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420자)

운영위원회

경로당 게임단 코치 · 류시안

춘봉은 넥타이를 두 번 다시 맸다⁠. 세 번째에 매듭이 목 한가운데에 왔다⁠. 집배원 정년 퇴임식 때 산 넥타이라고 했다⁠. 남색 바탕에 작은 우체통 무늬가 줄지어 있었다⁠.

“⁠회의는 옷으로 하는 거야⁠. 내가 서른 해 동안 본 게 그거야⁠. 넥타이 맨 사람 편지는 반송이 없어⁠.⁠”

“⁠어르신⁠, 오늘은 제가 말할게요⁠.⁠”

“⁠나는 앉아만 있을게⁠. 앉아 있는 것도 일이야⁠.⁠”

10월 첫 월요일⁠, 안산 e스포츠 경기장 2층 회의실이었다⁠. 긴 탁자에 이름표가 놓였다⁠. 게임사 리그 운영팀장⁠, 경기도 담당 과장⁠, 대학 교수 둘⁠, 본선에 오른 팀 대표 여섯⁠, 그리고 맨 끝에 「⁠자문위원 남궁석⁠」 남궁석은 빨간 점퍼 대신 회색 양복을 입고 왔다⁠. 앉자마자 탁자 위에 서류를 반듯하게 펴 놓았다⁠.

운영팀장이 화면에 안건을 띄웠다⁠. 「⁠본선 규칙 조정안⁠: 패드 사용 제한 · 세트 시간 15분 → 10분⁠」

남궁석이 먼저 손을 들었다⁠.

“⁠패드에는 조준 보조 기능이 있습니다⁠. 조준점이 상대 근처에 가면 저절로 붙어요⁠. 키보드 쓰는 선수는 그걸 손으로 해야 합니다⁠. 같은 무대에서 하나는 손으로 하고 하나는 기계가 도와주면 공정하지 않죠⁠.⁠”

틀린 말이 아니었다⁠. 강현은 프로 시절 패드 선수와 붙을 때 조준 보조 때문에 몇 번이나 화를 냈다⁠. 교수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간⁠.⁠” 남궁석이 서류를 한 장 넘겼다⁠. “⁠결선부터는 방송이 붙습니다⁠. 지난주 예선 중계 시청 기록을 보면 세트가 십 분을 넘기면 시청자가 절반으로 줍니다⁠. 기다리는 장면이 길어서요⁠. 시니어 리그도 방송입니다⁠. 기다리는 걸 누가 봅니까⁠?⁠”

“⁠백만 명이 봤어요⁠.⁠”

강현이 말했다⁠. 회의실의 눈이 끝자리로 몰렸다⁠. 춘봉은 넥타이를 한 번 매만졌다⁠.

“⁠청춘오락실 영상이요⁠. 바위 뒤에서 기다리는 장면만 삼십 초였어요⁠. 그걸 백만 명이 봤어요⁠.⁠”

“⁠숏폼이랑 중계는 다르다⁠.⁠” 남궁석이 강현을 보지 않고 운영팀장에게 말했다⁠. “⁠삼십 초는 웃기고⁠, 십오 분은 지루하다⁠.⁠”

“⁠그럼 조준 보조는 끄면 되잖아요⁠. 패드는 쓰게 하고 보조만 다 같이 끄면 공정하죠⁠. 어르신들 중에 키보드 글자를 못 읽으시는 분도 있어요⁠.⁠” 강현은 숨을 골랐다⁠. “⁠만 예순다섯 이상 리그예요⁠. 손 빠른 사람만 남기면 시니어 리그가 아니라 레드혼 2군 리그죠⁠.⁠”

남궁석이 처음으로 강현을 보았다⁠. 금테 안경 너머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가 선수일 때는 기다리는 거 싫어했다⁠. 기다리는 상대를 제일 먼저 찾아서 잡았지⁠. 그래서 이겼고⁠.⁠”

“⁠그래서 손목이 나갔고요⁠.⁠”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경기도 과장이 물병 뚜껑을 열다 말았다⁠. 춘봉이 끝자리에서 헛기침을 했다⁠. 서른 해 동안 남의 집 대문 앞에서 하던 헛기침이었다⁠.

“⁠저기⁠, 한 말씀만⁠.⁠” 춘봉이 손을 들었다⁠. “⁠우리는 빨리는 못 해요⁠. 대신 늦게는 안 가요⁠. 서른 해 동안 등기를 하루도 늦게 안 갖다줬어요⁠. 우리가 느린 게 아니라 길을 다르게 가는 거예요⁠.⁠”

교수 하나가 메모를 했다⁠. 다른 팀 대표인 군포 할머니가 박수를 쳤다⁠. 운영팀장이 시계를 보며 정리했다⁠.

“⁠패드는 허용하되 조준 보조 기능은 전원 끕니다⁠. 세트 시간은 십 분으로 줄입니다⁠. 방송 편성 때문에요⁠. 스폰서 쪽 요청도 있었고요⁠.⁠”

“⁠스폰서가 어디예요⁠?⁠” 강현이 물었다⁠.

운영팀장이 화면을 넘겼다⁠. 리그 후원사 목록 맨 위에 빨간 로고가 있었다⁠. 레드혼의 모기업인 식품 회사였다⁠.

남궁석은 서류를 접어 가방에 넣었다⁠. 회의실을 나가며 강현 옆을 지나다 낮게 말했다⁠.

“⁠십 분이면 바위 뒤에 몇 번 앉을 수 있냐⁠. 세어 봐라⁠.⁠”

*

회의실을 나오자 복도 끝 유리문 너머로 프로 경기장 무대가 보였다⁠. 다음 달 프로 리그 결승을 앞두고 무대 철골을 올리는 중이었다⁠. 조명 기사들이 사다리 위에서 소리를 질렀고⁠, 무대 한가운데에 거대한 아크라인 로고가 천에 덮인 채 누워 있었다⁠.

춘봉이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유리문에 이마를 댔다⁠.

“⁠저기가 코치 놀던 데야⁠?⁠”

“⁠비슷한 데요⁠. 저기보다 컸어요⁠.⁠”

“⁠여기서 몇 명이나 봐⁠?⁠”

“⁠만 명쯤요⁠.⁠”

춘봉이 휘파람을 불었다⁠. 와동 우편 구역 전체 가구 수보다 많다고 했다⁠. 둘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이 레드혼 유니폼을 입은 앳된 선수 둘이 연습실에서 나왔다⁠. 하나는 오른손에⁠, 하나는 왼손에 강현과 같은 검은 보호대를 차고 있었다⁠. 둘은 강현을 알아보고 멈칫했다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지나갔다⁠. 춘봉이 둘의 뒷모습을 보다가 강현의 손목을 보았다⁠.

“⁠저 집은 손목 보호대를 단체로 맞추나⁠.⁠”

강현은 대답 대신 엘리베이터 단추를 한 번 더 눌렀다⁠. 단추는 이미 불이 들어와 있었다⁠.

*

십 분은 짧았다⁠. 시 본선을 닷새 앞두고 거실 창 아래에서 연습할 때마다 시간이 모자랐다⁠. 춘봉이 뒷길을 한 바퀴 돌아 거점에 들어가면 이미 삼 분이 지나 있었다⁠. 거점을 늦게 잡으면 점수가 백까지 차지 않았고⁠, 시간이 끝났을 때 앞선 팀이 이겼다⁠.

“⁠지름길을 찾아야 돼⁠.⁠” 춘봉이 지도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여기 담 무너진 데⁠. 사람이 넘을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넘어가는 길이 아니에요⁠, 어르신⁠.⁠”

“⁠직접 가 봐야 알지⁠.⁠”

춘봉의 방패꾼은 무너진 담으로 걸어갔다⁠. 담 모서리에 몸을 비비자 방패꾼이 쑥 넘어갔다⁠. 강현은 화면을 멈추고 한참 봤다⁠. 프로 시절에도 아무도 쓰지 않던 자리였다⁠. 너무 좁아서⁠, 빨리 달리는 사람은 지나치는 자리였다⁠.

“⁠배달 완료⁠.⁠” 춘봉이 말했다⁠. “⁠이 동네는 내가 다 뚫어 놨어⁠.⁠”

*

10월 9일 한글날⁠, 안산 e스포츠 경기장 보조 경기장⁠. 객석이 이백 석이었고 절반이 찼다⁠. 앞줄에 「⁠광 안 나와 할머니⁠」 플래카드가 다시 나왔고⁠, 플래카드 옆에 처음 보는 팻말이 하나 있었다⁠. 「⁠우리 할머니 사냥꾼⁠」 팻말을 든 사람은 키가 크고 마른 청년이었다⁠. 회색 후드티를 입었고 안경을 콧등 아래로 내려 쓰고 있었다⁠.

분옥이 무대에 오르다 팻말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저놈이 왜 여기 있어⁠.⁠”

권우람⁠, 분옥의 손자였다⁠. 경기도 북쪽 대학 기숙사에서 아침 첫차를 갈아타고 왔다고 했다⁠. 점례가 우람에게 손을 흔들었다⁠.

“⁠우람아⁠! 할머니 영상 내가 찍은 거야⁠! 구독 눌렀어⁠?⁠”

“⁠눌렀어요⁠, 점례 할머니⁠! 알림 설정도 했어요⁠!⁠”

분옥은 팻말을 못 본 척 의자에 앉았다⁠. 앉으면서 귀 끝이 빨개졌다⁠.

첫 경기는 군포 팀이었다⁠. 십 분 안에 끝내려면 처음 이 분 안에 거점을 잡아야 했다⁠. 춘봉이 무너진 담으로 가운데 거점에 먼저 들어갔고⁠, 점례가 소리쳤고⁠, 진배의 손가락이 접혔다⁠. 분옥은 바위 뒤에 한 번만 앉았다⁠. 두 번째부터는 담 밑⁠, 그다음은 다리 밑이었다⁠. 앉은 자리마다 「⁠처치⁠」가 떴다⁠.

세 번째 경기는 쉽지 않았다⁠. 상대는 화성에서 온 팀이었고⁠, 셋 중 둘이 전직 택배 기사라 길을 춘봉만큼 알았다⁠. 무너진 담에 먼저 와 있는 상대를 보고 춘봉이 처음으로 길을 잃었다⁠. 화면 위쪽 시계가 일 분을 남겼을 때 점수는 팔십칠 대 팔십구였다⁠. 가운데 거점에 상대 하나가 버티고 있었다⁠.

진배가 후보석에서 손가락 다섯 개를 들어 올렸다⁠. 상대 사냥꾼이 쓰러진 지 막 십 초가 지나 있었다⁠. 손가락이 하나씩 접혔다⁠. 넷⁠, 셋⁠, 둘⁠. 분옥의 사냥꾼이 덤불에서 몸을 일으켰다⁠. 진배의 손가락이 다 접히는 순간 상대 사냥꾼이 진영에서 다시 나왔고⁠, 나오자마자 분옥의 화살을 맞았다⁠. 「⁠처치⁠」 점례가 거점으로 뛰어들어 춘봉을 살렸다⁠. 춘봉은 방패를 들고 거점 한복판에 엉덩이를 붙였다⁠. 시계가 영이 되었을 때 점수는 구십일 대 구십이었다⁠.

객석이 일어났다⁠. 우람이 팻말을 머리 위로 흔들다가 옆 사람의 머리를 쳤다⁠. 세 경기를 내리 이겼다⁠. 경기도 결선 진출이었다⁠.

무대에서 내려오자 우람이 객석 난간을 넘어 달려왔다⁠. 분옥을 끌어안다가 분옥의 손에서 패드를 받아 들었다⁠.

“⁠할머니⁠, 이거 손목 아프면 바로 말해⁠. 진짜로⁠.⁠”

“⁠할머니가 언제 아프다고 하는 거 봤냐⁠.⁠”

“⁠그러니까 하는 말이잖아요⁠.⁠”

강현은 대기실 쪽 계단에서 둘을 보고 있었다⁠. 우람이 강현을 알아보고 꾸벅 인사했다⁠. 인사하는 내내 눈이 강현의 손목 보호대에 붙어 있었다⁠.

“⁠코치님 레드혼 시절 결승 경기⁠, 저 중학교 때 다 봤어요⁠. 다리 밑 매복 세 번 연속 그거⁠.⁠”

“⁠그거 오늘 할머니가 하셨어요⁠.⁠”

“⁠네⁠. 그래서 울 뻔했어요⁠.⁠”

*

대기실에서 둘만 남았을 때 분옥이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매점에 컵라면을 사러 갔다⁠.

“⁠상금 나오면 넷이 나눠⁠?⁠”

“⁠팀이 정하는 거예요⁠. 보통은 나눠요⁠.⁠”

분옥은 꽃무늬 조끼 단추를 하나 풀었다⁠. 안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레드혼 실버 전단이 아니었다⁠. 대학 등록금 고지서였다⁠. 고지서 귀퉁이가 땀에 눅눅했다⁠.

「⁠2027학년도 2학기 등록금 분할 납부 · 4회차 · 3⁠,400⁠,000원 · 납부 기한 11월 30일 · 미납 시 제적 처리⁠」

“⁠세 번은 냈어⁠. 경비실 옆에서 분리수거 일 하는 거랑⁠, 이것저것 해서⁠.⁠” 분옥이 고지서를 다시 접었다⁠. “⁠마지막이 삼백사십이야⁠. 저놈 엄마는 몸이 안 좋아서 일을 못 해⁠.⁠”

강현은 고지서를 받지도 못하고 손만 내밀었다가 거두었다⁠.

“⁠우람 씨는 알아요⁠?⁠”

“⁠알면 학교 그만둔다고 할 놈이야⁠. 그러니까 코치도 말하지 마⁠.⁠” 분옥이 조끼 단추를 채웠다⁠. “⁠천만 원을 넷이 나누면 이백오십이야⁠. 모자라⁠.⁠”

“⁠우승하면 제 몫은 안 받을게요⁠.⁠”

“⁠코치는 선수가 아니잖아⁠. 원래 몫이 없어⁠.⁠”

분옥이 웃었다⁠. 강현은 따라 웃지 못했다⁠.

대기실 문이 벌컥 열렸다⁠. 점례가 컵라면 다섯 개를 가슴에 안고 들어왔고⁠, 진배가 나무젓가락 한 움큼을⁠, 춘봉이 뜨거운 물이 든 보온병을 들고 뒤따랐다⁠. 우람은 맨 뒤에서 단무지 봉지를 들고 있었다⁠.

“⁠언니⁠, 매점 아줌마가 우리 알아봤어⁠! 광 안 나와 할머니 일행이라고 단무지 공짜로 줬어⁠.⁠”

“⁠단무지로 에어컨 나머지 반 대 사면 되겠네⁠.⁠” 진배가 말했다⁠.

우람이 웃음을 터뜨렸다⁠. 진배는 웃는 우람에게 젓가락을 두 벌 쥐여 주며 많이 먹으라고 했다⁠. 분옥은 컵라면 뚜껑을 뜯으며⁠, 고지서가 든 조끼 안주머니를 팔꿈치로 한 번 눌렀다⁠. 강현은 보온병을 받아 분옥의 컵에 물을 먼저 부었다⁠. 선까지 정확히⁠.

*

분옥은 화장실에 가는 길에 복도 끝 자판기 앞에서 걸음을 늦췄다⁠. 빨간 점퍼가 자판기 불빛 앞에 서 있었다⁠. 레드혼 홍보팀장이었다⁠. 홍보팀장은 캔커피 두 개를 뽑아 하나를 분옥에게 내밀었다⁠.

“⁠어르신⁠, 오늘 다리 밑 매복 보고 단장님이 한참 말씀이 없으셨어요⁠.⁠”

“⁠그 양반 원래 말 많아⁠?⁠”

“⁠숫자 말씀은 많으세요⁠.⁠” 홍보팀장이 웃었다⁠.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캔커피 위에 얹어 주었다⁠. “⁠레드혼 실버는 결선 엔트리 마감 전까지 선수를 받아요⁠. 혹시 생각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계약금은 전단에 적힌 그대로예요⁠. 결승까지 가면 수당이 따로 나오고요⁠.⁠”

분옥은 캔커피를 받았다⁠. 명함은 커피 위에서 떨어지지 않고 얹혀 있었다⁠. 분옥은 명함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나는 청춘오락실이야⁠.⁠”

“⁠네⁠. 알아요⁠. 그래서 드리는 거예요⁠.⁠”

홍보팀장이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분옥은 캔커피를 따지 않았다⁠. 명함을 조끼 안주머니에 넣었다⁠. 등록금 고지서와 레드혼 실버 전단 사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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