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322자)

반지

경로당 게임단 코치 · 류시안

강현세탁의 금고는 다이얼을 오른쪽으로 세 번⁠, 왼쪽으로 두 번 돌려야 열렸다⁠. 번호는 강현의 생일이었다⁠. 어머니가 정한 번호였다⁠. 강현은 카운터 뒤에 쪼그려 앉아 다이얼을 돌렸다⁠. 손이 미끄러져 두 번 처음부터 다시 했다⁠. 세 번째에 금고 문이 둔하게 열렸다⁠.

맨 아래 칸에 남색 벨벳 상자가 있었다⁠. 뚜껑을 여는 데 힘이 들었다⁠. 네 해 동안 닫혀 있던 경첩이 뻑뻑했다⁠. 상자 안에서 반지가 불빛을 받았다⁠. 가운데에 아크라인 로고가 박혔고⁠, 옆면에 「⁠2023 WORLD CHAMPION · TAESAN⁠」이 새겨져 있었다⁠. 태산은 강현의 선수 시절 아이디였다⁠.

“⁠팔러 가냐⁠?⁠”

어머니가 다리미를 든 채 강현의 등 뒤에 와 있었다⁠.

“⁠도금이라 안 팔린다면서요⁠.⁠”

“⁠가짜도 사는 사람은 있어⁠. 세계 챔피언 거면 더 쳐주지⁠.⁠”

“⁠돌려주러 가요⁠.⁠”

“⁠누구한테⁠?⁠”

강현은 상자 뚜껑을 닫았다⁠. 어머니는 더 묻지 않았다⁠. 다리미를 받침대에 내려놓고⁠, 카운터 서랍에서 비닐 지퍼백을 하나 꺼내 강현에게 내밀었다⁠. 단추나 반지처럼 작은 손님 물건을 담는 봉투였다⁠.

“⁠상자째 들고 다니다 잃어버린다⁠. 여기 넣어⁠.⁠”

강현은 반지를 지퍼백에 옮겨 담고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소견서는 다른 주머니에 넣었다⁠. 원장이 출력해 준 종이였다⁠. 이틀 동안 몇 번이나 펼쳤다 접어서 접힌 자리가 하얗게 일어나 있었다⁠.

*

같은 날 아침⁠, 경로당에 에어컨이 들어왔다⁠. 레드혼 실버의 출연료 백만 원에 구청이 사업비로 보탠 전기 요금 지원을 합쳐 산 벽걸이였다⁠. 설치 기사가 사다리에서 내려오자마자 진배가 리모컨을 들었다⁠.

“⁠회장님⁠, 오늘 바깥이 14도예요⁠.⁠”

“⁠샀으면 틀어 봐야지⁠. 고장 났으면 지금 바꿔 줘야 할 거 아니야⁠.⁠”

진배가 버튼을 눌렀다⁠. 찬 바람이 거실로 쏟아졌다⁠. 화투판 할아버지들이 일제히 담요를 끌어 올려 어깨에 둘렀고⁠, 춘봉은 모자를 귀까지 내려 썼다⁠. 점례는 에어컨 아래에서 휴대전화를 들고 생중계를 했다⁠.

“⁠여러분⁠, 청춘오락실에 드디어 에어컨이 들어왔습니다⁠. 지금 10월 말이고요⁠, 회장님이 냉방 18도로 틀었습니다⁠. 다들 떨고 계십니다⁠. ㅋㅋㅋ⁠.⁠”

“⁠점례 씨⁠, 그거 올리지 마⁠. 구청에서 보면 돈 낭비라고 해⁠.⁠”

“⁠구청 주무관님도 구독자야⁠, 회장님⁠.⁠”

진배가 리모컨을 내려놓고 에어컨을 껐다⁠. 끄고 나서 리모컨을 벽에 붙은 모금함 옆 고리에 정성스럽게 매달았다⁠. 모금함은 이제 비어 있었다⁠. 진배는 모금함에 붙은 「⁠에어컨 모금함⁠」 종이를 떼어 내고⁠, 뒷면에 매직으로 크게 썼다⁠. 「⁠내년 여름까지 손대지 말 것 · 회장⁠」

분옥은 연습을 한 시간만 하고 패드를 내려놓았다⁠. 손목의 노란 고무줄을 한 번 고쳐 감고 신발장으로 갔다⁠.

“⁠언니⁠, 어디 가⁠?⁠”

“⁠볼일⁠.⁠”

“⁠무슨 볼일⁠? 같이 가⁠?⁠”

“⁠혼자 보는 볼일이야⁠.⁠”

점례는 고개를 갸웃했다가 다시 생중계로 돌아갔다⁠. 강현은 부엌 문턱에서 분옥의 등을 보았다⁠. 분옥은 신발을 신고 나서 거울 앞에서 조끼 단추를 목까지 채웠다⁠. 경로당 밖으로 나가는 날에만 하는 버릇이었다⁠.

*

오후 두 시⁠, 분옥은 와동 사거리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카페에 들어온 것이 몇 년 만인지 몰랐다⁠. 메뉴판의 글씨가 너무 많아서 맨 위에 있는 것을 시켰다⁠. 커피가 아니라 이름이 긴 차였고⁠, 컵 위에 크림이 산처럼 쌓여 나왔다⁠.

맞은편에 레드혼 홍보팀장이 앉았다⁠. 빨간 점퍼 대신 회색 재킷을 입었지만⁠, 가방에 달린 열쇠고리가 빨간 뿔 모양이었다⁠. 홍보팀장은 서류를 한 장씩 분옥 앞에 펼쳤다⁠.

“⁠계약금 오백만 원은 계약하시고 다음 날 넣어 드려요⁠. 활동비는 매달 오십만 원이고⁠, 결승까지 가면 수당이 따로 백만 원 나와요⁠. 연습은 단장님이 어르신께는 하루 네 시간으로 맞추겠다고 하셨어요⁠.⁠”

“⁠네 시간이면 나머지 넷은 뭐 해⁠?⁠”

“⁠다른 선수들이 해요⁠.⁠” 홍보팀장이 웃었다⁠. 웃음이 금방 사라졌다⁠. “⁠결승 엔트리 마감이 11월 13일이에요⁠. 그 전에 계약하셔야 결승에 나오실 수 있어요⁠.⁠”

“⁠나 없이 청춘오락실이 결승 가면⁠?⁠”

“⁠그럼 어르신은 청춘오락실을 상대로 뛰시는 거죠⁠.⁠”

분옥은 크림을 숟가락으로 떠 먹었다⁠. 너무 달았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서류 맨 아래의 서명 자리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나 같은 노인네를 왜 오백이나 줘⁠? 손도 느린데⁠.⁠”

“⁠단장님 말씀으로는요⁠.⁠” 홍보팀장이 잠깐 망설였다⁠. “⁠청춘오락실이 이기는 이유가 어르신 하나래요⁠. 어르신이 오시면 저희가 이기고⁠, 어르신이 계시면 저희가 질 수도 있대요⁠.⁠”

“⁠그 양반이 그렇게 말했어⁠?⁠”

“⁠숫자로 말씀하셨어요⁠. 어르신이 매복으로 잡은 횟수가 경기마다 평균 몇이고⁠, 그게 점수로 몇이고⁠.⁠”

분옥은 웃었다⁠. 소리 내지 않고 어깨로만 웃었다⁠.

“⁠우리 코치는 그런 거 안 세⁠. 기다리면 온다고만 해⁠.⁠”

홍보팀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류를 다시 모아 파일에 넣고⁠, 파일째 분옥 앞에 밀어 놓았다⁠.

“⁠가져가셔서 생각해 보세요⁠. 손자분 학교 일은 단장님이 모르는 척하라고 하셨어요⁠. 저도 모르는 척할게요⁠.⁠”

분옥은 파일을 내려다보았다⁠. 손자 이야기를 누가 꺼냈는지 묻지 않았다⁠. 명함을 받던 날 경기장 복도에서⁠, 분옥은 홍보팀장에게 계약금은 언제 나오느냐고 딱 한 번 물었다⁠. 한마디면 충분했다⁠.

창밖 인도에서 누가 걸음을 멈췄다⁠. 분옥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유리창 너머에서 휴대전화 카메라 소리가 아주 작게 났다⁠.

*

밤 열 시⁠, 레드혼 실버 연습장에는 불이 반만 켜져 있었다⁠. 선수들은 다 퇴근했고⁠, 의자 등받이마다 파스 상자가 놓여 있었다⁠. 남궁석이 혼자 연습장 맨 끝 책상에 앉아 경기 영상을 보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 분옥의 사냥꾼이 다리 밑에 엎드려 있었다⁠. 남궁석은 영상을 멈추고 화면에 자를 대고 거리를 쟀다⁠.

“⁠왔냐⁠.⁠” 남궁석이 돌아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소리 들렸다⁠. 네 걸음은 소리가 작다⁠.⁠”

강현은 남궁석의 책상 옆에서 멈췄다가⁠, 의자를 끌어와 마주 앉았다⁠. 주머니에서 소견서를 꺼내 자 옆에 펼쳐 놓았다⁠. 남궁석은 종이를 보았다⁠. 레드혼 의무실 양식을 알아보는 데 일 초도 걸리지 않았다⁠. 남궁석은 종이를 손으로 집지 않았다⁠. 안경을 고쳐 쓰고 끝까지 읽었다⁠.

“⁠원장이 줬냐⁠.⁠”

“⁠네⁠.⁠”

“⁠그 사람 그때도 말이 많았다⁠.⁠”

“⁠8월 14일이요⁠.⁠” 강현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낮게 나왔다⁠. “⁠결승이 10월 21일이었어요⁠. 두 달 동안 감독님은 염증이라고 하셨어요⁠. 결승 끝나고 쉬자고요⁠. 제 의자 당겨 주시면서요⁠.⁠”

“⁠그래⁠.⁠”

“⁠왜요⁠?⁠”

남궁석이 소견서를 반으로 접었다⁠. 접힌 종이를 손바닥으로 눌러 펴지 않게 했다⁠.

“⁠보여 줬으면 너는 안 뛰었을 거냐⁠.⁠”

강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뛰었을 거다⁠. 너는 그런 놈이야⁠. 열여덟에 데려왔을 때부터 그랬어⁠. 아프다는 말을 할 줄 몰랐지⁠. 손톱이 들려도 안 했고 열이 사십 도까지 올라도 안 했다⁠.⁠” 남궁석이 접은 종이를 강현 앞으로 밀었다⁠. “⁠내가 보여 줬으면 너는 고민하다 뛰었을 거고⁠, 내가 결승에서 빼면 너는 평생 나를 원망했을 거다⁠. 반지 없이 원망하는 거보다 반지 끼고 원망하는 게 낫다고 봤다⁠.⁠”

“⁠그건 제가 정할 일이었어요⁠.⁠”

“⁠그래⁠. 네가 정할 일이었지⁠.⁠” 남궁석이 처음으로 강현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그리고 나도 그 결승 지면 잘렸다⁠. 그해 모기업이 그렇게 말했어⁠. 우승 못 하면 감독 바꾼다고⁠. 나도 그때 예순둘이었다⁠.⁠”

연습장 천장 에어컨이 바람을 바꾸는 소리를 냈다⁠. 파스 냄새가 한 번 밀려왔다가 물러났다⁠.

“⁠너도 아팠잖아⁠.⁠” 남궁석이 말했다⁠. “⁠두 달 동안 한 번도 아프다고 안 했잖아⁠. 밤에 몰래 얼음찜질하는 거 내가 봤다⁠. 넌 그때도 알았어⁠. 내가 말 안 한 거랑 네가 말 안 한 거랑⁠, 어느 게 더 크냐⁠?⁠”

강현은 조끼 주머니에서 지퍼백을 꺼냈다⁠. 반지를 꺼내 소견서 위에 올려놓았다⁠. 반지가 종이 위에서 한 바퀴 구르다 멈췄다⁠.

“⁠알았어요⁠. 그래서 감독님이 말해 줄 줄 알았어요⁠.⁠”

남궁석이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손을 뻗어 반지를 집었다⁠. 손가락 사이에서 반지를 한 번 돌려 옆면의 글씨를 읽었다⁠. 태산⁠. 남궁석이 지어 준 아이디였다⁠. 산처럼 버티라고⁠.

“⁠이건 네 거다⁠.⁠”

남궁석이 반지를 강현 앞으로 밀었다⁠. 강현은 받지 않았다⁠.

“⁠그럼 소견서도 제 거예요⁠. 이번엔 제가 정할게요⁠. 누구한테 보여 줄지⁠.⁠”

남궁석의 손이 반지 위에서 멈췄다⁠. 숫자를 말하던 입이 한참 다물려 있었다⁠.

“⁠네가 그걸 보여 주면⁠.⁠” 남궁석이 천천히 말했다⁠. “⁠리그 메인 스폰서가 어디인지 알지⁠. 레드혼 감독이 선수 수술을 숨겼다는 기사가 나가면 스폰서가 리그에서 빠진다⁠. 결승도 상금도 같이 빠진다⁠. 네 노인네들 천만 원도⁠.⁠”

“⁠협박이세요⁠?⁠”

“⁠계산이다⁠. 너한테 가르친 거⁠.⁠”

강현은 일어났다⁠. 소견서는 챙기고 반지는 책상 위에 두었다⁠. 엘리베이터까지 걸어가는 동안 뒤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강현이 안으로 들어가 돌아섰을 때 남궁석이 연습장 끝에서 손을 휘둘렀다⁠.

반지가 날아왔다⁠. 강현은 반사적으로 왼손을 뻗었다⁠. 반지가 손바닥에 탁 닿았고⁠, 손목이 꺾이며 통증이 팔꿈치까지 올라왔다⁠. 강현은 반지를 쥔 채 엘리베이터 벽에 기댔다⁠. 문이 닫히기 직전⁠, 남궁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손은 빠르네⁠.⁠”

*

엘리베이터가 1층에 닿는 사이 휴대전화가 연달아 울렸다⁠. 단톡방이었다⁠. 이름이 「⁠청춘오락실 (⁠6⁠)⁠」로 바뀌어 있었다⁠. 분옥⁠, 점례⁠, 춘봉⁠, 진배⁠, 우람⁠, 그리고 강현⁠. 메시지가 사십 개 넘게 쌓여 있었다⁠. 맨 위는 오후 두 시 십오 분에 점례가 올린 사진이었다⁠.

카페 유리창 너머로 찍은 사진이었다⁠. 창가 자리에 꽃무늬 조끼가 앉아 있었고⁠, 맞은편에 회색 재킷이 앉아 있었다⁠. 회색 재킷의 가방에 빨간 뿔 열쇠고리가 달려 있었다⁠. 탁자 위에 서류 파일이 하나 놓였고⁠, 꽃무늬 조끼 앞에 크림이 산처럼 쌓인 컵이 있었다⁠.

「⁠언니 거기서 뭐 해⁠?⁠?⁠」

사진 아래로 메시지가 이어졌다⁠. 「⁠저 빨간 뿔 레드혼 거 아냐⁠?⁠」 춘봉이었다⁠. 「⁠언니 크림 먹는 거 처음 봄 ㅋㅋ 아니 웃을 때가 아니고⁠」 점례였다⁠. 「⁠할머니 무슨 일이에요⁠? 전화 받아 주세요⁠」 우람이었다⁠. 「⁠다들 진정해⁠. 차 한잔 마실 수도 있지⁠」 진배였다⁠. 진배의 메시지에 점례가 바로 답했다⁠. 「⁠회장님 화투 칠 때 빨간 뿔이랑 차 마셔 봤어⁠?⁠?⁠」

분옥의 메시지는 하나도 없었다⁠. 맨 아래에 숫자 하나가 떠 있었다⁠. 분옥이 읽은 표시였다⁠. 읽고 답하지 않았다⁠.

강현은 1층 상가 출입문 앞에서 왼손을 폈다⁠. 반지가 손바닥 한가운데에 빨간 자국을 남기고 놓여 있었다⁠. 반지를 지퍼백에 다시 넣었다⁠. 지퍼를 닫는 손가락이 떨렸다⁠. 강현은 오른손 엄지로 단톡방 입력창을 눌렀다⁠. 무엇을 쓸지 몰라 한참 깜빡이는 줄만 보았다⁠. 결국 한 줄을 썼다⁠.

「⁠내일 아침 아홉 시⁠, 경로당에서 뵐게요⁠. 다들요⁠.⁠」

전송을 누르자 숫자가 하나씩 줄어들었다⁠. 다섯이 넷⁠, 넷이 셋⁠. 마지막 하나가 남았다가⁠, 한참 뒤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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