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12자)

도네이션

경로당 게임단 코치 · 류시안

아침 아홉 시⁠, 경로당 거실 창 아래에 여섯이 둘러앉았다⁠. 모니터는 꺼져 있었다⁠. 진배는 화투 담요를 펴지 않았고⁠, 춘봉은 넥타이를 매지 않았다⁠. 점례는 휴대전화 두 대를 다 엎어 놓았다⁠. 엎어 놓은 휴대전화를 몇 번이나 뒤집었다가 다시 엎었다⁠. 우람은 첫차를 타고 와서 분옥 옆에 앉아 있었다⁠. 분옥은 꽃무늬 조끼 단추를 목까지 채우고 무릎 위에 파일 하나를 올려놓았다⁠. 레드혼 홍보팀장이 준 파일이었다⁠.

“⁠차 마셨어⁠.⁠” 분옥이 먼저 말했다⁠. “⁠크림 있는 거⁠. 너무 달았어⁠.⁠”

아무도 웃지 않았다⁠. 점례만 입꼬리가 잠깐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언니⁠, 빨간 옷 입을 거야⁠?⁠”

“⁠아직 안 정했어⁠.⁠”

“⁠왜⁠? 우리가 뭐 잘못했어⁠?⁠”

분옥은 파일을 열지 않고 조끼 안주머니에서 고지서를 꺼냈다⁠. 등록금 고지서였다⁠. 접힌 자리가 닳아 종이가 실처럼 얇아져 있었다⁠. 분옥이 고지서를 바닥에 펼쳤다⁠. 우람이 고지서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삼백사십이야⁠. 이번 달 말까지⁠. 못 내면 저놈 학교에서 잘려⁠.⁠”

거실이 조용해졌다⁠. 에어컨 리모컨이 모금함 옆 고리에서 흔들렸다⁠.

“⁠언니⁠, 왜 말 안 했어⁠?⁠” 점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사십 년이야⁠. 사십 년 동안 언니 김장 같이 했는데⁠, 언니 돈 없는 걸 단톡방 사진으로 알아야 돼⁠?⁠”

“⁠말하면 뭐가 달라져⁠?⁠”

“⁠달라지지⁠! 내가 계 하나 깨면⁠…⁠…⁠.⁠”

“⁠점례 씨 계는 손녀 결혼 자금이잖아⁠.⁠” 분옥이 말했다⁠. “⁠그거 깨면 내가 평생 그 손녀 얼굴을 어떻게 봐⁠.⁠”

춘봉이 바둑알 통을 끌어다 무릎에 올렸다⁠. 흰 돌을 한 주먹 쥐었다가 놓았다⁠.

“⁠상금 천만 원이지⁠. 이기면 언니가 오백 가져가⁠. 나는 안 받아도 돼⁠. 집배원 연금 나와⁠.⁠”

“⁠나도⁠.⁠” 진배가 말했다⁠. “⁠나는 에어컨 생겼으니 됐어⁠. 내년 여름에 언니 자리는 바람 제일 센 데로 줄게⁠.⁠”

점례가 휴대전화 한 대를 뒤집었다⁠.

“⁠나는 반만⁠. 반은 언니 줘⁠. 아니 다 줘⁠. 아니 반⁠.⁠”

분옥이 셋을 차례로 보았다⁠. 화투판에서 패를 볼 때처럼 오래 보지 않았다⁠. 짧게 보고⁠, 고개를 저었다⁠.

“⁠이기면 그렇게 하자⁠. 고마워⁠.⁠” 분옥이 파일을 무릎 위에서 들어 올렸다⁠. “⁠레드혼은 이기든 지든 오백이야⁠. 계약하면 바로 넣어 준대⁠.⁠”

*

강현은 분옥을 부엌으로 불렀다⁠. 냉장고가 웅웅거렸고⁠, 전기밥솥에서 보온 표시등이 깜빡였다⁠. 분옥은 부엌 식탁 의자에 앉아 손목의 고무줄을 풀었다 다시 감았다⁠.

“⁠가지 마세요⁠.⁠”

“⁠코치가 정할 일이야⁠?⁠”

“⁠아니요⁠. 그래도 가지 마세요⁠. 그 사람 연습장 가 보셨잖아요⁠. 의자마다 파스예요⁠.⁠”

“⁠파스는 우리 집에도 있어⁠.⁠” 분옥이 고무줄을 손목에 두 번 감았다⁠. “⁠니가 내 손자 등록금 내 줄 거야⁠?⁠”

“⁠제가 구해 볼게요⁠. 이 주만 주세요⁠.⁠”

“⁠어디서⁠? 코치 월급이 얼만데⁠?⁠”

“⁠방송이요⁠. 예전에 하던 거요⁠. 제 이름 아직 아는 사람들 있어요⁠.⁠”

분옥이 강현의 왼쪽 손목을 봤다⁠. 보호대 위에 원장이 붙여 준 반창고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 손으로 또 하겠다고⁠?⁠”

“⁠한 번만요⁠.⁠”

“⁠코치가 처음 왔을 때 나한테 뭐라고 했지⁠. 힘 빼라고 했지⁠. 쥐는 게 아니라 얹는 거라고⁠.⁠” 분옥이 식탁에서 일어났다⁠. “⁠지금 코치가 쥐고 있어⁠.⁠”

“⁠어르신도 쥐고 계시잖아요⁠. 그 파일⁠.⁠”

분옥이 손에 든 파일을 내려다보았다⁠. 파일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얬다⁠. 분옥은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파일이 식탁 위에 떨어졌다⁠.

“⁠엔트리 마감이 13일이래⁠. 그때까지 기다려 볼게⁠. 기다리면 온다며⁠.⁠”

분옥은 부엌을 나갔다⁠. 식탁 위에 파일이 남았다⁠. 강현은 파일을 열어 보지 않았다⁠.

*

토요일 밤 아홉 시⁠, 강현세탁 이층 방⁠. 우람이 노트북 두 대와 카메라 하나⁠, 마이크 하나를 책상에 놓고 선을 이었다⁠. 방송 화면 제목은 우람이 정했다⁠. 「⁠태산 귀환 — 손목 괜찮냐고 묻지 마세요⁠」

“⁠코치님⁠, 화면 켜면 바로 사람 들어와요⁠. 공지 올렸어요⁠. 삼천 명이 알림 눌렀어요⁠.⁠”

“⁠삼천이요⁠?⁠”

“⁠코치님 은퇴 영상 아직 조회수 올라가요⁠.⁠”

방 한구석 이불 위에 점례가 앉아 있었다⁠. 채팅창 관리를 맡겠다고 자원했다⁠. 휴대전화 두 대 중 하나로 채팅을 보고⁠, 하나로는 경로당 단톡방에 실황을 올렸다⁠. 춘봉은 사연 읽기를 맡았고⁠, 진배는 왜 왔는지 아무도 몰랐다⁠. 진배는 어머니가 내온 귤을 까며 방송 화면을 기웃거렸다⁠. 분옥은 오지 않았다⁠.

방송이 켜지자 채팅창이 폭포처럼 내려왔다⁠.

「⁠태산 형 실화냐⁠」 「⁠손목 괜찮음⁠? 아 묻지 말랬지⁠」 「⁠광 안 나와 할머니 코치님이 태산이었어⁠?⁠?⁠」 「⁠다리 밑 매복 원조 등장⁠」

점례가 채팅을 소리 내어 읽었다⁠.

“⁠태산 형 실화냐⁠. 실화야⁠. 우리 코치님 실물이야⁠. ㅋㅋㅋ⁠. 아⁠, 이건 내가 쓴 거네⁠.⁠”

강현은 패드를 쥐었다⁠. 엄지를 막대 위에 얹었다⁠. 힘을 빼려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첫 판은 아크라인 공개 대전이었다⁠. 강현의 사냥꾼이 다리 밑으로 들어갔다⁠. 엎드렸다⁠. 기다렸다⁠. 상대가 다리를 건너는 순간 화살이 날았다⁠. 「⁠처치⁠」 채팅창이 터졌다⁠.

후원 알림이 연달아 떴다⁠. 「⁠만 원 — 다리 밑 수강료⁠」 「⁠오천 원 — 할머니께 홍삼⁠」 「⁠삼만 원 — 2023 결승 보고 울던 중학생입니다⁠」

춘봉이 후원 사연을 받아 읽었다⁠.

“⁠삼만 원⁠, 이천이십삼 결승 보고 울던 중학생입니다⁠. 배달 왔습니다⁠. 수취인 위강현⁠. 반송 불가⁠.⁠”

“⁠어르신⁠, 배달 왔습니다는 빼셔도 돼요⁠.⁠”

“⁠그게 내 인사야⁠. 빼면 등기가 아니야⁠.⁠”

채팅창이 「⁠배달 왔습니다⁠」로 도배되었다⁠. 진배가 귤을 입에 문 채 화면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여러분⁠, 와동 시장 강현세탁⁠. 와이셔츠 한 장에 천오백 원⁠. 코치 엄마 가게야⁠.⁠”

어머니가 아래층에서 소리쳤다⁠. “⁠회장님⁠, 이천 원이에요⁠!⁠”

“⁠이천 원이랍니다⁠!⁠”

채팅창이 웃음으로 넘쳤다⁠. 「⁠세탁소 광고 무엇⁠」 「⁠이천 원 실화냐⁠」 「⁠와이셔츠 보내면 다림질해 주나요⁠」 후원이 계속 올라갔다⁠.

두 시간째⁠, 강현의 왼손 엄지가 막대 위에서 미끄러졌다⁠. 손목이 저렸다⁠. 저림이 엄지에서 팔꿈치까지 거슬러 올라왔다⁠. 강현은 막대를 놓고 손목을 주무르다 다시 쥐었다⁠. 상대 사냥꾼이 다리 위에서 강현을 먼저 찾았다⁠. 강현의 사냥꾼이 쓰러졌다⁠.

채팅창에 아이디 하나가 떴다⁠. 회색 글씨의 짧은 아이디였다⁠. 후원 금액은 천 원이었다⁠.

「⁠천 원 — 손목 아껴라 — 남궁⁠」

점례가 남궁이라는 글자에서 읽다 말고 멈췄다⁠. 춘봉이 고개를 들었다⁠. 우람이 노트북 화면을 강현 쪽으로 돌렸다⁠. 강현은 패드를 쥔 채 회색 아이디를 한참 보았다⁠. 채팅창은 금세 다른 글자로 덮였다⁠. 「⁠누구임⁠?⁠」 「⁠남궁이면 그 남궁⁠?⁠」 「⁠레드혼 감독 아니냐⁠」

강현은 패드를 내려놓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손목 아껴야 해서요⁠.⁠”

방송이 꺼졌다⁠. 우람이 후원 합계를 확인했다⁠. 플랫폼 수수료를 떼고 나면 구십이만 원이었다⁠. 우람은 숫자를 읽고 나서 노트북을 덮었다⁠.

“⁠구십이면 할머니 등록금 반도 안 돼요⁠.⁠” 우람이 말했다⁠. “⁠그리고 코치님 손목 다 나갔어요⁠. 이걸로 끝이에요⁠. 할머니가 알면 저 진짜 혼날 거예요⁠.⁠”

점례가 이불 위에서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단톡방 실황 마지막 글을 보여 주었다⁠. 「⁠방송 끝 구십이만 원 코치님 손목 아웃 ㅠㅠ⁠」 글 옆에 숫자 하나가 금세 사라졌다⁠. 분옥이 읽었다⁠.

점례와 춘봉과 진배가 돌아가고 우람이 막차를 타러 나간 뒤⁠, 어머니가 이층으로 올라왔다⁠. 손에 김이 오르는 수건을 들고 있었다⁠. 세탁소 스팀다리미로 데운 수건이었다⁠. 어머니는 말없이 강현의 보호대를 풀고 손목에 수건을 감았다⁠. 뜨거웠다⁠. 강현이 움찔하자 어머니가 수건 위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말로 하랬지⁠.⁠”

“⁠말로는 돈이 안 모여요⁠.⁠”

“⁠손으로 모은 돈은 손목으로 갚는 거야⁠. 네 감독님한테 배웠으면서⁠.⁠” 어머니가 수건을 한 번 더 감았다⁠. “⁠아까 그 천 원⁠, 그 양반 맞지⁠?⁠”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피식 웃었다⁠.

“⁠천 원이 뭐야⁠, 천 원이⁠. 세계 챔피언 키워 놓고⁠.⁠”

“⁠감독님은 원래 숫자로 말해요⁠.⁠”

“⁠그럼 천 원이 무슨 숫자야⁠?⁠”

강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수건을 감은 손목을 한참 붙잡고 있다가⁠, 식기 전에 다른 수건을 데워 오겠다며 내려갔다⁠. 계단에서 다리미 김 빠지는 소리가 올라왔다⁠.

*

4강은 일주일 뒤 토요일이었다⁠. 상대는 수원 장기판 팀이었다⁠. 셋 다 동네 장기 고수였고⁠, 말을 한 칸씩 옮기듯 한 걸음씩 움직였다⁠. 서두르지 않는 상대는 처음이었다⁠.

분옥은 다리 밑에 앉았다가 오래 기다렸다⁠. 상대가 오지 않았다⁠. 수원 장기판도 기다리고 있었다⁠. 두 팀이 서로 먼저 가 있으려고 바람골 지도 곳곳에 엎드렸다⁠. 화면 위쪽 시계만 흘렀다⁠.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누군가 소리쳤다⁠. “⁠둘 다 자는 거 아니에요⁠?⁠” 앞줄의 우람이 가방에서 매직을 꺼내 팻말 뒷면에 새로 썼다⁠. 「⁠할머니 주무시는 거 아님⁠」 팻말이 올라가자 객석이 한 번 더 웃었다⁠.

진배가 후보석에서 손가락 하나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손가락 끝이 지도 위의 한 자리를 가리켰다⁠. 상대 사냥꾼이 엎드린 덤불이었다⁠. 진배는 오 분 동안 상대가 한 번도 움직이지 않은 자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장기판에서 차가 안 움직이면 거기가 급소라고⁠, 연습 때 몇 번이나 말했다⁠.

분옥이 진배의 손가락을 보았다⁠. 다리 밑에서 나와 덤불 뒤로 돌아갔다⁠. 덤불을 등 뒤에서 쏘았다⁠. 「⁠처치⁠」 춘봉은 덤불이 쓰러지는 틈에 무너진 담을 넘어 가운데 거점에 들어갔다⁠. 청춘오락실이 첫 세트를 가져갔고⁠, 두 번째 세트도 같은 수로 가져갔다⁠.

결승 진출이었다⁠. 반대편 4강에서는 레드혼 실버가 이겼다⁠. 총알 영감은 반깁스를 풀고 나왔고⁠, 경기가 끝나자 무대 뒤로 손목을 감싸 쥐고 걸어갔다⁠.

무대에서 내려오며 분옥이 강현 옆으로 다가왔다⁠. 객석의 함성 때문에 목소리를 키우지 않으면 들리지 않았다⁠. 분옥은 키우지 않았다⁠. 강현이 고개를 숙여 귀를 댔다⁠.

“⁠구십 모았다며⁠.⁠”

“⁠네⁠.⁠”

“⁠그 손으로⁠.⁠”

“⁠네⁠.⁠”

분옥은 대답 대신 강현의 왼쪽 손목 보호대를 한 번 꾹 눌렀다⁠. 아팠다⁠. 강현은 아프다고 하지 않았다⁠. 분옥이 강현의 얼굴을 보고 손을 뗐다⁠.

“⁠아프면 아프다고 해⁠. 코치는 그게 안 돼⁠.⁠”

*

밤에 세탁소 이층 방에서 강현은 휴대전화를 열었다⁠. 낯선 아이디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e스포츠 전문 매체의 기자였다⁠. 레드혼 시절 몇 번 인터뷰를 했던 이름이었다⁠.

「⁠위강현 선수님⁠, 오랜만입니다⁠. 방송에 올라온 「⁠손목 아껴라 — 남궁⁠」 후원이 커뮤니티에서 화제입니다⁠. 은퇴 사유에 대해 다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레드혼 의무실 관련해서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요⁠.⁠」

강현은 책상 서랍을 열었다⁠. 소견서와 반지가 든 지퍼백이 나란히 들어 있었다⁠. 강현은 소견서를 꺼내 휴대전화 옆에 펼쳤다⁠. 접힌 자리가 이제 하얗게 일어나 찢어지기 직전이었다⁠.

입력창에 손가락을 올렸다⁠. 오른손이었다⁠. 한 글자씩 천천히 눌렀다⁠.

「⁠네⁠. 결승 전에 뵙죠⁠. 보여 드릴 게 있습니다⁠.⁠」

9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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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느린독자2026.11.01· 9화

    모니터 꺼 놓고 여섯 분이 둘러앉은 아침이 이상하게 무서웠어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 류시안작가2026.11.01

      도네이션 하나가 경로당 공기를 바꿔 놨어요. 점례 씨가 휴대전화를 뒤집는 횟수만큼 다들 속이 뒤집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