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487자)

이름

숏폼 드라마 속 악녀로 빙의했다 · 윤솔채

광장은 백 화짜리 드라마를 통틀어 가장 사람이 많은 곳이었다⁠. 처형대를 둘러싸고 수도 사람들이 빽빽하게 서 있었고⁠, 군중 뒤로 귀족들의 관람석이 계단처럼 올라갔다⁠. 맨 위 단에 황후가 앉아 있었다⁠. 황후 옆에 에블린이⁠, 한 단 아래에 공작이 있었다⁠. 처형대 계단 밑에는 시녀장이 찻쟁반을 들고 서 있었다⁠. 관리들에게 차를 돌리는 것이 시녀장의 대사였다⁠.

나는 처형대 한가운데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손목이 앞으로 묶여 있었다⁠. 겨울바람이 드러난 어깨를 할퀴었다⁠. 새빨간 머리칼이 바람에 날려 얼굴을 덮었다 걷혔다⁠. 목의 검은 리본 초커가 숨을 쉴 때마다 살갗을 눌렀다⁠. 뒤에서 형리가 도끼 자루를 고쳐 쥐는 소리가 났다⁠.

허공은 하얀 글자로 가득했다⁠. 지금까지의 어느 화보다 촘촘했다⁠. 글자들이 처형대 위의 하늘을 덮어서 햇빛이 글자 사이로 새어 내려왔다⁠.

「⁠코인 충전함⁠」 「⁠결제했다 공녀 살려라⁠」 「⁠처형이면 환불 되냐⁠」 「⁠여기까지 1⁠.5배속으로 달려옴⁠」

붉은 띠가 떠 있었다⁠. 「⁠서른 번째 화부터 코인 결제⁠」 오른쪽 위의 숫자는 이제 읽을 수도 없을 만큼 빨리 굴렀다⁠.

군중 맨 앞줄에 흰 제복이 보였다⁠. 견장 없는 어깨⁠, 짧은 은발⁠. 카시안은 수도 사람들 사이에 서 있었다⁠. 황태자 자리를 잃어서 관람석에 앉을 자리가 없었다⁠. 금빛 눈이 나를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면 앞에서 묻겠다고 한 사람이었다⁠.

머리 위 테두리에 분홍 막대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초침이 째깍거렸다⁠.

*

막대의 첫 마디가 찼을 때 근위대장이 두루마리를 펼쳤다⁠.

“⁠죄인 공녀는 황태자의 반지를 훔쳐 계약 신부의 자리를 차지하였고⁠, 초하루에 황후 폐하의 찻잔에 독을 타 폐하를 해하려 하였다⁠. 죄인의 품에서 독병이 나왔다⁠. 이에 참형에 처한다⁠.⁠”

군중이 웅성거렸다⁠. 대본에 있는 웅성거림이었다⁠. 하얀 글자들은 대본을 몰랐다⁠. 「⁠공녀 아님⁠」 「⁠공녀가 마셨잖아⁠」 「⁠공작 저 표정 봐⁠」

두 번째 마디가 찼다⁠. 근위대장이 관람석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증인은 나와 증언하라⁠.⁠”

에블린이 일어났다⁠. 하얀 드레스 자락이 관람석 계단을 하나씩 쓸며 내려왔다⁠. 긴 금발 웨이브가 겨울바람에 흔들렸다⁠. 에블린은 처형대 아래에 멈춰 나를 올려다보았다⁠. 주먹을 쥐고 있었다⁠. 주먹 안에 금반지가 있었다⁠.

“⁠공녀가 찻잔에 무언가를 타는 것을 보았습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대본대로였다⁠. 원래대로였다⁠. 에블린은 증언을 마치고도 돌아가지 않았다⁠. 나를 보았다⁠.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이번에도 나는 알아들었다⁠.

‘⁠가세요⁠.⁠’

막대가 삼분의 일을 넘었다⁠. 형리가 도끼를 어깨에 올렸다⁠. 쇠가 햇빛을 받아 하얗게 번쩍였다⁠.

가만히 있으면 되었다⁠. 삼 분이 끝날 때까지⁠. 도끼가 내려오고⁠, 목이 떨어지고⁠, 나는 2호선 맨 끝 칸에서 눈을 뜬다⁠. 무릎 위에서 휴대전화가 1⁠.5배속으로 처형 장면을 보여 주고 있을 것이었다⁠. 내 얼굴이 아니라 공녀의 얼굴로⁠. 나는 다음 역에서 내려 집에 간다⁠. 현관의 상자를 연다⁠. 김치가 익어 시큼한 냄새가 올라온다⁠. 찌개를 끓인다⁠. 땀이 나고 코가 빨개진다⁠.

내일 아침이면 화면 속 공녀는 이름 없이 죽어 있고⁠, 사람들은 시원하다고 쓴다⁠. 마흔 화 뒤에 운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처형대 계단 아래의 시녀장을 보았다⁠. 시녀장이 찻쟁반을 들고 서 있었다⁠. 오른 손목에 기운 수건이 감겨 있었다⁠. 손목이 떨렸다⁠. 쟁반 위 찻잔들이 아주 작게 달각거렸다⁠.

“⁠시녀장님⁠.⁠”

대본에 없는 목소리가 광장에 퍼졌다⁠. 근위대장이 두루마리에서 눈을 들었다⁠. 공작이 관람석에서 몸을 일으켰다⁠.

“⁠따님은 이제 황후궁 세탁장이에요⁠.⁠”

한 문장뿐이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부탁하지 않았다⁠. 고르는 것은 시녀장의 몫이었다⁠.

막대가 반을 넘었다⁠. 시녀장은 쟁반을 든 채 서 있었다⁠. 한참이었다⁠. 초침이 열 번쯤 울렸다⁠. 하얀 글자들이 시녀장의 머리 위로 몰려들었다⁠. 「⁠시녀장님⁠」 「⁠제발⁠」 「⁠손목 떨리는 거 봐⁠」

시녀장이 움직였다⁠. 처형대 첫 계단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은쟁반이 나무 계단에 닿는 소리가 났다⁠. 시녀장이 대본에 없는 자리에 쟁반을 내려놓는 것을 나는 처음 보았다⁠. 마흔 칸을 수백 번 오르는 동안 한 번도 놓지 못한 쟁반이었다⁠. 빈손이 된 시녀장이 관람석을 올려다보았다⁠. 황후를 보았다⁠.

“⁠폐하⁠. 초하루의 찻잔은 제가 날랐습니다⁠.⁠”

목소리는 다실에서 들은 것과 같았다⁠. 낮고⁠, 고르게 깔렸다⁠. 날씨를 말하는 목소리였다⁠.

“⁠공작 각하께서 주신 것을 제 손으로 탔습니다⁠. 생일 연회 날 연회장 구석에서 받았습니다⁠. 공녀님 품에서 나온 병은 각하께서 공녀님께 쥐여 주신 것입니다⁠. 공녀님은 폐하 대신 그 잔을 마셨습니다⁠. 저는 보았습니다⁠. 제 딸을 걸고 말씀드립니다⁠.⁠”

광장이 무너졌다⁠. 군중의 웅성거림이 대본 밖으로 넘쳤다⁠. 관람석의 부채들이 떨어졌다⁠. 하얀 글자가 하늘을 찢을 듯이 쏟아졌다⁠.

「⁠일흔 번째 화가 지금 나옴⁠」 「⁠시녀장님ㅠㅠㅠㅠㅠ⁠」 「⁠공작 너였냐⁠」 「⁠결제한 보람 있다⁠」

공작이 관람석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회색 수염이 흔들렸다⁠. 깨어난 사람의 걸음이었다⁠.

“⁠시녀 따위가 감히⁠—⁠”

공작의 오른손이 올라갔다⁠. 원작 내내 공녀의 뺨으로 떨어지던 손이었다⁠. 오늘은 계단 아래의 시녀장을 향해 있었다⁠. 공작가의 손은 어딘가에는 떨어져야 했다⁠.

“⁠공작을 잡아라⁠.⁠”

황후가 일어나 있었다⁠. 목소리가 광장 끝까지 갔다⁠. 한 달 동안 차를 마셔 본 사람의 목소리였다⁠. 근위병들이 공작의 팔을 붙잡았다⁠. 들린 손은 끝내 아무 데도 떨어지지 못했다⁠. 공작이 끌려가며 무언가를 외쳤다⁠. 「⁠공작가는⁠」으로 시작하는 말이었다⁠. 끝은 군중의 소리에 묻혔다⁠.

막대가 삼분의 이를 넘었다⁠. 나는 등 뒤에서 쇠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들었다⁠.

형리는 대본대로 움직였다⁠. 깨어나지 않은 사람이었다⁠. 도끼가 머리 위로 높이 올라갔다⁠. 쪽대본의 마지막 줄이었다⁠. 「⁠형리⁠, 도끼를 내리친다⁠.⁠」 증언이 뒤집혀도 형리의 대본은 그대로였다⁠. 도끼날이 정수리 위에서 햇빛을 갈랐다⁠.

하얀 글자들 사이로 글자 하나가 떠올랐다⁠. 아이디 옆에 작은 연필 표시가 붙어 있었다⁠.

「⁠작가 · 잠깐만요⁠」

도끼가 멈췄다⁠. 내 머리 위 한 뼘에서⁠, 휴대전화 테두리 바로 위에서⁠. 형리의 팔이 허공에서 굳었다⁠. 쇠의 찬 기운이 정수리에 닿았다⁠.

「⁠작가 · 도끼 지웠어요⁠」

광장의 하얀 글자들이 한꺼번에 「⁠?⁠?⁠?⁠?⁠」가 되었다가 「⁠작가님⁠?⁠?⁠?⁠」이 되었다가 「⁠작가님 보고 있음⁠?⁠?⁠」이 되었다⁠. 나는 웃음이 터질 뻔했다⁠. 처형대 위에서 웃을 수는 없어서 입술을 깨물었다⁠.

막대가 끝에 가까워졌다⁠. 초침이 귀를 쪼았다⁠. 남은 시간은 이십 초 남짓이었다⁠. 첫 화 연회장에서 잔을 높이 들던 때와 같은 이십 초였다⁠.

흰 제복이 처형대 계단을 올라왔다⁠. 카시안은 형리의 굳은 팔 밑으로 지나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알현실 융단 위에서 폐위를 받던 무릎이었다⁠. 금빛 눈이 내 눈과 같은 높이가 되었다⁠. 카시안은 묶인 내 손목을 두 손으로 감쌌다⁠. 손바닥이 따뜻했다⁠.

“⁠하나 묻겠소⁠.⁠”

광장이 조용해졌다⁠. 하얀 글자들도 흐르기를 멈췄다⁠.

“⁠당신 이름이 무엇이오⁠?⁠”

원작 내내 아무도 하지 않은 질문이었다⁠. 공녀를 부르는 말은 공녀⁠, 악녀⁠, 계약 신부⁠, 죄인뿐이었다⁠. 출연진 자막에도 넉 자뿐이었다⁠.

“⁠주이레요⁠.⁠”

내 목소리가 광장 끝까지 갔다⁠.

“⁠주이레⁠. 스물다섯 살이고⁠, 콜센터에서 일했고⁠, 2호선 막차 타고 다녔어요⁠.⁠”

두둥⁠.

북소리가 지금까지 들은 것 가운데 가장 컸다⁠. 광장 전체가 멈췄다⁠. 군중이⁠, 관람석이⁠, 끌려가던 공작이⁠, 쟁반 옆의 시녀장이⁠, 처형대 아래의 에블린이⁠. 허공 한가운데에 붉은 글자가 떠올랐다⁠. 「⁠다음 화에 계속⁠」이 아니었다⁠.

「⁠완결⁠」

붉은 글자 밑으로 하얀 글자가 쏟아졌다⁠.

「⁠이레⁠?⁠」 「⁠이름 생겼다ㅠㅠㅠ⁠」 「⁠주이레 공녀⁠」 「⁠결제했는데 완결이라니 근데 납득함⁠」 「⁠작가 · 서른 화 완결⁠. 제 이름 달고요⁠」

마지막 글자를 보고 나는 눈을 감았다⁠. 머리 위 테두리에서 분홍 막대가 끝까지 찼다⁠. 꽉 찬 막대가 한 번 반짝이더니⁠, 테두리째로 흐려져 사라졌다⁠. 귓속의 초침이 멎었다⁠. 이번에는 다시 울리지 않았다⁠.

삼 분이 지났다⁠. 아무것도 되감기지 않았다⁠.

*

밤에 에블린의 베개 밑에서 마지막 종이가 나왔다⁠. 틈은 종이 한 장이 겨우 빠져나올 만큼 좁아져 있었다⁠. 종이가 나오고 나자 틈은 매트리스의 바느질 자국이 되었다⁠.

「⁠님 김치는 제가 못 챙겨 드려요⁠. 미안해요⁠. 에블린한테 전해 주세요⁠. 마지막 장은 버렸어요⁠. 대신 이제 아무도 안 써요⁠. 거기서는 다들 마음대로 하세요 — 작가⁠」

빨간 펜이었다⁠. 여백에는 한 줄이 더 있었다⁠. 「⁠편성 담당한테 엄청 혼나는 중⁠. 결제는 터졌음⁠」

*

저녁의 황궁 정원은 회색이 많았다⁠. 카메라가 꺼진 세상은 이제 계속 꺼져 있었다⁠. 우리가 걷는 길만 촘촘해졌다⁠. 분수 둘레의 장미는 겨울 장미였다⁠. 꽃잎 가장자리가 얼어 갈색이었다⁠. 화면이 보여 준 적 없는 장미였다⁠.

에블린은 분수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손바닥에 금반지를 올려놓고 있었다⁠. 백 번째 화 마지막 장의 분수였다⁠. 황후의 관도⁠, 잡을 손도 없었다⁠. 나와 카시안이 다가가자 에블린이 고개를 들었다⁠.

“⁠작가님이 마지막 장 버렸대요⁠.⁠”

“⁠알아요⁠. 들었어요⁠.⁠” 에블린이 반지를 굴렸다⁠. “⁠이제 정말 아무것도 없네요⁠.⁠”

카시안이 분수 가장자리에 앉았다⁠. 견장 없는 어깨에 물보라가 앉았다⁠. 에블린이 카시안을 보았다⁠.

“⁠전하⁠. 아니⁠, 카시안 님⁠. 마지막 장에서 저한테 무어라 속삭이셨을까요⁠? 작가님은 안 정했대요⁠. 카시안 님이 직접 하라고요⁠.⁠”

카시안은 진지하게 생각했다⁠. 분수 물소리가 한참 났다⁠. 카시안이 입을 열었다⁠.

“⁠아마⁠…⁠… 괜찮소⁠, 였을 것이오⁠.⁠”

정원이 조용했다⁠.

에블린의 어깨가 떨렸다⁠. 입술이 움찔했다⁠. 에블린은 두 손으로 입을 막으려다가⁠, 손이 반쯤 올라간 데서 멈췄다⁠. 대본도 카메라도 없는 데서⁠, 아낄 웃음도 닳을 웃음도 없는 데서⁠.

에블린이 웃었다⁠. 소리 내어⁠. 처음에는 터진 숨처럼 짧게⁠, 다음에는 길게⁠, 허리를 접고 분수 가장자리를 손바닥으로 치면서⁠. 백열세 번의 괜찮소를 다 털어 내는 웃음이었다⁠. 웃음소리가 장미 덤불을 지나고 회랑을 지나 정원 끝까지 갔다⁠. 회색이던 정원 끝이 웃음이 닿은 자리부터 천천히 그려졌다⁠.

에블린은 웃다가 반지를 분수에 던졌다⁠. 퐁⁠. 금빛이 물속에서 한 번 흔들리다 가라앉았다⁠.

“⁠그냥 금이에요⁠.⁠” 에블린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웃어서 난 눈물이었다⁠. “⁠내일은 세탁장에 가 볼래요⁠. 시녀장 딸이 빨래를 잘한대요⁠. 저 하얀 드레스밖에 없거든요⁠.⁠”

카시안이 나를 보았다⁠. 금빛 눈이 웃고 있었다⁠.

“⁠이레⁠.⁠”

처음 불리는 내 이름이었다⁠. 공녀의 귀로 듣는 내 이름은 낯설고⁠, 생각보다 짧았다⁠.

“⁠내일은 무엇을 하겠소⁠?⁠”

“⁠모르겠어요⁠. 대본이 없어서요⁠.⁠”

“⁠좋은 대답이오⁠.⁠”

나는 목에 손을 댔다⁠. 검은 리본 초커의 매듭을 당겼다⁠. 첫날 밤부터 살갗에 그려 넣은 듯 꿈쩍하지 않던 매듭이 손끝에서 스르륵 풀렸다⁠. 목이 시원했다⁠. 나는 풀린 리본으로 새빨간 머리칼을 한데 모아 묶었다⁠. 바람이 불었다⁠. 분수 물 위로 묶은 머리 끝이 흔들렸고⁠, 물 밑에서 반지가 한 번 더 금빛으로 깜박였다⁠. 에블린이 아직 웃고 있었다⁠. 삼 분이 지나고⁠, 또 삼 분이 지났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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