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317자)

밤의 협상

퇴직금으로 차린 카페 · 탁은담

12월 8일 밤 아홉 시⁠, 간판 없는 집 유리문을 단미가 두드렸다⁠. 민트색 셔츠 위에 검은 패딩을 입고 있었다⁠. 패딩에서 찬 바람과 귤피 시럽 냄새가 같이 들어왔다⁠. 직영점 개점을 사흘 앞두고 주방에서 시럽을 졸이다 온 길이었다⁠.

단미는 계산대 위에 클리어 파일을 놓았다⁠. 안에 종이가 여섯 장 들어 있었다⁠. 맨 위 장 제목이 보였다⁠.

「⁠판교 플래그십 메뉴 개발 기록 — 동네 시리즈⁠」

“⁠직영점 교육 자료예요⁠. 매니저한테만 줘요⁠. 넷째 장 보세요⁠.⁠”

도석은 파일을 넘겼다⁠. 메뉴마다 칸이 나뉘어 있었고⁠, 칸마다 「⁠원안⁠」이라는 줄이 있었다⁠. 야근 귤피 라테 원안⁠, 학원 앞 보리 밀크 원안⁠, 참깨 크림 라테 원안⁠, 생강 허니 라테 원안⁠. 네 줄 모두 같은 글씨였다⁠. 「⁠너울마을점(⁠가맹⁠) — 매니저 후보 포트폴리오 경유⁠」

“⁠본사가 알고 있었어요⁠. 어디서 온 건지⁠. 상무님이 시음회 때 특허 아니라고 하신 건 맞는 말인데⁠, 출처는 본사도 다 적어 놨어요⁠.⁠”

“⁠이걸 가져오면 너는⁠…⁠…⁠.⁠”

“⁠잘릴 수도 있죠⁠. 근데 저 그만두는 거 아니에요⁠. 직영점 매니저 계속할 거예요⁠. 학자금 아직 이천삼백 남았어요⁠.⁠”

단미는 의자에 앉지 않고 계산대에 기댔다⁠.

“⁠사장님⁠, 오늘 협상에 하나 더 넣어 주세요⁠. 점주가 만든 메뉴를 본사가 가져다 팔면⁠, 한 잔에 얼마씩 점주 몫을 주는 거요⁠. 쑥 라테⁠, 유자⁠, 옥수수⁠. 방에 사진 올라오는 거 저도 봤어요⁠. 본사가 그거 또 가져갈 거예요⁠. 가져가는 건 막을 수 없어도 몫은 받아야죠⁠.⁠”

“⁠네 몫도 들어가야 해⁠. 첫눈 시나몬은 네가 만든 거잖아⁠.⁠”

단미가 웃었다⁠. 지난 한 달 동안 본 단미의 웃음 가운데 가장 짧고 가장 진짜였다⁠.

“⁠그건 직영점 거예요⁠. 저는 거기 사람이니까요⁠. 사장님 거만 챙기세요⁠.⁠”

*

밤 열 시⁠, 사람들이 모였다⁠. 예란이 먼저 왔다⁠. 정자점 마감을 남편 친구에게 맡기고 택시를 탔다고 했다⁠. 광교점 사장은 노트북 화면으로 들어왔다⁠. 열여섯 석 가운데 창가 네 자리를 붙여 테이블을 만들었다⁠. 윤옥은 연두색 앞치마를 두르고 계산대 뒤에서 보리를 우렸다⁠. 퇴근하고 바로 왔다⁠.

“⁠당신 혼자 정하는 거 이제 없다며⁠. 그러니까 나도 있어야지⁠. 말은 안 할게⁠. 보리만 우릴게⁠. 사십 분⁠.⁠”

예란이 화장실에 간 사이⁠, 윤옥이 보리 냄비를 저으며 도석에게 낮게 말했다⁠.

“⁠뭘 내줄지 미리 정해 뒀어⁠?⁠”

“⁠내줄 거⁠?⁠”

“⁠협상은 받을 거 정하는 게 아니야⁠. 내줄 거 먼저 정하는 거야⁠. 학부모 민원도 그래⁠. 이건 끝까지 안 되고⁠, 이건 되고⁠. 그거 안 정하고 들어가면 밤새 다 내줘⁠.⁠”

“⁠당신은 뭘 내줄 거 같아⁠?⁠”

“⁠나한테 묻지 마⁠. 당신 가게야⁠.⁠”

윤옥은 국자를 내려놓고 도석을 보았다⁠.

“⁠근데 하나는 말할게⁠. 간판은 내줘도 돼⁠. 칠판은 내주지 마⁠.⁠”

열 시 오 분⁠, 혜지가 혼자 왔다⁠. 채홍도 법무팀장도 없었다⁠. 회색 코트 대신 검은 패딩이었다⁠. 혜지는 테이블 맞은편에 앉으며 단미를 보았다⁠. 단미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문가로 물러났다⁠.

“⁠단미 씨도 계실 거예요⁠?⁠”

“⁠네⁠. 증언하러 왔어요⁠. 필요하시면요⁠.⁠”

혜지는 단미가 들고 온 클리어 파일을 보았다⁠. 표지만 보고도 무엇인지 알았다⁠.

“⁠시작해요⁠.⁠”

*

첫 싸움은 영업지역이었다⁠. 예란이 반경 오백 미터를 내밀었다⁠. 혜지는 이백 미터를 내밀었다⁠. 광교점 사장이 화면 안에서 판교와 분당 지도를 띄워 동그라미를 그렸다 지웠다⁠. 오백이면 직영점 자리가 없었고⁠, 이백이면 너울마을 같은 상가가 다 들어갔다⁠. 열한 시 반에 삼백 미터에서 멈췄다⁠. 혜지가 덧붙였다⁠.

“⁠삼백 미터 안에 직영점을 낼 때는 그 안의 가맹점주가 동의해야 해요⁠. 동의 안 하면 못 내요⁠. 대신 이미 공사가 끝난 두 곳⁠, 너울마을하고 정자는 열어요⁠.⁠”

예란이 도석을 보았다⁠. 정자 직영점은 예란의 가게 앞이었다⁠. 예란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열어⁠. 대신 그 두 곳 옆 가게는 다음 것 받아⁠.⁠”

두 번째 싸움은 매출 보전이었다⁠. 도석이 두 해 동안 줄어든 몫의 절반을 말했다⁠. 혜지는 학원 이전과 재건축을 다시 꺼냈다⁠. 직영점 탓이 아닌 매출 감소까지 본사가 메울 수는 없다고 했다⁠. 예란이 둔산점의 열두 달 그래프를 다시 펴 보였다⁠.

“⁠학원이 옮긴 건 알아⁠. 그럼 학원 몫은 빼⁠. 빼고 남은 거⁠, 그거는 직영점 몫이잖아⁠. 그건 메워⁠.⁠”

“⁠남은 게 직영점 몫이라는 걸 누가 정해요⁠?⁠”

“⁠같은 동네 다른 카페 매출 보면 되지⁠. 다른 카페는 빠진 게 열에 하나고⁠, 우리는 열에 둘이야⁠. 그 차이가 직영점이야⁠.⁠”

혜지가 그래프를 오래 보았다⁠. 계산이 맞았다⁠. 혜지가 숫자 앞에서 말을 고르는 것을 도석은 두 번째로 보았다⁠. 새벽 한 시⁠, 일 년 반 동안⁠, 같은 상권의 다른 카페 매출이 빠진 만큼은 빼고 보전하기로 했다⁠. 광교점 사장이 숫자를 넣어 보고 「⁠이거면 둔산점 사장님 숨은 쉬어요⁠」라고 화면에 띄웠다⁠.

윤옥이 보리를 한 잔씩 돌렸다⁠. 혜지 앞에도 놓았다⁠. 혜지는 잔을 들고 냄새를 맡았다⁠.

“⁠사모님⁠, 이거 몇 분 우리셨어요⁠?⁠”

“⁠사십 분이요⁠. 삼십오 분 아니고요⁠.⁠”

윤옥이 단미를 보며 말했고⁠, 단미가 문가에서 소리 없이 웃었다⁠.

세 번째는 단미가 내민 것이었다⁠. 도석이 클리어 파일을 테이블 가운데 놓았다⁠. 「⁠원안⁠」 네 줄이 위를 보고 있었다⁠. 혜지는 파일을 끝까지 읽었다⁠. 네 번째 장에서 오래 멈췄다⁠.

“⁠한 잔에 얼마요⁠?⁠”

“⁠이백 원⁠.⁠”

“⁠백 원⁠.⁠”

“⁠직영점 한 잔이 육천오백 원입니다⁠. 이백 원이면 서른 몇 분의 일입니다⁠.⁠”

“⁠본사 재료비⁠, 인건비⁠, 임대료 다 빼면 직영점이 한 잔에 남기는 게 칠백 원이 안 돼요⁠. 이백이면 셋에 하나를 드리는 거예요⁠.⁠”

“⁠백오십⁠.⁠”

“⁠백오십⁠.⁠”

혜지가 말하고⁠, 잠깐 웃었다⁠. 오늘 밤 처음 나온 웃음이었다⁠. 단미가 문가에서 숨을 내쉬었다⁠. 새벽 한 시 반⁠, 윤옥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강재였다⁠. 윤옥이 화면을 도석에게 보여 주었다⁠.

「⁠엄마 언제 와⁠? 나 내일 기말 수학인데 아빠 가게 걱정돼서 극한이 안 외워져⁠」

「⁠극한은 외우는 거 아니야⁠. 자⁠」

윤옥이 답을 보내고 한숨을 쉬었다⁠. 화면 속 광교점 사장이 웃음을 참았다⁠. 예란이 휴대전화를 들어 녹음했다⁠.

“⁠여보⁠. 한 잔에 백오십 원⁠. 쑥 라테 집 사장님 부자 되겠다⁠. 끊어⁠.⁠”

*

새벽 두 시⁠, 남은 것이 하나였다⁠. 마흔두 곳⁠. 도석은 계획을 접으라고 했고⁠, 혜지는 접을 수 없다고 했다⁠. 접으면 직영 비중을 못 맞추고⁠, 투자 규모가 줄고⁠, 원두 단가는 결국 오른다고 했다⁠. 도석이 같은 말을 세 번 하고⁠, 혜지가 같은 대답을 세 번 했다⁠. 광교점 사장은 화면 안에서 졸다가 깼다⁠.

윤옥이 계산대 뒤에서 처음으로 끼어들었다⁠.

“⁠두 시 넘었어요⁠. 이제 다들 반말해도 되지 않아요⁠? 교무실에서는 회의가 자정 넘으면 반말해요⁠.⁠”

“⁠사모님⁠, 그런 규칙이 진짜 있어요⁠?⁠”

“⁠제가 지금 만들었어요⁠.⁠”

혜지가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웃다가 그대로 한참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들었을 때 얼굴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우리 아버지가 분식집을 했어요⁠. 떡볶이 프랜차이즈 가맹점⁠. 제가 열여덟 살 때요⁠.⁠”

가게가 조용해졌다⁠. 보리 냄비가 끓는 소리만 났다⁠.

“⁠이천 년 겨울에 본사가 부도났어요⁠. 본사가 작았어요⁠. 직영점 하나 없이 가맹비랑 소스 값으로만 돌아가던 회사였어요⁠. 부도나니까 소스가 끊겼어요⁠. 떡볶이 집에 소스가 안 오면 장사가 안 돼요⁠. 아버지는 시장에서 고추장을 사다 소스를 만들었는데⁠, 맛이 달랐어요⁠. 손님이 한 달 만에 다 끊겼어요⁠.⁠”

혜지는 보리 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간판 글씨가 반쯤 떨어져 있었어요⁠. 아버지가 사다리를 놓고 떼려다가 그만뒀어요⁠. 가게 닫는 날까지 반쯤 떨어진 채로 뒀어요⁠. 저는 그 아래서 사진을 찍었어요⁠. 아직 휴대전화에 있어요⁠.⁠”

예란이 고개를 돌렸다⁠. 도석은 혜지를 보았다⁠. 혜지의 코트에서 나던 시더우드 냄새가 오늘은 나지 않았다⁠. 패딩에서는 그냥 겨울 냄새가 났다⁠.

“⁠그래서 본사를 크게 만들고 싶었어요⁠. 직영점이 있고⁠, 투자가 있고⁠, 원두를 싸게 사 오는 본사요⁠. 그런 본사는 부도가 안 나요⁠. 소스가 안 끊겨요⁠. 마흔두 곳은 그 길이었어요⁠. 저는 지금도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상무님 아버님 가게는 본사가 약해서 무너졌습니다⁠.⁠”

도석이 말했다⁠.

“⁠제 가게는 본사가 강해서 무너졌습니다⁠. 원두가 끊기고⁠, 간판이 내려갔습니다⁠. 소스가 끊긴 날하고 같은 날입니다⁠. 상무님은 한쪽 날만 기억하고 계십니다⁠.⁠”

혜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 안의 보리 잔이 식어 갔다⁠. 오래 지나서 혜지가 말했다⁠.

“⁠마흔두 곳⁠, 접을게요⁠. 이미 연 두 곳 말고는요⁠. 대신 투자 규모가 줄어요⁠. 줄어든 몫만큼 원두 단가가 조금 오를 거예요⁠. 그건 점주들도 같이 져야 해요⁠.⁠”

예란이 도석을 보았다⁠. 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란이 화면 속 광교점 사장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광교점 사장이 졸린 손으로 숫자를 적었다⁠.

*

새벽 네 시⁠, 협약 초안이 노트북 화면에 다 모였다⁠. 영업지역 삼백 미터와 직영점 동의⁠. 일 년 반 매출 보전⁠. 점주 메뉴 한 잔에 백오십 원⁠. 소통방은 본사 직원 없이 다시 연다⁠. 마흔두 곳 계획은 접는다⁠.

혜지가 패딩 지퍼를 올렸다⁠. 일어나기 전에 도석을 보았다⁠.

“⁠하나 남았어요⁠.⁠”

“⁠말씀하십시오⁠.⁠”

“⁠마 사장님⁠, 협의회 대표에서 내려오세요⁠.⁠”

예란이 의자를 뒤로 밀었다⁠. 혜지는 예란을 보지 않고 도석만 보았다⁠.

“⁠계약이 해지된 점주가 대표로 있는 단체와 맺은 협약은 이사회가 안 받아요⁠. 싱가포르도 봐요⁠. 협약서에 사장님 이름이 있으면⁠, 본사가 해지한 사람한테 졌다고 읽어요⁠. 이 협약은 공동 대표 금예란 사장님 이름으로만 찍어야 해요⁠.⁠”

“⁠그럼 너울마을은 뭐가 남아⁠?⁠”

예란이 물었다⁠. 혜지가 예란을 처음 보았다⁠.

“⁠사장님 해지⁠, 철회할게요⁠. 위약금 청구도 거두고요⁠. 재계약해 드릴게요⁠. 새 협약 조건으로요⁠. 너울마을점 영업지역도 삼백 미터로 다시 그려 드릴게요⁠. 길 건너 직영점이 그 안에 들어가지만⁠, 이미 연 곳이니까 매출 보전을 받으시면 돼요⁠.⁠”

도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예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받지 마⁠. 아니⁠, 받아⁠. 아⁠, 모르겠다⁠. 구 년 동안 이런 거 정해 본 적이 없어서⁠.⁠”

예란은 휴대전화를 들었다가 녹음 버튼을 누르지 않고 내려놓았다⁠. 남편에게도 물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도석은 계산대 옆 칠판을 보았다⁠. 뒷면 아홉 줄에 운중동 콩 한 줄⁠. 단미의 「⁠40분⁠. 35분 아님⁠」 계산대 뒤에서 윤옥이 보리 냄비 불을 껐다⁠. 단미는 문가에서 클리어 파일을 꼭 쥐고 있었다⁠.

“⁠내려오시면⁠, 아침 아홉 시에 본사 10층에서 도장 찍겠습니다⁠. 안 내려오시면 투자는 없고⁠, 이 초안도 없어요⁠. 저도 없고요⁠.⁠”

혜지가 일어났다⁠. 유리문을 열자 새벽 공기가 들어와 식은 보리 냄새를 쓸어 갔다⁠. 길 건너 직영점 지붕의 「⁠달그락⁠」은 꺼져 있었다⁠. 개점까지 사흘이었다⁠.

“⁠일곱 시까지 답 주세요⁠. 문자로요⁠. 한 글자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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