, 님이 이기면 마지막 장 버려야 돼요⁠. 제일 먼저 쓴 거⁠. 그거 버리는 게 제일 무서워요⁠.⁠”

작가가 복도로 걸어갔다⁠. 몇 걸음 못 가서 멈췄다⁠. 복도 한가운데에 하얀 드레스가 서 있었다⁠. 에블린이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몰랐다⁠. 창살 너머로 두 사람이 마주 보는 것이 보였다⁠. 작가는 노트북을 가슴에 끌어안았다⁠. 쓴 사람이 쓰인 사람 앞에 선 얼굴이었다⁠.

“⁠에블린⁠.⁠” 작가가 먼저 불렀다⁠. 목소리가 작았다⁠. “⁠실물이 더 예쁘네⁠. 금발 웨이브 그렇게 쓰길 잘했다⁠.⁠”

에블린은 웃지 않았다⁠. 대본에 없는 데서는 웃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얀 드레스 자락을 두 손으로 쥐고⁠, 백 번 접었다 편 종이를 소매에서 꺼냈다⁠.

“⁠하나만 여쭤볼게요⁠, 작가님⁠. 백 번째 화 마지막 장에서 전하가 무어라 속삭여요⁠?⁠”

작가가 종이를 보았다⁠. 자기가 맨 먼저 쓴 장이었다⁠. 작가의 입술이 달싹였다⁠.

“⁠안 정했어⁠.⁠”

“⁠네⁠?⁠”

“⁠거기는 안 썼어⁠. 카시안이 그때 가서 직접 하라고 남겨 뒀어⁠. 내가 쓰면 카시안 말이 아니잖아⁠.⁠” 작가가 노트북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때 가면 정해질 줄 알았어⁠. 백 번째 화까지 쓰다 보면⁠.⁠”

에블린의 손이 종이를 쥔 채 내려갔다⁠. 한참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럼 저는 드라마 내내 뭘 기다린 거예요⁠?⁠”

작가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고개를 숙였다⁠. 쓴 사람이 쓰인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을 나는 처음 보았다⁠. 에블린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미안해⁠.⁠”

“⁠내일 저는 원래대로 할 거예요⁠.⁠” 에블린이 종이를 다시 접어 소매에 넣었다⁠. 접는 손이 익숙했다⁠. “⁠작가님이 쓴 대로요⁠. 공녀가 찻잔에 무언가를 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할 거예요⁠. 작가님도 원래대로 해 주세요⁠. 작가님이라도요⁠. 그래야 제가 기다린 게 아무것도 아닌 게 안 돼요⁠.⁠”

에블린이 먼저 걸어갔다⁠. 작가는 한참 서 있다가 반대로 걸어갔다⁠. 「⁠특별 출연⁠」 자막이 작가를 따라가다가 흐려졌다⁠.

*

새벽이 오기 전에 시녀장이 왔다⁠. 쟁반 없이 맨손이었다⁠. 시녀장이 맨손으로 걷는 것을 처음 보았다⁠. 손목에 내가 감아 준 수건이 다시 감겨 있었다⁠. 닳은 자리가 기워져 있었다⁠.

“⁠딸이 오후에 황후궁 세탁장으로 왔습니다⁠.⁠” 시녀장이 창살 앞으로 왔다⁠. 목소리가 떨렸다⁠. “⁠누가 옮겼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공작저에서 사람이 와서 짐을 싸 주고 갔답니다⁠. 대본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고요⁠.⁠”

“⁠다행이에요⁠.⁠”

“⁠공녀님이 하셨습니까⁠?⁠”

“⁠제가 부탁만 했어요⁠. 쓴 건 작가님이에요⁠.⁠”

시녀장은 창살 너머로 나를 오래 보았다⁠. 손목을 왼손으로 감싸 쥐었다⁠.

“⁠내일 처형대 아래에서 찻쟁반을 듭니다⁠. 관리들에게 차를 돌리는 것이 제 대사입니다⁠.⁠” 시녀장이 고개를 숙였다⁠. “⁠그것 말고 무엇을 할지는⁠, 내일 제가 정하겠습니다⁠.⁠”

시녀장이 떠났다⁠. 약속은 없었다⁠. 나는 약속을 받지 않았다⁠. 받는 순간 시녀장이 고를 일이 내 몫이 되었다⁠.

창살 높이 난 작은 창으로 빛이 들어왔다⁠. 흰 물감이 아니라 진짜 새벽빛 같은 푸른빛이었다⁠. 광장에서 망치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처형대를 세우는 소리였다⁠. 허공에 붉은 띠가 떠올랐다⁠.

「⁠서른 번째 화부터 코인 결제⁠」

머리 위 테두리에 분홍 막대가 생겨났다⁠. 아직 차오르지 않은 막대였다⁠. 왼쪽 귀에서 초침이 째깍⁠, 하고 첫 소리를 냈다⁠.

1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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