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329자)

아버지의 밭 열두 무

소림사 세무 조사 · 여무겸

가정 32년 10월 19일 새벽⁠, 등봉현 관아 대문 앞의 솥 여섯이 하나씩 장대에 꿰어졌다⁠. 밤사이 지현이 갈문형의 방문 앞에서 두 시진을 서 있었다⁠. 무엇이라고 빌었는지 은학은 몰랐지만⁠, 동이 트자 창고 문이 열렸고 시주 수레 스무 대가 산으로 돌아갔다⁠. 무 서른 개도 돌아갔다⁠. 서리 하나가 무를 셀 때 서른하나라고 했던 것을 기억해 내고 하나를 찾느라 한참 수레 밑을 뒤졌다⁠.

지현은 대문 옆 기둥에 기대어 하품을 했다⁠. 눈 밑이 검었다⁠.

“⁠노 서리⁠, 이번 한 번일세⁠. 북경 나리가 그러셨네⁠. 다음번에는 수레가 아니라 땅을 압류한다고⁠.⁠”

“⁠땅은 바퀴가 없어서 산으로 돌려보낼 수도 없겠습니다⁠.⁠”

“⁠그러니 더 무섭지⁠.⁠” 지현이 하품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자기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지현도 알았다⁠. 기둥에서 등을 떼고 목소리를 낮췄다⁠. “⁠추 진사가 사겠다는 말은 나도 들었네⁠. 내가 들은 줄은 자네도 모르는 걸로 하게⁠. 나는 배가 아파서 아무것도 못 들었어⁠.⁠”

“⁠오늘은 배가 괜찮으십니까⁠?⁠”

“⁠자네 얼굴을 보니 다시 아프네⁠.⁠”

은학은 산으로 올라가는 솥을 보았다⁠. 맨 뒤 솥을 진 은결이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관아가 소림 땅을 거두어 추명도에게 팔면⁠, 추씨가 소림 이름에 맡겨 둔 삼천 무가 은 한 번에 추씨 이름으로 돌아온다⁠. 막는 길은 하나였다⁠. 추씨의 삼천 무가 처음부터 소림 땅이 아니라는 것을 밭에서 보여 주면 된다⁠. 남의 땅을 소림 체납으로 거둘 수는 없다⁠. 수레가 그랬듯이⁠.

*

10월 21일 아침⁠, 북쪽 구릉의 그루터기 밭에 새끼줄 한 타래가 풀려 나갔다⁠. 줄 한쪽 끝은 은학이 잡았고⁠, 다른 끝은 개방 거지가 잡고 밭 건너편으로 뛰어갔다⁠. 거지는 스무 걸음쯤 가다가 넘어졌고⁠, 일어나면서 줄을 놓쳤다⁠. 줄이 뱀처럼 밭고랑을 따라 미끄러졌다⁠.

“⁠다시 하십시오⁠. 줄은 팽팽해야 합니다⁠.⁠”

“⁠팽팽한 건 배고픈 사람 배밖에 없소⁠.⁠” 거지가 투덜거리며 줄을 주웠다⁠.

방노삼이 밭둑에 앉아 대나무 막대로 땅에 금을 그었다⁠. 땅을 재는 법은 은학이 아침에 한 번 일러 주었다⁠. 다섯 자를 한 걸음으로 치고⁠, 가로 걸음과 세로 걸음을 곱해 이백사십으로 나누면 무가 나온다⁠. 방노삼은 곱하기에서 한 번 막히고⁠, 나누기에서 두 번 막혔다⁠. 세 번째로 막혔을 때 대나무 막대를 땅에 꽂았다⁠.

“⁠노 서리⁠, 거지가 왜 땅을 재야 하오⁠?⁠”

“⁠거지는 이 고을 밭을 다 압니다⁠. 밥 얻으러 안 가 본 집이 없으니까요⁠.⁠”

“⁠그건 맞소⁠.⁠” 방노삼이 막대를 다시 뽑았다⁠. “⁠어느 집 밭이 넓은지는 그 집 개가 얼마나 사나운지 보면 아오⁠. 추씨 집 개가 제일 사납소⁠.⁠”

원진은 두루마리 대신 새끼줄 타래를 메고 다녔다⁠. 무승이 새끼줄을 들고 밭을 누비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라⁠, 지나가던 농부들이 일손을 멈추고 구경했다⁠. 원진은 구경꾼을 볼 때마다 합장을 했고⁠, 합장을 할 때마다 줄이 손에서 풀렸다⁠.

첫날 잰 밭은 넷이었다⁠. 시주 문서에는 넷을 합쳐 사백 무라고 적혀 있었다⁠. 은학이 주판을 튕겨 보니 오백이십 무였다⁠. 추씨는 시주하면서 땅 넓이까지 줄여 적었다⁠. 줄인 만큼은 소림에도 관아에도 없는 땅이었다⁠. 거기서 나는 곡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추씨 곳간 하나만 알았다⁠.

“⁠땅이 자랐소⁠.⁠” 원진이 말했다⁠.

“⁠땅은 안 자랍니다⁠. 적은 사람이 줄였지요⁠.⁠”

“⁠적은 사람은 줄였는데 땅은 그대로 있었으니⁠, 땅 처지에서는 자란 것이오⁠.⁠”

은학은 원진을 한참 보았다⁠. 원진은 진지했다⁠.

*

이튿날 동쪽 개울가 밭에서 추씨 집사가 머슴 열을 데리고 나타났다⁠. 머슴들은 몽둥이를 들었고⁠, 집사는 지난번 비단 조끼 위에 털 배자를 하나 더 걸쳤다⁠. 날이 차가워지고 있었다⁠.

“⁠서리 나리⁠, 이건 무슨 짓입니까⁠?⁠”

“⁠조사 절차 여덟⁠, 전토의 실측입니다⁠.⁠”

“⁠소림 땅을 재시는데 왜 우리 머슴이 일하는 밭에서 재십니까⁠?⁠”

“⁠소림 땅이라고 돌에 새겨 있어서요⁠.⁠” 은학이 밭둑의 돌 표지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소림 땅이면 소림이 재게 해 주셨고⁠, 추씨 댁 땅이면 추씨 댁이 세금을 내셔야 합니다⁠. 어느 집 땅인지 말씀해 주시면 그 집 이름으로 고지서를 쓰겠습니다⁠.⁠”

집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소림 땅이라고 하면 줄을 막을 수 없고⁠, 추씨 땅이라고 하면 세금을 내야 했다⁠. 집사가 머슴들에게 턱짓을 했다⁠. 머슴들이 몽둥이를 들고 밭으로 들어왔다⁠.

방노삼이 손을 들었다⁠. 거지 스물이 줄을 놓고 밭 한가운데에 주저앉았다⁠. 그루터기 사이에 엉덩이를 붙이고⁠, 사발을 무릎에 올리고⁠, 머슴들을 올려다보았다⁠.

“⁠뭐 하는 거야⁠? 일어나⁠!⁠”

“⁠거지는 아무 데나 앉소⁠.⁠” 방노삼이 말했다⁠. “⁠앉는 데는 세금이 없소⁠. 쫓아내려면 때려야 하는데⁠, 거지를 때리면 소문이 나오⁠. 거지 입이 고을에서 제일 빠르오⁠. 추 나리 집 머슴이 밭에서 거지를 팼다는 소문이⁠, 내일 아침이면 낙양까지 가오⁠.⁠”

머슴들이 몽둥이를 든 채 집사를 돌아보았다⁠. 집사가 이를 악물었다⁠. 원진이 밭둑에 서서 합장했다⁠.

“⁠때리시려면 저 사람들 먼저⁠, 다음은 나요⁠. 나는 맞을 뿐 피하지 않소⁠.⁠”

“⁠스님은 왜 끼십니까⁠?⁠”

“⁠줄을 들고 있으니 나도 측량하는 사람이오⁠.⁠”

집사는 머슴들을 물렸다⁠. 돌아가면서 은학에게 한마디를 남겼다⁠.

“⁠나리⁠, 서리 녹봉으로 사시지요⁠? 노씨 댁 빚 문서가 아직 우리 집 궤짝에 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은학은 줄을 놓지 않았다⁠. 손바닥이 새끼줄에 쓸려 붉게 부어올랐다⁠.

사흘째 오후⁠, 서쪽 구릉 밭에서 줄을 잡던 거지가 손을 놓고 밭둑으로 뛰어갔다⁠. 밭둑에 젊은 소작인 하나가 서 있었다⁠. 동쪽 개울가 타작마당에서 은학에게 돌은 그렇게 말한다고 대꾸하던 소작인이었다⁠. 소작인은 거지에게 무언가를 쥐여 주고 돌아섰다⁠. 거지가 들고 온 것은 나무 말 하나였다⁠.

“⁠추 나리 댁 소작료 마당에서 쓰는 말이랍니다⁠. 헌 것이라 버린 걸 주워 뒀대요⁠.⁠”

은학은 말을 받아 들고 가장자리에 손가락을 대 보았다⁠. 관아 창고의 말보다 한 손가락 마디만큼 높았다⁠. 추씨 집은 소작인에게서 한 말을 받을 때마다 관아 말로 한 말하고도 한 되를 더 받았다⁠. 은학은 말을 두루마리 옆에 묶었다⁠. 소작인은 이미 밭둑 너머로 사라지고 없었다⁠. 이름을 묻지 못했다⁠.

“⁠이름은 안 물어보시오⁠?⁠” 방노삼이 물었다⁠.

“⁠물으면 내일 그 사람 밭이 없어집니다⁠.⁠”

방노삼이 대나무 막대로 은학의 정강이를 툭 쳤다⁠. “⁠서리치고는 쓸 만하오⁠.⁠”

*

10월 24일 해 질 녘⁠, 서쪽 개울가에 닿았을 때 거지들은 지쳐 있었다⁠. 나흘 동안 잰 밭이 열여섯⁠, 시주 문서에 적힌 삼천 무는 줄로 재면 삼천칠백 무였다⁠. 은학의 주판 알이 닳아서 반들거렸다⁠. 추씨 땅은 이제 다 쟀다⁠. 은학은 줄을 감으며 돌아가려 했다⁠.

“⁠저 밭도 소림 땅이오⁠.⁠” 방노삼이 대나무 막대로 개울 건너를 가리켰다⁠. “⁠돌 표지가 있소⁠. 작은 밭인데⁠, 거기 콩이 잘 되오⁠. 우리 애들이 가을마다 이삭 주우러 가오⁠.⁠”

개울 건너에 밭 하나가 있었다⁠. 크지 않았다⁠. 밭둑에 늙은 대추나무가 한 그루 있었고⁠, 대추나무 밑에 돌 표지가 박혀 있었다⁠. 은학은 대추나무를 알아보았다⁠. 대추나무 가지에 아버지가 새끼줄로 그네를 매어 주었다⁠. 은결이 그네에서 떨어져 이마를 찢었고⁠, 아버지가 은결을 업고 성안 의원까지 뛰었다⁠.

은학은 개울을 건넜다⁠. 신이 젖는 것도 몰랐다⁠. 대추나무 밑 돌 표지에 「⁠少林寺常住田⁠」이 새겨 있었다⁠. 다른 돌보다 글자 홈이 얕았다⁠. 이끼도 덜 끼어 있었다⁠.

“⁠이 밭은 시주 문서에 없었습니다⁠.⁠”

“⁠추씨 뭉치에 없었겠지⁠.⁠”

뒤에서 혜공의 목소리가 났다⁠. 혜공이 은결과 함께 개울가 길을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은결은 등에 장작 한 짐을 지고 있었다⁠. 거지들이 일어나 합장했고⁠, 원진이 줄 타래를 내려놓았다⁠. 혜공은 밭둑까지 와서 대추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나흘째 산 아래 밭을 다 재고 다닌다고 해서 내려왔네⁠. 언젠가 여기도 올 줄 알았지⁠.⁠”

“⁠대사님⁠, 이 밭이 왜 소림 땅입니까⁠?⁠”

“⁠시주를 받았으니까⁠.⁠”

“⁠누구에게서요⁠?⁠”

혜공이 은학을 보았다⁠. 은학이 끊은 말을 혜공이 끝까지 듣던 방장실의 눈이었다⁠.

“⁠가정 19년 겨울⁠, 노 이장이 산문을 올라왔네⁠. 이(⁠里⁠)의 빈 세금을 메우느라 빚을 지고⁠, 빚 갚을 날을 하루 앞둔 날이었지⁠. 빚 준 집에서는 밭을 내놓으라고 했다더군⁠. 노 이장은 빚 준 집에 밭을 주느니 부처님께 드리겠다고 했네⁠. 대신 두 가지를 부탁했지⁠.⁠” 혜공이 대추나무 가지를 만졌다⁠. “⁠그해 겨울 두 아들이 죽 줄에서 쫓겨나지 않게 해 달라는 것⁠. 작은아들을 공양간에 들여 밥을 먹여 달라는 것⁠.⁠”

“⁠그해 겨울에 아버지는 쓰러지셨습니다⁠.⁠”

“⁠시주하고 사흘 뒤였네⁠.⁠”

은학은 대추나무 밑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열여섯 살 겨울⁠, 죽 줄의 맨 끝에서 은학은 소림이 그냥 죽을 주는 줄 알았다⁠. 여섯 번째 솥 앞에서 받던 죽에는 아버지의 콩밭이 들어 있었다⁠. 은결이 공양간에 들어간 것도 은결이 졸라서가 아니었다⁠.

“⁠이 밭이 소림 땅이 된 뒤로⁠, 이 밭이 내던 세금은 어디로 갔습니까⁠?⁠”

혜공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물음이었다⁠. 은학이 장 영감에게⁠, 청허자에게⁠, 무림맹 연무장 한가운데에서 몇 번이나 말한 대답이 있었다⁠. 한 집이 빠지면 빠진 몫은 옆집으로 간다⁠.

은학은 은결을 보았다⁠. 은결은 장작 짐을 진 채 개울 물만 보고 있었다⁠.

“⁠너는 알았냐⁠?⁠”

은결이 장작 짐을 내려놓았다⁠. 장작이 땅에 부딪혀 굴렀다⁠.

“⁠열다섯 살 때 방장 스님이 말해 줬어⁠.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은결이 형을 보았다⁠. “⁠형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아버지가 그러셨대⁠. 형은 주판을 놓는 사람이라서⁠, 알면 이 밭부터 고지서에 올릴 거라고⁠.⁠”

은학은 대답하지 못했다⁠. 한참 뒤에 나온 목소리가 은학 자신에게도 낯설었다⁠.

“⁠알면서 나더러 돌아가라고 했냐⁠? 계단에서⁠, 세 번이나 들어서 옮기면서⁠.⁠”

“⁠형이 들고 올 줄 알았으니까⁠.⁠” 은결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형이 그 종이를 펼치면 언젠가 여기 올 줄 알았어⁠. 아버지 밭에⁠. 형이 아버지 밭에 고지서를 붙이는 거⁠, 나는 보기 싫었어⁠.⁠”

“⁠아버지 밭이 아니다⁠. 소림 밭이다⁠. 아버지가 그렇게 만드셨다⁠.⁠”

“⁠아버지는 우리 먹이려고 그랬어⁠!⁠”

은결의 고함에 개울가 억새밭에서 새 떼가 날아올랐다⁠. 혜공은 대추나무 밑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은학은 동생의 얼굴을 보았다⁠. 이마에 그네에서 떨어진 흉터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대사님⁠.⁠” 은학은 혜공을 보았다⁠. “⁠이 밭도 고지서에 올리겠습니다⁠.⁠”

혜공이 염주를 한 알 굴렸다⁠. “⁠자네 아버지가 걱정한 대로군⁠.⁠”

“⁠아버지가 걱정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거지들이 슬금슬금 개울 건너로 물러났다⁠. 방노삼이 원진의 소매를 끌었다⁠. 원진은 따라가면서 한 번 돌아보았다⁠.

해가 숭산 너머로 넘어갔다⁠. 대추나무 그림자가 밭을 가로질러 길게 누웠다⁠. 그루터기 사이에 거지 아이들이 줍다 남긴 콩 꼬투리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은학은 쪼그려 앉아 꼬투리를 집었다⁠. 꼬투리를 까자 안에 콩이 두 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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