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105자) · 도겸 · 사월 ~ 오월

베인 쪽도 아프다

무영검의 제자 · 한도윤

만 19세 이상 이용가

둑 자리에 처음 나온 것은 정만이었다. 이튿날 아침 하윤이 무너진 흙더미 앞에 삽을 꽂았을 때, 정만이 제 삽을 메고 다리를 건너왔다. 예순여덟 된 팔뚝으로 흙을 퍼 올리며 스물한 해 전에도 자기가 먼저 나왔다고 투덜거렸다. 윤선은 둑 아래 강가에서 돌을 골랐다. 두드려서 맑게 우는 것만 광주리에 담았고, 둔하게 우는 돌은 강물에 던졌다. 던질 때마다 무슨 약재 이름을 하나씩 중얼거렸는데, 하윤이 무슨 뜻이냐고 묻자 저 돌이 약이었으면 그 약 값이라고 했다.

닷새째에 이장 아들이 나왔다. 이레째에 셋이 더 나왔다. 보름째 아침에는 둑 자리에 아홉이 서 있었고, 아낙들이 새참을 이고 둑길을 줄지어 올라왔다. 사월 볕이 무너진 흙더미를 말려 발밑이 부슬부슬 부서졌고, 샛강 물이 불어 흙탕 냄새가 진하게 올라왔다. 삽날이 자갈에 긁히는 소리, 광주리를 주고받는 사내들의 구령, 돌을 두드리는 윤선의 쨍한 소리가 둑 위에서 뒤섞였다.

하윤은 나온 사람들에게 까닭을 물었다. 닷새째 나온 이장 아들은 심심해서라고 했다. 이레째 나온 셋은 저 사람이 나왔으니까라고 했다. 보름째 아홉에게는 묻지 않았다. 윤선이 옆에서 까닭을 왜 자꾸 묻느냐고 핀잔을 줬다.

“갚으려면 무엇이 사람을 움직이는지 알아야 합니다.”

“스무 해 약을 팔면서 본 게 있소. 왜 아픈지 아는 사람은 열에 하나뿐이오. 그래도 낫소.”

둑을 쌓는 법은 정만이 알았다. 스물한 해 전 스승과 쌓은 방식 그대로였다. 먼저 무너진 자리 앞쪽 물속에 참나무 말뚝을 두 줄로 박는다. 말뚝 사이에 버드나무 섶을 엮어 넣어 물살을 죽인다. 그다음에 섶 뒤로 흙을 한 자씩 부어 발로 밟고 달구로 다진다. 한 자 붓고 다지고, 또 한 자 붓고 다진다. 한꺼번에 두 자를 부으면 속이 덜 다져져 장마에 물이 스며들고, 스며든 물이 둑을 안에서부터 무너뜨린다. 정만은 달구질 노래를 할 줄 알았는데 음이 하나도 안 맞았다. 사내들이 노래를 따라 부르다 웃음이 터져 달구를 놓쳤고, 정만은 스물한 해 전 그 사람은 노래를 안 불러서 둑이 오래갔다고 우겼다.

*

도겸은 둑이 보이는 언덕 위 버려진 방앗간에서 보름을 지냈다. 마종곤은 도겸을 백하진에 남겨 두면서 한 가지만 시켰다. 장마 전에 마을이 은 백 냥을 모으는지 지켜보라. 모으는 기색이 보이면 알리라. 도겸은 날마다 방앗간 문틈으로 둑을 내려다봤고, 날마다 둑에 붙은 사람 수를 셌다. 하나, 둘, 넷, 아홉.

마비산은 열흘 전에 끊었다. 왜 끊었는지는 도겸도 몰랐다. 새벽에 기름종이를 펴다가 그냥 도로 접었다. 첫날은 서른하나가 멀리서 들리는 북소리처럼 쿵쿵 울렸고, 사흘째에는 그 북소리가 방앗간 안에 가득 차서 도겸은 맷돌 옆에 웅크리고 이를 악물었다. 무릎이 끊어질 것 같았고, 옆구리가 불에 탔고, 목 뒤에서 누가 송곳을 돌렸다. 아홉째와 열한째가 사시 뒷골목 헛간에 누워 있는 까닭을 그제야 몸으로 알았다. 이레째에 도겸은 처음으로 아픈 자리 하나하나에 얼굴을 붙여 봤다. 오른 무릎은 형주 나루의 늙은 뱃사공, 옆구리는 양양 장터의 젊은 과부, 목 뒤는 노가촌 아랫마을 대장장이였다. 두 해 동안 마비산에 덮여 얼굴이 없던 자리들이었다.

보름째 아침, 도겸은 방앗간에서 나와 둑으로 내려갔다. 걸음마다 무릎이 꺾였다. 둑 자리에 이르자 흙을 퍼던 사내들이 삽을 멈췄다. 흑사채 추심꾼이 내려왔다는 것을 다들 알았다.

도겸은 정만 앞으로 갔다. 허리에서 칼을 풀었다. 칼집째 두 손으로 들어 정만의 평상 위에 내려놓았다.

“맡아 주시오.”

정만이 칼을 내려다봤다가 도겸을 올려다봤다.

“다리에서 나를 못 벤 사람이구려.”

“그렇소.”

“댁도 벤 사람이오?”

“서른하나.”

정만이 찻사발을 든 채 한참 도겸을 보다가 턱으로 둑을 가리켰다.

“돌은 저 여자가 골라 주오. 맑은 것만 드시오. 둔한 걸 들면 저 여자한테 혼나오.”

도겸은 돌을 들었다. 윤선이 두드려 준 맑은 돌이었다. 들자마자 옆구리의 과부 자리가 비명을 질렀고, 도겸은 돌을 안은 채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하윤이 달려와 돌의 반대쪽을 잡았다. 둘이 돌 하나를 맞들고 둑 위로 올라갔다.

새참 때 윤선이 도겸의 손목을 잡아 맥을 짚었다. 맥이 줄 끊어진 거문고처럼 제멋대로 뛰었다. 윤선은 보퉁이에서 감초와 작약을 꺼내 솥에 달였고, 사발에 부어 도겸 앞에 내밀었다.

“마비산 끊은 지 며칠이오?”

“열흘.”

“열흘이면 제일 나쁠 때는 지났소. 이건 아픈 걸 없애는 약이 아니오. 쥐가 나는 걸 풀어 주는 약이오. 아픈 건 댁이 지시오.”

도겸이 사발을 받아 들고 윤선을 봤다. 누구의 딸인지 하윤에게 들어서 알았다. 스승이 스물두 해 전 은 스무 냥에 벤 사람의 딸이었다.

“당신이 나한테 약을 주오?”

“약값은 받을 거요. 저 사람한테.”

윤선이 하윤을 턱으로 가리켰다. 도겸이 약을 마시다가 사레가 들려 기침을 했고, 기침하는 사이에 웃었다.

오후에 구양탁이 둑길로 올라왔다. 쇠장갑을 끼고 새 환도를 찼다. 둑 위 사람들이 일손을 멈췄다.

“도겸이, 주인께서 부르신다. 형주로 돌아오라고.”

“둑 다 쌓고 가겠소.”

“주인께서는 오래 두고 보시는 분이 아니라고 했지.”

“그럼 오래 두고 보지 마시라고 전하시오. 나는 여기서 돌을 들겠소.”

구양탁이 도겸과 하윤과 둑 위의 아홉을 차례로 보고 나서 웃었다. 쇠장갑 낀 손으로 둑 윗돌 하나를 두드렸다. 맑은 소리가 났다. 구양탁은 아무 말 없이 둑길을 내려갔다.

*

그날 밤 도겸과 하윤은 둑 위에 나란히 앉았다. 달이 샛강에 떠서 물결마다 부서졌다. 도겸은 이를 딱딱 부딪치며 떨었고, 하윤이 제 겉옷을 벗어 도겸의 어깨에 덮었다.

“여덟째, 이거 다 네가 질 거냐? 내 서른하나.”

“같이 지겠습니다.”

“같이 지는 게 뭔데.”

“오늘 돌 하나를 둘이 들었습니다.”

도겸이 웃다가 옆구리를 움켜쥐었다. 웃음이 신음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웃음이 됐다.

“둑 다 쌓으면 산에 가겠다. 스승님 뵈러. 쌀 대신 내가 가면 되지. 셋째 사형은 입이 하나 늘었다고 투덜대겠지만.”

“밥 한 숟가락씩 덜겠다고 할 겁니다.”

“그리고 도로 반을 돌려주겠지.”

도겸이 하윤의 겉옷을 여미며 샛강을 내려다봤다.

“여덟째, 다리에서 정만 영감 팔뚝을 보는데 말이다. 스승님이 그은 자리가 저렇게 늙었더라. 그 영감은 스승님을 도와 다리를 놨다더라. 나는 서른하나 가운데 누가 나를 도와줄지 모르겠다. 얼굴도 이제 겨우 붙였는데.”

하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둑 아래서 개구리가 한꺼번에 울기 시작했다.

“하나 부탁하자. 사시 나루 뒷골목에 삯바느질하는 늙은이가 있다. 우리 어머니다. 빚은 다 지워졌다. 그 대신 아들이 이렇게 됐다는 건 모른다. 산에 올라가기 전에 들러서 내가 칼을 내려놨다고 전해 줘라. 내가 직접 말하면 울 테니까.”

“사형이 직접 가십시오. 저는 우는 사람을 어떻게 하는지 모릅니다.”

“나도 모른다. 그러니까 네가 가라는 거다.”

*

삼경이 지나서 헛간 쪽에서 무엇이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하윤이 잠에서 깨어 뛰어나갔을 때 헛간 문이 열려 있었고, 등롱 하나가 바닥에 굴러 불이 짚에 옮겨붙으려 하고 있었다. 하윤이 등롱을 걷어차 밖으로 내던졌다.

도겸은 짚더미 위에 반쯤 누워 있었다. 가슴 한가운데 적삼이 검게 젖어 있었고, 비린 쇠 냄새가 짚 냄새를 덮고 있었다. 무영이 아니었다. 흔적이 남는 칼이었다.

헛간 구석에 구양탁이 서 있었다. 환도 끝에서 피가 짚 위로 떨어졌다.

하윤은 칼이 없었다. 구양탁에게 뛰어들어 두 손바닥을 가슴에 얹으려 했다. 구양탁이 반 걸음 비켜서며 쇠장갑으로 하윤의 손목을 쳐 냈고, 환도 등이 하윤의 왼팔을 후려쳤다. 뼈가 울렸다. 대패는 상대가 가만히 있을 때 미는 것이다. 구양탁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흔적은 내가 남기오. 추심꾼들이 못 하는 일.”

구양탁은 환도를 짚에 문질러 닦고 헛간 뒷문으로 나갔다. 하윤은 쫓지 않았다. 쫓을 칼도 없었고, 도겸의 숨소리가 들렸다.

하윤은 도겸을 안았다. 도겸의 가슴에서 더운 것이 하윤의 손바닥으로 번졌다. 윤선이 약 보퉁이를 들고 뛰어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가, 상처를 한 번 보고 손을 멈췄다. 윤선의 손이 도겸의 이마를 짚었고,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도겸이 하윤의 소매를 쥐었다.

“여덟째, 내 칼.”

“정만 어르신이 맡고 계십니다.”

“네가 가져라. 뒤집어서.”

도겸의 손이 소매에서 풀렸다. 풀린 손이 짚 위에 떨어졌다. 하윤은 그 손을 다시 쥐었다. 손바닥에 칼 쥐는 굳은살이 박여 있었고, 그 굳은살 위에 오늘 든 돌 가루가 하얗게 묻어 있었다.

그날 밤 하윤은 새 수를 얻지 못했다. 헛간 짚더미 옆에 새벽까지 앉아 있었는데, 앉음새는 좌정이었으나 지킬 사람이 없었다.

윤선이 물을 데워 도겸의 몸을 씻었다. 하윤은 등잔을 들고 옆에 있었다. 서른한 군데가 아팠던 몸이었는데, 씻어 놓고 보니 흔적은 가슴 한가운데 하나뿐이었다. 무릎에도 옆구리에도 목 뒤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서른한 사람을 앓게 한 칼잡이가 한 사람의 칼에 죽었고, 죽은 몸에 남은 것은 그 한 사람의 흔적뿐이었다. 윤선이 수건을 짜다 말고 손을 멈췄다.

“이 사람 아픈 자리는 어디로 가오?”

하윤은 몰랐다. 스승도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벤 사람이 죽으면 그 서른한 자리는 베인 사람들에게 돌아가는지, 허공으로 흩어지는지, 아무도 세어 본 적이 없었다.

*

아침에 백하진 사람들이 헛간 앞에 모였다.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정만이 평상 위의 칼을 들고 와 하윤 앞에 내려놓았다. 도겸의 칼이었다. 칼집 입구에 도겸이 칼을 넣다가 빗나간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

사흘 뒤 둑이 끝났다. 도겸이 들다 만 돌을 아홉이 마저 들었다. 마지막 머릿돌을 얹던 날, 이장이 둑 아래 논에 첫 모를 꽂았다. 이장이 논둑에서 흙 묻은 손을 털며 하윤에게 말했다.

“가을에 벼가 나면 은을 모아 형주로 가져가겠소. 백 냥이 안 되면 되는 만큼. 장마 전에 은을 내라던 약조는 못 지켰지만, 둑은 섰소. 그 사람한테 가서 그렇게 전하시오. 아니, 전할 사람은 이제 없구려.”

하윤은 도겸을 수레에 싣고 형문산으로 떠났고, 윤선이 수레 뒤를 밀었다. 백하진 사람 아홉이 다리 끝까지 따라 나왔다가 거기서 멈췄다. 정만이 다리 난간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맑은 소리가 샛강 위로 번졌다. 도겸이 맡겨 두었던 칼은 하윤의 허리에 있었다. 하윤은 그 칼을 한 번도 뽑아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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