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10,831자)
성취했는데 기쁨은 왜 이렇게 짧은가?
쇼펜하우어의 삶 · 네오
1818년 봄, 드레스덴의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서른 살이었고, 네 해 동안 매달린 원고를 막 끝냈다. 원고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이름을 달 책이었고, 그 마지막 부분은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괴로워하는지를 다루었다.
그 무렵 어느 날 그는 드레스덴 궁전 정원의 온실 건물 오랑제리에서 돌아왔다. 겨울을 난 귤나무와 오렌지나무가 한꺼번에 꽃을 피워 온실 안은 꽃의 바다였고, 그는 그 향기에 취한 채 집으로 걸어왔다. 문을 열어 준 집주인 여자가 그의 웃옷에 꽃잎 하나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박사님, 꽃이 피셨네요!”
“그렇지요. 나무가 꽃을 피우지 않으면 어떻게 열매를 맺겠습니까!”[주 9-01]
그는 자기 원고를 열매라고 여겼다. 그 열매를 세상에 내놓을 사람이 필요했다.
*
1818년 3월 28일, 그는 라이프치히의 출판인 프리드리히 아르놀트 브로크하우스에게 편지를 썼다. 브로크하우스는 여러 저자가 항목을 나누어 쓰는 백과사전 『대화 사전』을 펴내 이름난 사람이었다. 드레스덴의 지인 비덴펠트가 다리를 놓았다.[주 9-02]
“내 책은 새로운 철학 체계입니다. 그것도 말 그대로 새롭습니다. 이미 있는 것을 새로 풀어 놓은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어느 누구의 머리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처음부터 끝까지 빈틈없이 이어진 하나의 생각입니다. 내가 확신하기로, 이 책은 뒷날 다른 책 백 권이 거기서 흘러나오고 거기서 시작될 책 가운데 하나가 될 것입니다.”[주 9-02]
그는 조건을 하나하나 적었다. 책은 마흔 장의 인쇄 전지, 곧 큰 종이 마흔 장을 접어 찍어 낼 분량이 될 것이다. 7월 중순에 원고의 삼분의 이를 보내고, 나머지는 9월 초에 보낸다. 가을 미하엘 축일 무렵 라이프치히에서 열리는 책 시장에 맞추어 좋은 종이에 큰 판형으로 찍어 낸다. 많아야 팔백 부만 찍고, 다음 판에 대한 권리는 모두 내놓는다. 한 장 한 장 세 번씩 교정을 보되, 마지막 교정은 그가 인정하는 학자가 한다. 원고료는 인쇄된 전지 한 장에 금화 한 닢으로, 그가 스스로 ‘말할 거리도 안 된다’고 부른 금액이었다. 그 돈은 원고를 넘기는 날 바로 치러야 했다. 원고를 넘기면 그는 곧장 이탈리아로 떠날 생각이었다. 그는 답장을 미루지 말라고 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사람을 시켜 라이프치히의 책 시장에서 다른 출판인을 찾겠다고 덧붙였다.[주 9-03]
사흘 뒤인 3월 31일 브로크하우스는 출판을 받아들였다. 그 답장은 남아 있지 않다. 상회의 편지 사본 장부에는 한 줄만 적혀 있다. 원고 건, 원고의 삼분의 이가 손에 들어오면 원고료를 치른다.[주 9-04]
받아들였다는 소식은 그가 기다리던 것이었다. 4월 8일 그는 답장을 썼고, 첫 문장은 안도였다.
“내 제안을 받아들여 주셔서 무척 기쁩니다. 이제 이 일로 더는 마음 쓰지 않아도 되겠군요.”[주 9-05]
안도는 그 한 문장으로 끝났다. 바로 다음 문장부터 그는 다시 걱정을 적었다. 원고료는 책의 가치에도, 거기 들인 시간과 수고에도 견줄 수 없는 금액이니 자기에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인쇄와 교정에 관한 다른 조건을 정확히 지키는 것이다. 그것이 지켜지리라고 믿을 수 있어야만 알프스 너머에서 마음을 놓을 수 있다. 그러니 계약서를 써 달라. 팔백 부를 넘기지 않고, 둘째 판을 바라지 않고, 미하엘 축일 책 시장에 맞추어 낸다는 것을 문서로 묶어 달라. 그리고 그는 책이 검열을 통과하지 못할까 걱정했다. 책에는 정부를 건드리는 말이 한 마디도 없고 마지막 부분의 도덕은 그리스도교의 도덕과 같지만, 그의 철학 전체는 말없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어긋났다.[주 9-05]
*
브로크하우스의 자리에서 보면 이 편지는 이상하지 않았다. 그는 출판으로 먹고사는 사람이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서른 살이었고, 박사 논문과 색채에 관한 얇은 책 한 권 말고는 낸 것이 없었다. 그런 사람이 아직 보여 주지도 않은 원고를 두고 백 권의 책이 거기서 흘러나올 것이라고 했다. 원고를 미리 볼 수도 없었다. 원고는 그 사람만 읽을 수 있는 글씨로 되어 있고 사본이 없으니 손에서 놓을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브로크하우스는 원고의 삼분의 이가 손에 들어올 때 돈을 치르겠다고 적었다. 검열을 걱정하는 저자를 위해, 그는 검열이 너그럽기로 알려진 작은 공국 알텐부르크에서 책을 찍자고 내놓았다. 계약은 4월 8일 맺어졌다.[주 9-06] 장사꾼의 계산은 정직했다. 위험은 그가 졌다.
쇼펜하우어의 자리에서 보아도 이 편지는 이상하지 않았다. 그는 네 해를 이 원고에 바쳤다. 돈은 아버지의 유산으로 넉넉했고, 그가 바란 것은 돈이 아니라 그 원고가 한 글자도 상하지 않고 정해진 날에 세상에 나오는 일이었다. 원고료를 받는 날 떠나겠다고 한 것도 돈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일이 끝났다는 표시를 원했다.
두 사람의 말은 모두 옳았다. 다만 두 사람이 바라본 것은 같은 원고의 다른 얼굴이었다. 브로크하우스에게 원고는 아직 오지 않은 상품이었고, 쇼펜하우어에게 원고는 이미 끝난 삶의 열매였다. 그리고 그 열매를 손에 쥔 사람은 3월 31일의 기쁨을 4월 8일의 첫 문장에서 다 써 버렸다.
*
성취했는데 기쁨은 왜 이렇게 짧은가? 기쁨은 원하던 것이 채워지는 순간에만 있고, 채워지는 순간 원함도 함께 끝나기 때문에 짧다. 그 봄 그가 브로크하우스에게 넘길 원고 안에 이미 그 말이 들어 있었다. 이 책은 번호를 매긴 짧은 절들이 이어지는 꼴로 되어 있는데, 그 58번째 절을 그는 이렇게 연다.
“모든 만족, 사람들이 흔히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은 본디 그리고 본질에서 언제나 소극적일 뿐이고 결코 적극적이지 않다. 그것은 처음부터 저절로 우리에게 찾아오는 기쁨이 아니라, 언제나 어떤 바람이 채워지는 것이어야 한다. 바람, 곧 모자람이 모든 즐거움에 앞서는 조건이다. 그런데 바람이 채워지면 바람도 끝나고, 따라서 즐거움도 끝난다. 그러므로 만족과 행복은 어떤 아픔, 어떤 곤경에서 풀려나는 것 이상일 수 없다.”[주 9-07]
그는 여기서 ‘소극적’이라는 말을 기분이 가라앉았다는 뜻으로 쓰지 않는다. 무엇이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빠져나가는 것이라는 뜻으로 쓴다. 그의 논증을 차례로 풀면 이렇다.
먼저 전제가 있다. 모든 즐거움은 그보다 앞서 무엇을 바라는 마음이 있을 때에만 생긴다. 바라지 않던 것을 얻으면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이유가 있다. 바란다는 것은 무엇이 모자라다는 것이고, 모자람은 아픔의 한 가지다. 그는 진짜 아픔만이 아니라 조용히 있지 못하게 들쑤시는 모든 바람, 그리고 삶을 짐으로 만드는 권태까지 그 아픔에 넣는다. 그러므로 결론이 나온다. 바람이 채워졌을 때 사람이 얻는 것은 모자람이 사라진 상태, 곧 바라기 전의 상태로 돌아간 것뿐이다. 그는 같은 절에서 다시 말한다. 무엇을 이루기는 어렵고 걸음마다 걸림돌이 쌓이지만, 마침내 모든 것을 넘어서 얻었을 때 얻은 것은 어떤 괴로움이나 바람에서 풀려난 것, 그래서 그 괴로움이 오기 전처럼 지내게 된 것밖에 없다.[주 9-08]
그는 이 논증 위에 한 가지 관찰을 더한다. 우리에게 곧바로 주어지는 것은 언제나 모자람, 곧 아픔뿐이다. 만족과 즐거움은 그 앞의 괴로움과 결핍을 떠올릴 때에만 간접적으로 안다. 그래서 사람은 지금 가진 좋은 것을 좋은 줄 모르고 그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여긴다. 좋은 것은 괴로움을 막아 주는 방식으로만 우리를 기쁘게 한다. 잃고 나서야 그 값이 느껴진다.[주 9-08]
그 관찰은 그 자신에게도 들어맞았다. 그가 원고료를 ‘말할 거리도 안 된다’고 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아버지가 남긴 재산이 있었다. 그 재산은 그가 네 해 동안 아무 직업 없이 원고에만 매달릴 수 있게 해 준 바탕이었다. 그러나 그 네 해 동안 그 재산이 그를 날마다 기쁘게 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것은 늘 거기 있었고, 그래서 그에게는 원래 그런 것이었다. 그가 바라고 애태운 것은 아직 손에 없는 것, 곧 출판인과 계약서와 책 시장이었다.
이 논증을 1818년 4월에 놓아 보면, 3월 31일의 기쁨이 왜 4월 8일의 첫 문장을 넘기지 못했는지가 보인다. 그 기쁨은 ‘받아 줄 출판인이 없으면 어쩌나’ 하는 괴로움이 사라진 자리였다. 괴로움이 사라지자 기쁨이 설 자리도 사라졌다. 그 빈자리에 다른 모자람이 곧바로 들어섰다. 정해진 날에 나올까, 교정이 정확할까, 검열을 통과할까, 알프스 너머에서 마음을 놓을 수 있을까? 그는 앞의 57번째 절에서 이미 그 순서를 적어 두었다. 사람의 삶은 원하는 것과 이루는 것 사이를 흘러간다. 바람은 그 본성에서 아픔이다. 이루고 나면 곧 물리고, 목표는 겉모습이었을 뿐이며, 가지고 나면 매력이 사라진다. 그러면 바람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찾아온다.[주 9-09]
그가 그 순서를 몰랐던 것이 아니다. 그는 그것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계약서 한 장이 알프스 너머의 평온을 가져다주리라고 믿었다. 같은 책의 57번째 절 끝에서 그는 사람이 바람에서 바람으로 쉬지 않고 옮겨 가며, 얻은 만족마다 약속한 만큼 채워 주지 못하고 대개는 곧 부끄러운 착각으로 드러나는데도,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고 썼다.[주 9-10] 그 사람이 1818년 4월에는 그 자신이었다.
*
그렇다고 그가 기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기쁨이 있다고 말한다. 다만 그 기쁨이 바람이 채워지는 기쁨인 한, 그 길이는 바람의 길이를 넘지 못한다고 말한다. 같은 57번째 절에서 그는 삶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순수하다고 할 만한 기쁨을 따로 떼어 놓는다. 그것은 무엇을 얻어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원함 자체에서 잠시 벗어나 아무 이해관계 없이 바라볼 때 오는 기쁨이다.[주 9-09] 그 기쁨이 무엇인지 그는 책의 다른 부분에서 길게 다룬다.
그 구별 앞에서 오랑제리의 날을 다시 보면 질문이 생긴다. 그날 그는 무엇을 얻어서 기뻤던 것이 아니었다. 원고는 아직 아무에게도 넘어가지 않았고, 출판인도 정해지지 않았다. 그는 꽃이 핀 온실을 걸어 나와 꽃잎을 웃옷에 단 채 웃었다. 열매를 맺기 전에 꽃이 피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 기쁨은 채워진 바람이 아니라 아직 바라는 중에 있는 사람의 기쁨이었고, 일 자체가 주는 기쁨이었다. 그의 논증으로 보면 그것은 무엇일까? 고통이 잠시 그친 것일까, 아니면 그가 따로 떼어 놓은 다른 종류의 기쁨일까?
그는 그 물음에 끝까지 깔끔하게 답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자신도 다음 것을 바라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 4월 8일의 편지를 봉하면서 그는 이미 다음 모자람을 세고 있었다. 마흔 장의 전지, 팔백 부, 세 번의 교정, 미하엘 축일, 그리고 알프스. 열매를 손에 쥔 사람은 그 열매를 들고 다음 계절을 기다렸다. 다음 계절이 오면 그는 다시 기뻐할 수 있을까?
후주
[주 9-01] 빌헬름 폰 그비너, 『가까이에서 본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aus persönlichem Umgange dargestellt), 라이프치히: 브로크하우스, 1862, 52쪽. 스캔(archive.org arthurschopenha00gwingoog, PDF 73쪽)으로 대조했다. 1818년 봄, 제4권 집필에 몰두하던 그가 꽃이 만발한 츠빙거의 오랑제리에서 취한 듯 돌아오자 집주인 여자가 웃옷의 꽃을 보고 한 말과 그의 대답은 그비너의 전언이다. 원문은 „Sie blühen Herr Doctor!" „Ja", sagte er, „und wenn die Bäume nicht blühen, wie sollten sie Früchte tragen!" 한국어 의역. 그비너는 그가 「제4권」(das vierte Buch)에 몰두하던 때라고 적는다. 1818년 3월 원고를 마쳤다는 것은 쇼펜하우어 협회 연표 1814~1818년 항목. 오랑제리가 궁전 정원의 온실 건물이고 귤나무가 겨울을 났다는 풀이는 서술자의 말이다.
[주 9-02] 1818년 3월 28일 브로크하우스에게 보낸 편지. 하인리히 에두아르트 브로크하우스, 『프리드리히 아르놀트 브로크하우스, 편지와 기록으로 본 그의 삶과 일』 제2권, 라이프치히: 브로크하우스, 1876, 350~352쪽(archive.org friedricharnold02broc, 흑백 PDF 366~368쪽). 편저자는 쇼펜하우어의 편지를 원본 그대로, 철자와 문장부호까지 살려 찍었다고 밝힌다(350쪽 각주). 인용은 350쪽(PDF 366쪽)을 스캔으로 대조했다. 원문은 Mein Werk also ist ein neues philosophisches System: aber neu im ganzen Sinn des Worts: nicht neue Darstellung des schon Vorhandenen: sondern eine im höchsten Grad zusammenhangende Gedankenreihe, die bisher noch nie in irgend eines Menschen Kopf gekommen. Das Buch … wird, meiner festen Ueberzeugung nach, eines von denen seyn, welche nachher die Quelle und der Anlaß von hundert andern Büchern werden. 한국어 의역이며 가운데 한 구절을 줄였다. 비덴펠트(Hr. v. Biedenfeld)가 다리를 놓았다는 것은 같은 편지 350쪽 첫머리와 352쪽. 브로크하우스가 『대화 사전』을 펴냈다는 것은 쇼펜하우어의 1818년 8월 31일 편지(같은 책 356쪽, Ihre Konversations-Lexikon-Autoren)와 352쪽 각주. 「여러 저자가 항목을 나누어 쓰는 백과사전」이라는 풀이는 서술자의 말이다.
[주 9-03] 같은 편지 351쪽(PDF 367쪽). 조건의 내용은 스캔으로 대조했고 취지를 옮겼다. 40전지, 7월 중순에 삼분의 이, 9월 초까지 나머지, 미하엘 축일 책 시장(Michaelismesse), 많아야 800부, 둘째 판의 권리 포기, 세 번의 교정과 마지막 교정을 맡을 학자, 「말할 거리도 안 되는」(kaum nennenswerthe) 원고료 전지당 1두카트, 원고를 넘길 때 지불, 넘기는 대로 이탈리아로 떠난다는 것, 받아들이지 않으면 라이프치히 책 시장에서 다른 출판인을 찾겠다는 것(352쪽). 「인쇄 전지」의 풀이는 서술자의 말이다.
[주 9-04] 같은 책 352쪽(PDF 368쪽). 편저자의 서술. 스캔으로 대조했다. 원문은 Brockhaus antwortete am 31. März mit Annahme des Verlags; über seinen Brief ist im Copirbuche der Firma nur bemerkt: „Wegen eines Manuscripts; wenn ich zwei Drittel davon in Händen hätte, solle das Honorar erfolgen." 같은 쪽의 편저자 서술은 쇼펜하우어가 그때까지 박사 논문 말고는 『시각과 색채에 관하여』(1816)만 냈다고 적는다.
[주 9-05] 1818년 4월 8일 브로크하우스에게 보낸 편지. 같은 책 353~354쪽(PDF 369~370쪽). 첫 문장은 353쪽을 스캔으로 대조했다. 원문은 Es ist mir recht lieb, daß Sie meinen Antrag angenommen haben und ich nunmehr des ferneren Sorgens dieserhalb überhoben bin. 한국어 의역. 이어지는 원고료·조건·계약서·「알프스 너머에서 마음을 놓는다」(werde ich jenseit der Alpen Ruhe haben) 대목도 353쪽을 스캔으로 대조했고 취지를 옮겼다. 검열 걱정(유대교·그리스도교 교리와의 말없는 어긋남, 마지막 책의 도덕이 그리스도교 도덕과 같다는 것)은 353쪽 아래를 djvu 텍스트로 읽고 취지를 옮겼다(스캔 대조는 재확인).
[주 9-06] 같은 책 354쪽. 계약이 4월 8일 맺어졌고, 검열 갈등을 걱정한 쇼펜하우어를 위해 브로크하우스가 검열이 특히 너그러운 알텐부르크에서 찍고 검열받자고 내놓았다는 것은 편저자의 서술이다(djvu 텍스트, 취지). 원고를 미리 보여 줄 수 없는 까닭(자기만 읽을 수 있고 사본이 없다)은 3월 28일 편지 351~352쪽. 「장사꾼의 계산」 이하 두 사람의 자리에 대한 서술은 편지 내용에서 끌어낸 서술자의 해석이다. 유산으로 생활이 넉넉했다는 것은 [주 1-11].
[주 9-07]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1권 §58 첫머리. 1891년 브로크하우스판(프라우엔슈테트 편), 인쇄 376쪽, PDF 420쪽. 스캔으로 대조했다. 원문은 Alle Befriedigung, oder was man gemeinhin Glück nennt, ist eigentlich und wesentlich immer nur negativ und durchaus nie positiv. Es ist nicht eine ursprünglich und von selbst auf uns kommende Beglückung, sondern muß immer die Befriedigung eines Wunsches seyn. Denn Wunsch, d. h. Mangel, ist die vorhergehende Bedingung jedes Genusses. Mit der Befriedigung hört aber der Wunsch und folglich der Genuß auf. Daher kann die Befriedigung oder Beglückung nie mehr seyn, als die Befreiung von einem Schmerz, von einer Noth. 한국어 의역. 이어지는 「진짜 아픔만이 아니라 우리의 평온을 깨는 모든 바람, 그리고 삶을 짐으로 만드는 권태까지」는 같은 쪽 다음 문장(denn dahin gehört nicht nur jedes wirkliche, offenbare Leiden, sondern auch jeder Wunsch, dessen Importunität unsere Ruhe stört, ja sogar auch die ertödtende Langeweile, die uns das Daseyn zur Last macht)의 취지를 옮겼다.
[주 9-08] 같은 절, 인쇄 376~377쪽, PDF 420~421쪽. 스캔으로 대조했다. 「모든 것을 넘어서 얻었을 때…」는 Wann aber endlich Alles überwunden und erlangt ist, so kann doch nie etwas Anderes gewonnen seyn, als daß man von irgend einem Leiden, oder einem Wunsche, befreit ist, folglich nur sich so befindet, wie vor dessen Eintritt의 취지, 「곧바로 주어지는 것은 모자람뿐」 이하는 Unmittelbar gegeben ist uns immer nur der Mangel, d. h. der Schmerz … Erst nachdem wir sie verloren haben, wird uns ihr Werth fühlbar의 취지를 옮긴 것이다.
[주 9-09] 같은 책 §57, 인쇄 370쪽, PDF 414쪽. 스캔으로 대조했다. Zwischen Wollen und Erreichen fließt nun durchaus jedes Menschenleben fort. Der Wunsch ist, seiner Natur nach, Schmerz: die Erreichung gebiert bald Sättigung: das Ziel war nur scheinbar: der Besitz nimmt den Reiz weg: unter einer neuen Gestalt stellt sich der Wunsch, das Bedürfniß wieder ein의 취지를 옮겼다. 「가장 아름답고 가장 순수한 기쁨」은 같은 쪽 끝(Denn Das, was man sonst den schönsten Theil, die reinsten Freuden des Lebens nennen möchte, eben auch nur, weil es uns aus dem realen Daseyn heraushebt …)의 취지이며, 그 뒤는 371쪽으로 이어진다(371쪽은 읽지 않음, 재확인).
[주 9-10] 같은 책 §57 끝, 인쇄 375~376쪽, PDF 419~420쪽. 스캔으로 대조했다. Denn unermüdlich streben wir von Wunsch zu Wunsch, und wenn gleich jede erlangte Befriedigung, soviel sie auch verhieß, uns doch nicht befriedigt, sondern meistens bald als beschämender Irrthum dasteht, sehen wir doch nicht ein, daß wir mit dem Faß der Danaiden schöpfen의 취지를 옮겼다. 원문의 「다나이스의 독」(그리스 신화에서 벌로 밑 빠진 독에 물을 길어 붓는 딸들)을 「밑 빠진 독」으로 풀었다.
사료에 근거한 것은 1818년 3월의 원고 완성, 오랑제리에서 돌아온 날 집주인과 나눈 말(그비너의 전언), 3월 28일 편지와 그 조건, 3월 31일 브로크하우스의 수락과 편지 사본 장부의 메모, 4월 8일 편지, 알텐부르크 인쇄와 계약 날짜다. 브로크하우스의 편지들은 1876년 그의 손자가 펴낸 전기에 실린 것을 읽었다. 오랑제리 장면의 날짜·꽃·향기의 세부와 편지를 봉하는 장면은 소설의 창작이다. 원고 속 §57·§58은 1818년 봄 그가 끝낸 원고에 들어 있던 대목이지만, 그날 그가 그 대목을 떠올렸다는 것은 서술자의 연결이다. 인용한 판본은 1891년판이며 초판(1818년 말, 표제 연도 1819)과 문구가 다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