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26자)

향신 사랑채에 주판이 서른 개

소림사 세무 조사 · 여무겸

가정 32년 10월 26일 밤⁠, 추명도의 집 대문이 손바닥 하나만큼 열렸다⁠. 문틈으로 집사의 얼굴이 반쯤 나왔다⁠. 털 배자를 입은 채였고⁠, 입에서 술 냄새가 났다⁠.

“⁠서리 나리가 이 밤에 대문을 다 두드리시고⁠.⁠”

“⁠이번 달 이자를 가져왔습니다⁠.⁠”

은학은 소매에서 헝겊 꾸러미를 꺼냈다⁠. 집사가 꾸러미를 받아 풀고 은 조각 하나를 이로 깨물었다⁠. 깨문 자국을 등롱 불에 비춰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조각도 깨물었다⁠. 여섯 해 동안 다달이 보아 온 동작이었다⁠.

“⁠이자는 쪽문으로 내시면 되는데요⁠.⁠”

“⁠오늘은 추 나리를 뵈러 왔습니다⁠.⁠”

집사가 은학의 품을 보았다⁠. 품속에서 종이 모서리가 비죽 나와 있었다⁠. 집사가 웃었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나리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 밤 서리 나리가 올 거라고⁠, 술상을 하나 더 보라고 하셨지요⁠.⁠”

대문 안은 마당이 셋이었다⁠. 첫 마당 양옆으로 곳간이 줄지어 있었다⁠. 곳간 문마다 큰 자물쇠가 달려 있었고⁠, 문틈으로 좁쌀 냄새가 짙게 새어 나왔다⁠. 곳간 처마 밑에 아직 들이지 못한 소작료 자루가 쌓여 있었다⁠. 자루마다 마을 이름을 쓴 나무패가 꽂혀 있었다⁠. 은학이 걸으며 읽은 마을 이름 가운데 열이 소림 땅이라는 돌 표지가 박힌 마을이었다⁠. 개가 은학의 뒤를 따라오며 으르렁거렸다⁠. 은학은 관모를 한 번 더 바로 썼다⁠. 개가 으르렁거리던 소리를 낮추었다⁠. 어머니 말이 맞았다⁠.

두 번째 마당으로 넘어가는 문 옆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창호지에 책상 앞에 앉은 젊은 사내의 그림자가 비쳤다⁠. 그림자가 몸을 앞뒤로 흔들며 글을 외웠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먼 곳에서 오면 또한⁠… 또한⁠… 또한 배부르지 아니한가⁠.⁠”

“⁠즐겁지 아니한가⁠.⁠” 은학이 저도 모르게 말했다⁠.

창호지의 그림자가 멈추었다⁠. 문이 열리고 스물 남짓한 사내가 고개를 내밀었다⁠. 비단 옷에 붓을 귀에 꽂고 있었다⁠.

“⁠누구시오⁠?⁠”

“⁠지나가는 서리입니다⁠. 논어 첫 장은 즐겁지 아니한가입니다⁠.⁠”

“⁠배부르지 아니한가가 더 와닿소⁠.⁠” 사내가 귀에 꽂은 붓을 뽑아 들었다⁠. “⁠조부님이 내년 향시에 붙으라 하시는데⁠, 나는 벗이 먼 데서 오면 밥부터 생각나오⁠. 서리께서는 향시를 보셨소⁠?⁠”

“⁠세 번 봤습니다⁠.⁠”

“⁠세 번이나 붙으셨소⁠?⁠”

“⁠세 번 떨어졌습니다⁠.⁠”

사내가 붓을 도로 귀에 꽂았다⁠. “⁠그러면 나는 좀 더 놀아도 되겠소⁠.⁠” 문이 닫혔다⁠. 집사가 뒤에서 헛기침을 했다⁠. 추씨 집 손자라고⁠, 묻지도 않았는데 집사가 일러 주었다⁠.

*

사랑채는 두 번째 마당 끝에 있었다⁠. 방문을 열자마자 은학은 걸음을 멈추었다⁠. 벽 세 면에 주판이 빼곡했다⁠. 작은 것은 손바닥만 했고 큰 것은 문짝만 했다⁠. 흑단 틀에 상아 알을 끼운 것⁠, 붉은 칠에 금박을 입힌 것⁠, 알이 옥으로 된 것도 있었다⁠. 은학이 세어 보니 서른 개였다⁠. 추명도는 방 한가운데 술상 앞에 앉아 있었다⁠.

“⁠들어오게⁠. 내 자식들일세⁠.⁠” 추명도가 벽을 가리켰다⁠. “⁠주판 놓는 사람이 이 방에 들어와서 걸음을 멈추지 않으면 그 사람은 주판쟁이가 아니지⁠.⁠”

“⁠다 쓰시는 겁니까⁠?⁠”

“⁠쓰다니⁠? 모으는 거지⁠.⁠” 추명도가 벽에서 가장 낡은 주판 하나를 내렸다⁠. 틀이 거무스름했고 알 몇 개가 빠져 있었다⁠. “⁠이건 소동파가 쓰던 것이라더군⁠. 송나라 때 사람 말일세⁠.⁠”

“⁠소동파 때도 주판이 있었습니까⁠?⁠”

“⁠그러니 귀하지⁠.⁠” 추명도가 진지하게 말했다⁠. “⁠은 쉰 냥 줬네⁠.⁠”

은학은 술상 앞에 앉았다⁠. 술상에는 잔이 둘이었고⁠, 안주로 대추와 말린 감이 올라 있었다⁠. 추명도가 은학의 잔에 술을 따랐다⁠. 은학은 잔을 들지 않았다⁠.

“⁠자네 밭 이야기를 들었네⁠. 서쪽 개울가 대추나무 밭⁠.⁠” 추명도가 자기 잔을 비웠다⁠. “⁠노 이장은 정직한 사람이었지⁠. 정직해서 빚을 졌고⁠, 정직해서 그 빚을 우리 집에서 졌네⁠. 그 해에 이(⁠里⁠)의 빈 몫을 메우겠다고 은을 빌리러 왔을 때⁠, 내가 말렸어⁠. 빈 몫은 원래 빈 거라고⁠. 메우려고 들면 끝이 없다고⁠.⁠”

“⁠그 빈 몫이 누구 몫이었는지 나리는 아셨습니까⁠?⁠”

“⁠알았지⁠.⁠” 추명도가 대추를 하나 집었다⁠. “⁠우리 집 몫이었네⁠.⁠”

은학은 잔을 보았다⁠. 술 위에 등잔불이 떨렸다⁠.

“⁠젊은이⁠, 내 얘기를 들어 보게⁠. 서른 해 전 내가 땅을 소림에 맡기지 않았으면⁠, 그 땅에서 난 곡식은 관아를 거쳐 개봉으로⁠, 개봉에서 북경으로 갔을 걸세⁠. 북경에 가서 어디로 갔겠나⁠? 변방에 다 갔을까⁠? 절반은 가는 길에 관원들 소매로 들어가고⁠, 남은 절반의 절반은 궁 안에서 단약 굽는 도사들 숯값이 되었겠지⁠.⁠” 추명도가 대추씨를 뱉었다⁠. “⁠나는 그 곡식으로 서른 해 동안 소림 솥 하나를 끓였네⁠. 가정 연간 큰 가뭄 때는 우리 곳간을 열어 고을 사람들을 먹였고⁠, 개울에 다리를 놓았고⁠, 서당을 세웠네⁠. 관아가 한 일보다 내가 한 일이 많아⁠. 자네 아버지 같은 사람이 열이 있어도 이 고을은 못 먹여 살리네⁠. 나 같은 사람 하나는 먹여 살리지⁠.⁠”

“⁠그 서른 해 동안 나리 몫의 세금은 장 영감이 냈습니다⁠.⁠”

“⁠장 영감은 내 솥에서 죽을 먹지⁠.⁠”

“⁠장 영감 소로 끓인 죽입니다⁠.⁠”

추명도가 웃었다⁠. 소리 없이 어깨만 흔들었다⁠. 웃음을 그치고 술상 옆 궤짝을 열었다⁠. 궤짝 안에서 종이 두 장을 꺼내 술상 위에 나란히 놓았다⁠.

한 장은 은학이 아는 종이였다⁠. 아버지의 빚 문서였다⁠. 맨 아래에 붉은 「⁠추⁠」 자 도장이 있었다⁠. 다른 한 장은 처음 보는 종이였다⁠. 하남 포정사사의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국자감 감생 자리일세⁠. 나라에 곡식이나 은을 바치면 시험 없이 국자감에 이름을 올려 주는 길이 있지⁠. 감생이 되면 벼슬길이 열려⁠. 향시에 네 번째로 들어갈 필요가 없네⁠.⁠” 추명도가 두 번째 종이를 은학 앞으로 밀었다⁠. “⁠은 이백 냥은 내가 냈네⁠. 이름 칸만 비어 있어⁠.⁠”

은학은 종이를 보지 않으려고 했다⁠. 눈이 종이로 갔다⁠. 이름 쓸 자리가 비어 있었고⁠, 비어 있는 자리가 자기 이름만 한 크기였다⁠.

“⁠그리고 이건⁠.⁠” 추명도가 빚 문서를 집어 들어 등잔불 위로 가져갔다⁠. 종이 모서리가 불꽃에 닿을 듯 말 듯 흔들렸다⁠. “⁠자네가 원하면 오늘 밤 태우지⁠. 열세 해 이자가 오늘로 끝나⁠.⁠”

“⁠무엇을 해 드리면 됩니까⁠?⁠”

“⁠소림만 치게⁠.⁠” 추명도가 말했다⁠. “⁠사백 년 치든 사십 년 치든 소림 이름으로 된 땅을 거두게⁠. 관아가 팔면 내가 사지⁠. 그러면 원외랑 나리는 동지 전에 은을 받고⁠, 변방은 솜옷을 받고⁠, 자네는 벼슬과 빚 없는 집을 받네⁠. 소림은 땅을 잃지만 솥은 남아⁠. 내가 날마다 수레를 계속 보낼 테니까⁠. 누가 손해인가⁠?⁠”

“⁠장 영감이 손해입니다⁠.⁠”

“⁠장 영감은 늘 손해였네⁠. 자네가 무엇을 해도 그건 안 바뀌어⁠.⁠” 추명도가 턱으로 사랑채 옆방을 가리켰다⁠. “⁠원외랑 나리는 지금 저 손님방에서 주무시네⁠. 벽이 얇아⁠. 자네가 오늘 무슨 대답을 하든 원외랑 나리 귀에 들어갈 걸세⁠. 대답을 잘 고르게⁠.⁠”

은학은 옆방 벽을 보았다⁠. 벽 너머에서 기침 소리가 한 번 났다⁠. 잠든 사람의 기침이 아니었다⁠.

*

은학은 품에서 새 고지서를 꺼냈다⁠. 한 자도 안 되는 종이였다⁠. 술상 위⁠, 빚 문서와 감생 자리 사이에 펼쳐 놓았다⁠.

“⁠추씨 댁 밭 열여섯⁠, 삼천칠백 무⁠. 소림 이름에 맡겨 둔 서른 해 치 여름 세금과 가을 세금입니다⁠. 시주 문서보다 칠백 무가 넓어서⁠, 그 칠백 무는 소림도 관아도 모르는 땅이었습니다⁠.⁠” 은학은 고지서 맨 첫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맨 위는 저희 집 밭입니다⁠. 열두 무⁠, 열세 해 치⁠. 제가 냅니다⁠.⁠”

추명도가 고지서를 내려다보았다⁠. 맨 첫 줄을 오래 보았다⁠.

“⁠자네 아버지 밭부터 올렸군⁠.⁠”

“⁠아버지가 걱정하셨던 대로 했습니다⁠.⁠”

“⁠빚 문서를 태워 준다는데도⁠?⁠”

“⁠아버지 빚은 제가 갚겠습니다⁠. 아버지 밭 세금도 제가 냅니다⁠. 나리 밭 세금은 나리가 내십시오⁠.⁠” 은학은 감생 자리 종이를 추명도 앞으로 밀어 돌려놓았다⁠. “⁠이름 칸은 그대로 두시지요⁠. 나리 댁에 향시 볼 손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추명도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빚 문서를 등잔불에서 거두어 궤짝에 도로 넣었다⁠. 궤짝 뚜껑이 닫히는 소리가 컸다⁠.

“⁠그러면 주판으로 해 보세⁠.⁠” 추명도가 벽에서 흑단 주판 하나를 내려 은학 앞에 놓았다⁠. 상아 알이 반들거렸다⁠. “⁠내 밭 세금이 얼마인지 내 주판으로 놓아 보게⁠. 자네 주판은 관아 것이니 관아 편을 들 거야⁠.⁠”

은학은 흑단 주판을 당겼다⁠. 알을 올리려는데 알이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꿈쩍하지 않았다⁠. 알을 꿴 대나무 살에 옻칠이 두껍게 먹어 알이 붙어 있었다⁠. 벽에 두고 보기만 하는 주판이었다⁠.

“⁠알이 안 움직입니다⁠.⁠”

“⁠그러니 귀하지⁠.⁠”

은학은 흑단 주판을 내려놓고 자기 허리의 주판을 풀었다⁠. 열세 줄⁠, 관아에서 여섯 해를 쓴 것이었다⁠. 알이 반들반들 닳아 있었다⁠. 은학이 알을 튕기기 시작하자 서른 개 주판이 벽을 덮은 사랑채에서 처음으로 주판 소리가 났다⁠. 추명도는 소리를 들으며 술을 따랐다⁠. 따르다가 잔이 넘쳤다⁠.

은학이 마지막 알을 내렸다⁠.

“⁠은으로 바꾸면 이천 냥이 조금 넘습니다⁠. 나리가 소림 땅을 사려고 원외랑 나리께 내겠다고 하신 은보다 적습니다⁠. 땅을 사시는 것보다 세금을 내시는 편이 싸게 먹힙니다⁠.⁠”

추명도가 넘친 술을 소매로 훔쳤다⁠. 처음으로 대답이 늦었다⁠.

“⁠계산은 맞네⁠.⁠” 추명도가 말했다⁠. “⁠틀린 건 자네가 세상을 주판 하나로 놓는다는 거지⁠. 세상에는 주판이 서른 개 있어⁠. 내 방에도 서른 개가 있고⁠.⁠”

사랑채 밖에서 개가 짖다가 멈추었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발소리가 났다⁠. 가죽 장화가 돌바닥을 밟는 소리였고⁠, 쇠붙이가 부딪는 소리가 따라왔다⁠. 사랑채 문이 바깥에서 열렸다⁠.

문간에 선 사내는 마흔 남짓이었다⁠. 붉은 비단 옷에 물고기 비늘 같은 무늬가 수놓아져 있었고⁠, 허리에 휘어진 칼을 찼다⁠. 금의위의 칼이었다⁠. 사내는 방 안의 서른 개 주판을 한 번 둘러보고⁠, 술상 앞의 은학을 보았다⁠.

“⁠금의위 천호 석경룡이오⁠.⁠” 사내가 낮고 느리게 말했다⁠. “⁠소림 계단을 네 번 올랐다는 서리가 이 사람이오⁠?⁠”

추명도가 잔을 내려놓았다⁠. “⁠손님이 오셨군⁠. 한 분 더⁠.⁠”

석경룡은 앉으라는 말을 기다리지 않고 문턱을 넘었다⁠. 은학의 고지서를 집어 들어 등잔불에 비추어 보았다⁠. 글을 읽는 눈이 아니라 글씨를 쓴 손을 살피는 눈이었다⁠.

“⁠소림에 중이 몇이오⁠?⁠”

“⁠관아에는 이백여든이 올라 있습니다⁠. 도첩 있는 사람은 그 절반이 안 됩니다⁠.⁠”

“⁠그중 곤봉 드는 자가⁠?⁠”

“⁠나한당에 쉰쯤입니다⁠.⁠”

“⁠쉰⁠.⁠” 석경룡이 고지서를 술상에 내려놓았다⁠. “⁠북쪽에서는 백련교 무리가 오랑캐 땅으로 넘어가 알탄 칸의 성을 쌓아 준다고 하오⁠. 남쪽 바다에서는 왜구가 들끓고⁠. 이런 때에 산속에 쉰이 무기를 들고 모여 있소⁠. 칼 든 중은 중이 아니오⁠.⁠”

“⁠곤봉입니다⁠, 천호 나리⁠.⁠”

“⁠곤봉도 사람을 죽이오⁠.⁠” 석경룡이 은학을 내려다보았다⁠. “⁠서리⁠, 그대가 세금을 걷든 말든 나는 상관없소⁠. 나는 내일 산문에 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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