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367자)

화산파 대제자와 주판 비무

소림사 세무 조사 · 여무겸

가정 32년 10월 보름 새벽⁠, 등봉현 성안 셋방에서 은학은 관복 끈을 매다가 손을 멈추었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사발을 씻고 있었다⁠. 가장자리에 이가 빠진 사발이었다⁠. 은학은 스무날 넘게 묻지 못한 말을 끈을 다 매고 나서야 꺼냈다⁠.

“⁠어머니⁠, 소림 죽 줄에 서 계신 걸 봤습니다⁠.⁠”

어머니의 손이 물속에서 멈추었다가 다시 움직였다⁠.

“⁠봤으면 인사를 하지⁠.⁠”

“⁠관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관복 입은 아들이 어미한테 인사도 못 하냐⁠?⁠” 어머니가 사발을 엎어 놓고 행주로 손을 닦았다⁠. “⁠죽 한 그릇 먹는 게 무슨 흉이냐⁠. 사흘에 한 번 가서 공양간 일 거들고 한 그릇 얻어먹는 거다⁠. 네 밥 쌀 아끼려고⁠.⁠”

“⁠사흘에 한 번 삼십 리를 걸으십니까⁠?⁠”

“⁠걸으면 배가 꺼지고⁠, 배가 꺼지면 죽이 더 맛있다⁠.⁠”

어머니는 말을 끝내고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은학은 문간에서 신을 신었다⁠. 신 끈을 매는 동안 어머니의 등이 아궁이 불빛에 붉게 물들었다⁠. 은학은 오늘 연무장에서 할 말을 머릿속으로 한 번 더 외웠다⁠. 외운 말 가운데 어머니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도 없었다⁠.

*

같은 날 늦은 아침⁠, 연무장으로 들어가는 쪽문 앞에서 은결이 물지게를 지고 있었다⁠. 양쪽 물통이 넘칠 만큼 차 있었는데⁠, 은결은 물통을 내려놓지 않고 형의 앞을 가로막았다⁠. 물이 출렁여 은학의 관복 자락에 몇 방울 튀었다⁠.

“⁠형⁠, 오늘 지면 섣달까지 산에 못 온다며⁠.⁠”

“⁠그렇게 정했다⁠.⁠”

“⁠그럼 어머니도 못 오셔⁠.⁠” 은결이 물지게를 고쳐 멨다⁠. “⁠형이 못 오는 산에 어머니가 오시겠어⁠? 형 체면 깎인다고 안 오시지⁠.⁠”

은학은 동생을 보았다⁠. “⁠어머니가 여기 오시는 걸 너는 알았냐⁠?⁠”

“⁠사흘마다 오셔⁠. 공양간에서 내 옆에 앉아서 파 다듬으셔⁠. 파 다듬으시고 죽 한 그릇 드시고⁠, 남은 누룽지 싸서 내려가셔⁠.⁠” 은결이 형의 얼굴을 보고 말을 멈추었다⁠. “⁠몰랐어⁠?⁠”

“⁠몰랐다⁠.⁠”

“⁠형만 몰랐네⁠.⁠”

은결은 물지게를 지고 쪽문 안으로 들어갔다⁠. 물통에서 흘린 물이 돌바닥에 줄을 그으며 따라갔다⁠. 은학은 젖은 관복 자락을 손으로 짰다⁠. 물이 몇 방울 떨어졌다⁠. 셋방의 밥상 위 흰쌀밥과⁠, 한 번도 상을 보지 않던 어머니의 바늘이 떠올랐다⁠. 누룽지는 어디로 갔는지 은학은 알지 못했다⁠. 은학이 먹은 적이 없었다⁠.

*

같은 날 한낮⁠, 소림사 연무장은 사람으로 꽉 찼다⁠. 사방 백 걸음쯤 되는 돌마당이었는데⁠, 북쪽 끝에 소림·무당·화산·개방의 깃발 넷이 나란히 꽂혀 있었다⁠. 개방 깃발은 깃대가 대나무였고⁠, 깃발 천에 기운 자국이 셋 있었다⁠. 마당 둘레에는 무승과 도사와 화산 제자들이 둘러섰고⁠, 담 위에는 죽 줄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다리를 늘어뜨리고 앉아 있었다⁠. 개방 거지 몇이 담 밑을 돌며 볶은 콩을 한 줌씩 팔았다⁠. 한 줌에 동전 한 닢이었다⁠.

은학은 마당 한가운데에 혼자 앉았다⁠. 앞에 놓인 낮은 탁자에 주판 하나와 고지서 두루마리가 있었다⁠. 연무장 기둥 뒤에서 삿갓 하나가 고개를 내밀었다가 쑥 들어갔다⁠. 지현이었다⁠. 삿갓 아래로 관복 자락이 다 보였다⁠.

“⁠무림맹 대회를 연다⁠.⁠” 북쪽 깃발 아래에서 청허자가 일어섰다⁠. 거북 등딱지를 옆에 내려놓았다⁠. “⁠겨루기는 셋이다⁠. 말과 주판과 사람⁠. 셋 가운데 둘을 이기는 사람이 오늘 옳은 사람이다⁠.⁠”

원진이 곤봉으로 바닥을 쳤다⁠.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은학은 옳은 사람을 겨루기로 정한다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옳은 일이 꼭 어느 한 사람 몫이어야 하는지 은학은 알 수 없었다⁠.

“⁠첫 겨루기는 말일세⁠.⁠” 청허자가 은학 앞으로 걸어 나왔다⁠. “⁠노 서리⁠, 하늘은 땅에 비를 내리고 땅은 사람에게 곡식을 내네⁠. 하늘이 땅에게 세금을 걷는가⁠?⁠”

“⁠걷지 않습니다⁠.⁠”

“⁠땅은 사람에게 세금을 걷는가⁠?⁠”

“⁠걷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은 땅에 세금을 매기나⁠?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는 것을 우리는 어리석다고 하네⁠. 무위라는 말을 아는가⁠? 억지로 하지 않는 것이 도라는 말일세⁠.⁠”

담 위에서 박수가 나왔다⁠. 은학은 주판을 만지작거렸다⁠.

“⁠도장님⁠, 하늘이 비를 내릴 때 등봉현 몫⁠, 화음현 몫을 나눠 내립니까⁠?⁠”

“⁠나누지 않네⁠.⁠”

“⁠나라는 나눕니다⁠. 등봉현이 올해 북경에 보낼 좁쌀이 정해져 있습니다⁠. 하늘이 비를 적게 내린 해에도 줄지 않습니다⁠. 이 몫을 이(⁠里⁠)마다 나누고⁠, 이 안에서 다시 집마다 나눕니다⁠. 한 집이 빠지면 빠진 몫은 사라지지 않고 옆집으로 갑니다⁠.⁠” 은학은 청허자를 올려다보았다⁠. “⁠억지로 하지 않는 것이 도라면⁠, 지금 억지로 내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의 도를 대신 지고 있습니까⁠?⁠”

“⁠그러면 북경에 가서 고을 몫을 줄여 달라고 하게⁠.⁠”

“⁠북경은 변방이 춥다고 합니다⁠.⁠”

청허자가 수염을 쓸었다⁠. 담 위가 조용했다⁠. 콩을 팔던 거지도 손을 멈추었다⁠. 청허자는 한참 은학을 내려다보다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첫 겨루기는 비긴 걸로 하세⁠. 나는 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이겼다고 말하기도 싫군⁠.⁠”

*

두 번째 겨루기에 백소운이 나왔다⁠. 백소운은 칼을 풀어 제자에게 맡기고 열다섯 줄 주판만 들고 은학의 탁자 맞은편에 앉았다⁠. 무승 둘이 탁자 양옆에 향을 하나씩 꽂고 불을 붙였다⁠.

“⁠향이 타는 동안 소림의 사백 년 체납을 계산합니다⁠. 정화 3년부터 올해까지⁠, 나리 고지서에 적힌 땅 넓이와 고을 세율로⁠.⁠” 백소운이 주판을 흔들어 알을 가지런히 했다⁠. “⁠빠르고 맞는 사람이 이깁니다⁠.⁠”

“⁠나리 고지서는 제가 썼습니다⁠. 제가 답을 압니다⁠.⁠”

“⁠압니다⁠. 그래서 틀린 데를 제가 찾으면 제가 이기는 거지요⁠.⁠”

향 끝에서 연기가 올라가자 두 주판이 동시에 울었다⁠. 딸깍거리는 소리가 연무장 돌바닥 위로 빗소리처럼 깔렸다⁠. 백소운의 손가락은 은학보다 빨랐다⁠. 열다섯 줄을 다 쓰면서 위아래로 알을 튕겼고⁠, 은학은 열세 줄 가운데 열한 줄로 같은 일을 했다⁠. 담 위의 사람들은 무슨 겨루기인지 몰라도 두 사람의 손만 보고 숨을 죽였다⁠. 지현이 기둥 뒤에서 삿갓을 벗고 목을 뺐다⁠.

향이 반쯤 탔을 때 백소운의 손이 멈추었다⁠.

“⁠틀렸습니다⁠.⁠” 백소운이 고지서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나리는 당나라 때 진왕이 내린 땅 사십 경을 넣었어요⁠. 황제가 내린 땅은 세금 바깥입니다⁠. 사백 년 치에서 그만큼 빠져야 해요⁠.⁠”

“⁠알고 있습니다⁠.⁠” 은학은 고지서 끝을 펼쳐 보였다⁠. 종이 귀퉁이에 작은 글씨로 무언가 적혀 있었다⁠. “⁠황제가 내린 땅은 빼 두었습니다⁠. 대신 사백 년 치 고지서에는 원외랑 나리께서 넣으라고 하신 땅이 들어 있습니다⁠. 소림 이름으로 맡겨 둔 남의 땅입니다⁠. 삼천 무⁠.⁠”

“⁠남의 땅이요⁠?⁠”

“⁠향신이 세금을 피하려고 절 이름에 맡겨 둔 땅입니다⁠. 소작료는 향신 집으로 갑니다⁠.⁠” 은학은 주판 알을 다시 올렸다⁠. “⁠이 삼천 무가 서른 해 동안 내지 않은 세금을 등봉현 다른 집들이 메웠습니다⁠. 한 집에 해마다 좁쌀 너 말쯤입니다⁠.⁠”

백소운의 손이 주판 위에서 멈추어 있었다⁠. 은학은 백소운의 손등을 보았다⁠. 칼 쥐는 사람의 손이 아니었다⁠. 손바닥에 낫 자루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대제자님은 화음현 어디 출신이십니까⁠?⁠”

“⁠그건 왜요⁠?⁠”

“⁠화산 아래 화음현에도 화산 이름으로 된 땅이 있을 겁니다⁠. 그 땅 소작료가 어느 집으로 가는지 대제자님은 아실 것 같아서요⁠.⁠”

향이 다 타서 재가 떨어졌다⁠. 백소운은 주판을 탁자 위에 엎었다⁠. 알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두 번째 겨루기는 제가 졌습니다⁠.⁠”

화산 제자들이 술렁거렸다⁠. 청허자가 거북 등딱지를 두드렸다⁠. 백소운은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연무장 가장자리에 혼자 섰다⁠. 화산 깃발을 등지고 서 있었다⁠.

*

겨루기 사이에 반 시진 쉬는 틈이 생겼다⁠. 은학이 탁자 앞에 그대로 앉아 있자 방노삼이 대나무 막대를 짚고 다가와 볶은 콩 한 줌을 탁자에 쏟았다⁠.

“⁠드시오⁠. 값은 안 받소⁠.⁠”

“⁠동전 한 닢이라고 들었습니다⁠.⁠”

“⁠나리한테는 해당 없음이오⁠.⁠” 방노삼이 허리 자루를 두드렸다⁠. 접힌 종이 모서리가 자루 밖으로 비죽 나와 있었다⁠. “⁠나도 해당 없음을 받았으니⁠, 나리도 하나 받아야 공평하지⁠.⁠”

은학은 콩을 하나 집어 먹었다⁠. 소금을 쳐서 볶은 콩이었다⁠. 방노삼은 은학 옆에 쭈그려 앉아 담 위의 사람들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기 앉은 사람들 반은 나리 편이고 반은 소림 편이오⁠. 그런데 다들 같은 죽을 먹소⁠. 그게 제일 웃기오⁠.⁠”

“⁠장로님은 어느 편이십니까⁠?⁠”

“⁠나는 콩 편이오⁠.⁠” 방노삼이 일어나며 콩 한 알을 입에 던져 넣었다⁠. “⁠콩은 세금이 없거든⁠.⁠”

*

“⁠세 번째는 사람일세⁠.⁠” 청허자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낮았다⁠. “⁠누구를 세우겠나⁠?⁠”

은학은 담 위를 올려다보았다⁠. 담 끝에 장 영감이 앉아 있었다⁠. 은학이 이레 전 관아 사람을 보내 부탁했을 때 장 영감은 대답 대신 침을 뱉었다⁠. 오늘 아침 장 영감은 누구보다 먼저 와서 담 위에 앉아 있었다⁠.

장 영감이 담에서 내려왔다⁠. 새끼줄로 동여맨 짚신이 돌바닥에 끌렸다⁠. 마당 한가운데에 와서 섰지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사람이 너무 많았다⁠.

“⁠영감님⁠, 누렁이 이야기를 해 주십시오⁠.⁠”

“⁠누렁이⁠?⁠” 장 영감이 은학을 보았다가⁠, 담 위를 보았다가⁠, 깃발 넷을 보았다⁠. “⁠열한 해 키운 소요⁠. 올봄에 이장이 끌고 갔소⁠. 우리 갑에 빈 세금이 있다고⁠. 나는 내 몫을 냈소⁠. 우리 갑 사람들도 다 냈소⁠. 그런데 빈 세금이 있다는 거요⁠. 빈 세금이 어디서 났냐고 물었더니 이장이 그러더이다⁠. 세금 안 내는 땅이 있어서 그렇다고⁠. 그 땅이 누구 땅이냐고 물었더니⁠…⁠.⁠”

장 영감이 말을 멈추었다⁠. 혜공이 소림 깃발 아래에 앉아 있었다⁠.

“⁠누구 땅이라고 했습니까⁠?⁠”

“⁠절 땅이라고 했소⁠.⁠” 장 영감이 혜공을 보았다⁠. “⁠나는 날마다 저 절에서 죽을 먹소⁠. 소 판 다음부터⁠. 그러니 할 말이 없소⁠. 할 말이 없는데 배는 고프고⁠, 소는 없소⁠.⁠”

담 위에서 누가 훌쩍였다⁠. 웃던 사람들이 웃지 않았다⁠. 개방 거지들이 콩 자루를 내려놓았다⁠. 방노삼이 대나무 막대로 자기 발등을 두드렸다⁠. 방노삼 곁에 앉은 거지들 가운데 절반은 소를 판 집의 아들이었다⁠.

혜공은 염주를 굴리지 않았다⁠. 은학은 혜공을 보지 않으려고 장 영감의 짚신을 보았다⁠.

청허자가 일어섰다⁠. “⁠판정을⁠…⁠.⁠”

“⁠판정은 미룹시다⁠.⁠” 백소운이 연무장 가장자리에서 말했다⁠. “⁠화산은 이 판정에 손을 들지 않겠습니다⁠.⁠”

깃발 넷 가운데 하나가 흔들렸다⁠. 바람 때문인지 깃대를 잡은 화산 제자의 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방노삼이 백소운을 보았고⁠, 청허자가 혜공을 보았다⁠. 혜공은 장 영감을 보고 있었다⁠.

연무장 문간에서 사미승 하나가 달려왔다⁠. 짚신 한 짝이 벗겨진 채였다⁠. 사미승은 혜공 앞에 엎어지듯 무릎을 꿇었다⁠.

“⁠방장 스님⁠, 쌀 수레가 안 올라옵니다⁠. 관아 길목에서 북경 나리가 수레를 다 세웠습니다⁠. 압류라고 했습니다⁠. 추 나리 댁 수레도⁠, 마을에서 올라오던 시주 수레도 전부요⁠.⁠”

은학의 주판에서 알 하나가 저절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담 위의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려 공양간을 보았다⁠. 오늘 저녁 솥에 넣을 쌀이 산 아래 길목에 멈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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