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398자)

땅 없는 개방이 제일 먼저 왔다

소림사 세무 조사 · 여무겸

가정 32년 9월 13일 해 질 녘⁠, 소림사 산문 계단 아래에 가마 두 채가 나란히 내려앉아 있었다⁠. 앞의 가마는 검은 칠에 금박을 둘렀고⁠, 뒤의 가마는 관아에서 빌린 것이라 휘장 한쪽이 찢어져 있었다⁠. 금박 가마에서 먼저 사람이 내렸다⁠. 예순 남짓에 흰 비단 도포를 입었고⁠, 손에 쥔 부채 살이 상아였다⁠. 은학이 계단을 다 내려오기도 전에 부채가 펼쳐졌다⁠.

“⁠자네가 노 서리인가⁠? 계단을 네 번 올랐다는⁠.⁠”

소문은 은학보다 빨리 산을 내려가 있었다⁠. 은학은 맨 아래 칸에서 허리를 굽혔다⁠.

“⁠등봉현 호방 서리 노은학입니다⁠.⁠”

“⁠추명도일세⁠. 지부 벼슬을 하다 고향에 내려와 늙는 사람이지⁠.⁠” 추명도가 부채로 은학의 등 뒤를 가리켰다⁠. 원진이 아직 두루마리를 메고 서 있었다⁠. “⁠사백 년 치라⁠. 장하다⁠. 등봉에 이런 젊은이가 있는 줄 몰랐네⁠. 향시에 세 번 떨어진 사람이 쓴 글씨가 아니야⁠. 시험관들이 눈이 없었지⁠.⁠”

찢어진 가마에서 갈문형이 내렸다⁠. 갈문형은 칭찬하는 말에는 끼어들지 않았다⁠. 계단 위를 한 번 올려다보고⁠, 은학을 한 번 보았다⁠.

“⁠수결은 받았나⁠?⁠”

“⁠아직입니다⁠.⁠”

“⁠사흘 동안 무엇을 했나⁠?⁠”

“⁠시주각에서 땅을 찾았습니다⁠. 소림 이름으로 된 땅 가운데 삼천 무가 해마다 추씨 댁으로 소작료를 냅니다⁠.⁠”

은학은 추명도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추명도의 부채가 한 번 멈추었다가 다시 부쳤다⁠. 바람이 일정했다⁠.

“⁠시주한 땅은 부처님 것일세⁠. 소작인들이 오래 낸 버릇대로 우리 집에 갖다 주는 것을 내가 받아서 소림 공양간에 다시 보내지⁠. 수레로 날마다⁠.⁠” 추명도가 웃었다⁠. “⁠서리 일을 하면 사람이 의심이 많아지지⁠. 나쁜 버릇은 아니야⁠. 다만 젊은이⁠, 세상은 주판으로 안 돌아가네⁠.⁠”

“⁠주판으로 안 도는 것은 세상이고⁠, 세금은 주판으로 돕니다⁠.⁠”

갈문형이 손을 들었다⁠. “⁠그만⁠. 서리가 왜 향신 땅을 들추나⁠? 칙령은 무림 문파의 전토를 말한다⁠. 소림 이름으로 된 땅은 다 소림 땅이다⁠. 소림 것을 걷어라⁠. 사백 년 치를 내지 못하면 땅으로 받는다⁠. 관아가 땅을 거둬 팔면 은이 한 번에 나온다⁠.⁠”

“⁠땅으로 받으면 솥이 식습니다⁠.⁠”

“⁠솥은 내 일이 아니다⁠.⁠” 갈문형이 짧게 끊었다⁠. “⁠대동 변방의 병사들은 지금 맨손에 입김을 불고 있다⁠. 여기 죽 줄보다 길게⁠.⁠”

추명도가 손뼉을 한 번 쳤다⁠. 길 아래에서 소달구지 한 대가 올라왔다⁠. 짐칸에 쌀가마가 여섯 개 실려 있었다⁠.

“⁠오늘 몫일세⁠. 공양간으로 올려 보내게⁠.⁠” 추명도가 원진에게 말했다⁠. “⁠서리 나리가 사백 년을 걷는 동안에도 죽은 끓어야지⁠.⁠”

계단 옆 담 너머로 쌀가마를 본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누가 “⁠추 나리 만세⁠” 하고 외쳤고⁠, 몇이 따라 외쳤다⁠. 원진이 은학을 보았다⁠. 쌀가마를 받으러 내려가면서 원진은 은학의 두루마리를 계단 난간에 조심스럽게 기대 놓았다⁠.

산길 아래에서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지현이 관복 자락을 손에 쥐고 뛰어 올라오고 있었다⁠. 가마를 탈 돈을 아낀 모양이었다⁠. 지현은 추명도와 갈문형 앞에 이르러 허리를 굽혔다가 숨이 차서 한동안 펴지 못했다⁠.

“⁠늦었습니다⁠. 오늘 배가⁠…⁠.⁠”

“⁠배는 괜찮나⁠?⁠” 추명도가 부채로 지현의 등을 두드렸다⁠.

“⁠추 나리를 뵈니 다 나았습니다⁠.⁠”

추명도가 은학에게 돌아섰다⁠. “⁠노 서리⁠, 오늘 저녁 우리 집에서 원외랑 나리와 함께 밥이나 드세⁠. 계단을 네 번 오른 다리를 쉬게 해야지⁠.⁠”

“⁠고맙습니다만⁠, 집에서 어머니가 밥을 짓고 기다리십니다⁠.⁠”

“⁠효자로군⁠.⁠” 추명도가 부채를 접었다⁠. 접힌 부채 끝이 은학의 허리춤 주판을 가볍게 건드렸다⁠. 알 하나가 딸깍 내려갔다⁠. “⁠주판 알이 하나 틀렸네⁠.⁠”

은학은 계단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혜공이 산문 아래에서 이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은학이 고개를 숙이자⁠, 혜공은 돌아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

9월 15일 밤⁠, 등봉현 성안 골목 끝의 셋방에서 어머니가 밥상을 들고 들어왔다⁠. 상 위에 흰쌀밥 한 그릇과 시래깃국⁠, 간장 한 종지가 있었다⁠. 흰쌀밥은 관아에서 달마다 서리에게 내주는 쌀로 지은 것이었다⁠. 쌀이 반 말이 채 안 되어서⁠, 은학은 한 달 내내 어머니가 쌀을 어디에 숨겨 두고 아껴 짓는지 알지 못했다⁠.

“⁠어머니는 드셨습니까⁠?⁠”

“⁠먹었다⁠.⁠”

“⁠무엇을요⁠?⁠”

“⁠밥을 먹었지⁠, 무엇을 먹어⁠?⁠” 어머니가 등잔 심지를 돋우고 바느질감을 무릎에 올렸다⁠. 남의 집 버선이었다⁠. 한 켤레를 기우면 동전 두 닢이 나왔다⁠. “⁠관아에서는 사백 년을 걷는다며⁠. 성안에 소문이 났다⁠. 노씨 집 큰아들이 소림 계단을 네 번 올랐다고⁠.⁠”

“⁠세 번 들려 내려왔다는 말은 안 났습니까⁠?⁠”

“⁠그 말도 났다⁠.⁠” 어머니의 바늘이 버선 뒤꿈치를 오갔다⁠. “⁠은결이가 들었다며⁠.⁠”

은학은 숟가락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어머니는 바느질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추씨 댁 이자는 이번 달에도 냈다⁠. 네 녹봉 받은 날 갖다줬어⁠.⁠”

아버지가 이장으로 있던 해에 이(⁠里⁠)의 빈 세금을 메우려고 추씨 집 전당포에서 은을 빌렸다⁠. 아버지는 은을 빌린 해 겨울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고⁠, 빚은 열세 해째 이자만 줄지 않고 남아 있었다⁠. 은학은 빚 문서를 본 적이 있었다⁠. 맨 아래에 찍힌 붉은 도장이 「⁠추⁠」 자였다⁠.

“⁠어머니⁠, 그저께 추씨 댁 주인을 소림 계단 아래서 만났습니다⁠.⁠”

“⁠인사는 했냐⁠?⁠”

“⁠세금 얘기를 했습니다⁠.⁠”

어머니의 바늘이 처음으로 멈추었다⁠. 등잔불이 흔들렸다⁠. 어머니는 바늘을 버선에 꽂아 둔 채 은학을 보았다⁠.

“⁠밥 식는다⁠. 먹어라⁠.⁠”

은학은 밥을 먹었다⁠. 어머니는 바느질을 다시 했다⁠. 은학이 숟가락을 놓을 때까지 어머니의 바늘은 버선 한 짝을 다 기웠고⁠, 한 번도 상을 보지 않았다⁠.

*

9월 20일 아침⁠, 은학이 다시 산문 계단을 오르자 대웅전 앞마당에 먼저 와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개방이었다⁠. 누더기를 입은 거지 스물이 대웅전 계단에 줄줄이 앉아 사발을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다⁠. 가운데 앉은 사내는 쉰 남짓에 허리에 매듭 지은 자루를 여럿 찼고⁠, 손에 대나무 막대를 쥐었다⁠. 개방 장로 방노삼이었다⁠.

“⁠노 서리가 누구요⁠?⁠”

“⁠접니다⁠.⁠”

“⁠생각보다 말랐소⁠. 우리 편인 줄 알았소⁠.⁠” 방노삼이 대나무 막대로 마당 바닥을 툭 쳤다⁠. “⁠우리는 땅이 없소⁠. 땅이 없으니 세금도 없지⁠. 그래서 걱정은 제일 많소⁠. 소림 솥이 식으면 우리가 제일 먼저 굶소⁠. 그래서 제일 먼저 왔소⁠.⁠”

“⁠멀리서 오셨습니까⁠?⁠”

“⁠어제 저녁에 왔소⁠. 죽 먹고 잤소⁠.⁠”

뒤이어 산문으로 들어온 것은 화산파였다⁠. 검은 옷을 입은 제자 넷을 거느리고 서른 남짓한 여인이 앞장섰다⁠. 머리를 높이 틀어 올리고 허리에 칼을 찼는데⁠, 칼 옆에 주판이 하나 더 매달려 있었다⁠. 화산파 장문의 대제자 백소운이라고 스스로 밝히고⁠, 은학의 허리춤을 먼저 보았다⁠.

“⁠주판이 열세 줄이군요⁠. 저는 열다섯 줄입니다⁠.⁠”

“⁠두 줄로 무엇을 더 하십니까⁠?⁠”

“⁠빚을 셉니다⁠.⁠” 백소운이 대답했다⁠. “⁠화산은 땅이 적어서 은이 늘 모자랍니다⁠. 서리 나리의 고지서가 소림을 지나 화산으로 오면⁠, 화산은 산을 팔아야 합니다⁠. 산을 팔면 화산파가 아니라 그냥 파지요⁠.⁠”

“⁠화산이 그냥 파가 되면 저도 섭섭합니다⁠.⁠”

“⁠서리 나리가 섭섭하실 일은 아니지요⁠.⁠” 백소운이 주판 알을 하나 튕겼다⁠. “⁠소림 계단 아래에서 시작한 고지서가 화산 봉우리까지 오는 데 몇 해 걸릴지⁠, 저는 벌써 계산해 두었습니다⁠.⁠”

“⁠몇 해입니까⁠?⁠”

“⁠두 해요⁠. 서리 나리 목이 그때까지 붙어 있다면요⁠.⁠”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무당이었다⁠. 흰 도포를 입은 도사가 제자 하나 없이 혼자 걸어 들어왔다⁠. 예순 남짓에 수염을 반만 길렀고⁠, 등에 칼 대신 부채만 한 거북 등딱지를 메었다⁠. 무당의 청허자였다⁠.

“⁠무당은 걱정할 게 없지 않습니까⁠?⁠” 방노삼이 먼저 물었다⁠. “⁠황상께서 도사를 그렇게 아끼신다던데⁠.⁠”

“⁠황상께서 아끼시는 도사는 단약을 굽는 도사요⁠. 우리는 칼을 쓰는 도사지⁠.⁠” 청허자가 대웅전 계단에 앉았다⁠. “⁠칼 쓰는 도사는 단약 굽는 도사의 땅을 지켜 주지 않소⁠. 단약 굽는 도사도 칼 쓰는 도사의 땅을 지켜 주지 않고⁠.⁠”

혜공이 대웅전에서 나왔다⁠. 넷이 모였다⁠. 은학은 마당 한가운데에서 품을 뒤졌다⁠.

“⁠마침 잘되었습니다⁠. 조사 절차 여섯⁠, 관련 문파에 대한 사전 고지입니다⁠.⁠”

은학은 밤새 쓴 종이 석 장을 꺼내 차례로 건넸다⁠. 화산파 몫은 백소운에게⁠, 무당파 몫은 청허자에게 갔다⁠. 마지막 한 장은 방노삼 손에 들어갔다⁠. 방노삼이 종이를 펼쳤다⁠. 종이 가운데에 넉 자가 쓰여 있었다⁠.

「⁠해당 없음⁠.⁠」

방노삼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게 무슨 말이오⁠?⁠”

“⁠개방은 전토가 없으므로 세금도 없다는 고지입니다⁠.⁠”

“⁠그러면 왜 주는 거요⁠?⁠”

“⁠문파마다 고지하라는 절차가 있어서요⁠. 받으셨다는 수결을 해 주십시오⁠.⁠”

“⁠나는 이걸 못 받소⁠!⁠” 방노삼이 종이를 흔들었다⁠. “⁠다들 받는데 나만 해당 없음이오⁠? 우리가 문파가 아니라는 말이오⁠? 개방 제자가 천하에 몇인 줄 아시오⁠?⁠”

“⁠모릅니다⁠. 호적에 안 오르셔서요⁠.⁠”

대웅전 계단의 거지 스물이 한꺼번에 일어섰다⁠. 백소운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청허자는 거북 등딱지를 무릎에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인 사람이 청허자 하나였는데도 마당이 조용해졌다⁠.

“⁠노 서리⁠.⁠” 청허자가 말했다⁠. “⁠칼로 하자면 자네는 열 번 죽고⁠, 주판으로 하자면 우리가 열 번 죽겠지⁠. 말로 하세⁠. 다음 달 보름⁠, 이 절 연무장에서 무림맹 대회를 열겠네⁠. 소림·무당·화산·개방이 오늘부터 한 맹일세⁠. 대회에 나와서 자네 고지서가 왜 옳은지 말하게⁠. 우리가 말로 지면 고지서를 받겠네⁠.⁠”

“⁠제가 지면요⁠?⁠”

“⁠섣달 그믐까지 산에 오르지 말게⁠.⁠”

은학은 주판을 내려다보았다⁠. 섣달 그믐까지 산에 오르지 않으면⁠, 섣달 그믐에 목을 내놓아야 했다⁠. 지든 이기든 섣달 그믐은 오고⁠, 이기면 조금 더 늦게 온다⁠.

“⁠나가겠습니다⁠.⁠”

혜공이 염주를 한 알 굴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맹을 묶은 사람이 혜공이라는 것을 마당에 있는 사람이 다 알았다⁠. 방노삼이 「⁠해당 없음⁠」 종이를 접어 허리 자루에 넣었다⁠. 받지 않겠다고 소리친 종이를 가장 깊숙이 넣었다⁠.

*

해가 기울 무렵 은학은 담을 따라 산을 내려갔다⁠. 공양간 뒷마당에서 저녁 죽 줄이 담 밖까지 나와 있었다⁠. 은학은 줄 옆을 지나면서 사람들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땅을 보고 걸었다⁠. 땅을 보아도 발이 보였다⁠. 맨발⁠, 짚신⁠, 헝겊으로 감은 발⁠, 신이 한 짝뿐인 발⁠. 줄은 길었고⁠, 줄 끝은 산길 모퉁이를 돌아서까지 이어졌다⁠.

모퉁이를 돌자 줄 맨 끝에 등이 조금 굽은 여인이 서 있었다⁠. 흰머리가 섞인 머리를 쪽 지었고⁠, 기운 데를 다시 기운 무명 저고리를 입었다⁠. 손에 든 사발은 은학이 아는 사발이었다⁠. 가장자리에 이가 빠진 자리가 있었고⁠, 열세 해 전 겨울에 은학이 들고 다니던 사발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을 보지 못했다⁠. 앞사람의 등을 보며 한 걸음 줄이 나아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은학은 은행나무 뒤에 섰다⁠. 관복의 남색이 노란 잎 사이에서 너무 진했다⁠. 어머니가 한 걸음 나아갔다⁠. 사발 이 빠진 자리가 은학 쪽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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