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335자)

실사

퇴직금으로 차린 카페 · 탁은담

12월 7일 아침 여덟 시⁠, 반찬가게 할머니가 깨 봉지를 들고 너울마을점에 들어왔다⁠. 갓 볶은 깨였다⁠. 봉지를 열지 않아도 고소한 냄새가 계산대 위로 번졌다⁠.

“⁠오늘 싱가포르 사람들 온다며⁠? 깨 새로 볶았어⁠. 남의 나라 사람한테 묵은 깨 먹일 수는 없잖아⁠.⁠”

“⁠직영점만 본답니다⁠. 여기는 안 옵니다⁠.⁠”

“⁠안 와도 볶아 놨어⁠. 오면 먹이고⁠, 안 오면 사장이 먹어⁠.⁠”

할머니는 깨 봉지를 놓고 나가다 유리문 앞에서 길 건너를 보았다⁠. 직영점 일 층 통유리 안에 민트색 셔츠를 입은 직원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맨 앞에 단미가 있었다⁠. 채홍이 직원들 앞을 오가며 무언가를 연습시키고 있었다⁠. 유리문을 다 닫지 않아서 채홍의 목소리가 찻길을 건너왔다⁠.

“⁠자⁠, 다시⁠! 웰컴 투 달그락⁠, 웨어 에브리 컵 이즈 어 브랜드 익스피리언스⁠!⁠”

직원들이 따라 했다⁠. 할머니가 도석을 돌아보았다⁠.

“⁠저 사람 뭐라는 거야⁠?⁠”

“⁠컵마다 브랜드 경험이 들어 있답니다⁠.⁠”

“⁠컵에는 커피가 들어 있지⁠. 브랜드가 들어 있으면 그걸 어떻게 마셔⁠?⁠”

할머니가 반찬가게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길 건너를 보고 혀를 한 번 찼다⁠. 도석은 깨를 절구에 옮겼다⁠. 손이 바빠야 길 건너를 덜 보았다⁠.

휴대전화가 연달아 울렸다⁠. 윤옥이었다⁠.

「⁠실사단 오면 웃지 마⁠. 당신 웃으면 영업하는 거 같아⁠」

「⁠안 와⁠」

「⁠오면⁠」

이어서 강재의 메시지가 왔다⁠. 강재가 아빠에게 먼저 메시지를 보낸 것은 드문 일이었다⁠.

「⁠아빠 혹시 오면 영어 하지 마⁠. 아빠 영어는 연구소 영어라 논문처럼 말해⁠」

도석은 「⁠알았다⁠」라고 보냈다⁠. 강재에게서 엄지 하나가 왔다⁠. 도석은 절구를 다시 잡았다⁠. 공이가 깨를 짓이길 때마다 고소한 냄새가 한 겹씩 올라왔다⁠.

*

오전 열 시 반⁠, 주단미는 직영점 이 층 시음대 뒤에 서 있었다⁠. 실사단은 셋이었다⁠. 맨 앞의 여자가 대표였다⁠. 쉰 중반쯤⁠, 짧은 회색 머리에 검은 니트⁠, 안경을 머리 위에 올리고 있었다⁠. 뒤의 두 남자는 태블릿과 노트를 들었다⁠. 통역은 서른 초반의 한국 여자였다⁠. 엄혜지가 대표 옆에서 걸었고⁠, 채홍은 한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

대표는 매장을 천천히 돌았다⁠. 좌석 수를 묻고⁠, 스터디존 콘센트를 들여다보고⁠, 통유리 너머 상가를 내려다보았다⁠. 상가 한쪽 끝⁠, 간판 자리가 새로 칠해진 가게에서 대표의 눈이 잠깐 멈췄다⁠.

시음대 앞에서 대표가 「⁠판교 동네 시리즈⁠」 메뉴판을 읽었다⁠. 통역이 하나씩 옮겼다⁠. 단미는 대표 앞에 귤피 라테를 놓았다⁠. 대표는 마시기 전에 냄새를 맡았다⁠. 혜지처럼⁠, 그리고 사장님처럼⁠.

대표가 영어로 무언가 물었다⁠. 통역이 단미에게 말했다⁠.

“⁠이 귤 메뉴는 누가 처음 만들었는지 물으세요⁠. 동네 시리즈라는 이름이 마음에 든대요⁠. 동네 어디서 온 이야기냐고요⁠.⁠”

채홍이 단미 대신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다⁠. 혜지가 손을 들어 채홍을 막았다⁠. 혜지는 단미를 보았다⁠. 대답은 단미가 하라는 눈이었다⁠. 혜지가 무엇을 바라는지 단미는 알 수 없었다⁠.

단미는 어제 저녁 채홍이 한 말을 떠올렸다⁠. 동네 시리즈 질문이 나오면 본사 메뉴 개발팀이 동네를 조사해서 만들었다고 대답하라는 말이었다⁠. 채홍은 이 대답을 세 번 따라 하게 했다⁠. 단미는 세 번 따라 했다⁠. 단미는 명찰을 한 번 만졌다⁠. 민트색 셔츠 위에 「⁠매니저 주단미⁠」 학자금 앱의 남은 원금이 떠올랐다⁠. 그리고 「⁠40분⁠. 35분 아님⁠」이라고 칠판에 쓰던 분필의 감촉이 떠올랐다⁠.

“⁠길 건너 가게에서 시작했어요⁠.⁠”

통역이 옮기기 전에 혜지의 얼굴이 굳었다⁠. 단미는 멈추지 않았다⁠.

“⁠간판이 없는 가게요⁠. 거기 사장님이 동네 사람 한 명 한 명 냄새를 맡고 만드셨어요⁠. 이건 그분 거를 본사 재료로 다시 만든 거예요⁠. 저는 거기서 석 달 일했고⁠, 같이 만들었어요⁠.⁠”

통역이 옮겼다⁠. 실사단 대표가 혜지를 보았다⁠. 혜지는 피하지 않았다⁠.

“⁠맞습니다⁠. 그 가게 레시피를 바탕으로 했습니다⁠. 그 가게는 지난주 가맹계약이 해지됐습니다⁠. 본사 원재료가 아닌 재료를 써서요⁠.⁠”

대표가 안경을 내려 쓰고 통유리 너머 상가를 다시 보았다⁠. 그러고는 영어로 짧게 말했다⁠. 통역이 옮겼다⁠.

“⁠차에서 내릴 때 귤 냄새가 났대요⁠. 이 매장에 들어오기 전에요⁠. 그 가게를 보고 싶으시대요⁠.⁠”

*

오전 열한 시 십 분⁠, 너울마을점 유리문이 열렸다⁠. 도석은 절구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회색 머리 여자가 들어왔고⁠, 뒤로 혜지와 통역과 남자 둘과 채홍이 들어왔다⁠. 열여섯 석 가게가 갑자기 좁아졌다⁠. 맨 마지막에 단미가 들어와 문 옆에 붙어 있었다⁠.

혜지가 먼저 말했다⁠.

“⁠마 사장님⁠, 싱가포르에서 오신 실사단 대표님이세요⁠. 사장님 가게를 보고 싶다고 하셔서요⁠.⁠”

혜지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다만 코트 단추를 하나 잘못 끼우고 있었다⁠.

실사단 대표가 계산대 옆 칠판을 보았다⁠. 뒷면 아홉 줄과 운중동 콩 한 줄⁠. 대표가 손가락으로 첫 줄을 가리켰다⁠. 도석은 귤껍질 시럽 병의 뚜껑을 돌렸다⁠. 에스프레소를 내리고⁠, 시럽을 한 숟가락 반 넣고⁠, 우유를 데워 얹었다⁠. 운중동 콩의 신맛이 귤과 만나 둥글어졌다⁠. 도석은 대표 앞에 잔을 놓았다⁠.

대표는 냄새를 맡고⁠, 마시고⁠, 잔을 내려놓고⁠, 길 건너 직영점을 손으로 가리켰다⁠. 통역이 옮겼다⁠.

“⁠저쪽 것보다 시럽이 덜 들어갔대요⁠. 그래서 귤 냄새가 더 난대요⁠.⁠”

“⁠한 숟가락 반입니다⁠. 원래 두 숟가락이었는데⁠, 저기 서 있는 매니저가 줄였습니다⁠.⁠”

도석이 문 옆의 단미를 가리켰다⁠. 단미가 눈을 크게 떴다⁠. 통역이 옮기자 대표가 단미를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 뒤의 남자 하나가 태블릿을 들고 끼어들었다⁠. 이 가게 매출에서 메뉴판에 없는 음료가 얼마나 되느냐는 물음이었다⁠. 도석이 포스기를 열어 「⁠기타⁠」 버튼 매출을 보여 주었다⁠. 개점 첫 달부터 지난달까지 열에 셋이 넘었고⁠, 해지 뒤에는 열에 일곱이 되어 있었다⁠. 남자가 숫자를 받아 적다가 대표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대표가 칠판을 한 번 더 보았다⁠.

유리문이 다시 열리고 세탁소 사장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다리미 냄새가 먼저 들어왔다⁠.

“⁠마 사장⁠, 손님 많아⁠? 생강 한 잔만 포장해 줘⁠. 아⁠, 손님들 외국 분이시네⁠. 헬로⁠.⁠”

세탁소 사장은 잔을 받아 들고 실사단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나갔다⁠. 통역이 대표에게 무언가를 설명했고⁠, 대표가 유리문 너머 세탁소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가 질문을 이어 갔다⁠. 통역이 하나씩 옮겼다⁠. 왜 간판이 없는지⁠. 왜 계약이 해지됐는지⁠. 왜 길 건너에 같은 브랜드가 생겼는지⁠. 도석은 하나씩 대답했다⁠. 영업지역이 건물 한 동이라는 것⁠, 귤껍질과 참깨와 생강⁠, 세 장의 경고장⁠, 간판 불 끄기⁠, 일억 이천을 거절한 일⁠. 꾸미지 않았다⁠. 혜지를 나쁘게 말하지도 않았다⁠.

대표가 혜지에게 몸을 돌렸다⁠. 혜지가 대답했다⁠. 영어로 직접 했고⁠, 통역은 도석이 들을 수 있게 우리말로 낮게 옮겼다⁠.

“⁠직영점 계획은 본사를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본사가 약하면 원두 단가가 오르고⁠, 가맹점 삼천 곳이 함께 무너집니다⁠. 저는 그걸 어릴 때 봤습니다⁠. 잘되는 가맹점을 사들이는 것은 투자 조건을 맞추는 가장 빠른 길이었습니다⁠. 빠른 길이 맞는 길인지는⁠, 지금 이 가게에 앉아 보니 잘 모르겠습니다⁠.⁠”

통역이 마지막 문장을 옮길 때 목소리가 조금 흔들렸다⁠. 혜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채홍이 혜지를 보았다⁠. 처음 보는 상무의 얼굴이라는 눈이었다⁠.

대표가 도석에게 물었다⁠. 통역이 옮겼다⁠.

“⁠사장님이 투자사라면⁠, 이 회사에 투자하시겠느냐고 물으세요⁠.⁠”

가게가 조용해졌다⁠. 혜지가 도석을 보았다⁠. 도석은 잔을 닦던 행주를 내려놓았다⁠.

“⁠하십시오⁠. 본사가 튼튼해야 점주도 삽니다⁠. 제가 그걸 압니다⁠. 본사 원두가 끊기니까 제 가게가 하루 만에 흔들렸습니다⁠.⁠”

혜지의 눈썹이 움직였다⁠. 도석은 말을 이었다⁠.

“⁠다만 마흔두 곳 계획에는 투자하지 마십시오⁠. 동네를 아는 가게를 사들이면 동네를 아는 사람이 사라집니다⁠. 그 사람이 사라진 가게는 직영점 하나가 늘어난 것뿐입니다⁠. 길 건너 직영점 메뉴판에 동네 시리즈가 있는 것은⁠, 동네를 아는 사람이 길 이쪽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통역이 옮겼다⁠. 대표는 오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리문이 열리고 할머니가 들어왔다⁠. 할머니는 낯선 얼굴들을 둘러보고 회색 머리 대표 앞으로 갔다⁠.

“⁠싱가포르에서 왔어⁠?⁠”

통역이 당황하며 옮겼다⁠.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도 깨 볶아⁠?⁠”

대표가 웃었다⁠. 실사단이 들어온 뒤 처음 나온 웃음이었다⁠. 대표가 영어로 길게 대답했고⁠, 통역이 옮겼다⁠.

“⁠할머니가 깨를 볶으셨대요⁠. 집에서요⁠. 싱가포르에서도요⁠. 할머니 집 부엌에서 늘 깨 냄새가 났대요⁠.⁠”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거 마셔 봐⁠. 깨 거⁠.⁠”

도석은 할머니가 아침에 볶은 깨로 참깨 한 잔을 내렸다⁠. 대표는 한 모금 마시고 눈을 감았다⁠.

*

열두 시⁠, 실사단 대표가 일어났다⁠. 계산대 앞에서 혜지와 도석을 번갈아 보며 영어로 말했다⁠. 통역이 한 문장씩 옮겼다⁠.

“⁠오늘은 결정하지 않겠다고 하세요⁠. 투자는 본사가 점주들과 싸우는 동안에는 할 수 없대요⁠. 본사와 점주 단체가 함께 서명한 합의가 오면 다시 오겠다고 하세요⁠. 마흔두 곳 계획이 그 합의 안에서 어떻게 바뀌는지 보고 싶으시대요⁠.⁠”

대표가 지갑을 꺼내 커피 두 잔 값을 계산대에 놓았다⁠. 도석이 손을 저었다⁠. 통역이 옮기기도 전에 대표가 고개를 저었다⁠. 대표는 돈을 그대로 두고 나갔다⁠. 계산대 위에 지폐 두 장이 남았다⁠. 도석은 지폐를 집지 않고 빈 잔 두 개를 개수대로 옮겼다⁠. 실사단과 통역과 채홍이 따라 나갔다⁠. 단미가 문을 나가다 돌아보았다⁠. 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미가 같이 끄덕였다⁠.

혜지만 남았다⁠. 혜지는 잘못 끼운 코트 단추를 그제야 보고 다시 끼웠다⁠.

“⁠사장님 때문에 투자가 멈췄어요⁠.⁠”

“⁠상무님 계획 때문에 멈춘 겁니다⁠.⁠”

“⁠같은 말이에요⁠.⁠”

“⁠다른 말입니다⁠.⁠”

혜지가 유리문 밖을 보았다⁠. 단미가 실사단 뒤를 따라 찻길을 건너고 있었다⁠.

“⁠단미 씨가 그렇게 말할 줄 몰랐어요⁠. 어제 채홍 점장이 대답을 연습시켰다던데요⁠.⁠”

“⁠단미는 연습한 대로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알아요⁠. 그래서 매니저로 뽑았어요⁠.⁠”

혜지는 짧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숨이었다⁠.

혜지는 대표가 남긴 지폐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계산대에 두 손을 짚었다⁠.

“⁠합의서가 없으면 투자는 없어요⁠. 투자가 없으면 원두 단가가 올라요⁠. 그럼 정자점도 광교점도 힘들어요⁠. 사장님이 그렇게 지키고 싶은 이천삼백 곳이요⁠.⁠”

“⁠압니다⁠.⁠”

“⁠합의서에 본사가 서명하려면 저는 마흔두 곳을 접어야 해요⁠. 그럼 직영 비중을 못 맞추고⁠, 투자 규모가 줄어요⁠. 저는 이 자리를 지키기 어려워요⁠.⁠”

혜지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 같이 망하거나 같이 살아요⁠. 둘 중 하나예요⁠. 내일 밤 여기서 만나요⁠. 열 시⁠. 공동 대표님도 부르세요⁠.⁠”

혜지가 나갔다⁠. 할머니가 혜지의 등을 보며 말했다⁠.

“⁠저 여자⁠, 오늘 처음으로 사람 같네⁠.⁠”

13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