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10,437자)
많이 읽었는데 왜 내 생각은 없는가?
쇼펜하우어의 삶 · 네오
1809년 가을, 괴팅겐 대학에 들어간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의학부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자연을 모르고는 아무것도 제대로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첫 학기에는 화학과 물리학과 식물학과 역사 강의를 닥치는 대로 들었다. 두 해 동안 고전을 몰아쳐 익힌 머리에 이번에는 자연과학이 쏟아져 들어왔다.[주 6-01]
그 학기에 그는 고틀로프 에른스트 슐체를 만났다. 슐체는 칸트 철학이 내세운 근거를 의심의 눈으로 하나하나 따진 책 『아이네시데모스』를 써서 이름을 얻은 철학자였다. 쇼펜하우어는 뒷날 자기 삶을 짧게 정리하면서, 슐체 덕분에 철학에 ‘깨어났다’고 썼다. 그리고 그 스승이 준 조언 하나를 적었다. 당분간 모든 힘을 플라톤과 칸트에 쏟고, 이 둘을 다 소화하기 전에는 다른 누구도,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와 스피노자는 보지 말라는 것이었다.[주 6-02] 둘째 학기에 그는 철학부로 옮겼다.[주 6-03]
스승은 그에게 많이 읽으라고 하지 않았다. 둘만 읽되 끝까지 읽으라고 했다.
*
1811년 부활절 방학에 그는 바이마르에 다니러 갔다. 그곳에서 일흔여덟 살의 시인 빌란트가 그를 불렀다. 어머니가 손을 쓴 자리였을 것이다. 빌란트는 무엇을 공부하느냐고 물었고, 철학만 공부하는 것은 말렸다. 그것은 탄탄한 학문이 못 된다고 했다. 스물세 살의 대학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삶은 곤란한 것입니다. 저는 그 삶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면서 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야기가 이어지자 늙은 시인은 마음을 바꾸었다. 이제 당신 성품을 알겠다고, 당신이 옳은 것을 골랐다고, 철학에 머물라고 했다.[주 6-04] 아르투어는 명성 높은 어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는 자기 대답을 내놓았고, 어른이 그 대답을 받아들였다. 그해 가을 그는 베를린 대학으로 갔다.
*
베를린으로 그를 끌어당긴 이름은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였다. 피히테는 칸트 다음의 독일 철학을 이끈다는 평을 듣던 철학자였고, 막 문을 연 베를린 대학의 기둥이었다. 아르투어는 그를 우러르며 강의실에 들어갔다. 그는 ‘의식의 사실들’과 ‘지식학’을 다루는 강의를 들으며, 알아듣기 어려운 그 강의를 이해하려고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쏟았다.[주 6-05] 강의 노트는 촘촘했다. 한 줄도 흘려듣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첫 시간부터 그의 귀에 걸린 말이 있었다. 피히테는 천재와 광기가 서로 가깝기는커녕 정반대 끝에 있다고 했다. 천재는 신적인 것이고, 광기는 짐승의 상태라는 것이었다.[주 6-05] 피히테는 강의와 따로 학생들과 문답하는 시간을 열었다. 아르투어는 그 자리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피히테와 논쟁했다.
“교수님, 천재와 광기가 정반대 끝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천재는 이성이 가장 자유롭게 스스로를 펼친 상태일세. 광기는 이성이 자기를 잃은 상태지. 하나는 정신이 가장 높이 오른 자리고 하나는 가장 낮게 떨어진 자리야. 둘이 어떻게 가까울 수 있겠나?”
“개념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실제 천재들의 삶을 보면 광기와 맞닿은 이가 적지 않습니다. 개념이 경험과 어긋나면, 고쳐야 하는 건 경험이 아니라 개념이 아닙니까?”
“경험은 우연한 것을 보여 줄 뿐이네. 철학은 우연을 모아 필연을 세우지 않아. 의식이 스스로를 세우는 그 행위에서 출발해야 하네.”
“그러면 저는 그 출발점을 어떻게 확인합니까? 교수님이 그렇다고 하시니 그렇다고 받아 적어야 합니까?”
피히테의 말은 그 나름으로 옳았다. 철학이 경험에 나타난 사례를 모아 결론을 내리면, 그 결론은 다음 사례 하나에 무너질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앎이 서 있는 첫 바닥을 찾으려 했다. 아르투어의 말도 옳았다. 아무도 확인할 수 없는 첫 바닥에서 시작한 결론은, 그 결론을 말한 사람의 권위 말고는 기댈 데가 없었다.
그 겨울 그는 자기 노트를 다시 읽다가 알아차렸다. 자기가 받아 적은 많은 문장에 자기는 이미 동의하고 있었다. 이해해서 동의한 것이 아니었다. 피히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서 동의했다. 그는 뒷날 그때의 자기를 이렇게 정리했다. 그의 ‘경험 이전의 존경’은 곧 업신여김과 비웃음으로 바뀌었다.[주 6-05] 칸트가 경험보다 먼저 주어지는 앎을 ‘경험 이전의’ 것이라고 부른 말을 그대로 빌려, 그는 강의를 듣기도 전에 품은 존경을 그렇게 불렀다. 그는 피히테를 만나기 전에 이미 피히테를 믿고 있었다.
같은 해 그는 슐라이어마허의 철학사 강의도 들었다. 신학자 슐라이어마허가 머리말에서 철학과 종교는 서로 없이 있을 수 없고 종교적이지 않은 사람은 철학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하자, 그는 노트 여백에 이렇게 적었다.
“종교적인 사람은 아무도 철학에 이르지 못한다. 그는 철학이 필요 없다. 정말로 철학하는 사람은 아무도 종교적이지 않다. 그는 걸음마 끈 없이 걷는다. 위험하지만 자유롭다.”[주 6-06]
옳든 그르든, 그것은 받아 적은 문장이 아니라 그가 쓴 문장이었다.
*
많이 읽었는데 왜 내 생각은 없는가? 읽는 일은 생각을 대신해 줄 뿐 생각을 낳아 주지 않는다. 읽은 것을 제 생각 안에서 다시 세우지 않으면, 아무리 많이 읽어도 그것은 남이 빌려준 생각으로 남는다.
「스스로 생각하기」는 그가 노년에 묶어 낸 『소품과 부록』 둘째 권의 한 장이다. 책이 나온 1851년은 베를린의 강의실을 떠난 지 마흔 해 만이었다. 이 책도 처음부터 끝까지 번호를 붙인 짧은 절들로 나뉘는데, 그 장의 266번째 절을 그는 이렇게 시작한다.
“읽는 것은 제 생각을 대신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읽는 동안 사람은 자기 생각을 남의 걸음마 끈에 매달아 끌려가게 둔다. 게다가 많은 책은 길을 잘못 들 수 있는 데가 얼마나 많은지, 그 책들을 따라가면 얼마나 심하게 헤맬 수 있는지를 보여 줄 뿐이다. 그러나 타고난 정신이 이끄는 사람, 곧 스스로, 기꺼이, 바르게 생각하는 사람은 바른 길을 찾을 나침반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읽는 것은 제 생각의 샘이 막혔을 때만 해야 한다. 가장 뛰어난 머리에도 그런 때는 자주 온다.”[주 6-07]
마흔 해 전 슐라이어마허의 강의 노트 여백에 썼던 ‘걸음마 끈’이 여기 다시 나온다. 그는 이어서 같은 진리라도 어떻게 얻었느냐에 따라 값이 다르다고 말한다. 그의 논증은 이렇다. 먼저 전제가 있다. 오랜 생각 끝에 얻은 진리를 어떤 책에서 손쉽게 찾을 수도 있었다. 다음은 이유다. 스스로 생각해서 얻은 진리만이 내 생각 전체 안에 살아 있는 한 부분으로 들어가고, 내가 아는 다른 것들과 단단히 이어지며, 그 아래의 근거와 그 뒤의 결과까지 함께 이해된다. 그래서 잊히지 않는다. 마지막은 결론이다. 같은 진리라도 스스로 생각해서 얻은 것이 백 배 값지다.[주 6-07] 그리고 그는 그 차이를 몸에 빗대어 말한다.
“그저 배워 온 진리는 우리에게 덧붙인 의수족이나 의치나 밀랍으로 만든 코처럼, 잘해야 남의 살로 빚은 코처럼, 겉에 붙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해서 얻은 진리는 타고난 팔다리와 같다. 그것만이 정말로 우리 것이다. 생각하는 사람과 그저 많이 아는 학자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주 6-08]
그는 같은 자리에서 순서를 말한다.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은 먼저 제 의견을 세우고, 그 의견을 받쳐 줄 권위자들은 나중에야 알게 된다. 그때 권위는 그의 생각과 그 자신을 굳혀 주는 데 쓰일 뿐이다. 책으로만 철학하는 사람은 거꾸로 권위에서 출발한다. 남의 책을 읽고 남의 의견을 모아 하나로 꿰는데, 그렇게 만든 것은 피와 살이 아닌 것으로 짜 맞춘 자동인형을 닮는다.[주 6-07] 다음 절에서 그는 한 문장으로 줄인다. 읽는다는 것은 제 머리 대신 남의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다.[주 6-08]
이 논증으로 1811년의 강의실을 보면, 노트가 촘촘할수록 그의 생각은 비어 있었다. 피히테의 문장은 그의 노트에 잘 붙어 있었다. 그러나 그 문장들은 그가 아는 다른 것들과 이어져 있지 않았고, 그 근거를 물으면 대답할 수 없었다. 남의 살로 빚은 코였다. 문답 시간에 그가 근거를 물었을 때, 그는 비로소 붙어 있던 것을 떼어 내고 자기 팔다리를 찾기 시작했다.
반년 전 빌란트 앞에서의 대답은 달랐다. 삶은 곤란한 것이고 그래서 그 삶을 생각하며 살겠다는 말은 어느 책에서 옮겨 온 문장이 아니었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과 상회의 책상과 여행길에서 본 감옥을 지나며 그 말에 이르렀고, 그래서 일흔여덟 살 시인의 반대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스스로 얻은 진리는 단단히 서 있고 잊히지 않는다고 그는 뒷날 썼다. 피히테에게서 받아 적은 문장은 근거를 묻는 물음 하나에 흔들렸고, 빌란트 앞의 대답은 반대를 받고도 서 있었다. 많이 아는 것과 제 생각이 있는 것의 차이는 그런 자리에서 드러난다. 반박을 받았을 때 근거를 대며 서 있을 수 있느냐, 아니면 그 말을 처음 한 사람의 이름 뒤로 물러서느냐?
*
그러나 그 장에는 그 자신을 거스르는 것도 들어 있다. 그는 읽는 것을 생각의 대용품이라고 했지만, 그의 철학은 읽기에서 자랐다. 슐체는 그에게 다른 무엇보다 플라톤과 칸트를 읽으라고 했고, 그는 그 말대로 했다. 다만 슐체가 권한 것은 많이 읽기가 아니라 둘을 끝까지 읽기였다. 두 사람을 다 소화하기 전에는 다른 책을 펴지 말라는 조언은, 읽은 것이 제 생각 안에 자리 잡을 때까지 새 생각을 들이지 말라는 말과 같았다. 그는 만년에 자기는 칸트의 철학을 끝까지 생각해 냈을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주 6-09] 그는 권위를 나중에야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칸트라는 권위를 먼저 알았고, 그 위에 제 생각을 세웠다. 266번째 절 자신도 그 길을 막지 않는다. 샘이 막혔을 때는 읽으라고 그는 썼다. 읽기와 생각하기는 원수가 아니다. 문제는 읽은 것을 받아 적는 데서 멈추느냐, 그것을 제 생각 안에서 다시 세우느냐다.
또 하나가 남는다. 피히테에 대한 그의 존경은 업신여김으로 바뀌었고, 그는 늘그막까지 피히테의 말투를 흉내 내며 비웃었다.[주 6-05] 그런데 비웃음도 존경처럼 근거보다 먼저 올 수 있다. 피히테의 모든 문장을 받아 적던 학생이 이번에는 피히테의 모든 문장을 지워 버렸다면, 그것은 제 생각이었는가, 다른 권위인 칸트를 따라간 것이었는가? 그가 한때 성직자 나부랭이라고 깎아내린 슐라이어마허에게서도, 그는 대학에서는 나중에 배워야 할 것을 배울 뿐이라는 말 하나만은 평생 칭찬했다.[주 6-09]
1811년 겨울 베를린의 하숙방에서 그는 피히테의 강의 노트를 덮고 칸트의 책을 폈다. 이번에는 문장마다 여백에 물음을 적었다. 내 생각은 남을 다 지운 자리에서 생기는가, 남의 생각을 끝까지 따라가 본 자리에서 생기는가?
후주
[주 6-01] 1809년 괴팅겐에서 처음 의학부에 이름을 올리고 자연과학 강의를 들은 것은 빌헬름 폰 그비너, 『가까이에서 본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라이프치히: 브로크하우스, 1922, 42쪽(Weil ihm das Studium der Naturwissenschaften vor allem unerlässlich schien, liess er sich in die medizinische Fakultät einschreiben). 인터넷 아카이브 전사본(archive.org/details/arthurschopenhau00gwin). 프랑크푸르트 대학 도서관 연표 1809년 항목도 같다. 첫 학기에 들은 과목 이름은 그비너가 든 교수 이름들(Blumenbach, Stromeyer, Schrader, Heeren 등)에서 소설이 과목으로 풀어 쓴 것이다.
[주 6-02] 그비너 같은 책 42~43쪽. 슐체가 『아이네시데모스』의 저자라는 것, 슐체를 통해 철학에 깨어났다는 것(zur Philosophie auferweckt), 「당분간 모든 힘을 플라톤과 칸트에 쏟고, 이 둘을 다 소화하기 전에는 다른 누구도,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와 스피노자는 보지 말라」(allen Fleiss fürs erste auf Platon und Kant zu verwenden und ehe diese bewältigt seien keinen andern, namentlich nicht Aristoteles und Spinoza anzusehen)는 쇼펜하우어가 백과사전용으로 쓴 자기 생애 개요를 그비너가 인용한 것이다. 간접 인용으로 의역. 쇼펜하우어 협회 연표 1809~1811년 항목(Der Philosoph G. E. Schulze weist Schopenhauer auf Platon und Kant hin)과 스탠퍼드 철학 백과 항목도 같다. 『아이네시데모스』를 칸트 철학의 근거를 따진 책으로 푼 것은 서술자의 설명이다.
[주 6-03] 프랑크푸르트 대학 도서관 연표 1809년 항목(Arthur schreibt sich zunächst in der Medizinischen Fakultät vom zweiten Semester an in der Philosophischen Fakultät ein).
[주 6-04] 1811년 부활절 방학 바이마르 방문과 빌란트와의 만남, 「삶은 곤란한 것입니다…」라는 대답은 쇼펜하우어 협회 연표 1809~1811년 항목(Schopenhauer zu Wieland: Das Leben ist eine mißliche Sache: ich habe mir vorgesetzt, es damit hinzubringen, über dasselbe nachzudenken). 빌란트가 철학이 탄탄한 학문이 못 된다며 말렸다가 「이제 당신 성품을 알겠다, 옳은 것을 골랐다, 철학에 머물라」고 한 것, 일흔여덟 살이었다는 것, 어머니가 손을 썼을 것이라는 짐작은 그비너 같은 책 44쪽(wohl auf Betrieb seiner Mutter … Ja, es scheint mir jetzt selbst, Sie haben das Rechte gewählt, junger Mann; ich verstehe jetzt Ihre Natur, bleiben Sie bei der Philosophie). 아르투어의 대답은 기록된 말의 의역이며, 빌란트의 말은 간접 인용이다. 그비너는 이 이야기를 쇼펜하우어 자신의 입에서 들었다고 각주에 밝힌다.
[주 6-05] 그비너 같은 책 45~46쪽. 피히테의 명성에 끌려 베를린에 간 것, 「의식의 사실들」과 「지식학」 강의를 이해하려 가장 성실한 노력을 쏟은 것, 피히테의 콜로키움에서 아주 열심히 논쟁한 것(disputierte auch mit Fichte in dessen Kolloquien auf das eifrigste), 「경험 이전의 존경이 업신여김과 비웃음으로 바뀌었다」(bald aber wich „die Verehrung a priori" … „der Geringschätzung und dem Spotte")는 그의 생애 개요의 말, 첫 시간에 천재와 광기를 정반대 끝에 둔 피히테의 주장(dem „göttlichen Genie" setzte Fichte den Wahnsinn als tierischen Zustand entgegen), 늘그막까지 피히테를 흉내 내며 비웃은 것, 1810·1811년 강의 노트가 남아 성실함을 보여 준다는 것은 그비너의 서술이다. 쇼펜하우어 협회 연표 1811~1813년 항목(Verehrung für J. G. Fichte und Fr. Schleiermacher schlägt auf Grund von deren Vorlesungen in Geringschätzung und Widerspruch um)도 같다. 문답 시간의 대화와 대사, 논쟁 주제를 천재와 광기로 정한 것, 노트를 다시 읽다 알아차린 장면은 소설의 창작이다. 피히테의 대사는 그가 천재를 이성의 신적 상태로, 광기를 짐승의 상태로 둔 기록과 의식의 자기 정립에서 출발하는 지식학의 일반적 입장에 근거했다.
[주 6-06] 그비너 같은 책 46쪽. 슐라이어마허의 「그리스도교 시대 철학사」 강의 머리말에 대해 노트 여백에 적은 글(Keiner, der religiös ist, gelangt zur Philosophie: er braucht sie nicht; keiner der wirklich philosophirt, ist religiös; er geht ohne Gängelband, gefährlich, aber frei!). 인터넷 아카이브 전사본으로 확인했고 쪽 그림 대조는 하지 않았다(재확인). 한국어 의역. 강의를 들은 해를 그비너는 밝히지 않아 베를린 첫해로 두었다.
[주 6-07] 쇼펜하우어, 『소품과 부록』 제2권 제22장 「스스로 생각하기」 §266. 1891년 브로크하우스판(전집 제6권), 인쇄 528쪽, PDF 538쪽. 스캔으로 대조했다. 인용 원문은 Lesen ist ein bloßes Surrogat des eigenen Denkens. Man läßt dabei seine Gedanken von einem Andern am Gängelbande führen. Zudem taugen viele Bücher bloß, zu zeigen, wie viel Irrwege es giebt und wie arg man sich verlaufen könnte, wenn man von ihnen sich leiten ließe. Den aber der Genius leitet, d. h. der selbst denkt, freiwillig denkt, richtig denkt, — der hat die Boussole, den rechten Weg zu finden. — Lesen soll man also nur dann, wann die Quelle der eigenen Gedanken stockt; was auch beim besten Kopfe oft genug der Fall seyn wird. 한국어 의역. 전제·이유·결론으로 푼 대목(Wenn man auch bisweilen eine Wahrheit … hätte mit Bequemlichkeit in einem Buche ganz fertig vorfinden können; so ist sie doch hundert Mal mehr werth, wenn man sie durch eigenes Denken erlangt hat. Denn nur alsdann tritt sie als integrirender Theil, als lebendiges Glied, ein in das ganze System unserer Gedanken …)은 같은 쪽 아래의 취지를 옮긴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은 권위를 나중에 안다 … 자동인형」 대목은 528쪽 아래~529쪽 위로, 528쪽 아래는 스캔으로 읽지 못하고 영문 대조본과 529쪽 첫 줄(jenes andere hingegen einem lebenden erzeugten Menschen)로 위치만 확인했다(취지, 재확인). 『소품과 부록』은 1851년에 나왔다.
[주 6-08] 같은 절과 §267, 인쇄 529쪽, PDF 539쪽. 스캔으로 대조했다. 인용 원문은 Die bloß erlernte Wahrheit klebt uns nur an, wie ein angesetztes Glied, ein falscher Zahn, eine wächserne Nase, oder höchstens wie eine rhinoplastische aus fremdem Fleische; die durch eigenes Denken erworbene aber gleicht dem natürlichen Gliede: sie allein gehört uns wirklich an. Darauf beruht der Unterschied zwischen dem Denker und dem bloßen Gelehrten. 한국어 의역. §267 첫 문장 Lesen heißt mit einem fremden Kopfe, statt des eigenen, denken은 간접 인용으로 옮겼다.
[주 6-09] 그비너 같은 책 65쪽 무렵(ausser Kant, dessen Philosophie er nur ausgedacht zu haben erklärte)과 47쪽(wurde nicht müde, den Satz desselben zu loben: auf Universitäten lerne man nur, was man nachher zu lernen habe — 앞 문맥상 슐라이어마허의 말). 둘 다 그비너가 전한 쇼펜하우어의 말이며 인터넷 아카이브 전사본으로 읽었다. 65쪽은 전사 텍스트의 다음 쪽 표시(66)로 셈한 것이라 재확인. 슐라이어마허를 「성직자」라고 깎아내린 것(schalt Schleiermacher einen Pfaffen)은 46쪽.
사료에 근거한 것은 괴팅겐에서 의학부로 들어가 자연과학을 듣고 둘째 학기에 철학부로 옮긴 일, 슐체의 조언, 1811년 빌란트와 나눈 말, 베를린에서 피히테 강의를 성실히 듣고 콜로키움에서 논쟁한 일, 천재와 광기에 관한 피히테의 주장, 존경이 업신여김으로 바뀐 일, 슐라이어마허 강의 노트의 여백 글이다. 피히테와의 문답 장면과 대사, 노트를 다시 읽다 알아차린 장면, 마지막 문단의 하숙방과 칸트의 책은 소설의 창작이다. 1851년의 『소품과 부록』은 스물세 살 학생의 생각이 아니라 예순세 살의 저작으로 비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