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17자)

머리 안 깎은 승병

소림사 세무 조사 · 여무겸

가정 32년 10월 27일 저녁⁠, 소림사 대웅전 앞마당에 나한당 무승 쉰이 모였다⁠. 곤봉은 들지 않았다⁠. 석경룡이 돌아간 뒤로 무승들은 곤봉을 나한당 벽에 세워 두고⁠, 압류 예정 물건이라 흠집 나면 안 된다며 서로 손대지 못하게 했다⁠. 마당 가장자리에 속가제자 스물이 섰다⁠. 머리를 깎지 않고 뒤로 묶은 사람들이었다⁠. 은결이 맨 앞에 있었다⁠.

은학은 대웅전 처마 밑 기둥 옆에 서 있었다⁠. 석경룡이 돌아간 뒤 산을 내려가지 못하고 해 질 녘까지 산문 안을 서성이다가⁠, 종소리를 따라 앞마당으로 왔다⁠. 무승 하나가 은학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가⁠, 관원이라는 것을 생각해 내고 도로 고개를 들었다⁠.

혜공이 대웅전 계단에 앉았다⁠. 등 뒤로 법당 안 부처의 얼굴이 등잔불에 반쯤 보였다⁠.

“⁠소림은 쉰을 보내지 않는다⁠.⁠”

마당이 조용했다⁠. 원진이 고개를 숙였다⁠. 쉰 가운데 몇이 숨을 내쉬었다⁠.

“⁠봄에 서른을 보냈다⁠. 서른이 돌아오지 않았다⁠. 산이 사람을 보내면 산은 사람을 받아야 하는데⁠, 이 산은 서른을 받지 못했다⁠. 또 쉰을 보내면 이 산은 무엇으로 남느냐⁠? 솥만 남는다⁠. 솥을 지킬 사람도 없이⁠.⁠” 혜공이 염주를 굴렸다⁠. “⁠금의위가 올라오면⁠, 올라오라고 해라⁠. 우리는 막을 뿐 치지 않는다⁠. 막다가 쓰러지면 쓰러진다⁠.⁠”

“⁠그러면 솥이 엎어집니다⁠, 방장 스님⁠.⁠”

은결이 앞으로 나왔다⁠.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무승들의 눈이 은결에게 갔다⁠.

“⁠스님들은 계율이 있습니다⁠. 살생하지 말라⁠. 저희는 머리를 안 깎았습니다⁠. 계율을 반만 받았으니 살생 계율도 반입니다⁠.⁠” 은결의 목소리가 마당에 울렸다⁠. “⁠속가제자 스물이 가겠습니다⁠. 천호는 쉰이라고 했지만⁠, 무승 쉰보다 속가 스물이 낫다고 하면 받을 겁니다⁠. 받게 만들겠습니다⁠.⁠”

“⁠은결아⁠.⁠”

“⁠방장 스님이 아버지 밭 받고 저 먹여 주셨잖아요⁠. 열세 해 동안⁠.⁠” 은결이 혜공을 보았다⁠. “⁠이번엔 제가 솥을 지키겠습니다⁠. 멀리서⁠.⁠”

혜공은 대답하지 않았다⁠. 원진이 쉰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 은결 옆에 섰다⁠.

“⁠나도 가겠소⁠. 나는 도첩이 없으니 계율을 반의반쯤 받았소⁠. 살생 계율도 반의반이오⁠.⁠”

무승들 사이에서 웃음이 새었다가 금방 그쳤다⁠. 웃을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다들 알았는데⁠, 원진이 하는 말은 늘 웃겼다⁠. 무승 다섯이 더 걸어 나왔다⁠. 도첩을 방에 두고 왔다던 무승들이었다⁠. 이제 스물여섯이었다⁠.

혜공이 염주를 멈추었다⁠. 법당 안의 등잔불이 흔들렸다⁠.

*

이튿날 아침⁠, 공양간에서 은결은 솥 여섯을 하나씩 저었다⁠. 솥마다 김이 올라 공양간 천장에 맺혔다가 물방울로 떨어졌다⁠. 은학은 공양간 문간에 서서 동생의 등을 보았다⁠. 산을 오르는 동안 할 말을 서른 가지쯤 생각했는데⁠, 문간에 서자 하나도 남지 않았다⁠.

“⁠형⁠, 들어오든지 나가든지 해⁠. 문 열어 두면 김 빠져⁠.⁠”

은학은 들어와 문을 닫았다⁠.

“⁠너는 못 간다⁠.⁠”

“⁠왜⁠?⁠”

“⁠이건 조사 절차 말고 관아 절차다⁠.⁠” 은학은 공양간 한가운데 섰다⁠. “⁠속가제자는 승적이 아니라 호적에 올라 있다⁠. 너는 등봉현 성안 노씨 집 사람이다⁠. 등봉현 사람을 요역이나 군역으로 내보내려면 관아가 차출해야 한다⁠. 차출 문서는 호방이 쓴다⁠. 호방에서 쓰는 사람이 나다⁠. 내가 안 쓰면 너는 못 간다⁠.⁠”

은결이 주걱을 멈추고 돌아섰다⁠.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그네에서 떨어져 생긴 흉터가 김에 젖어 붉었다⁠.

“⁠그럼 써⁠.⁠”

“⁠안 쓴다⁠.⁠”

“⁠형⁠, 금의위가 왜 왔는데⁠?⁠” 은결이 주걱을 솥에 걸쳐 놓았다⁠. “⁠형이 산문에서 고지서 펼쳤잖아⁠. 사람들이 모였잖아⁠. 칙령이 오고⁠, 원외랑이 오고⁠, 추 나리가 오고⁠, 무당하고 화산하고 개방이 오고⁠, 금의위가 왔어⁠. 다 형 뒤에 줄 서서 왔어⁠.⁠”

“⁠금의위는 내 고지서 때문에 온 게 아니다⁠. 북쪽 백련교 때문에⁠, 남쪽 왜구 때문에⁠, 산에 곤봉 든 사람이 모여 있다는 소문 때문에 왔다⁠.⁠”

“⁠소문은 누가 냈는데⁠?⁠”

은학은 대답하지 못했다⁠. 솥 하나에서 죽이 끓어 넘쳤다⁠. 은결이 얼른 뚜껑을 열고 주걱으로 휘저었다⁠. 넘친 죽이 아궁이 불에 떨어져 타는 냄새가 났다⁠.

“⁠나 미워서 하는 말 아니야⁠.⁠” 은결이 솥을 보며 말했다⁠. “⁠형이 옳은 거 알아⁠. 장 영감 소도 알고⁠, 추 나리 땅도 알고⁠, 아버지 밭도 알아⁠. 형 말이 다 맞아⁠. 맞는 말이 계단을 올라오면 누가 내려가야 해⁠. 이번엔 내가 내려가⁠.⁠”

“⁠어머니는⁠?⁠”

“⁠형이 있잖아⁠.⁠”

“⁠나는 섣달 그믐에 목이 날아갈지도 모른다⁠.⁠”

“⁠그럼 둘 다 없는 거네⁠.⁠” 은결이 웃었다⁠. 웃는 얼굴이 아버지를 닮아 있었다⁠. “⁠형⁠, 차출 문서 써⁠. 안 쓰면 천호가 쉰을 잡으러 와⁠. 스님들은 막을 뿐 치지 않으니까⁠, 그냥 잡혀가⁠. 그거 보고 싶어⁠?⁠”

은학은 주먹을 쥐었다⁠. 손바닥에 새끼줄에 쓸린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아 따끔거렸다⁠.

“⁠안 쓴다⁠.⁠”

은결이 주걱을 내려놓았다⁠. 형에게 다가왔다⁠. 은학이 뒤로 물러서기 전에 몸이 공중에 떴다⁠. 계단에서처럼 은결이 형을 어깨에 얹었다⁠. 은학이 은결의 등을 주먹으로 쳤다⁠. 은결은 꿈쩍하지 않았다⁠. 공양간 구석의 장작더미까지 걸어가서⁠, 형을 장작더미 꼭대기에 앉혀 놓았다⁠. 장작더미가 은학의 무게에 삐걱거렸다⁠. 은학의 관모가 장작 사이로 굴러떨어졌다⁠.

“⁠네 번째⁠.⁠” 은결이 관모를 주워 형의 머리에 씌웠다⁠. “⁠계단에서 세 번 했으니까⁠.⁠”

“⁠내려 줘라⁠.⁠”

“⁠형이 차출 문서 쓴다고 하면⁠.⁠”

은결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솥으로 돌아갔다⁠. 은학은 장작더미 위에서 내려오지 못했다⁠. 장작이 무너질까 봐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공양간 사미승들이 문틈으로 들여다보다가 은학과 눈이 마주치자 흩어졌다⁠. 은결이 솥 여섯을 다 저을 때까지 은학은 장작더미 위에 앉아 있었다⁠. 은결은 마지막 솥을 젓고 나서 형에게 와서 두 손을 뻗었다⁠.

“⁠내려와⁠.⁠”

은학은 동생의 손을 잡고 내려왔다⁠. 장작 하나가 굴러 떨어졌다⁠.

*

10월 28일 해 질 녘⁠, 관아 호방에 돌아온 은학은 차출 문서에 쓰는 종이를 궤짝에서 꺼냈다⁠. 종이를 꺼내 놓고 한참 탁자 앞에 앉아만 있었다⁠. 문간에 갈문형이 나타났다⁠. 저녁 내내 지현과 동지까지 날짜를 맞추던 참이었다⁠.

“⁠금의위가 승병을 데려가면 산이 비겠군⁠.⁠” 갈문형이 탁자 위의 빈 종이를 보았다⁠. “⁠차출 문서냐⁠?⁠”

“⁠아직 안 썼습니다⁠.⁠”

“⁠누구를 쓸 거냐⁠?⁠”

“⁠제 동생입니다⁠.⁠”

갈문형이 말이 없었다⁠. 문틀에 손을 얹고 서서 은학의 빈 종이를 오래 보았다⁠.

“⁠나는 형이 없다⁠.⁠” 갈문형이 말했다⁠. “⁠대동에서 군량을 나를 때⁠, 같이 수레를 몰던 사내가 형 같았지⁠. 그해 겨울 성벽에서 내려오지 못했다⁠. 손가락이 창 자루에 붙어서⁠.⁠” 갈문형이 문틀에서 손을 뗐다⁠. “⁠차출 문서는 호방이 쓰고⁠, 도장은 지현이 찍고⁠, 내가 확인한다⁠. 나는 네 문서를 확인하겠다⁠. 그게 내 일이다⁠. 동지 기한은 그대로다⁠.⁠”

“⁠알고 있습니다⁠.⁠”

“⁠네 동생이 왜구 하나를 쓰러뜨리면⁠, 변방 병사 하나가 솜옷 하나를 덜 기다린다⁠. 남쪽 바다에 은이 덜 들면 북쪽에 은이 더 가니까⁠.⁠” 갈문형이 돌아섰다⁠. “⁠나는 그렇게 계산한다⁠. 너는 다르게 하겠지⁠.⁠”

갈문형이 나간 뒤 은학은 빈 종이를 말아 소매에 넣었다⁠. 관아에서는 쓸 수 없었다⁠.

*

10월 28일 밤⁠, 등봉현 성안 셋방에서 은학은 호방에서 가져온 빈 종이를 펼쳤다⁠. 어머니가 바느질감을 내려놓고 은학의 손을 보았다⁠. 붓을 쥔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은결이 일이냐⁠?⁠”

“⁠강남에 가겠답니다⁠. 왜구 싸움에⁠.⁠”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어나서 궤짝을 열었다⁠. 궤짝 맨 밑에서 접어 둔 솜 한 뭉치와 무명 한 필을 꺼냈다⁠. 은학이 처음 보는 솜이었다⁠. 어머니가 언제부터 솜을 모아 두었는지 은학은 몰랐다⁠.

“⁠네 아버지 솜옷 지으려고 모은 거다⁠. 그해 겨울에 못 지었어⁠.⁠” 어머니가 무명을 펼치고 가위를 들었다⁠. “⁠강남은 따뜻하다지만 바닷바람은 차다더라⁠. 솜옷이 있어야지⁠.⁠”

“⁠어머니⁠, 아직 차출 문서를 안 썼습니다⁠.⁠”

“⁠쓸 거잖냐⁠.⁠”

어머니가 무명을 잘랐다⁠. 가위 소리가 셋방을 채웠다⁠. 은학은 붓을 먹에 찍었다⁠. 「⁠차출⁠」 두 글자를 쓰고⁠, 다음 줄에 동생의 이름을 썼다⁠. 「⁠노은결⁠, 스물둘⁠, 등봉현 성안⁠.⁠」 글씨가 반듯했다⁠. 관아에서 여섯 해를 쓴 손이 글씨만은 반듯하게 썼다⁠.

어머니는 밤새 솜옷을 지었다⁠. 은학은 어머니 옆에 앉아 실을 꿰어 드렸다⁠. 등잔 기름이 두 번 떨어져 두 번 부었다⁠. 닭이 울 무렵 솜옷이 다 되었다⁠. 어머니는 솜옷을 개어 보자기에 싸고⁠, 부엌에서 이 빠진 사발을 가져와 보자기 위에 얹었다⁠.

*

11월 1일 새벽⁠, 소림사 산문 계단 아래에 석경룡이 금의위 셋과 함께 말을 세우고 기다렸다⁠. 계단을 내려온 것은 스물여섯이었다⁠. 속가제자 스물⁠, 무승 다섯⁠, 원진⁠. 원진은 곤봉 대신 공양간 부지깽이를 들고 있었다⁠. 곤봉은 압류 예정 물건이라 두고 왔다고 했다⁠.

“⁠쉰이라 했소⁠.⁠” 석경룡이 말했다⁠.

“⁠스물여섯이오⁠.⁠” 계단 위에서 혜공이 대답했다⁠. “⁠나머지는 솥을 지키오⁠.⁠”

석경룡이 스물여섯을 한 사람씩 훑어보았다⁠. 맨 앞의 은결에게서 눈이 오래 머물렀다⁠. 어깨가 넓고 손바닥이 두꺼웠다⁠. 석경룡이 차출 문서를 받아 읽었다⁠. 문서를 쓴 서리의 이름을 보고 계단 아래의 은학을 돌아보았다⁠.

“⁠형이 동생을 차출했소⁠?⁠”

“⁠제 일입니다⁠.⁠”

“⁠모자란 스물넷은 동지에 다시 묻겠소⁠.⁠” 석경룡이 문서를 품에 넣었다⁠. “⁠데려가겠소⁠.⁠”

원진이 은학 앞을 지나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부지깽이를 어깨에 메고 있었다⁠.

“⁠서리⁠, 내 곤봉은 나한당 벽에 세워 두었소⁠. 압류 예정이니 잘 지켜 주시오⁠. 돌아와서 흠집 났나 보겠소⁠.⁠”

“⁠흠집 나면 제 녹봉에서 물겠습니다⁠.⁠”

“⁠서리 녹봉으로는 곤봉 반 토막이오⁠.⁠” 원진이 합장했다⁠. 처음으로 은학에게 하는 합장이었다⁠.

어머니가 산길을 올라왔다⁠. 보자기를 안고 숨이 찼다⁠. 어머니는 은결 앞에 가서 보자기를 내밀었다⁠. 은결이 보자기를 받았다⁠. 사발이 보자기 위에서 달그락거렸다⁠.

“⁠바닥 것부터 먹어라⁠.⁠”

“⁠알아요⁠.⁠” 은결이 보자기를 등에 메며 어머니 귀에 대고 말했다⁠. 은학에게도 다 들렸다⁠. “⁠어머니⁠, 형 밥은 좀 챙기세요⁠. 관아 밥 맛없대요⁠. 형이 그러는데 쌀을 어디다 숨겨 놓고 지으시는지 모르겠대요⁠.⁠”

어머니가 은결의 등을 한 번 때렸다⁠. 소리가 컸다⁠.

은결은 어머니에게 절을 했다⁠. 일어나서 형을 보았다⁠. 둘 사이에 한 걸음이 있었다⁠. 은학은 한 걸음을 건너지 못했다⁠.

“⁠형⁠, 계단 몇 칸이야⁠?⁠”

“⁠백여덟⁠.⁠”

“⁠올라가는 것만 셌지⁠? 내려가는 건 안 세어 봤지⁠?⁠”

은결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돌아섰다⁠. 스물여섯이 산길을 내려갔다⁠. 금의위 말이 앞장섰다⁠. 은결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산길 모퉁이를 돌기 직전⁠, 등에 멘 보자기에서 이 빠진 사발이 해를 받아 한 번 반짝였다⁠.

은학은 계단 맨 아래 칸에 서 있었다⁠. 돌 틈에 금의위 칼이 박혔던 자리가 하얗게 패어 있었다⁠. 어머니가 은학의 소매를 잡았다⁠. 어머니의 손이 떨렸는데⁠, 은학의 소매도 같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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