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382자)

참깨

퇴직금으로 차린 카페 · 탁은담

10월 18일 아침⁠, 집 식탁에서는 구운 김 냄새가 났다⁠. 윤옥은 김을 자르는 가위를 내려놓고 휴대전화의 가계부 앱을 열었다⁠. 설명회가 끝난 밤부터 윤옥은 말을 아꼈다⁠. 따지지 않는 윤옥은 따지는 윤옥보다 무서웠다⁠.

“⁠기계 할부⁠, 한 달에 얼마야⁠?⁠”

“⁠팔십⁠.⁠”

“⁠몇 개월⁠?⁠”

“⁠육십 개월⁠.⁠”

윤옥이 숫자를 넣었다⁠. 앱 화면에 새 칸이 생겼다⁠. 「⁠가게 기계 할부 — 매달 80만 원⁠」 윤옥은 칸 이름 옆에 작은 커피 잔 그림까지 골라 붙였다⁠.

“⁠다달이 여기 넣을게⁠. 당신이 매달 십오 일에 나한테 보여 줘⁠. 입금 내역⁠.⁠”

“⁠그걸 왜 보여 줘⁠?⁠”

“⁠교무행정사는 영수증 없는 돈을 안 믿어⁠. 직업병이야⁠.⁠”

윤옥은 김을 마저 자르고 강재 도시락 통에 넣었다⁠. 도석은 밥을 씹으면서 계산했다⁠. 매달 팔십을 어디서 만들어 보여 줄지⁠. 대출 이자는 칠월부터 다른 통장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거짓말이 한 달에 팔십만 원짜리 칸이 되어 식탁 위에 올라와 있었다⁠.

강재가 신발을 신으며 말했다⁠.

“⁠아빠⁠, 기계 육십 개월이면 나 대학 졸업할 때 끝나네⁠.⁠”

“⁠그렇네⁠.⁠”

“⁠기계가 나보다 오래 다니네⁠.⁠”

*

열한 시⁠, 상가 앞 인도에 민트색 푸드트럭이 멈췄다⁠. 옆구리에 큰 글씨가 붙어 있었다⁠. 「⁠플래그십 오픈 기념 · 아메리카노 무료 · 매일 11시⁠~2시⁠」 트럭 지붕 스피커에서 경쾌한 기타 음악이 나왔고⁠, 채홍이 헤드셋 마이크를 쓰고 트럭 앞에 나왔다⁠.

“⁠너울마을 여러분⁠! 달그락 플래그십이 먼저 인사드립니다⁠! 오늘 커피는 브랜드가 쏩니다⁠!⁠”

줄은 십 분 만에 상가 모퉁이를 돌았다⁠. 길 건너 테크노밸리에서 점심 먹으러 나온 사람들이 줄 끝에 붙었다⁠. 도석은 유리문 너머로 줄을 보았다⁠. 앞에서 세 번째⁠, 짝짝이 후드 끈이 보였다⁠. 야근 귤의 개발자였다⁠. 개발자는 도석과 눈이 마주치자 휴대전화로 얼굴을 가렸다⁠.

단미가 말했다⁠.

“⁠사장님⁠, 저 사람 휴대전화로 얼굴 가렸는데 후드 끈이 다 보여요⁠.⁠”

“⁠알아⁠.⁠”

“⁠배신이에요⁠?⁠”

“⁠공짜야⁠. 공짜 앞에서는 다 그래⁠.⁠”

가게 안이 조용해지자 단미가 스팀 노즐을 닦다가 말을 꺼냈다⁠. 손님이 없는 가게에서는 노즐을 닦을 일도 없었다⁠. 단미는 깨끗한 노즐을 또 닦았다⁠.

“⁠점장이 어제 또 전화했어요⁠. 쉬는 날에 직영점 교육 들어 보래요⁠. 교육비 준대요⁠. 하루 십만 원⁠.⁠”

“⁠하루 십만 원이면 여기 이틀 치다⁠.⁠”

“⁠네⁠. 그래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먼저 말해 달라고 하셨잖아요⁠.⁠”

“⁠들어 봐⁠.⁠”

“⁠진짜요⁠?⁠”

“⁠배울 게 있으면 배워⁠. 저쪽 기계는 우리 거보다 두 단계 위야⁠. 만져 보고 와서 얘기해 줘⁠.⁠”

단미는 노즐에서 손을 뗐다⁠. 도석의 말을 다 믿지 않는 얼굴이었고⁠, 도석도 제 말을 다 믿지는 않았다⁠. 단미를 붙잡을 돈이 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은 이런 말뿐이었다⁠.

“⁠사장님⁠, 저 교육 가서 사장님 욕 들으면 어떡해요⁠?⁠”

“⁠냄새 맡고 와⁠. 무슨 욕인지⁠.⁠”

단미가 웃었다⁠. 트럭 스피커의 기타 소리가 유리문을 타고 들어왔다⁠.

열두 시 반까지 너울마을점 문이 열린 것은 여섯 번이었다⁠. 평소의 점심이라면 서른 번은 열려야 했다⁠. 두 시에 트럭이 셔터를 내렸을 때 도석은 포스의 점심 매출을 보았다⁠. 반이었다⁠. 반도 너그럽게 본 숫자였다⁠.

점주 대화방에는 광교점 점주가 사진을 올렸다⁠. 같은 민트색 트럭이 광교 상가 앞에 멈춰 있었다⁠. 「⁠저희도 오늘부터예요⁠. 트럭이 몇 대예요 대체⁠」 사진 밑으로 화난 얼굴 표시가 열몇 개 달렸다⁠. 밤 열 시에는 예란의 음성 메시지가 왔다⁠. 도석은 처음으로 대화방에서 음성 메시지를 눌러 보았다⁠.

“⁠너울마을⁠. 트럭은 비 오면 안 와⁠. 아홉 해 전에도 그랬어⁠. 일기 예보 보고 기우제나 지내⁠. 그리고 트럭 앞에서 싸우지 마⁠. 사진 찍히면 점주가 진상인 걸로 나가⁠. 끊어⁠.⁠”

이십이 초짜리였다⁠. 도석은 두 번 들었다⁠. 두 번째에 ‘⁠끊어⁠’ 앞에서 예란이 숨을 한 번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

이튿날 열한 시⁠, 트럭이 다시 왔다⁠. 도석은 스팀 피처를 쥔 채 트럭 앞으로 갔다⁠. 줄을 서 있던 사람 몇이 민트색 앞치마를 보고 웃었다⁠. 같은 색 앞치마를 두른 사람이 같은 색 트럭에 따지러 가는 장면이었다⁠.

채홍이 헤드셋을 목으로 내렸다⁠.

“⁠사장님⁠! 커피 드시러 오셨어요⁠? 점주님은 두 잔 드릴게요⁠.⁠”

도석은 트럭 창구에서 나오는 냄새를 맡았다⁠. 원두를 갈아 놓은 지 오래된 냄새⁠, 기름이 산패하기 시작한 냄새였다⁠.

“⁠이 원두⁠, 볶은 지 삼 주 넘었습니다⁠. 공짜라 다행이네요⁠.⁠”

채홍의 입꼬리가 잠깐 굳었다가 다시 올라갔다⁠.

“⁠사장님⁠, 이건 커피가 아니고 브랜드 경험 투자예요⁠. 퍼널 상단을 넓히는 거죠⁠. 오늘 공짜로 마신 분이 다음 달 플래그십 단골이 되는 거예요⁠.⁠”

“⁠퍼널이 뭔지 모르겠지만⁠, 여기는 제 가게 문 앞입니다⁠. 제 손님이 줄을 서 있어요⁠.⁠”

“⁠도로 점용 허가 받았어요⁠. 구청에서요⁠. 그리고 사장님 손님이 아니라 동네 손님이죠⁠.⁠”

채홍은 휴대전화를 들어 허가증 사진을 보여 주었다⁠. 날짜와 도장이 다 있었다⁠. 채홍은 목소리를 낮췄다⁠.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저도 위에서 숫자 받아요⁠. 개점 첫 달 목표 못 넘기면 저 점장 자리 내놔야 돼요⁠. 사장님만 퇴직금 거신 거 아니에요⁠. 저도 제 커리어 걸었어요⁠.⁠”

“⁠커리어는 다른 데 가서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퇴직금도 다른 데 가서 다시 시작하실 수 있잖아요⁠. 본사가 인수 제안 드렸다면서요⁠.⁠”

도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채홍은 헤드셋을 다시 썼다⁠.

“⁠직영점 열 때까지 매일 와요⁠. 주말도요⁠. 싱가포르 분들 개점 날 오시는데⁠, 그때까지 이 동네에서 달그락 하면 플래그십이 떠오르게 하는 게 제 일이에요⁠. 영포티 사장님은 너무 진지하세요⁠.⁠”

트럭 스피커에서 기타 음악이 다시 커졌다⁠.

*

가게로 돌아오니 번영회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번영회장은 유리문에 붙은 종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도석이 설명회 다음 날 붙인 종이였다⁠. 「⁠길 건너 직영점과 같은 회사입니다⁠. 너울마을점은 점주가 직접 내립니다⁠」

“⁠마 사장⁠, 이거 떼⁠.⁠”

“⁠사실입니다⁠.⁠”

“⁠사실이니까 떼라는 거야⁠. 손님이 이거 보면 길 건너가 무슨 나쁜 짓 하는 줄 알아⁠. 외벽 칠 업체가 다음 주에 와⁠. 본사가 반 낸다는 거 아직 도장 안 찍었어⁠. 상가 분위기가 시끄러우면 본사가 손 뺄 수도 있대⁠.⁠”

“⁠누가 그럽니까⁠?⁠”

“⁠누가 그러긴⁠. 다 그래⁠.⁠”

번영회장의 입에서 믹스커피 냄새가 났다⁠. 하루에 다섯 잔은 마시는 사람의 냄새였다⁠. 너울마을점이 열리고 석 달 동안 번영회장은 한 번도 너울마을점 커피를 사 마시지 않았다⁠.

“⁠회장님⁠, 칠 벗겨진 지 십 년 된 외벽이 일주일 늦게 칠해진다고 무너지지 않습니다⁠. 제 가게는 일주일이면 무너집니다⁠.⁠”

“⁠그럼 마 사장네는 쿠폰에서 빠져⁠. 상가 공동 쿠폰⁠. 다른 가게는 다 들어가⁠.⁠”

번영회장은 문을 닫고 나갔다⁠. 종이 한 귀퉁이가 바람에 들렸다⁠. 도석은 테이프를 한 줄 더 붙였다⁠.

*

새벽 다섯 시⁠, 손맛찬방의 셔터가 반쯤 올라가 있었다⁠. 안에서 깨 볶는 냄새가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풀내가 나고⁠, 다음에 고소한 냄새가 올라오고⁠, 맨 끝에 아주 짧게 탄내 직전의 단내가 났다⁠. 도석은 셔터 밑으로 허리를 숙이고 들어갔다⁠.

할머니는 무쇠 솥 앞에서 나무 주걱을 젓고 있었다⁠. 솥 안에서 깨가 톡톡 튀었다⁠.

“⁠사장⁠, 이 시간에 웬일이야⁠? 쿠폰에서 빠졌다며⁠. 회장이 동네방네 떠들던데⁠.⁠”

“⁠깨 볶는 법 좀 배우러 왔습니다⁠.⁠”

“⁠커피 집이 왜 깨를 볶아⁠?⁠”

“⁠할머니 깨 냄새로 한 잔 만들어 보려고요⁠.⁠”

할머니는 주걱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 영감이 모란시장에서 방앗간을 서른 해 했어⁠. 가고 나서 방앗간은 팔았는데⁠, 깨 볶는 건 못 끊었어⁠. 아침마다 이거 볶아야 영감 냄새가 나⁠.⁠”

할머니가 주걱으로 솥 가장자리를 두드렸다⁠.

“⁠깨는 코로 볶는 게 아니야⁠. 귀로 볶아⁠. 톡톡 튀는 소리가 촘촘하다가 성겨지면 내려⁠. 소리가 끊기면 늦은 거야⁠.⁠”

도석은 눈을 감았다⁠. 튀는 소리가 빗소리처럼 촘촘했다가 하나씩 띄엄띄엄해졌다⁠. 할머니가 솥을 불에서 내렸다⁠. 도석의 코가 할머니의 귀보다 반 박자 늦었다⁠. 스물두 해 냄새로 일한 코가 일흔세 해 산 귀에 진 것이었다⁠.

할머니는 갓 볶은 깨를 한 줌 종이에 싸서 도석에게 쥐여 주었다⁠.

“⁠가져가서 해 봐⁠. 맛없으면 쿠폰 같은 거 없어⁠.⁠”

도석이 깨 봉지를 받아 들고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벽에 달력이 걸려 있었고⁠, 달력 아래에 상가 관리비 고지서가 압정으로 꽂혀 있었다⁠. 고지서 귀퉁이에 할머니가 연필로 동그라미를 친 숫자가 있었다⁠.

“⁠할머니⁠, 월세 오릅니까⁠?⁠”

“⁠아직⁠. 근데 건물 주인이 그러대⁠. 길 건너 큰 거 들어오면 이 상가 자리 값이 오른다고⁠. 회장도 그러고⁠. 자리 값 오르면 나 같은 사람은 쫓겨나는 거지 뭐⁠.⁠”

“⁠그런데 왜 설명회에서 박수를 치셨어요⁠?⁠”

“⁠나 박수 안 쳤어⁠. 쿠키 쌌어⁠.⁠”

할머니는 솥에 새 깨를 부었다⁠. 톡⁠, 하고 첫 소리가 났다⁠.

*

오후 세 시⁠, 도석은 할머니 앞에 잔을 놓았다⁠. 볶은 참깨를 절구에 빻아 페이스트를 만들고⁠, 우유와 함께 데워 거품을 내고⁠, 에스프레소를 반 샷만 넣고⁠, 소금을 한 꼬집 얹었다⁠. 할머니는 냄새를 먼저 맡고⁠,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고⁠, 다시 들어 한 모금 더 마셨다⁠.

“⁠영감이 깨 짜는 날 방앗간 냄새다⁠. 소금은 왜 넣었어⁠?⁠”

“⁠할머니 시금치 무칠 때 소금을 마지막에 넣으시잖아요⁠.⁠”

할머니는 대답 대신 잔을 비웠다⁠. 단미가 칠판 뒷면에 새 줄을 썼다⁠. 「⁠찬방 참깨⁠」 여덟 번째 줄이었다⁠.

할머니가 일어나며 앞치마 주머니를 뒤졌다⁠.

“⁠단미야⁠, 종이 좀 줘⁠. 작은 거⁠.⁠”

단미가 메모지 묶음을 건넸다⁠. 할머니는 볼펜으로 한 장 한 장 꾹꾹 눌러 썼다⁠. 글씨가 삐뚤었다⁠. 「⁠이 봉지 들고 가면 뒷면 한 잔 반값 — 너울마을 커피집⁠」

“⁠회장 쿠폰은 회장이 주고⁠, 내 쿠폰은 내가 줘⁠. 내 봉지에 내가 뭘 넣든 회장이 무슨 상관이야⁠.⁠”

할머니는 메모지 서른 장을 들고 반찬가게로 돌아갔다⁠.

*

이튿날 열한 시⁠, 트럭이 왔고 줄이 길게 이어졌다⁠. 열한 시 반⁠, 줄에서 사람이 하나씩 빠져나왔다⁠. 손에 반찬가게의 하얀 비닐봉지를 든 사람들이었다⁠. 봉지 손잡이 사이로 삐뚤빼뚤한 메모지가 보였다⁠. 사람들은 트럭을 지나 너울마을점 유리문을 밀었다⁠. 쌍둥이 엄마가 봉지를 흔들며 들어왔고⁠, 뒤따라 짝짝이 후드 끈이 들어왔다⁠.

“⁠사장님⁠, 저 어제 공짜 마셨는데요⁠. 맛이 그냥 공짜 맛이었어요⁠. 할머니가 장조림 사면 이거 준대서요⁠.⁠”

“⁠장조림 샀어⁠?⁠”

“⁠세 통이요⁠. 저 혼자 사는데⁠.⁠”

오후 한 시⁠, 채홍이 헤드셋을 목에 건 채 유리문을 열었다⁠. 채홍은 계산대 위의 메모지를 집어 들었다⁠.

“⁠사장님⁠, 이 쿠폰 본사 승인 받으셨어요⁠? 가맹점은 판촉물 본사 승인받아야 돼요⁠. 계약서에 있어요⁠.⁠”

“⁠그건 반찬가게 쿠폰입니다⁠. 본사가 반찬도 파십니까⁠?⁠”

채홍은 메모지를 내려놓았다⁠. 할머니의 삐뚤어진 글씨가 위를 보고 있었다⁠. 단미가 채홍 앞에 잔을 하나 놓았다⁠.

“⁠점장님⁠, 참깨 한 잔 드세요⁠. 이건 공짜 아니에요⁠. 오천오백 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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