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322자)

코치 자리

경로당 게임단 코치 · 류시안

기자와의 약속은 다음 주 월요일 오후로 잡혔다⁠. 미디어데이 이틀 전이었다⁠. 기자는 레드혼 홍보팀에 사실 확인 메일을 보냈다고 했다⁠. 기자로서 당연히 하는 일이라고⁠, 확인 없이 쓰면 기사가 안 된다고 했다⁠. 강현은 메일이 레드혼 어디로 갔을지 알았다⁠.

화요일 오전 열한 시⁠, 경로당 현관 유리문이 열렸다⁠. 남궁석이 혼자였다⁠. 빨간 점퍼도 회색 양복도 아니고⁠, 갈색 등산 점퍼를 입었다⁠.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떡도 홍삼도 없었다⁠. 신발장 앞에서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놓고⁠, 거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창 아래 밥상 앞에서 청춘오락실이 연습 중이었다⁠. 춘봉은 방패꾼으로 무너진 담을 넘고 있었고⁠, 진배는 분옥 등 뒤에서 손가락을 접고 있었다⁠. 점례가 남궁석을 먼저 보고 휴대전화를 들었다⁠.

“⁠단장님 오셨다⁠. 빈손으로 오셨다⁠. ㅋㅋ⁠. 아니 웃을 때가 아니다⁠.⁠”

남궁석은 점례의 휴대전화를 보고도 피하지 않았다⁠. 밥상 앞까지 걸어와 장판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예순여섯의 무릎이 장판 위에서 뚝 소리를 냈다⁠. 진배가 방석을 하나 밀어 주었다⁠. 남궁석은 고개를 숙여 받고⁠, 방석 위에 다시 앉았다⁠.

“⁠강현이⁠. 기자 만난다며⁠.⁠”

“⁠네⁠.⁠”

“⁠월요일이라며⁠.⁠”

“⁠네⁠.⁠”

남궁석이 등산 점퍼 안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반으로 접힌 서류였다⁠. 남궁석은 서류를 펴서 장판 위에 강현 앞으로 놓았다⁠. 레드혼 로고가 찍힌 계약서였다⁠. 맨 위에 「⁠2028 시즌 레드혼 프로팀 코치 계약(⁠안⁠)⁠」이라고 적혀 있었다⁠.

“⁠내가 감독으로 돌아가면 너를 코치로 쓴다⁠. 이사회에도 말해 놨어⁠. 연봉은 여기 적힌 대로⁠. 구청 계약직 일 년치를 석 달에 받는다⁠.⁠” 남궁석이 계약서의 숫자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너 다시 무대로 간다⁠. 선수는 못 해도 코치는 할 수 있어⁠. 네 손목으로도⁠.⁠”

춘봉이 계약서를 넘겨다보다가 돋보기를 꺼냈다⁠. 진배가 춘봉의 팔꿈치를 잡아당겼다⁠. 분옥은 패드를 무릎에 내려놓고 남궁석을 보았다⁠.

“⁠조건이 있죠⁠.⁠” 강현이 말했다⁠.

“⁠월요일에 기자 만나지 마라⁠. 그거면 된다⁠.⁠”

“⁠안 만나면요⁠?⁠”

“⁠만나면⁠.⁠” 남궁석이 계약서 위에서 손을 거두었다⁠. “⁠리그 메인 스폰서가 우리 모기업이다⁠. 레드혼 감독이 선수 수술을 숨겼다는 기사가 결승 전에 나가면⁠, 모기업은 리그에서 이름을 뺀다⁠. 이름을 빼면 돈도 뺀다⁠. 결승은 미뤄지거나 없어지고⁠, 상금 천만 원도 없어진다⁠. 레드혼 실버 어르신들 활동비도 끊긴다⁠. 총알 양반 반깁스 하고 받던 오십도⁠.⁠”

거실이 조용해졌다⁠. 화투 담요 위의 할아버지들도 패를 내려놓았다⁠. 점례의 휴대전화가 바닥을 향해 처졌다⁠.

“⁠그리고⁠.⁠” 남궁석이 분옥을 보았다⁠. “⁠어르신 계약금도요⁠. 계약하셔도 리그가 없어지면 저희가 드릴 이유가 없습니다⁠.⁠”

분옥은 대답하지 않았다⁠. 패드를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감독님⁠.⁠” 강현이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종이가 생각보다 두꺼웠다⁠. “⁠네 해 전에도 이렇게 하셨어요⁠? 소견서 받으시고요⁠. 숫자를 세어 보시고⁠, 결승 지면 잘리고⁠, 반지 없으면 제가 원망하고⁠, 그래서 안 보여 주신 거예요⁠?⁠”

“⁠그래⁠.⁠”

“⁠이번에도 세어 보신 거고요⁠.⁠”

“⁠그래⁠. 너한테 가르친 거다⁠.⁠”

강현은 계약서를 반으로 접었다⁠. 남궁석이 소견서를 접던 모양과 똑같이⁠, 접힌 자리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접은 계약서를 남궁석 앞으로 돌려놓았다⁠.

“⁠코치 자리는 안 받을게요⁠. 저 지금 코치예요⁠. 여기서요⁠.⁠”

“⁠구청 석 달짜리다⁠.⁠”

“⁠네⁠. 석 달짜리 코치요⁠.⁠”

남궁석이 계약서를 집어 점퍼 안주머니에 넣었다⁠. 무릎을 짚고 일어나려다 한 번 휘청했다⁠. 진배가 손을 내밀었다⁠. 남궁석은 진배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고맙습니다⁠, 회장님⁠.⁠”

“⁠화투 치세요⁠?⁠” 진배가 물었다⁠.

“⁠못 칩니다⁠.⁠”

“⁠그럼 배우러 오세요⁠. 패 읽는 거 가르쳐 드릴게⁠. 숫자만 세면 화투 못 쳐⁠.⁠”

남궁석이 진배를 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로 보았다⁠. 웃지도 화내지도 않고 고개만 한 번 숙이고 현관으로 나갔다⁠. 신발을 신으며 등을 보인 채 말했다⁠.

“⁠강현이⁠. 기사 나가면 네 노인네들이 너를 원망할 거다⁠. 반지 없이⁠.⁠”

유리문이 닫혔다⁠. 점례가 녹화를 끄지 않은 채 휴대전화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화면 속에서 장판의 꽃무늬가 천장을 보고 있었다⁠.

한참 만에 점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코치님⁠, 기사 내지 마⁠. 나 영상 다 내릴게⁠. 구독자 만 명 안 돼도 돼⁠. 결승만 하자⁠.⁠”

“⁠점례 씨는 그 양반 편이야⁠?⁠” 진배가 물었다⁠.

“⁠편이 어디 있어⁠. 언니 등록금 편이지⁠.⁠”

“⁠나는 내라고 하고 싶어⁠.⁠” 진배가 화투 담요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화투판에서 밑장 빼는 놈은 한 번 봐주면 평생 빼⁠. 네 해 전에 밑장 뺀 거야⁠, 저 양반⁠.⁠”

“⁠회장님은 상금 안 받는다고 했으니까 그런 말 하지⁠.⁠”

“⁠점례 씨⁠!⁠”

둘의 목소리가 커지는 사이 춘봉이 바둑알 통을 무릎에서 내려놓았다⁠. 춘봉은 서른 해 동안 받는 사람이 없어 돌아온 편지를 우체국 반송함에 넣어 본 사람이었다⁠.

“⁠등기는 받는 사람한테 가야 돼⁠.⁠” 춘봉이 말했다⁠. “⁠네 해 늦었어도 가야 돼⁠. 근데 받는 사람이 집에 없을 때 대문 앞에 던져 놓고 오면 그건 배달이 아니야⁠. 비 맞으면 다 번져⁠.⁠”

“⁠그게 무슨 소리야⁠, 춘봉 씨⁠.⁠”

“⁠때를 보라는 소리지⁠.⁠” 춘봉이 강현을 보았다⁠. “⁠코치⁠, 언제 갖다줄 거야⁠?⁠”

강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경로당 텔레비전에서 스포츠 뉴스가 돌았다⁠. 「⁠프로 리그 결승 11월 20일 안산 개최 … 레드혼 출신 선수 둘⁠, 손목 부상으로 이번 시즌 이탈⁠」 화면에 레드혼 유니폼을 입은 앳된 얼굴이 둘 지나갔다⁠. 운영위원회 날 경기장 복도에서 강현에게 꾸벅 인사하던 얼굴들이었다⁠.

분옥이 패드를 들어 올렸다⁠. 아무 말 없이 연습 모드를 다시 켰다⁠. 다리 밑에 사냥꾼을 엎드리게 하고⁠, 조준점을 다리 모서리에 올려놓았다⁠. 화면 속 다리 위로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분옥은 오래 기다렸다⁠.

*

화요일 저녁⁠, 분옥은 우람의 후드티를 빨려고 세탁기 앞에 앉았다⁠. 우람은 주말마다 할머니 집에 빨래를 맡기고 갔다⁠. 분옥은 강현세탁 주인이 하던 대로 주머니를 하나씩 뒤집었다⁠. 바깥 주머니에서는 버스 카드와 껌 종이가 나왔다⁠. 안쪽 지퍼 주머니에서 네 번 접힌 종이가 나왔다⁠.

「⁠휴학원 · 사유⁠: 경제적 사정 · 휴학 기간⁠: 2028학년도 1학기부터 1년⁠」

학생 서명 자리에 우람의 이름이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보호자 서명 자리는 비어 있었다⁠.

분옥은 종이를 들고 거실로 나갔다⁠. 우람은 소파에서 노트북으로 점례의 영상을 편집하고 있었다⁠. 할머니가 매복하는 장면에 자막을 넣던 참이었다⁠. 분옥이 휴학원을 노트북 화면 위에 덮었다⁠.

“⁠이게 뭐야⁠?⁠”

우람이 종이를 보고 노트북을 덮었다⁠. 화면이 닫히며 종이를 물었다⁠.

“⁠할머니⁠, 그거 아직 안 낸 거예요⁠.⁠”

“⁠아직⁠? 낼 거라는 거네⁠.⁠”

“⁠내년에요⁠. 이번 학기는 할머니가 내신다며요⁠. 내년엔 제가 벌어서 낼 거예요⁠. 물류센터는 밤에 일하면 시급이 세요⁠.⁠”

“⁠밤에⁠? 너 밤에 잠 안 자면 코피 쏟는 놈이야⁠.⁠” 분옥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커졌다⁠. “⁠할머니가 왜 분리수거 하는 줄 알아⁠? 왜 패드 잡는 줄 알아⁠? 니 학교 보내려고 하는 거야⁠. 근데 니가 학교를 그만둬⁠?⁠”

“⁠그만두는 게 아니라 쉬는 거예요⁠!⁠”

“⁠쉬는 놈이 돌아오는 거 봤어⁠? 니 엄마도 쉰다고 하고 안 돌아갔어⁠.⁠”

우람이 입을 다물었다⁠. 분옥도 입을 다물었다⁠. 세탁기가 혼자 물을 받는 소리가 났다⁠.

“⁠할머니 손목이 제 등록금이에요⁠?⁠” 우람이 작게 말했다⁠. “⁠아침마다 고무줄 감고 나가시잖아요⁠. 저 다 봐요⁠. 코치님 손목처럼 될까 봐 무서워요⁠. 할머니가 레드혼 가서 여덟 시간 하시면⁠, 저 학교 다니는 게 무슨 소용이에요⁠?⁠”

분옥은 손목의 고무줄을 내려다보았다⁠. 노란 고무줄이 살에 붉은 줄을 두 개 남기고 있었다⁠. 분옥은 고무줄을 풀지 않았다⁠. 휴학원을 노트북 사이에서 빼내 반으로 찢었다⁠. 다시 반으로 찢었다⁠. 우람이 말리지 않았다⁠.

“⁠보호자 서명은 할머니 거야⁠. 할머니가 안 하면 이건 종이야⁠.⁠”

우람은 찢어진 종잇조각을 내려다보다가 하나씩 주워 소파 위에 모았다⁠. 네 조각을 맞추자 자기 이름이 다시 붙었다⁠. 우람은 조각을 맞춘 채 손바닥으로 덮었다⁠.

“⁠할머니⁠, 그럼 레드혼 가지 마세요⁠. 그거 하나만요⁠.⁠”

“⁠그건 할머니가 정해⁠.⁠”

“⁠할머니는 맨날 할머니가 정해요⁠.⁠”

“⁠그러니까 할머니지⁠.⁠”

분옥은 세탁기 앞으로 돌아갔다⁠. 후드티를 세탁기에 넣고⁠, 세제를 두 숟가락 넣었다가 한 숟가락을 도로 덜었다⁠.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이 떨렸다⁠. 세탁기가 돌기 시작했고⁠, 분옥은 돌아가는 유리문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거실에서 우람이 노트북을 다시 여는 소리가 났다⁠. 편집하던 영상이 이어서 재생됐다⁠. 다리 밑에서 할머니가 기다리고⁠, 「⁠처치⁠」가 뜨고⁠, 점례의 비명이 들렸다⁠.

*

밤 아홉 시⁠, 경로당 불이 하나만 켜져 있었다⁠. 강현은 혼자 남아 바람골 지도를 새로 그리고 있었다⁠. 춘봉이 그려 준 달력 뒷면 지도 위에 기름종이를 덮고⁠, 레드혼 실버가 지난 경기들에서 지나간 길을 빨간 펜으로 따라 그렸다⁠.

현관 유리문이 열렸다⁠. 분옥이 들어왔다⁠. 꽃무늬 조끼 대신 회색 카디건을 입었고⁠, 단추를 채우지 않았다⁠. 분옥은 신발을 벗지 않고 현관 턱에 앉았다⁠.

“⁠우람이 놈이 휴학원을 써 놨더라⁠.⁠”

강현은 펜을 내려놓았다⁠.

“⁠알았지⁠?⁠”

“⁠네⁠.⁠”

“⁠둘 다 말하지 말라고 해서⁠?⁠”

“⁠네⁠.⁠”

분옥이 웃었다⁠. 소리 없이 어깨로만 웃었다⁠. 웃음이 금방 끝났다⁠.

“⁠코치⁠. 월요일에 그 기자 만나지 마⁠.⁠”

강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 그 양반 말 들었지⁠. 기사 나가면 결승이 없어진대⁠. 결승이 없으면 상금도 없고⁠, 레드혼 오백도 없어⁠. 내 손자 놈은 학교에서 잘리고⁠, 밤에 물류센터 가⁠. 코피 쏟으면서⁠.⁠” 분옥이 현관 턱에서 손을 짚고 몸을 돌렸다⁠. 강현을 똑바로 보았다⁠. “⁠코치 손목 일은 코치 일이야⁠. 나도 알아⁠. 억울하겠지⁠. 근데 그건 네 해 전 일이고⁠, 우리 등록금은 이번 달 말이야⁠.⁠”

“⁠결승 끝나고 하면요⁠?⁠”

“⁠결승 끝날 때까지 기다려 줄 거야⁠? 약속해⁠.⁠”

강현은 지도 위의 빨간 선들을 내려다보았다⁠. 레드혼 실버가 지나간 길은 전부 가까운 길이었다⁠. 남궁석이 가르친 대로⁠, 마주치면 이기는 길이었다⁠. 총알 영감이 반깁스를 하고도 달린 길이었다⁠.

“⁠약속은 못 해요⁠.⁠”

“⁠왜⁠?⁠”

“⁠기다리는 동안 저 사람들 손목이 나가요⁠. 총알 영감님⁠, 다음엔 깁스예요⁠. 네 해 전에 저도 기다렸어요⁠. 결승 끝나고 쉬자는 말에요⁠.⁠” 강현이 지도를 접었다⁠. “⁠어르신한테 결승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면⁠, 저는 감독님이랑 똑같아져요⁠.⁠”

분옥은 한참 강현을 보았다⁠. 화투판에서 패를 볼 때처럼 짧게 보지 않았다⁠. 오래 보았다⁠.

“⁠그럼 나는 내 패를 칠게⁠.⁠”

분옥이 일어났다⁠. 카디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레드혼 홍보팀장의 명함이었다⁠. 명함을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유리문을 밀고 나갔다⁠. 엔트리 마감은 13일⁠, 나흘 뒤였다⁠.

10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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