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32자)

나갔습니다

경로당 게임단 코치 · 류시안

레드혼 실버 연습장의 계약서는 다섯 장이었다⁠. 홍보팀장이 장마다 노란 견출지를 붙여 서명할 자리를 알려 주었다⁠. 분옥은 돋보기를 끼고 첫 장에서 끝 장까지 다 읽었다⁠. 다 읽고 나니 사십 분이 지나 있었다⁠. 홍보팀장은 재촉하지 않았다⁠. 남궁석은 맞은편 의자에 앉아 커피를 두 잔째 마셨다⁠.

“⁠여기 연습 시간이 하루 네 시간이라고 써 놨네⁠.⁠”

“⁠네⁠. 어르신은 따로 맞춰 드리기로 했어요⁠.⁠”

“⁠나머지 사람들은 여덟 시간이고⁠.⁠”

“⁠그분들은 원래 계약대로요⁠.⁠”

분옥은 세 번째 장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계약 기간 중 선수는 다른 팀의 전략 정보를 구단에 제공할 수 있다⁠」 분옥이 문장 위에 펜으로 줄을 긋고 고개를 들었다⁠.

“⁠이건 안 해⁠. 우리 애들 숨는 자리는 안 알려 줘⁠.⁠”

남궁석이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그 줄은 빼겠습니다⁠. 알려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왜⁠? 알고 싶을 거 아니야⁠.⁠”

“⁠어르신이 저희 편에 계시면 됩니다⁠. 청춘오락실은 어르신이 어디 계실지 모르고 들어오고⁠, 어르신은 그 애들이 어디 숨을지 아시고 들어오시죠⁠. 말씀 안 하셔도 어르신 손이 압니다⁠.⁠” 남궁석이 계약서를 분옥 앞으로 조금 밀었다⁠. “⁠저는 그거면 됩니다⁠.⁠”

분옥은 펜을 쥔 채 오래 있었다⁠. 손목의 노란 고무줄이 소매 밖으로 비어져 나왔다⁠. 남궁석이 고무줄을 보았다⁠. 아무 말 없이 홍보팀장에게 눈짓을 했고⁠, 홍보팀장이 서랍에서 살색 보호대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총알 영감이 차던 것과 같은 보호대였다⁠.

“⁠고무줄 말고 이거 하세요⁠. 고무줄은 피가 안 통해요⁠.⁠”

분옥은 보호대를 보았다⁠. 보호대를 집지 않고 펜을 내려 마지막 장에 이름을 썼다⁠. 한 획씩 꾹꾹 눌러 썼다⁠. 엄분옥⁠. 펜을 내려놓고 나서야 보호대를 집어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홍보팀장이 빨간 점퍼를 내밀었다⁠. 레드혼 실버 로고가 등판에 박혀 있었다⁠. 분옥은 점퍼를 받아 꽃무늬 조끼 위에 그대로 걸쳤다⁠. 소매가 손등을 덮었다⁠. 지퍼를 올리자 조끼의 꽃무늬가 목 밑에서 조금 보였다⁠.

“⁠사이즈 하나 작은 걸로 바꿔 드릴까요⁠?⁠”

“⁠됐어⁠. 이 안에 꽃이 있어서 커야 돼⁠.⁠”

남궁석이 처음으로 웃었다⁠. 숫자 없이 웃었다⁠.

*

정오⁠, 분옥이 경로당 현관 유리문을 열었다⁠. 빨간 점퍼를 벗어 팔에 걸치고 있었다⁠. 거실 창 아래에서 춘봉과 진배와 점례가 연습하다 고개를 들었다⁠. 점례의 손이 패드 위에서 굳었다⁠.

분옥은 신발을 벗지 않았다⁠. 신발장 위 칸에서 자기 꽃무늬 실내화를 꺼내 비닐봉지에 넣었다⁠. 창 아래 밥상 위에 놓인 자기 패드를 가지러 들어가려다 멈췄다⁠. 강현이 패드를 들고 현관까지 나왔다⁠.

“⁠이거 구청 거라 두고 가셔야 해요⁠.⁠”

“⁠알아⁠. 손잡이 테이프만 떼 갈게⁠. 그건 내가 감은 거야⁠.⁠”

분옥은 패드 손잡이에 감아 둔 꽃무늬 천 테이프를 손톱으로 긁어 뗐다⁠. 손가락이 미끄러지지 않게 감은 테이프였다⁠. 강현은 패드를 붙든 채 분옥이 다 뗄 때까지 기다렸다⁠. 테이프가 떨어지자 패드는 처음 상자에서 꺼냈을 때처럼 까맣게 되었다⁠.

점례가 패드를 내려놓고 일어났다⁠. 성큼성큼 현관까지 걸어 나왔다⁠.

“⁠언니⁠, 계약했어⁠?⁠”

“⁠했어⁠.⁠”

“⁠오백⁠?⁠”

“⁠오백⁠.⁠”

“⁠언니가 빨간 옷 입고 우리 숨는 데 다 알려 줄 거잖아⁠.⁠”

“⁠안 알려 줘⁠. 계약서에서 그 줄 뺐어⁠.⁠”

“⁠입으로 안 알려 줘도 몸이 알려 주지⁠!⁠” 점례의 목소리가 거실을 쩌렁 울렸다⁠. 화투판 할아버지들이 패를 쥔 채 고개를 들었다⁠. “⁠언니 손이 거기로 가잖아⁠! 다리 밑⁠, 무너진 담⁠, 덤불 세 번째 거⁠. 언니가 다 앉아 본 데야⁠. 우리가 같이 정한 데야⁠!⁠”

“⁠그럼 너네가 다른 데 앉아⁠.⁠”

“⁠언니⁠!⁠”

점례의 눈에서 눈물이 그대로 떨어졌다⁠. 닦지도 않았다⁠. 점례는 휴대전화 두 대를 다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찍지 않았다⁠.

“⁠사십 년이야⁠. 언니 남편 장례식 때 사흘 내리 내가 부엌 봤어⁠. 우리 손녀 돌잔치 때 언니가 떡 해 왔어⁠. 김장을 사십 번 했어⁠. 그런데 언니가 돈 없는 걸 사진으로 알았고⁠, 언니가 나가는 걸 현관에서 알아⁠.⁠”

“⁠점례야⁠.⁠”

“⁠언니는 맨날 혼자 정하고 통보만 해⁠. 화투 칠 때처럼⁠.⁠”

분옥이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진배가 화투 담요에서 일어나 둘 사이로 들어왔다⁠. 손에 화투 한 장을 들고 있었다⁠. 무슨 패인지는 진배도 모르고 집어 든 것이었다⁠.

“⁠둘 다 그만⁠. 여기 경로당이야⁠. 싸울 거면 고스톱으로 싸워⁠.⁠”

“⁠회장님은 빠져⁠!⁠” 둘이 동시에 말했다⁠.

진배가 화투패를 든 채 한 걸음 물러났다⁠. 춘봉이 창 아래에서 바둑알 통을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둘이 말은 잘 맞네⁠.⁠”

아무도 웃지 않았다⁠. 춘봉도 웃지 않았다⁠. 분옥은 실내화 봉지를 들고 현관 턱에서 일어났다⁠. 빨간 점퍼를 팔에서 내려 손에 쥐었다⁠. 유리문을 밀다가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점례야⁠. 손녀 결혼할 때 떡은 내가 할게⁠.⁠”

유리문이 닫혔다⁠. 점례는 신발장 앞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강현은 꽃무늬 테이프가 떨어진 패드를 든 채 서 있었다⁠. 패드 손잡이에 접착제 자국이 끈끈하게 남아 있었다⁠. 화투판 할아버지 하나가 휴지를 두 장 뽑아 와 점례 손에 쥐여 주었다⁠. 점례는 휴지로 코를 팽 풀고 나서 할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한 장 더⁠.⁠” 할아버지가 휴지 곽을 통째로 가져다 점례 무릎에 올려놓았다⁠. 점례는 곽을 끌어안고 한참 더 울었다⁠.

*

오후 세 시⁠, 단톡방이 울렸다⁠. 경로당 거실에 남은 사람들의 휴대전화가 한꺼번에 떨었다⁠. 점례가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보았다⁠. 보고 나서 거실 사람들 쪽으로 화면을 돌렸다⁠. 손이 떨려 화면이 흔들렸다⁠.

「⁠엄분옥 님이 나갔습니다⁠.⁠」

단톡방 이름이 「⁠청춘오락실 (⁠5⁠)⁠」로 바뀌어 있었다⁠. 점례가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엄지로 무언가를 누르려 했다⁠. 초대하기 단추였다⁠. 엄지가 단추 위에서 오래 멈췄다⁠. 누르지 않았다⁠. 점례는 휴대전화를 엎어 놓고 패드를 집었다⁠.

“⁠연습해⁠. 코치님⁠, 연습해⁠.⁠”

“⁠점례 어르신⁠…⁠…⁠.⁠”

“⁠울면서 하면 매복이 더 잘 돼⁠. 눈이 흐려서 덤불이 다 덤불로 보여⁠.⁠”

춘봉이 방패꾼을 다시 움직였다⁠. 진배는 분옥이 앉던 자리⁠, 창 바로 아래 방석에 앉았다⁠. 방석이 분옥의 몸 모양으로 눌려 있었다⁠. 진배는 눌린 자리를 손바닥으로 펴지 않고 그대로 앉았다⁠.

강현은 춘봉이 그려 준 달력 뒷면 지도를 바닥에 펼쳤다⁠. 빨간 동그라미 여섯 개⁠. 바위⁠, 덤불 둘⁠, 무너진 담⁠, 다리 밑⁠, 다리 건너 계단⁠. 하나도 빠짐없이 분옥이 앉아 본 자리였다⁠. 분옥이 고른 자리도 넷이었다⁠. 강현은 빨간 펜을 들고 동그라미 위에 하나씩 가위표를 쳤다⁠. 여섯 개를 다 치자 지도에 남은 자리가 없었다⁠.

“⁠코치⁠, 다 지우면 우리는 어디 앉아⁠?⁠” 춘봉이 물었다⁠.

“⁠새로 찾아야죠⁠.⁠”

“⁠일주일 남았어⁠.⁠”

“⁠네⁠.⁠”

춘봉이 바둑알 통을 흔들었다⁠. “⁠일주일이면 내가 집배원 할 때 새 동네 하나를 다 외웠어⁠. 번지까지⁠. 해 보자⁠, 코치⁠.⁠”

*

저녁 일곱 시⁠, 분옥은 아파트 거실에서 빨간 점퍼를 옷걸이에 걸었다⁠. 옷걸이를 어디에 둘지 몰라 방문 손잡이에 걸었다가⁠, 현관 옷걸이로 옮겼다가⁠, 다시 방문 손잡이로 옮겼다⁠. 꽃무늬 조끼는 벗어서 개켰다⁠. 개킨 조끼를 서랍에 넣으려다 그만두고 식탁 의자 등받이에 걸쳤다⁠.

손목의 노란 고무줄을 풀었다⁠. 살에 붉은 줄이 두 개 패어 있었다⁠. 분옥은 조끼 주머니에서 살색 보호대를 꺼내 손목에 감았다⁠. 찍찍이를 붙이는 소리가 빈 거실에서 크게 났다⁠. 보호대는 따뜻했고 고무줄보다 덜 조였다⁠. 분옥은 보호대 찬 손목을 이리저리 돌려 보다가 혼자 중얼거렸다⁠.

“⁠코치 거랑 똑같네⁠. 색만 다르고⁠.⁠”

휴대전화가 울렸다⁠. 우람이었다⁠.

“⁠할머니⁠, 계약했어요⁠?⁠”

“⁠어떻게 알았어⁠.⁠”

“⁠레드혼 실버 채널에 공지 떴어요⁠. 「⁠청춘오락실 맏언니 엄분옥 선수 영입⁠」 할머니 사진도 있어요⁠. 빨간 옷 입고 계세요⁠.⁠”

분옥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진을 언제 찍었는지 기억해 보았다⁠. 계약서에 이름을 쓰고 점퍼를 걸친 순간⁠, 홍보팀장이 휴대전화를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등록금 됐다⁠. 월요일에 넣어⁠.⁠”

“⁠할머니⁠…⁠…⁠.⁠”

“⁠학교나 다녀⁠. 다음 학기 것도 할머니가 해⁠.⁠”

우람이 한참 말이 없다가 전화를 끊었다⁠. 끊기 전에 숨을 크게 들이쉬는 소리가 났다⁠. 분옥은 휴대전화로 단톡방을 열려다 손가락을 멈췄다⁠. 단톡방 목록에 「⁠청춘오락실⁠」이 없었다⁠. 나온 방은 목록에서 사라졌다⁠. 분옥은 대신 점례의 숏폼 계정을 열었다⁠. 오늘은 새 영상이 없었다⁠. 맨 위에 고정해 둔 영상이 있었다⁠. 오타 자막 「⁠할머니 매볶⁠」 분옥은 영상을 눌렀다⁠. 다리 밑에서 꽃무늬 조끼의 사냥꾼이 기다리고⁠, 「⁠처치⁠」가 뜨고⁠, 점례의 비명이 들렸다⁠. 분옥은 영상을 세 번 돌려 보았다⁠. 세 번째에 점례의 비명 뒤에서 자기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같은 데 세 번 앉으면 광 안 나와⁠.

*

밤 아홉 시⁠, 경로당 불이 하나만 켜져 있었다⁠. 강현은 지도를 붙들고 남아 있었다⁠. 바람골 지도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몇 번이나 짚었다⁠. 분옥이 앉지 않은 자리는 분옥이 안 앉은 이유가 있는 자리였다⁠. 너무 멀거나⁠, 너무 훤하거나⁠, 빠져나올 길이 없었다⁠.

현관 유리문이 열렸다⁠. 진배가 들어왔다⁠. 화투 담요 대신 서류 봉투를 들고 있었다⁠. 진배는 신발을 벗고 거실을 가로질러 와 강현 앞 장판에 앉았다⁠. 돋보기를 이마에서 내려 쓰고 봉투에서 종이를 꺼냈다⁠. 리그 공식 양식이었다⁠.

「⁠선수 변경 신청서 · 팀명⁠: 청춘오락실 · 제외⁠: 엄분옥 (⁠이적⁠) · 추가⁠: 함진배 (⁠후보 → 선수⁠)⁠」

“⁠주무관한테 받아 왔어⁠. 마감이 내일 오전이래⁠.⁠” 진배가 종이를 강현 앞으로 밀었다⁠. “⁠내가 사냥꾼 할게⁠.⁠”

“⁠회장님⁠, 사냥꾼은 조준을 해야 해요⁠. 회장님 아직 연습 인형도⁠…⁠…⁠.⁠”

“⁠알아⁠. 백 개 중에 열 개 맞혀⁠.⁠” 진배가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대신 언제 나오는지는 알아⁠. 빨간 놈들이 언제 죽고 언제 살아나는지⁠. 그거 하나로 해 볼게⁠.⁠”

진배는 돋보기를 다시 이마로 올렸다⁠. 눈을 비볐다⁠. 오늘 밤에는 화투를 치지 않았다고 했다⁠. 패를 섞으려고 담요를 폈는데⁠, 맞은편에 분옥이 앉던 방석이 비어 있어서 도로 갰다고⁠.

“⁠언니는 패를 기다리는 사람이야⁠.⁠” 진배가 말했다⁠. “⁠이번엔 언니가 우리를 기다릴 거야⁠. 다리 밑에서⁠, 무너진 담에서⁠. 우리가 어디로 올지 아니까⁠.⁠”

“⁠네⁠.⁠”

“⁠그럼 우리도 언니를 기다리면 되지⁠. 언니가 어디 앉을지 우리도 아니까⁠.⁠”

강현은 펜을 멈췄다⁠. 가위표가 쳐진 동그라미 여섯 개를 내려다보았다⁠. 분옥이 앉을 자리였다⁠. 분옥이 앉을 줄 아는 자리였다⁠. 강현은 가위표 옆에 파란 펜으로 작은 점을 하나씩 찍었다⁠. 동그라미에서 열 걸음 떨어진 자리⁠, 동그라미의 등 뒤였다⁠.

진배가 넘겨다보았다⁠.

“⁠그게 뭐야⁠?⁠”

“⁠어르신이 기다리시는 자리를 기다리는 자리요⁠.⁠”

진배가 신청서 맨 아래에 서명했다⁠. 함진배⁠. 돋보기를 쓰지 않고 썼는데도 글씨가 반듯했다⁠. 진배는 펜을 내려놓고 창 아래 방석을 손바닥으로 한 번 쓸었다⁠. 분옥의 몸 모양으로 눌린 자리가 그제야 조금 펴졌다⁠.

1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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