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520자)

사백 년 치 시주 문서에 깔린 서리

소림사 세무 조사 · 여무겸

가정 32년 9월 11일 새벽⁠, 소림사 시주각 이 층에서 노은학은 먼지를 세 번 들이마시고 재채기를 네 번 했다⁠. 시주각은 절에 땅과 곡식을 바친 사람들의 문서를 쌓아 두는 누각이었다⁠. 서가가 천장까지 닿아 있었고⁠, 서가마다 끈으로 묶은 종이 뭉치가 빽빽했다⁠. 맨 아래 칸의 뭉치는 끈이 삭아 손을 대면 가루가 났다⁠. 창은 북쪽에 하나뿐이어서⁠, 해가 올라오기 전에는 원진이 들고 온 등잔 하나가 전부였다⁠.

“⁠방장께서 사백 년 치를 보여 주라 하셨소⁠.⁠” 원진이 등잔을 서가 옆 못에 매달았다⁠. “⁠다 보고 나면 사백 년이 지나 있을 거라고도 하셨소⁠.⁠”

“⁠방장께서 농담도 하십니까⁠?⁠”

“⁠농담인지 아닌지 나도 사십 년째 모르오⁠.⁠”

은학은 서가 왼편 맨 아래부터 손을 댔다⁠. 당나라 때 진왕 이세민이 소림 승병의 공을 치하하며 땅 사십 경과 물레방아 하나를 내렸다는 글을 베낀 종이가 가장 먼저 나왔다⁠. 비석에 새긴 것을 다시 베낀 것이라 글씨가 반듯했다⁠. 한 경이 백 무이니 사십 경은 사천 무였다⁠. 은학은 종이 귀퉁이에 「⁠황제가 내린 땅⁠」이라고 작게 적고 옆으로 밀어 두었다⁠. 나라가 내린 땅은 나라가 거두기 어렵다⁠. 관아에서 일한 여섯 해가 은학에게 가르쳐 준 것이었다⁠.

해가 올라오자 북쪽 창으로 흰빛이 들어왔다⁠. 은학은 원나라 때의 쌀 시주⁠, 홍무 연간의 기름 시주⁠, 영락 연간의 종 시주를 지나 위로 올라갔다⁠. 서가 가운데 칸에서 뭉치 하나가 유난히 새것이었다⁠. 끈이 하얗고 종이가 누렇지 않았다⁠. 은학이 뭉치를 잡아당기는 순간 서가가 앞으로 기울었다⁠.

“⁠노 서리⁠!⁠”

원진이 손을 뻗다가 허공에서 멈추었다⁠. 서가 위 칸의 뭉치들이 먼저 쏟아졌고⁠, 서가가 쏟아진 뭉치 위로 천천히 엎어졌다⁠. 먼지가 등잔불을 덮었다⁠. 은학이 눈을 떴을 때는 사백 년 치 시주 문서가 가슴과 다리를 누르고 있었고⁠, 코앞에 송나라 어느 과부가 향 열 근을 바쳤다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살아 있소⁠?⁠”

“⁠살아 있습니다⁠. 향 냄새가 납니다⁠.⁠”

“⁠꺼내 드리겠소⁠.⁠” 원진이 소매를 걷다가 다시 내렸다⁠. “⁠아니⁠, 잠깐⁠. 문서 아래 깔린 관원을 끌어내는 것은 관원에게 손을 대는 것인가⁠?⁠”

“⁠지금 그걸 따지실 때입니까⁠?⁠”

“⁠지금 따지지 않으면 언제 따지오⁠?⁠”

원진은 곤봉을 집어 들었다⁠. 곤봉 끝으로 종이 뭉치를 하나씩 들어 옆으로 옮겼다⁠. 손목만 쓰는 느린 동작이었는데⁠, 뭉치 하나를 옮길 때마다 은학의 가슴이 한 근씩 가벼워졌다⁠. 은학은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려 원진이 걷어 내는 종이의 글자를 읽었다⁠. 숨이 찼지만 읽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어깨까지 드러났을 때 원진의 곤봉이 아까 본 새 뭉치를 들어 올렸다⁠. 끈이 풀리면서 종이가 은학의 얼굴 위로 흩어졌다⁠.

「⁠가정 2년 봄⁠, 등봉현 향신 추씨가 동쪽 개울가 밭 이백 무를 소림사에 시주한다⁠.⁠」

「⁠가정 9년 가을⁠, 추씨가 북쪽 구릉 논밭 사백 무를 소림사에 시주한다⁠.⁠」

은학은 원진의 곤봉에 매달려 일어나 앉았다⁠. 같은 집안의 이름이 서른 해 동안 열한 번 나왔다⁠. 은학은 무릎 위에 종이를 늘어놓고 주판을 당겼다⁠. 먼지 앉은 알이 뻑뻑하게 내려왔다⁠.

“⁠삼천 무입니다⁠.⁠”

“⁠추 나리 댁은 시주를 많이 하시오⁠. 공양간 쌀도 날마다 수레로 보내시오⁠.⁠”

“⁠날마다 수레 하나로요⁠?⁠”

“⁠한 수레요⁠.⁠”

은학은 주판 알을 다시 올렸다⁠. 삼천 무에서 나는 좁쌀이면 수레 하나로는 모자랐다⁠. 한참 모자랐다⁠.

나무 계단이 삐걱거렸다⁠. 은결이 쟁반을 들고 올라왔다⁠. 쟁반 위에 죽 사발 하나와 짠지 한 종지가 있었다⁠. 은결은 엎어진 서가와 종이 더미 한가운데 앉은 형을 보더니 쟁반을 든 채 한참 서 있었다⁠.

“⁠방장 스님이 갖다 주래⁠. 먹고 일찍 내려가라고⁠.⁠”

“⁠일찍 내려가라는 말은 빼고 먹겠다⁠.⁠”

은결이 쟁반을 종이 더미 위에 내려놓았다⁠. 은학은 사발을 들었다⁠. 죽은 뜨거웠고⁠, 바닥에 좁쌀이 두껍게 가라앉아 있었다⁠. 공양간에서 가장 먼저 퍼 준 죽이 아니라 솥 바닥을 긁어 담은 죽이었다⁠. 열세 해 전 겨울에 받던 죽과 같았다⁠. 은학은 한 숟가락을 떠 넣고 사발을 내려놓았다⁠.

“⁠너 아직도 바닥 것을 퍼 오는구나⁠.⁠”

“⁠바닥이 제일 걸쭉해⁠.⁠” 은결이 엎어진 서가를 일으켜 세웠다⁠. 혼자서 서가 하나를 번쩍 들었다⁠. 원진이 곤봉을 짚은 채 감탄하는 소리를 냈다⁠. “⁠형⁠, 여기서 뭘 찾는데⁠?⁠”

“⁠땅이다⁠. 누가 무슨 땅을 소림에 맡겼는지⁠.⁠”

은결의 손이 서가 모서리에서 잠깐 멈추었다⁠. 은학은 사발 너머로 동생의 손을 보았다⁠. 은결은 서가를 벽에 붙이고 손바닥을 털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형이 이러는 거 보고 뭐라 하셨을까⁠.⁠”

“⁠칭찬하셨겠지⁠. 아버지는 이장이셨다⁠. 남의 빈 몫까지 메우다가 쓰러지신 분이다⁠.⁠”

은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빈 쟁반을 집어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이 아까보다 크게 삐걱거렸다⁠. 은학은 식기 시작한 죽을 마저 먹었다⁠. 바닥까지 긁어 먹고 나서야 은결이 쟁반을 두고 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

이튿날 아침⁠, 은학은 원진과 함께 소림 동쪽 개울가로 내려갔다⁠. 원진은 감시로 따라붙었는데⁠, 오 리쯤 걸은 뒤부터는 은학의 두루마리를 대신 메고 있었다⁠. 무거워 보여서 들었을 뿐 관원의 몸에 손을 댄 것은 아니라고⁠, 원진은 묻지도 않은 말을 두 번 했다⁠.

“⁠수좌 스님은 왜 도첩이 없으십니까⁠?⁠”

“⁠도첩은 은으로 사는 것이오⁠. 나라가 은이 모자랄 때마다 도첩을 팔았지⁠. 내가 머리를 깎던 해에는 은 열 냥이었소⁠.⁠” 원진이 두루마리를 고쳐 멨다⁠. “⁠나는 은이 없었소⁠. 그래서 머리만 깎았소⁠.⁠”

“⁠그러면 나라가 보기에 스님은 승려가 아니십니다⁠.⁠”

“⁠부처님이 보기에는⁠?⁠”

“⁠관아에는 부처님 도장이 없어서 모르겠습니다⁠.⁠”

원진이 껄껄 웃었다⁠. 웃음소리에 개울가 억새밭에서 꿩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원진은 꿩을 눈으로 따라가다가 말했다⁠. “⁠세금도 은이고 도첩도 은이고 솜옷도 은이오⁠. 북경은 은을 좋아하오⁠.⁠”

밭은 가을걷이가 끝나 그루터기만 남아 있었다⁠. 밭둑 끝에 무릎 높이의 돌 표지가 박혀 있었고⁠, 돌에는 「⁠少林寺常住田⁠」⁠, 소림사가 대대로 부리는 땅이라는 글자가 새겨 있었다⁠. 돌 표지에서 백 걸음 떨어진 타작마당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소작인들이 좁쌀 자루를 지고 줄을 섰고⁠, 줄 맨 앞에서 비단 조끼를 입은 사내가 커다란 말로 좁쌀을 떠서 쟀다⁠. 말은 곡식을 되는 나무 그릇이었다⁠. 은학이 보기에 말 가장자리가 보통 관아 말보다 한 손가락쯤 높았다⁠.

“⁠어느 댁 소작료입니까⁠?⁠”

줄 끝의 젊은 소작인이 은학의 관복을 보고 자루를 고쳐 멨다⁠.

“⁠추 나리 댁이지요⁠.⁠”

“⁠이 땅은 소림 땅이라고 돌에 새겨 있는데요⁠.⁠”

“⁠돌은 그렇게 말하지요⁠.⁠” 소작인이 웃지도 않고 말했다⁠. “⁠좁쌀은 추 나리 댁으로 갑니다⁠. 해마다 그랬습니다⁠. 우리 아버지 때도 그랬고요⁠.⁠”

비단 조끼가 말을 내려놓고 이쪽으로 걸어왔다⁠. 추씨 집 집사라고 스스로 밝혔다⁠.

“⁠관아 분이 소작료 마당에는 무슨 일로⁠?⁠”

“⁠조사 절차 다섯⁠, 현장 확인입니다⁠. 이 땅의 세금은 누가 냅니까⁠?⁠”

“⁠소림 땅이니 세금이 없지요⁠.⁠”

“⁠소작료는 누가 받습니까⁠?⁠”

집사가 원진을 흘끗 보았다⁠. 원진은 곤봉을 짚고 하늘을 보고 있었다⁠.

“⁠나리⁠, 논두렁은 누구의 것이오⁠?⁠” 원진이 하늘에 대고 물었다⁠.

“⁠논두렁은 지금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닙니다⁠, 스님⁠.⁠”

“⁠그러면 언제 묻소⁠?⁠”

집사는 원진을 무시하고 은학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비단 조끼에서 사향 냄새가 났다⁠.

“⁠서리 나리⁠, 우리 나리께서는 지금 댁에 귀한 손님을 모시고 계십니다⁠. 북경 호부에서 오신 원외랑 나리시지요⁠. 여기 일은 그분께 여쭈시는 게 빠를 겁니다⁠.⁠”

“⁠원외랑 나리께서 추 나리 댁에 묵으십니까⁠?⁠”

“⁠관아 객사는 바람이 들어서요⁠.⁠” 집사가 웃었다⁠. “⁠우리 나리는 손님을 춥게 두지 않으십니다⁠.⁠”

집사는 돌아서서 말을 다시 들었다⁠. 소작인들이 은학을 힐끔거리며 자루를 쏟았다⁠. 좁쌀 쏟아지는 소리가 비처럼 들렸다⁠. 은학은 말 가장자리의 높이를 손가락으로 재 보고 싶었으나 집사가 말을 몸으로 가렸다⁠. 은학은 돌 표지 옆에 쪼그려 앉아 돌에 새긴 글자를 손끝으로 쓸었다⁠. 글자 홈에 이끼가 끼어 있었다⁠. 서른 해쯤 된 이끼였다⁠.

*

9월 13일 저녁⁠, 방장실 문은 열려 있었다⁠. 혜공은 방석 위에 앉아 차를 따르고 있었고⁠, 찻잔이 둘이었다⁠. 은학이 들어서자 혜공은 한 잔을 밀어 주었다⁠.

“⁠앉게⁠. 사백 년은 다 읽었나⁠?⁠”

“⁠사십 년만 읽었습니다⁠. 나머지는 원진 스님이 곤봉으로 치웠습니다⁠.⁠”

“⁠원진이 곤봉으로 무엇을 치운 건 오랜만이군⁠.⁠”

은학은 앉지 않았다⁠. 품에서 추씨 시주 문서 열한 장을 꺼내 차 쟁반 옆에 나란히 놓았다⁠.

“⁠대사님⁠, 동쪽 개울가 밭에 다녀왔습니다⁠. 소림 땅이라고 새긴 돌 옆에서 소작인들이 추씨 집사에게 소작료를 냅니다⁠. 관아는 이 땅을 소림 땅으로 알고 세금을 매기지 않습니다⁠. 세금 없는 집 이름에 땅을 맡겨 두는 일을 관아에서는 궤기라고 부릅니다⁠. 땅은 남의 이름에 맡기고 곡식은 제 곳간으로 거두는 일입니다⁠.⁠”

혜공은 찻잔을 들었다⁠. 김이 흰 수염 끝에 맺혔다⁠.

“⁠알고 있네⁠.⁠”

“⁠알고 계셨습니까⁠?⁠”

“⁠삼십 년 전에 추 진사가 처음 왔을 때부터⁠. 그때 추 진사는 지부 벼슬을 받아 남쪽으로 가는 길이었네⁠. 밭을 소림에 맡기겠다고 하더군⁠. 대신 공양간에 날마다 쌀 한 수레를 보내겠다고⁠.⁠” 혜공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수레가 솥 하나일세⁠. 여섯 솥 가운데 하나⁠.⁠”

“⁠삼천 무에서 나는 곡식이면 솥이 열은 됩니다⁠.⁠”

“⁠알고 있네⁠.⁠”

“⁠그 삼천 무가 내지 않은 세금은 등봉현 다른 집들이 메웁니다⁠. 장 영감의 누렁이가 메웠고⁠, 열세 해 전에는⁠…⁠.⁠”

은학은 말을 끊었다⁠. 혜공이 은학을 오래 보았다⁠. 은학이 끊은 말의 끝을 혜공도 아는 얼굴이었다⁠.

“⁠그러니 대사님은 추씨 집 세금을 장 영감 소로 메우시면서 장 영감에게 죽을 쑤어 주고 계십니다⁠.⁠”

방장실 밖에서 저녁 종이 울렸다⁠. 혜공은 대답 대신 염주를 한 바퀴 다 굴렸다⁠.

“⁠자네가 그 땅을 들추면 수레가 끊기네⁠. 내일 아침 솥 하나가 식고⁠, 백 몇 사람이 마당에서 빈 사발을 들고 돌아가지⁠. 추 진사는 세금을 내느니 땅을 팔 사람이고⁠, 땅을 사는 사람은 또 다른 이름을 찾겠지⁠. 자네가 바로잡는 것은 종이 위의 땅이고⁠, 내가 지키는 것은 오늘 저녁 사발일세⁠.⁠”

“⁠사발도 종이도 같은 고을에 있습니다⁠.⁠”

혜공이 창밖 대웅전 지붕을 보았다⁠. “⁠도사를 아끼는 황제께서 궁 안 불당을 허셨다는 말은 자네도 들었겠지⁠. 칙령은 무림 문파라고 말하지만⁠, 첫 고지서가 어느 산문으로 갈지는 북경이 정했네⁠.⁠”

“⁠고지서는 제가 썼습니다⁠.⁠”

“⁠그러니 더 아프지⁠.⁠”

“⁠그래서 자네는 나를 칠 텐가⁠?⁠”

“⁠고지서를 고쳐 드리겠습니다⁠. 소림 몫과 추씨 몫을 따로 적어서⁠.⁠”

혜공이 처음으로 눈을 감았다⁠. 은학은 혜공이 화를 내는지 웃는지 알 수 없었다⁠. 염주 알이 멈추었다⁠.

“⁠추 진사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빠르네⁠.⁠”

“⁠그러면 제가 먼저 뛰겠습니다⁠.⁠”

“⁠자네는 걸음이 느리지 않나⁠. 계단을 네 번 오른 사람이 할 말은 아닐세⁠.⁠”

문밖에서 발소리가 다급하게 났다⁠. 빗자루를 든 사미승이 문턱에 걸려 넘어질 뻔하다가 겨우 섰다⁠.

“⁠방장 스님⁠, 산문 아래 가마가 둘 왔습니다⁠. 추 나리하고⁠, 북경 나리요⁠.⁠”

은학은 찻잔을 보았다⁠. 혜공이 따라 준 차는 한 모금도 줄지 않은 채 식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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