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375자)

뒷면

퇴직금으로 차린 카페 · 탁은담

12월 9일 새벽 다섯 시⁠, 아파트로 걸어가는 길에는 서리 냄새가 났다⁠. 풀잎에 앉은 서리가 녹기 직전에 내는 비린 물 냄새였다⁠. 윤옥은 연두색 앞치마를 패딩 안에 그대로 입고 걸었다⁠. 도석은 빈 보온병을 들고 있었다⁠.

“⁠정했어⁠?⁠”

“⁠내려올 거야⁠.⁠”

윤옥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재계약은⁠?⁠”

“⁠그건 아직⁠.⁠”

“⁠아직이 아니라⁠, 당신 얼굴에 벌써 써 있어⁠. 안 한다고⁠.⁠”

도석이 웃었다⁠. 윤옥은 웃지 않고 앞만 보았다⁠.

“⁠간판은 내줘도 된다고 했지⁠. 칠판은 내주지 말라고 했고⁠. 당신이 그 말 듣고 정한 거면 나 아무 말 안 할게⁠. 근데 대출 오천은 그대로야⁠. 그건 알지⁠?⁠”

“⁠알아⁠.⁠”

“⁠삼천이백은 없어지고⁠.⁠”

“⁠응⁠.⁠”

“⁠그럼 오천만 남았네⁠. 오천이면 내가 교무실에서 한 이 년 더 버티면 돼⁠.⁠”

아파트 현관 앞에서 윤옥이 멈췄다⁠. 처음으로 도석을 돌아보았다⁠.

“⁠다음부터 혼자 정하면 진짜 끝이에요⁠.⁠”

“⁠네⁠.⁠”

여섯 시 오십팔 분⁠, 도석은 혜지에게 문자를 보냈다⁠. 한 글자였다⁠.

「⁠네⁠」

보내기를 누르고 도석은 가게 유리문을 열었다⁠. 밤새 우린 보리 냄새와 식은 원두 냄새가 가게 안에 고여 있었다⁠. 창가 네 자리를 붙인 테이블 위에 빈 잔이 여섯 개 남아 있었다⁠. 혜지가 마신 잔⁠, 예란이 마신 잔⁠, 단미가 끝까지 들고만 있던 잔⁠. 도석은 잔을 하나씩 개수대로 옮겼다⁠. 마지막 잔을 씻을 때 답이 왔다⁠. 「⁠고맙습니다⁠. 아홉 시에 찍겠습니다⁠」 혜지의 문자에는 웃는 얼굴이 없었다⁠.

*

아침 아홉 시⁠, 판교 본사 10층에서 협약에 도장이 찍혔다⁠. 도석은 도장 찍는 자리에 가지 않았다⁠. 예란이 갔다⁠. 기흥점 남편이 넥타이를 매고 따라갔고⁠, 광교점 사장이 노트북을 들고 갔다⁠. 열 시 십 분에 예란의 음성 메시지가 왔다⁠.

“⁠찍었어⁠. 내 이름만 있어⁠. 금예란⁠. 구 년 만에 본사 서류에 내 이름이 제일 크게 들어갔어⁠. 기분 더러워⁠. 고마워⁠. 끊어⁠.⁠”

점주 모임 방에 협약서 사진이 올라왔다⁠. 방은 오랫동안 조용했다가 한꺼번에 시끄러워졌다⁠. 「⁠삼백 미터⁠!⁠」⁠, 「⁠쑥 라테 한 잔에 백오십 원 받으면 제 떡집 이모한테 반 드릴 거예요⁠」⁠, 「⁠대표님 어디 가셨어요⁠?⁠」 마지막 물음에 예란이 답을 달았다⁠. 「⁠대표 그만둔 사람 대표라고 부르지 마⁠. 너울마을 사장이라고 불러⁠」 한 시간 뒤 예란이 음성 메시지를 하나 더 보냈다⁠. “⁠아⁠, 그리고 기흥점 남편이 도장 찍는 데서 넥타이 풀었어⁠. 상무가 넥타이 안 맨 거 보고⁠. 끊어⁠.⁠”

오후 한 시⁠, 본사가 점주 소통방을 다시 열었다⁠. 공지에 웃는 얼굴 표시가 없었다⁠.

*

오후 세 시⁠, 혜지가 간판 없는 집에 왔다⁠. 회색 코트였다⁠. 시더우드 냄새가 다시 났다⁠. 혜지는 계산대 앞에 봉투를 놓았다⁠. 민트색 로고가 찍힌 봉투였다⁠.

“⁠재계약서예요⁠. 새 협약 조건으로 그려 드렸어요⁠. 영업지역 삼백 미터⁠, 길 건너 직영점은 이미 연 곳이라 매출 보전 받으시고요⁠. 원두 공급은 내일부터 바로 들어가요⁠. 간판도 본사가 새로 달아 드려요⁠. 철거비 안 받고요⁠.⁠”

도석은 봉투를 열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재계약은 안 하겠습니다⁠.⁠”

혜지는 놀라지 않았다⁠. 그래도 한 번 더 물었다⁠.

“⁠직영점 바로 앞에서 브랜드 없이 버티시겠다고요⁠? 가맹점이 아니면 매출 보전도 못 받으세요⁠. 직영점 손님이 사장님 가게로 건너올 이유가 없어요⁠.⁠”

“⁠귤 냄새 맡고 건너올 겁니다⁠. 안 건너오면 제가 잘못 내린 겁니다⁠.⁠”

“⁠사장님 대출은요⁠?⁠”

“⁠집사람이 교무실에서 두 해 더 버티기로 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두 해 버틸 겁니다⁠.⁠”

혜지는 봉투를 도로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봉투에 넣지 않은 종이였다⁠.

“⁠이건 따로 드릴게요⁠. 레시피 사용 계약이에요⁠. 직영점이 야근 귤피⁠, 학원 앞 보리⁠, 참깨 크림⁠, 생강 허니 네 가지를 팔 때마다 한 잔에 백오십 원⁠. 협약에는 점주 메뉴라고 썼는데⁠, 사장님은 이제 점주가 아니라서 따로 만들었어요⁠. 재계약 안 하셔도 드려요⁠.⁠”

도석은 종이를 받았다⁠. 길 건너 직영점이 너울마을점 레시피를 팔 때마다 백오십 원이 간판 없는 집으로 건너오는 계약이었다⁠.

“⁠이건 받겠습니다⁠.⁠”

“⁠받으실 줄 알았어요⁠. 이거라도 받으셔야 제가 덜 미안해요⁠.⁠”

혜지는 계산대 옆 칠판을 보았다⁠. 뒷면 열 줄이 보였다⁠.

“⁠저 다음 주부터 사업전략실에서 나가요⁠. 가맹지원실로 가요⁠. 점주들 만나서 민원 받는 자리래요⁠. 대표이사님 말로는 벌이래요⁠.⁠”

“⁠벌입니까⁠?⁠”

“⁠저한테는 공부예요⁠. 사장님 같은 분들 냄새를 맡아 보라는 거겠죠⁠.⁠”

혜지는 잠깐 망설이다 말했다⁠.

“⁠야근 귤 한 잔 주세요⁠. 제 돈으로요⁠.⁠”

도석은 한 잔을 내렸다⁠. 혜지는 서서 마셨다⁠. 다 마시고 잔을 내려놓으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시럽 한 숟가락 반⁠. 직영점도 줄이라고 할게요⁠.⁠”

혜지는 문을 나가다 유리문 위 칠한 벽을 올려다보았다⁠.

“⁠간판은 뭐로 다세요⁠?⁠”

“⁠아직 못 정했습니다⁠.⁠”

“⁠정하시면 저한테도 알려 주세요⁠. 가맹지원실에서는 가맹점 아닌 가게 간판도 공부해야 하니까요⁠.⁠”

혜지가 웃으며 나갔다⁠. 찻길을 건너는 혜지의 걸음이 처음 공사장에 왔던 날보다 느렸다⁠.

*

12월 10일 저녁 여덟 시⁠, 간판 없는 집 테이블에 사람들이 둘러앉았다⁠. 가운데에 남색 천이 펼쳐져 있었다⁠. 세탁소 사장이 가져온 천이었다⁠. 천 간판으로 쓰기 좋은 두꺼운 무명이라고 했다⁠. 옆에 오렌지색 천 조각이 쌓여 있었다⁠. 글자를 오려 다리미로 눌러 붙일 천이었다⁠.

“⁠이름을 정해야 오리지⁠. 뭐로 할 거야⁠?⁠”

세탁소 사장이 가위를 들고 물었다⁠. 할머니가 먼저 말했다⁠.

“⁠너울 커피집⁠. 내 메모지에 그렇게 썼잖아⁠.⁠”

번영회장이 손을 들었다⁠.

“⁠판교 원조 커피⁠. 원조라는 말이 붙어야 길 건너를 이겨⁠.⁠”

“⁠원조라는 말 붙이면 회장님 또 박수 치실 거잖아요⁠.⁠”

도석이 말하자 테이블이 웃었다⁠. 강재가 휴대전화에서 고개를 들었다⁠. 기말고사 수학을 끝낸 날이었다⁠.

“⁠퇴직금⁠.⁠”

“⁠뭐⁠?⁠”

“⁠가게 이름⁠. 퇴직금⁠. 아빠 퇴직금으로 차렸잖아⁠. 다들 기억하게⁠.⁠”

윤옥이 강재의 등을 때렸다⁠. 할머니는 웃다가 쿠키를 떨어뜨렸다⁠. 세탁소 사장이 가위를 내려놓고 진지하게 말했다⁠.

“⁠퇴직금은 글자가 세 개라 오리기 좋은데⁠.⁠”

“⁠아저씨⁠, 진지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윤옥이 말리자 강재가 한 술 더 떴다⁠.

“⁠그럼 희망퇴직⁠. 네 글자⁠. 희망이 들어가잖아⁠.⁠”

“⁠너 기말 수학 망쳤지⁠?⁠”

“⁠극한 나왔어⁠. 엄마가 외우지 말라며⁠. 안 외웠더니 몰랐어⁠.⁠”

윤옥이 이번에는 강재의 등을 때리지 않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강재가 머리를 피했다⁠. 도석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혜지였다⁠. 도석은 화면을 윤옥에게 내밀었다⁠.

「⁠싱가포르 투자 확정됐어요⁠. 처음 규모의 절반이에요⁠. 원두 단가는 내년 봄에 조금 올라요⁠. 점주들께는 제가 소통방에서 직접 말씀드릴게요⁠」

윤옥은 문자를 두 번 읽고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윤옥이 계산대 옆 칠판을 가리켰다⁠.

“⁠뒷면⁠.⁠”

모두 칠판을 보았다⁠.

“⁠이 가게 사람들이 다 뒷면 보고 왔잖아요⁠. 앞면은 본사 거였고⁠. 이제 앞면이 없으니까⁠, 뒷면이 이름이에요⁠.⁠”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세탁소 사장이 오렌지색 천에 분필로 두 글자를 그리고 가위로 오렸다⁠. 「⁠뒷⁠」의 받침이 어려워서 두 번 다시 오렸다⁠. 다리미가 데워지는 냄새가 났다⁠. 세탁소 사장은 남색 천 위에 오렌지 글자를 놓고 다리미를 꾹 눌렀다⁠. 스팀이 올라왔다⁠. 접착 심지가 녹는 냄새와 무명이 데워지는 냄새가 섞였다⁠.

“⁠백 년 간다⁠.⁠”

*

12월 11일 토요일 아침 일곱 시⁠, 길 건너 직영점 앞에 줄이 있었다⁠. 민트색 풍선이 입구 양쪽에 매달려 있었고⁠, 지붕의 「⁠달그락⁠」 세 글자가 아침 해를 받아 반짝였다⁠. 입구에서 단미가 첫 손님을 맞았다⁠. 「⁠매니저 주단미⁠」 명찰이 민트색 셔츠 가슴에 있었다⁠. 채홍은 헤드셋 마이크를 쓰고 「⁠웰컴 투 달그락⁠」을 외쳤다⁠. 혜지는 보이지 않았다⁠. 가맹지원실 첫 출근이 월요일이라고 했다⁠.

상가 앞에서 도석은 사다리 위에 있었다⁠. 아래에서 세탁소 사장이 사다리를 붙잡았고⁠, 윤옥이 천 간판의 한쪽 끝을 들었다⁠. 간판 자리는 번영회장이 상가 돈으로 칠한 외벽 색 그대로였다⁠. 도석은 나사 대신 고리 네 개를 박고 남색 천을 걸었다⁠. 바람이 불자 천이 한 번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오렌지색 두 글자가 아침 햇빛에 선명했다⁠.

「⁠뒷면⁠」

할머니가 반찬가게 앞에서 박수를 쳤다⁠. 이번에는 쿠키를 싸지 않았다⁠. 택시 한 대가 상가 앞에 멈추고 예란이 내렸다⁠. 예란은 꽃집에서 산 작은 화분을 안고 있었다⁠.

“⁠개업 화분⁠. 너 개업 두 번 하는 거야⁠. 한 번은 남의 간판⁠, 한 번은 네 간판⁠.⁠”

예란은 천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뒷면⁠? 이름 이상하네⁠. 근데 냄새는 좋다⁠. 끊어⁠.⁠”

“⁠전화 아닙니다⁠, 사장님⁠.⁠”

“⁠알아⁠. 버릇이야⁠.⁠”

예란은 화분을 계산대 옆에 놓고 정자점을 열러 다시 택시를 탔다⁠. 2층 학원 창문에서 강재가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었다⁠.

도석은 사다리를 내려와 가게로 들어갔다⁠. 계산대 옆 칠판을 들어 유리문 바로 안쪽⁠, 밖에서 보이는 자리로 옮겼다⁠. 칠판은 석 달 반 동안 뒷면이 바깥을 향해 있었다⁠. 오늘부터는 뒷면이 앞면이었다⁠. 앞면이던 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도석은 칠판을 그대로 세웠다⁠. 분필 글씨 열 줄이 유리문 밖을 향했다⁠. 야근 귤⁠, 학원 앞 보리⁠, 찬방 참깨⁠, 세탁소 생강⁠, 맨 아래 운중동 콩⁠. 단미의 「⁠40분⁠. 35분 아님⁠」도 지우지 않았다⁠.

도석은 민트색 앞치마를 벗고 윤옥이 사 온 남색 앞치마를 둘렀다⁠. 체크무늬 남방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었다⁠. 운중동 콩을 갈고⁠, 에스프레소를 내리고⁠, 귤껍질 병을 열었다⁠. 오른손에 은색 스팀 피처를 들고 우유를 데웠다⁠. 피처 표면에 손바닥 열기가 뿌옇게 번졌다⁠.

일곱 시 이십 분⁠, 유리문이 열렸다⁠. 개발자였다⁠. 개발자는 직영점 줄 맨 앞에 있다가 빠져나와 찻길을 건너왔다고 했다⁠. 후드 끈은 여전히 짝짝이였다⁠.

“⁠뒷면이요⁠.⁠”

“⁠이제 앞면이야⁠.⁠”

“⁠그럼 앞면이요⁠.⁠”

개발자는 잔을 받아 들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 직영점보다 콘센트가 두 개 적은 자리였다⁠. 개발자는 노트북을 열지 않고 잔부터 두 손으로 감쌌다⁠.

일곱 시 반⁠, 길 건너 직영점 입구에서 단미가 손님을 맞다가 고개를 들었다⁠. 찻길 건너 남색 천 간판을 오래 보았다⁠. 단미는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한 장 찍고⁠, 다시 손님을 맞았다⁠. 일 분 뒤 도석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간판 예뻐요⁠. 귤피 시럽 한 숟가락 반으로 줄였어요⁠. 상무님 지시래요⁠. 그리고 오늘 첫 잔 백오십 원 갔어요⁠」

도석은 답장에 한 줄만 썼다⁠. 「⁠보리는 사십 분⁠」 단미에게서 웃는 얼굴 하나가 왔다⁠. 본사 공지에 붙던 것과 같은 표시였는데⁠, 이번에는 웃는 얼굴로 보였다⁠.

도석은 유리문을 열어 두었다⁠. 귤 냄새와 할머니가 아침에 볶은 참깨 냄새가 인도로 흘러나갔다⁠. 찬 아침 공기를 타고 찻길을 건너⁠, 민트색 풍선 사이로⁠, 직영점 줄 끝에 선 사람들의 코끝까지 갔다⁠. 줄 끝의 사람 하나가 고개를 돌려 냄새가 오는 곳을 찾았다⁠. 남색 천이 바람에 한 번 더 부풀었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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