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001자) · 두 시 십일 분
기증자 서명
당신을 위한 두 번째 심장 · 문가온
기증자 동의서는 넉 장이었다. 정미경이 이메일로 보낸 양식을 리안은 원룸 부엌 식탁에서 출력했다. 프린터가 한 장 뽑을 때마다 덜컥거렸다. 사월 이십팔일 밤 열한 시. 봉인이 풀리려면 서류 셋, 그 첫 번째였다.
첫 장은 쉬웠다. 이름, 생년월일, 조직형. 수혜자 카드 뒷면을 보고 여섯 자리를 옮겨 적었다. 둘째 장은 기증 대상. 인체유래물 종류: 자가 세포 유래 배양 심장. 기록번호 314. 배양 기관: 새빛오가노이드 연구소. 셋째 장에서 펜이 멈췄다.
세포 채취 경위를 기재하십시오.
리안은 그 칸을 오래 봤다. 칸은 다섯 줄이었다. 칠 년을 다섯 줄에. 그녀는 적었다. 2022년 4월부터 2029년 4월까지 사내 건강검진 시 매년 채혈 30ml. 검진 안내 기준 10ml. 초과분 20ml는 본인 동의 없이 세포 배양에 사용됨. 본인은 2029년 4월 23일 조직 적합 검사로 인지. 다섯 줄이 꽉 찼다. 마지막 글자가 칸 밖으로 삐져나갔다. 그대로 두었다.
넷째 장. 보상.
기증에 대한 금전적 보상 여부 □ 없음 □ 있음(내역: )
천도율이 내민 종이에는 한 건에 천만 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스물아홉 건, 이억 구천. 리안은 없음 칸에 표시했다. 볼펜 끝이 종이를 눌러 뒷장까지 자국이 났다. 그 아래 서명란. 기증자 서명.
펜을 쥔 손이 멈췄다. 이십삼 년 동안 그녀는 받은 사람이었다. 누구에게 받았는지 모르는. 그 칸에 이름을 쓰면 처음으로 준 사람이 된다. 받을 사람의 이름을 아는.
서리안.
세 글자를 쓰는 데 십 초가 걸렸다. 받침 하나하나가 느렸다. 쓰고 나서 부엌 불 아래 그 종이를 들고 오래 앉아 있었다. 가슴뼈 가운데가 따뜻했다. 조이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사월 이십구일 아침, 우편함에 등기가 와 있었다. 새빛바이오 법무팀. 업무 방해와 영업 비밀 누설로 고소를 준비 중이라는 통지. 리안은 그 봉투를 식탁 위 동의서 옆에 나란히 놓았다. 두 종이가 같은 크기였다. 한쪽은 그녀를 기증자라고 불렀고 한쪽은 피의자라고 불렀다. 아홉 시에 문세라에게서 짧은 문자가 왔다. 강목훈 소장 진술서 접수. 열한 장. 나정원 씨 두 번째 진술 오늘 오후. 리안은 그 문자를 두 번 읽고, 등기 봉투를 뜯지 않은 채 가방에 넣었다.
사월 이십구일 오후 네 시. 한결대병원 행정동 칠 층 소회의실. 긴급 윤리 심의는 위원 일곱 가운데 다섯이 왔다. 새벽에 욕을 했다는 위원장은 예순 넘은 여자 교수였다. 돋보기를 코끝에 걸고 동의서 넉 장을 한 장씩 넘겼다. 셋째 장에서 멈췄다. 칸 밖으로 삐져나간 글자에서.
“서리안 씨. 이 세포는 도둑맞은 겁니다. 본인 말로도.”
“예.”
“도둑맞은 걸로 만든 심장을, 지금 와서 본인이 기증한다고 서명하면. 도둑질이 기증이 되는 겁니까?”
리안은 그 질문이 올 줄 알았다. 밤새 답을 준비했다. 준비한 답은 쓰지 않았다.
“아니요. 도둑질은 도둑질이에요. 감사관님이 조사하세요. 저는 그 일에 대해서는 피해자로 설 거예요. 그런데 이 심장은 지금 뛰고 있어요. 모레 오후 두 시 십일 분까지만요. 도둑맞은 걸 되찾을 방법은 없어요. 제 몸에 도로 넣을 수도 없고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이거 하나예요. 어디로 갈지 제가 정하는 거요. 처음으로.”
위원 하나가 손을 들었다. 병원 홍보실장이라고 했다.
“이 건 언론에 나갑니다. 확실히. 그러면 우리 병원이 불법 배양 심장을 받은 병원이 됩니다. 그 부담은 누가 집니까?”
“제가요.”
리안이 말했다.
“기자가 오면 제 이름을 대세요. 서리안이 가져왔다고. 병원은 기증자가 서명한 동의서로 받았다고. 그건 사실이니까요.”
홍보실장이 입을 다물었다.
위원장이 돋보기를 벗었다.
“본인은 이식 수혜자죠. 이십삼 년.”
“예.”
“그 빚을 갚는 겁니까?”
리안은 대답을 고르지 않았다.
“갚을 데를 몰랐어요. 그 집 엄마를 몰라서. 그래서 이십삼 년 동안 빚진 채로 살았어요. 이번에는 받을 사람을 알아요. 열한 살이에요. 이게 갚는 건지는 모르겠어요. 그 집 엄마한테 가는 건 아니니까요. 근데 저는 받은 걸 다른 데로 넘기는 거 말고는 갚는 방법을 몰라요.”
회의실이 조용했다. 위원 하나가 헛기침을 했다. 위원장이 동의서 첫 장으로 돌아가 조직형 여섯 자리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승인합니다. 조건부. 수혜자 보호자 동의가 따로 있어야 해요. 출처를 다 알고도 받겠다는 동의.”
서류 둘. 남은 하나는 병원 수용 확인서였고, 그 확인서에는 보호자 서명이 필요했다.
칠백십이 호. 윤지선은 침대 옆 보호자 의자에 앉아 리안의 동의서 사본을 읽었다. 셋째 장에서 오래 멈췄다. 세아는 잠들어 있었다. 산소 줄이 콧구멍 아래서 가늘게 쉬익거렸다. 모니터 숫자가 낮게 흔들렸다.
“그러니까 이 심장은.”
윤지선이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훔친 거로 만든 거네요. 선생님 피를.”
“저 선생님 아니에요.”
“그럼 뭐라고 해요. 리안 씨.”
“네.”
“만약에요. 넣었는데 나중에 재판에서 이게 불법이라서, 증거라서, 도로 내놓으라고 하면요. 우리 애 가슴에서 꺼내라고 하면요.”
리안은 그 질문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슴이 차가워졌다. 문세라의 말이 떠올랐다. 저는 증거를 지키는 사람이지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증거 조직은 따로 떼어 놨어요. 제가 뗐어요. 봉인했어요. 이 심장은 이제 증거가 아니라 세아 거예요. 누구도 꺼내라고 못 해요. 제가 그 앞에 설게요.”
“어떻게 믿어요?”
리안은 대답 대신 셔츠 단추를 두 개 풀었다. 흉터가 드러났다. 명치에서 쇄골 사이까지 곧게. 이십삼 년 된 하얀 선. 윤지선이 그것을 봤다.
“저도 모르는 사람 거 받았어요. 그 사람 엄마가 저를 믿어서 준 게 아니에요. 아무도 믿을 수 없어서 줬대요. 그냥 살라고.”
윤지선은 흉터를 오래 봤다. 그러다 손을 뻗었다. 멈췄다. 허락을 구하는 눈이었다.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지선의 손바닥이 흉터 위에 닿았다. 조금 차가웠다. 그 손이 거기 그대로 있었다. 십 초. 이십 초.
“뛰네요.”
“뛰어요.”
“남의 건데.”
“이십삼 년 됐으니까 제 거래요. 우리 엄마가 그랬어요.”
침대에서 세아가 뒤척였다. 눈을 반쯤 떴다. 엄마 손이 낯선 사람 가슴에 얹혀 있는 걸 봤다.
“엄마, 뭐 해?”
“아줌마 심장 뛰는 거 보는 거야.”
“나도.”
세아가 손을 뻗었다. 닿지 않았다. 산소 줄이 당겨졌다. 리안이 몸을 숙여 아이 손이 닿게 했다. 작은 손바닥이 흉터 끝에 닿았다. 뜨거웠다. 열이 있는 손이었다.
“진짜 뛴다.”
세아는 그 말을 하고 다시 잠들었다. 손은 떼지 않았다.
윤지선이 웃었다. 우는 얼굴로. 그리고 손을 떼고 수용 확인서에 서명했다. 윤지선. 세 글자가 삐뚤었다.
사월 삼십일 오전 아홉 시. 판교에서 서울까지 구급차로 사십 분. 문세라가 봉인을 풀었다. 리안이 314번을 이송 캐리어에 옮겼다. 관을 하나씩 떼고, 하나씩 다시 이었다. 손이 알았다. 조찬이 구급차 뒷문을 잡았다. 휴가 중에. 편도하가 캐리어 배터리 여분을 들고 탔다. 강목훈은 연구동 뒷문 앞에 서 있었다. 따라오지 않았다. 구급차 문이 닫히기 직전에 그가 한 손을 들었다. 무엇을 보내는 손인지 리안은 알았다.
경부고속도로 서울 방향은 막혔다. 구급차 사이렌에 차들이 조금씩 비켰다. 리안은 캐리어를 두 무릎 사이에 끼고 두 팔로 감쌌다. 투명한 창 너머로 314번이 뛰었다. 분당 육십오. 구급차가 흔들려도 박자를 놓치지 않았다. 리안의 박동은 백십이었다. 캐리어가 흔들릴 때마다 흉터가 울렸다. 한남 나들목 앞에서 구급차가 완전히 섰다. 앞차들이 비킬 자리가 없었다. 사이렌이 혼자 울었다. 편도하가 배터리 표시를 봤다. 칠십 퍼센트. 두 시간은 버틴다. 버틴다는 걸 알면서도 편도하는 여분 배터리를 두 손으로 꼭 쥐고 있었다. 삼 분 뒤 차들이 한 대씩 갓길로 바퀴를 걸쳤다. 틈이 생겼다. 구급차가 그 틈으로 빠져나갔다. 리안은 창밖으로 갓길에 걸친 차들을 봤다. 운전석의 누구도 이 구급차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몰랐다. 그래도 비켰다. 모르는 사람을 위해 비키는 것. 이십삼 년 전 그녀도 누군가가 비켜 준 길로 이 병원에 왔을 것이다.
연구소 3번 방에서 캐리어를 꺼낼 때 리안은 예비 배양기 앞에 잠깐 섰다. 빈 배양기. 여드레 동안 314번이 있던 자리. 배양액 자국이 유리 안쪽에 얇게 말라 있었다. 칠 년 동안 이 방에서 폐기물실로 내려간 것들은 이런 자국을 남기지 않았다. 폐기할 때는 배양기를 바로 소독했으니까. 이번에는 아무도 소독하지 않았다. 리안은 그 자국을 손끝으로 한 번 쓸었다. 유리 바깥쪽에서.
수술은 열한 시에 시작됐다. 리안은 수술실에 들어갈 수 없었다. 기증자는 수술 팀이 아니다. 보호자 대기실에서 윤지선 옆에 앉았다. 대기실은 더웠다. 소아 병동과 같은 이 도. 윤지선이 손수건으로 목덜미를 닦았다. 리안도 닦았다. 둘은 모니터 한 대를 봤다. 수술 진행 표시. 이름 대신 환자 번호.
열두 시 반에 조찬과 편도하가 대기실로 왔다. 조찬은 편의점 봉지를 들고 있었는데, 문 앞에서 멈추더니 봉지를 등 뒤로 숨겼다.
“수술실 앞에서는 참치마요 먹는 거 아니래요. 우리 할머니가.”
“할머니가 수술실도 아세요?”
“할머니는 다 알아요.”
편도하가 윤지선 옆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생수 뚜껑을 따서 건넸다. 윤지선이 받았다. 네 사람이 모니터 한 대를 봤다. 형용사도 농담도 없이.
한 시. 두 시.
두 시 십일 분에 수술실 문이 열렸다. 정미경이 나왔다. 마스크를 내렸다. 흰 머리가 모자 밖으로 삐져나와 땀에 젖어 있었다. 그녀는 윤지선 앞에 서지 않고 리안 앞에 섰다.
“뛰기 시작했어. 두 시 십일 분. 첫 박동이 딸꾹질처럼 왔대.”
리안은 대기실 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윤지선이 옆에서 소리 없이 무너졌다. 리안은 그 어깨를 안았다. 안는 팔이 떨렸다. 가슴뼈 가운데가 뜨거웠다. 거기서 무엇인가가 뛰었다. 이십삼 년 된 남의 것이. 그리고 지금 어느 수술실 안에서, 여섯 주 된 그녀의 것이. 같은 시각에.
두 시 십일 분. 여드레 전 314번이 1번 방 유리 안에서 처음 뛴, 바로 그 시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