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315자)

간판 없는 집

퇴직금으로 차린 카페 · 탁은담

12월 1일 아침 일곱 시⁠, 너울마을점에서는 새 원두 냄새가 났다⁠. 운중동 로스터리에서 사흘 전에 볶은 콩이었다⁠. 신맛이 먼저 코끝을 건드리고⁠, 단내가 뒤에서 길게 따라왔다⁠. 본사 원두를 쓰던 석 달 반 동안 이 가게에서 나지 않던 냄새였다⁠.

도석은 계산대 위 메뉴판 앞면을 떼어 냈다⁠. 본사가 인쇄해 보낸 판이었다⁠. 떼어 낸 자리에 아무것도 붙이지 않았다⁠. 계산대 옆에는 작은 칠판만 남았다⁠. 칠판은 오늘도 뒷면이 바깥을 향해 있었다⁠. 아홉 줄 위에 도석이 한 줄을 더 썼다⁠. 「⁠아메리카노 · 라테 — 운중동 콩⁠」

일곱 시 반⁠, 첫 손님은 개발자였다⁠. 개발자는 유리문 위 밝은 네모를 올려다보며 들어왔다⁠.

“⁠사장님⁠, 지도 앱에서 가게가 없어졌어요⁠. 「⁠폐업 또는 정보 없음⁠」으로 떠요⁠.⁠”

“⁠폐업 안 했어⁠.⁠”

“⁠그래서 제가 리뷰 남겼어요⁠. 가게 이름 칸에 「⁠간판 없는 집⁠」이라고 쓰고⁠, 「⁠폐업 아님⁠. 귤 있음⁠」이라고요⁠.⁠”

개발자는 휴대전화를 보여 주었다⁠. 리뷰 밑에 벌써 좋아요가 열몇 개 붙어 있었다⁠. 열 시쯤에는 동네 사람들이 다 그렇게 불렀다⁠. 쌍둥이 엄마는 학부모 단톡방에 「⁠오늘 간판 없는 집에서 모여요⁠」라고 올렸고⁠, 할머니는 반찬 사러 온 사람들에게 “⁠간판 없는 집 커피 마셔 봐⁠.⁠” 하고 등을 떠밀었다⁠. 번영회장이 부른 칠 업자가 오후에 와서 간판 자리 밝은 네모를 상가 외벽 색으로 칠했다⁠. 네모가 사라지자 가게는 정말로 간판이 없는 집이 되었다⁠.

배달 앱 주문은 끊겼다⁠. 본사 앱에 묶여 있던 주문 창구가 해지와 함께 닫혔다⁠. 점심 매출이 다시 반으로 줄었다⁠. 주말의 줄은 사진 찍으러 온 사람들이었다는 윤옥의 말이 맞았다⁠. 도석은 포스기 화면을 끄고 콩을 갈았다⁠. 그라인더 돌아가는 소리가 손님 없는 가게 안에 오래 울렸다⁠.

*

같은 날 오후⁠, 점주 모임 방에 본사 일대일 상담의 답이 올라왔다⁠. 광교점 사장이 협의회 이름으로 다시 면담을 청한 데 대한 답이었다⁠.

「⁠본사는 현재 가맹계약을 유지하고 있는 점주님들의 대표와만 대화합니다⁠. 계약이 끝난 분이 대표로 계신 단체와는 대화가 어렵습니다 :⁠)⁠」

방이 들끓었다⁠. 「⁠대표 잘라 놓고 대표 없다고 안 만나 준다는 거임⁠?⁠」⁠, 「⁠웃는 얼굴 진짜 그만 붙여라⁠」 도석은 한참 화면을 보다가 글을 썼다⁠.

「⁠대표에서 내려오겠습니다⁠. 계약 있는 분이 맡아 주십시오⁠.⁠」

일 분 만에 음성 메시지가 왔다⁠. 예란이었다⁠.

“⁠내려오긴 뭘 내려와⁠. 너는 그대로 있어⁠. 내가 공동 대표 할게⁠. 계약 있는 사람이 하나 있으면 되잖아⁠. 본사가 나랑만 말하겠다면 나랑 말하라 그래⁠. 대신 너는 내 옆에 앉아 있어⁠. 말은 네가 해⁠. 끊어⁠.⁠”

광교점 사장이 표를 붙였다⁠. 방 인원 이천육백 명 가운데 찬성이 이천을 넘었다⁠. 예란은 아홉 해 만에 대표가 되었고⁠, 첫 결정으로 날짜를 정했다⁠.

「⁠12월 3일 금요일 낮 열두 시 · 판교 본사 앞 광장 · 각자 우리 가게 동네 메뉴 한 잔씩 들고 오기⁠」

*

12월 2일 저녁⁠, 집 식탁 위에 서류가 펼쳐져 있었다⁠. 본사 법무팀의 네 번째 봉투였다⁠. 「⁠계약 해지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 예고 — 위약금 및 브랜드 손상 배상 32⁠,000⁠,000원⁠」 윤옥은 서류를 한 장씩 넘기며 형광펜을 그었다⁠. 노란색은 날짜⁠, 분홍색은 금액⁠, 초록색은 근거 조항이었다⁠. 학교에서 공문을 정리하는 방식 그대로였다⁠.

“⁠삼천이백⁠.⁠”

“⁠응⁠.⁠”

“⁠대출 오천에 삼천이백 더하면 팔천이백⁠. 당신 퇴직금 이억은 벌써 가게에 들어갔고⁠.⁠”

윤옥은 형광펜 뚜껑을 닫았다⁠. 화를 내지 않았다⁠. 도석은 화를 내는 윤옥보다 형광펜 뚜껑을 닫는 윤옥이 더 무서웠다⁠.

“⁠여기 「⁠브랜드 손상⁠」이라고 썼지⁠? 근거가 간판 불 끄기야⁠. 십 분 동안 간판 끈 게 브랜드 손상이래⁠. 그럼 이천삼백 곳 다 청구해야지⁠. 왜 당신한테만 해⁠?⁠”

“⁠대표니까⁠.⁠”

“⁠그러니까⁠. 이건 돈 달라는 서류가 아니고 겁주는 서류야⁠. 우리 학교 민원 서류 중에 이런 거 많아⁠. 금액 크게 쓰고 근거는 흐리게⁠.⁠”

윤옥은 서류를 클리어 파일에 넣고 파일 겉에 네임펜으로 썼다⁠. 「⁠본사 — 겁주는 서류 1⁠」 강재가 방에서 나와 파일을 들여다보았다⁠.

“⁠엄마⁠, 1이면 2도 와⁠?⁠”

“⁠오겠지⁠. 칸 비워 놨어⁠.⁠”

강재가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마시고 들어가면서 말했다⁠.

“⁠아빠⁠, 내일 광장 추우니까 내복 입어⁠. 영포티는 내복 안 입는 게 멋인 줄 알아⁠.⁠”

이튿날 아침⁠, 현관에 보온병 하나와 내복 한 벌이 놓여 있었다⁠. 보온병에는 윤옥의 글씨로 「⁠보리⁠. 40분⁠」이라고 적힌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

12월 3일 오전 열 시⁠, 엄혜지는 본사 10층 대표이사실에 서 있었다⁠. 대표이사는 창가에서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광장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평일 오전의 광장은 배달 오토바이와 비둘기뿐이었다⁠.

“⁠엄 상무⁠, 실사단이 7일에 와⁠. 나흘 남았어⁠. 오늘 저 광장에 점주들이 모여서 사진이 나가면⁠, 싱가포르가 뭐라고 할 것 같아⁠?⁠”

“⁠분쟁 리스크를 물을 겁니다⁠.⁠”

“⁠그럼 투자는⁠?⁠”

“⁠늦어지거나 줄어듭니다⁠.⁠”

대표이사가 돌아보았다⁠.

“⁠마흔두 곳 계획⁠, 엄 상무가 짰지⁠. 직영 삼십 퍼센트 맞추겠다고⁠. 그런데 지금 우리 가맹점 이천삼백 곳이 간판을 껐어⁠. 계획이 뭐가 잘못됐어⁠?⁠”

혜지는 대답하기 전에 숨을 골랐다⁠. 혜지의 숫자는 틀리지 않았다⁠. 직영점 옆 가맹점 매출은 대전과 부산에서 정말로 올랐다⁠. 원두 단가는 투자 없이는 정말로 오를 것이었다⁠. 틀린 것이 있다면 숫자 밖에 있었다⁠. 너울마을점 칠판 뒷면의 아홉 줄 같은 것⁠.

“⁠계획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순서가 틀렸습니다⁠. 사람을 먼저 만나야 했습니다⁠.⁠”

“⁠그럼 지금 만나⁠. 그리고 엄 상무⁠, 실사 끝날 때까지 광장 사진 한 장이라도 더 나가면 직영점 계획 전체를 다시 볼 거야⁠. 엄 상무 자리도⁠.⁠”

혜지는 고개를 숙였다⁠. 숙인 고개 밑으로 대표이사의 구두가 보였다⁠. 열두 해 전 입사 면접 날에도 같은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면접 날 혜지는 본사가 커야 점주가 산다고 말해서 붙었다⁠.

혜지는 대표이사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피곤했다⁠. 혜지는 휴대전화를 열었다가⁠, 사진첩 맨 아래의 오래된 사진 하나를 잠깐 보고 닫았다⁠. 분식집 간판 아래 서 있는 남자와 교복 입은 여학생의 사진이었다⁠. 간판 글씨는 반쯤 떨어져 있었다⁠.

*

열두 시⁠, 광장에 점주들이 모였다⁠. 처음엔 몇십 명이던 것이 열두 시 십 분에 이백⁠, 열두 시 반에 사백을 넘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잔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도석은 광장 한가운데서 숨을 들이마셨다⁠. 냄새가 사백 가지였다⁠. 강릉점의 옥수수⁠, 제주 노형점의 귤⁠, 광교점의 쑥⁠, 수지점의 대추⁠, 둔산점에서 올라온 사장의 유자⁠. 같은 본사 원두 위에 동네마다 다른 냄새가 얹혀 있었다⁠. 광장이 장터처럼 향기로웠다⁠. 도석은 윤옥이 싸 준 보온병을 열어 보리를 한 모금 마셨다⁠. 사십 분 우린 보리였다⁠. 내복 덕분에 등이 따뜻했고⁠, 강재 말을 들은 것이 조금 분했다⁠.

예란은 정자점 앞치마를 두르고 맨 앞에 있었다⁠. 손에 든 잔은 아무것도 넣지 않은 아메리카노였다⁠.

“⁠사장님은 동네 메뉴 없으세요⁠?⁠”

광교점 사장이 묻자 예란이 잔을 들어 보였다⁠.

“⁠아홉 해 동안 본사 메뉴만 팔았어⁠. 이게 내 동네 메뉴야⁠. 본사 아메리카노⁠. 아홉 해 치 한이 들어 있어⁠.⁠”

기흥점 남편은 오늘도 넥타이를 매고 왔다⁠. 이번에는 폭이 좁은 새 넥타이였다⁠. 강릉점 사장은 생일 케이크 대신 옥수수 라테에 초를 꽂아 왔다고 했다⁠. 광장 바람에 초가 세 번 꺼졌고⁠, 세 번 다 기흥점 아내가 라이터로 다시 붙여 주었다⁠.

열두 시 이십 분⁠, 광장 가장자리에 민트색 점퍼가 나타났다⁠. 채홍이었다⁠. 채홍은 직영점 개점 쿠폰 묶음을 들고 점주들 사이를 돌았다⁠.

“⁠점주님들⁠, 12월 11일 플래그십 오픈해요⁠! 오셔서 브랜드 경험 한번 해 보세요⁠!⁠”

예란이 쿠폰 한 장을 받아 들고 앞뒤를 보았다⁠.

“⁠이거 우리 로열티로 찍은 거지⁠?⁠”

“⁠아⁠, 그게⁠, 마케팅 예산으로⁠…⁠…⁠.⁠”

“⁠마케팅 예산이 어디서 나와⁠? 우리 가게에서 나와⁠. 이거 내 돈으로 내가 공짜 커피 마시는 거야⁠.⁠”

주변 점주들이 웃었다⁠. 채홍은 쿠폰 묶음을 점퍼 안에 넣고 광장 가장자리로 물러났다⁠. 물러나면서 휴대전화로 광장 사진을 찍었다⁠. 위에 보고하는 사진이었다⁠.

열두 시 사십 분⁠, 로비 회전문이 돌고 혜지가 나왔다⁠. 경비원 둘이 따라 나오려는 것을 혜지가 손짓으로 돌려보냈다⁠. 혜지는 마이크 없이 계단 맨 아래 칸까지 내려왔다⁠. 광장이 조용해졌다⁠. 혜지는 공동 대표 예란과 예란 옆의 도석을 보았다⁠.

“⁠엄혜지입니다⁠.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다고 들었어요⁠.⁠”

예란이 도석의 옆구리를 찔렀다⁠. 도석은 잔을 들고 한 걸음 나갔다⁠. 오늘 들고 온 잔은 찬방 참깨였다⁠.

“⁠상무님 숫자는 맞습니다⁠. 대전도 부산도 직영점 옆 가맹점 매출이 올랐습니다⁠. 역 앞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상무님 마흔두 곳은 전부 아파트 상가입니다⁠. 역 앞이 아닙니다⁠.⁠”

“⁠알고 있어요⁠.⁠”

“⁠그럼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본사가 지금까지 아파트 상가 가맹점 옆에 낸 직영점이 몇 곳입니까⁠? 그 옆 가맹점은 지금 몇 곳 남아 있습니까⁠?⁠”

광교점 사장이 노트북을 들었다⁠. 지난 두 주 동안 방에서 모은 사실이었다⁠. 김포⁠, 세종⁠, 인천 청라⁠. 해지된 가맹점 점주들이 하나씩 방에 들어와 자기 이야기를 남겼다⁠. 혜지는 노트북을 보지 않았다⁠. 대답을 미루지도 않았다⁠.

“⁠세 곳이에요⁠. 김포⁠, 세종⁠, 청라⁠. 시범으로 냈어요⁠. 옆 가맹점은 한 곳 남았어요⁠. 두 곳은 본사가 샀어요⁠.⁠”

광장이 웅성거렸다⁠. 혜지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샀다는 건 망하기 전에 제값을 쳐 드렸다는 뜻이에요⁠. 그분들은 대출을 다 갚고 나가셨어요⁠. 버티다 망한 가게는 그런 돈도 못 받아요⁠. 저는 그걸 알아요⁠. 여러분보다 더 잘 알아요⁠.⁠”

수지점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가 멈췄다⁠. 몇 사람이 잔을 내렸다⁠. 혜지의 말은 이번에도 맞았다⁠. 맞아서 광장이 흔들렸다⁠.

“⁠버티다 망하는 것과 팔고 나가는 것 말고 하나가 더 있습니다⁠.⁠”

도석이 말했다⁠. 손에 든 참깨 잔에서 김이 올라왔다⁠.

“⁠버티는 가게 옆에 직영점을 안 내는 겁니다⁠.⁠”

혜지는 도석의 잔을 보았다⁠. 참깨 냄새가 계단까지 올라갔다⁠. 혜지의 휴대전화가 코트 주머니에서 울렸다⁠. 혜지는 화면을 보고⁠, 광장을 보고⁠, 다시 화면을 보았다⁠.

“⁠싱가포르 실사단 일정이 확정됐어요⁠. 12월 7일 화요일⁠. 너울마을 직영점하고 정자동 직영점 자리를 봐요⁠. 오늘 이 광장 사진도 이미 받았대요⁠.⁠”

혜지는 휴대전화를 넣었다⁠.

“⁠실사단은 직영점만 봐요⁠. 가맹점 앞에는 안 서요⁠.⁠”

“⁠냄새는 찻길을 건넙니다⁠.⁠”

혜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계단을 다시 올라 회전문 안으로 들어갔다⁠. 예란이 도석의 팔을 잡았다⁠.

“⁠너울마을⁠. 화요일에 걔네가 너네 동네 와⁠. 간판 없는 집에⁠. 뭐 할 거야⁠?⁠”

도석은 참깨 잔을 비웠다⁠. 사백 가지 냄새가 겨울 광장을 떠다녔다⁠.

“⁠커피를 내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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