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391자)

설명회

퇴직금으로 차린 카페 · 탁은담

오후 다섯 시⁠, 너울마을점은 하루 중 가장 시끄러웠다⁠. 2층 학원이 저녁반을 받는 시간이었고⁠, 아이를 올려 보낸 엄마 아빠들이 계단을 내려와 카페로 들어왔다⁠. 열여섯 석이 금세 찼다⁠. 가게 안에 젖은 우산 냄새와 학원 가방의 지우개 냄새⁠, 퇴근길 양복의 담배 냄새가 섞였다⁠.

창가 네 자리는 늘 같은 사람들이 앉았다⁠. 중2 쌍둥이 엄마⁠, 초6 아빠⁠, 고1 엄마⁠, 그리고 윤옥과 같은 고2 3반 엄마였다⁠. 넷은 주문을 한 번에 했다⁠.

“⁠뒷면 넷이요⁠.⁠”

도석은 보리를 꺼냈다⁠. 볶은 보리를 우유에 넣고 약한 불에 오래 우려⁠, 끝에 꿀을 조금 넣는 음료였다⁠. 학원 앞에서 아이를 기다리는 시간은 한 시간 반이었고⁠, 기다리는 동안 커피를 두 잔 마시면 밤에 잠이 안 온다고 쌍둥이 엄마가 말한 날 만든 음료였다⁠. 칠판 뒷면 두 번째 줄⁠, 「⁠학원 앞 보리⁠」였다⁠.

“⁠사장님⁠, 오늘 설명회 가세요⁠? 단톡방에서 다들 가신대요⁠.⁠”

“⁠갑니다⁠.⁠”

“⁠스터디존 생기면 저희 여기 안 와요⁠. 서운해하지 마세요⁠. 애들 옆에 붙어 있어야 해서⁠.⁠”

“⁠스터디존 옆에 보리는 없을 겁니다⁠.⁠”

고1 엄마가 웃었다⁠.

“⁠사장님 영업 잘하시네⁠. 영포티 사장님들은 원래 말이 없던데⁠.⁠”

“⁠저는 영포티 지났습니다⁠. 마흔여덟이에요⁠.⁠”

“⁠지났다고 굳이 말씀하시는 게 딱 영포티예요⁠.⁠”

정자동에서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마흔여덟이 되면 영포티에서 벗어나는 줄 알았는데⁠, 벗어났다고 말하는 순간 다시 붙잡혔다⁠. 단미가 계산대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떨었다⁠.

계산을 마치고 휴대전화를 보니 점주 대화방이 시끄러웠다⁠. 사흘 전 도석이 올린 물음 밑으로 답이 몇 줄 붙어 있었다⁠. 「⁠저희 광교도 다음 달 상가 설명회 한대요⁠」⁠, 「⁠본사가 번영회 회식비 냈다는 소문 있음⁠」⁠, 「⁠너울마을점 사장님 힘내세요 (⁠저는 익명으로 응원만⁠)⁠」 맨 끝에 예란의 한 줄이 있었다⁠.

「⁠봤지⁠? 일곱 시에 박수 소리 크면 진 거야⁠.⁠」

도석은 「⁠안 지려고 갑니다⁠」라고 쓰고⁠, 지웠다⁠. 단미가 보리 냄비를 저으며 말했다⁠.

“⁠사장님⁠, 가서 혼자 손들지 마세요⁠. 혼자 손들면 영포티 같아요⁠.⁠”

“⁠그럼 둘이 들어 줄래⁠?⁠”

“⁠저는 시급이라서요⁠.⁠”

단미가 냄비 불을 줄였다⁠. 도석은 앞치마를 벗지 않고 2층으로 올라갔다⁠.

*

2층 수학학원 강의실에서는 보드마커 냄새와 버터 쿠키 냄새가 싸웠다⁠. 저녁 여섯 시 오십 분⁠, 칠판에는 「⁠고2 미적분 — 극한의 성질⁠」이 반쯤 지워진 채 남아 있었고⁠, 맨 앞 책상에는 민트색 상자들이 쌓여 있었다⁠. 달그락 쿠키와 종이컵⁠, 보온 통에 담아 온 커피였다⁠. 도석은 강의실 문을 열자마자 커피 냄새를 맡았다⁠. 볶은 지 삼 주는 된 원두였다⁠. 향이 위로 올라오지 않고 바닥에 깔렸다⁠.

의자는 서른 개였고 스무 개가 찼다⁠. 번영회장이 맨 앞에서 사람들을 앉혔다⁠. 세탁소 사장은 팔뚝에 다리미 화상 자국을 단 채 팔짱을 끼고 앉았고⁠, 꽃집 사장은 앞치마에 흙이 묻은 그대로 왔다⁠. 태권도 관장은 도복 위에 점퍼를 걸쳤다⁠. 반찬가게 할머니는 맨 뒤에 앉아 쿠키를 냅킨에 세 개째 싸고 있었다⁠.

“⁠할머니⁠, 안 오신다면서요⁠.⁠”

“⁠커피 안 마시러 왔어⁠. 쿠키 먹으러 왔어⁠. 쿠키는 남의 집 거라도 달아⁠.⁠”

할머니는 네 번째 쿠키를 싸서 도석의 앞치마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

일곱 시 정각⁠, 엄혜지가 칠판 앞으로 나왔다⁠. 옆에서 채홍이 노트북을 프로젝터에 꽂았다⁠. 화면에 너울마을 상가 사진이 떴다⁠. 상가 외벽은 사진으로 보니 더 낡아 보였다⁠.

“⁠바쁘신데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길게 안 하겠습니다⁠. 상가에 드리는 약속 세 가지만 말씀드리고 질문 받겠습니다⁠.⁠”

화면이 넘어갔다⁠. 「⁠플래그십 개점 후 상가 앞 하루 유동 인구 — 예상 2⁠,000명⁠」 아래에 작은 글씨로 「⁠대전·부산 직영점 사례 기준 추정⁠」이 붙어 있었다⁠.

“⁠첫째⁠, 직영점 영수증을 가져오시는 손님은 상가 모든 가게에서 십 퍼센트를 할인받습니다⁠. 할인 비용은 본사와 가게가 반씩 냅니다⁠. 둘째⁠, 상가 외벽 도색 비용 절반을 본사가 지원합니다⁠. 셋째⁠, 직영점 이 층 스터디존을 오후 네 시부터 열 시까지 학생들에게 무료로 엽니다⁠. 학원 끝나고 기다리는 시간에 쓰시라고요⁠.⁠”

박수가 나왔다⁠. 번영회장이 제일 먼저 쳤고⁠, 학원 원장이 따라 쳤다⁠. 꽃집 사장은 휴대전화로 화면을 찍었다⁠. 도석은 박수가 줄어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손을 들었다⁠.

“⁠너울마을점 마도석입니다⁠.⁠”

채홍이 노트북 뒤에서 작게 「⁠아⁠」 하는 입 모양을 만들었다⁠. 혜지는 표정 없이 손바닥을 내밀어 말하라고 했다⁠.

“⁠직영점 영수증을 가져오면 반찬가게에서 할인을 해 준다고 하셨습니다⁠. 그 손님이 반찬을 사고 커피는 어디서 마십니까⁠?⁠”

“⁠직영점에서 드시겠죠⁠. 아니면 너울마을점에서요⁠.⁠”

“⁠칠천 세대가 정해진 동네입니다⁠. 길 건너로 간 손님만큼 이쪽 손님이 줍니다⁠. 상권이 커지는 게 아니고⁠, 같은 손님이 길을 건너는 겁니다⁠.⁠”

혜지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사장님 말씀이 맞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너울마을점도 쿠폰에 들어오실 수 있게 했습니다⁠. 본사가 일부러 가맹점을 죽이지는 않아요⁠. 가맹점이 줄면 본사도 손해예요⁠.⁠”

“⁠그럼 직영점을 오백 미터 떨어진 데 내시면 됩니다⁠.⁠”

“⁠오백 미터 밖에는 이 층짜리 빈 건물이 없어요⁠.⁠”

몇 사람이 웃었다⁠. 웃음이 나쁜 뜻은 아니었다⁠. 번영회장이 일어나 손을 휘저었다⁠.

“⁠자⁠, 자⁠. 마 사장 걱정은 알겠는데⁠, 우리 상가 칠 벗겨진 지 십 년이야⁠. 본사가 반 내 준다잖아⁠. 이런 기회 또 없어⁠.⁠”

세탁소 사장이 팔짱을 풀었다⁠.

“⁠외벽 칠은 좋은데⁠, 우리 세탁소는 직영점 손님이 빨래를 맡기나⁠?⁠”

“⁠맡기실 수도 있죠⁠.⁠”

채홍이 노트북 뒤에서 대답했다⁠. 세탁소 사장은 채홍의 니트를 한 번 보고 다시 팔짱을 꼈다⁠.

*

강의실 뒷문이 열렸다⁠. 늦게 온 사람이 허리를 숙이고 들어와 맨 뒷줄에 앉았다⁠. 회색 카디건⁠, 손에는 학교 이름이 찍힌 서류 봉투⁠. 하윤옥이었다⁠.

도석은 앞을 보고 있었지만 냄새로 알았다⁠. 교무실 프린터의 토너⁠, 그리고 윤옥이 십 년째 쓰는 복숭아 핸드크림⁠. 도석의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화면이 스터디존 사진으로 넘어갔다⁠. 긴 원목 책상과 콘센트가 일렬로 박힌 벽⁠. 혜지가 같은 말을 한 번 더 했다⁠.

“⁠학생들 무료입니다⁠. 오후 네 시부터 열 시까지요⁠.⁠”

맨 뒷줄에서 제일 큰 박수가 터졌다⁠. 윤옥이었다⁠. 학원 원장이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고⁠, 윤옥도 고개를 끄덕였다⁠. 고2 3반 학부모방이 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혜지가 다시 물었다⁠.

“⁠다른 질문 있으신가요⁠?⁠”

도석이 두 번째로 손을 들었다⁠. 손을 드는 순간 뒷줄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윤옥이 몸을 앞으로 빼고 도석의 등을 보고 있었다⁠. 도석은 등으로 윤옥의 눈길을 느꼈다⁠.

“⁠스터디존을 저녁 열 시까지 열면⁠, 학원 앞에서 기다리는 부모님들은 어디서 기다립니까⁠?⁠”

“⁠스터디존 옆 라운지에서요⁠. 거기도 좌석이 마흔 개예요⁠.⁠”

“⁠지금은 그분들이 제 가게에서 기다립니다⁠.⁠”

강의실이 조용해졌다⁠. 혜지는 대답 대신 화면을 넘겼다⁠. 마지막 장이었다⁠. 「⁠너울마을 상가와 함께 자라는 달그락⁠」

번영회장이 박수를 청하듯 두 손을 들었다⁠. 박수가 다시 나왔다⁠. 꽃집 사장도⁠, 학원 원장도⁠, 태권도 관장도 쳤다⁠. 반찬가게 할머니는 쿠키를 싸느라 손이 바빴다⁠. 세탁소 사장은 팔짱을 낀 채 손가락만 까딱거렸다⁠. 맨 뒷줄에서 윤옥이 쳤다⁠. 아까보다 작게⁠, 그러나 끝까지 쳤다⁠.

“⁠번영회는 플래그십 개점을 환영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이의 없으시죠⁠?⁠”

이의는 하나였고⁠, 하나는 이의 축에 들지 못했다⁠.

*

사람들이 나가자 강의실에 쿠키 부스러기 냄새만 남았다⁠. 도석이 의자를 정리하는데 혜지가 다가왔다⁠.

“⁠사장님⁠, 오 분만 따로 얘기할 수 있을까요⁠?⁠”

채홍이 프로젝터를 들고 나가며 문을 닫았다⁠. 문 유리 너머 복도에서 윤옥이 학원 원장과 이야기하는 것이 보였다⁠. 윤옥은 스터디존 자리 예약을 묻고 있었다⁠.

혜지는 칠판 앞 책상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회의할 때와 다른 자세였다⁠.

“⁠아까 질문 좋았어요⁠. 저도 같은 걸 걱정했어요⁠. 그래서 말씀드려요⁠. 너울마을점⁠, 본사가 사고 싶어요⁠.⁠”

“⁠가게를 사겠다고요⁠?⁠”

“⁠권리금까지 쳐서 일억 이천만 원⁠. 위약금 없고⁠, 인테리어 감가도 본사가 떠안아요⁠. 사장님이 넣으신 퇴직금 이억에는 못 미치지만⁠, 두 해 버티다 문 닫는 것보다는 많이 남으세요⁠.⁠”

혜지는 같은 목소리로 한 줄을 더했다⁠.

“⁠신용대출 오천만 원도 정리하실 수 있는 돈이고요⁠.⁠”

도석의 손에 들려 있던 의자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다리 하나가 먼저 닿아 덜컥 소리가 났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가맹 창업 대출 연계 창구요⁠. 사장님이 개점 전에 받으신 대출⁠, 본사 협력 은행 창구에서 받으셨잖아요⁠. 상담 기록이 본사로 와요⁠. 계약서에 동의하셨어요⁠.⁠”

또 계약서였다⁠. 도석은 이번에도 서명란만 찾던 손을 떠올렸다⁠.

“⁠왜 제 가게입니까⁠? 직영점을 길 건너에 내면서 왜 제 가게까지 삽니까⁠?⁠”

“⁠사장님 가게는 동네를 알아요⁠. 「⁠기타⁠」로 찍히는 매출이 열에 셋이에요⁠. 저희는 동네를 몰라요⁠. 싱가포르 투자사는 직영 매장 매출이 전체의 삼십 퍼센트가 넘어야 돈을 넣어요⁠. 직영 매장을 빨리 늘리는 길은 잘되는 가게를 사는 거예요⁠.⁠”

“⁠그 투자 때문에 퇴직금 넣은 사람을 밀어냅니까⁠?⁠”

“⁠투자가 안 들어오면 내년에 원두 공급 단가가 올라가요⁠. 그럼 삼천 가게가 같이 힘들어져요⁠. 사장님 가게 하나 지키다 삼천 가게가 흔들리는 게 맞아요⁠?⁠”

“⁠삼천 가게를 지키려면 삼천 가게가 각자 버텨야 합니다⁠. 하나씩 사들이면 남는 건 본사 가게뿐입니다⁠.⁠”

“⁠남는 가게가 본사 가게든 사장님 가게든⁠, 손님한테는 같은 커피예요⁠.⁠”

“⁠같은 커피가 아닙니다⁠. 상무님이 아까 냄새 맡고 마신 커피는 제 손으로 내린 겁니다⁠.⁠”

혜지는 처음으로 말을 고르는 얼굴이 되었다⁠. 잠깐이었다⁠. 혜지는 일어나서 코트 단추를 잠갔다⁠.

“⁠십일월 말까지 생각해 보세요⁠. 그 뒤로는 제가 이 금액을 못 드려요⁠. 직영점이 열리면 사장님 가게 값이 떨어지니까요⁠.⁠”

혜지가 문을 열었다⁠. 복도에 윤옥이 서 있었다⁠. 학원 원장은 이미 가고 없었다⁠. 혜지는 윤옥에게 목례하고 계단으로 내려갔다⁠. 시더우드 냄새가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윤옥은 도석을 보았다⁠. 서류 봉투를 두 손으로 쥐고 있었다⁠.

“⁠대출 정리라니⁠. 무슨 대출⁠?⁠”

복도 끝 강의실에서 고2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렸다⁠. 문이 열리고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도석은 아이들 틈에서 강재의 가방을 보았다⁠. 강재도 엄마 아빠를 보았고⁠, 다가오지 않고 멈췄다⁠.

“⁠기계⁠. 에스프레소 기계 할부⁠.⁠”

“⁠기계 할부를 본사 상무가 왜 알아⁠?⁠”

“⁠본사에서 산 기계니까⁠.⁠”

윤옥은 도석의 눈을 오래 보았다⁠. 도석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피하면 냄새가 날까 봐서였다⁠. 거짓말에는 냄새가 없었다⁠. 도석은 처음으로 그것이 고마웠고⁠, 고마운 만큼 속이 쓰렸다⁠.

“⁠알았어⁠. 집에 가서 얘기해⁠.⁠”

윤옥이 계단을 내려갔다⁠. 강재가 엄마를 따라가다 돌아보았다⁠. 도석의 앞치마 주머니에서 할머니가 넣어 준 쿠키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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