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10,200자)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나를 모를 때
쇼펜하우어의 삶 · 네오
1807년 가을, 바이마르의 요한나 쇼펜하우어 집에는 일주일에 두 번 손님이 모였다. 시인 괴테가 왔고, 일흔이 넘은 시인 빌란트가 왔고, 로마에서 오래 살다 온 미술 평론가 페르노프가 왔다. 남편이 죽고 바이마르로 옮겨 온 지 한 해 만에 그녀의 응접실은 그 도시에서 가장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방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손님들에게 차와 버터 바른 빵만 내놓았는데도 손님들은 빠지지 않고 왔다.[주 4-01]
그 가을, 아들 아르투어가 며칠씩 그 집에 다니러 왔다. 그해 여름부터 그는 이웃 공국의 도시 고타에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우고 있었다. 열아홉 살이었다.
아들이 오면 응접실의 공기가 달라졌다. 손님들이 연극과 그림과 새로 나온 책을 이야기하는 사이에 아들은 세상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사람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말했다. 누가 반대하면 그는 끝까지 따졌다. 그의 판단은 신탁처럼 단호했고, 거기에 토를 달 틈이 없었다. 요한나는 웃는 얼굴로 손님을 대하면서 속으로는 아들의 말을 받아치고 싶은 것을 꾹꾹 눌렀다. 아들이 올 때마다 그 일이 되풀이되었다.[주 4-02]
*
손님들이 돌아간 밤이었다. 찻잔이 치워지지 않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아르투어, 오늘 저녁 너는 손님들 앞에서 세 번이나 세상을 어리석다고 했다.”
“세상이 어리석으니 어리석다고 했습니다. 어머니의 손님들은 전쟁이 지나간 도시에서 연극 이야기를 합니다. 작년 이맘때 이 도시 길바닥에 시체가 쌓여 있었다는 건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 길바닥을 본 사람은 나다. 너는 함부르크에 있었고 나는 여기 있었어. 내가 부상병에게 빵과 포도주를 날랐다. 그걸 겪고 나서 나는 사람들이 모여 웃을 수 있는 방 하나를 만들기로 했다. 그게 그렇게 어리석으냐?”
“어리석다는 게 아닙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시는 게 보기 힘들다는 겁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러셨습니다.”
요한나의 얼굴이 굳었다.
“너는 모든 일을 그렇게 한 가지 눈으로만 본다. 나는 네가 사람의 비참을 곱씹기 좋아한다는 걸 안다. 그래서 내가 본 것을 다 써 보내지도 않았다. 그런데 너는 네가 본 비참을 남들도 똑같이 짊어지지 않으면 그 사람을 경박하다고 한다.”
“저는 어머니께 짊어지시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이해해 주시기를 바랐을 뿐입니다.”
“이해한다. 네가 이 세상과 네 살갗 안에서 편하지 않다는 걸 나만큼 아는 사람이 또 있겠니? 하지만 이해한다고 해서 내가 너처럼 살아야 하는 건 아니다.”
두 사람은 각자 옳았다. 요한나는 남편이 죽은 뒤 처음으로 자기 손으로 삶을 꾸리고 있었고, 아직 어린 딸을 키워야 했다. 그녀에게 응접실은 사치가 아니라 새 도시에서 살아남는 길이었고, 웃음은 슬픔을 모르는 표시가 아니라 슬픔을 겪은 뒤에 고른 것이었다. 아르투어는 아버지를 잃고 미워하던 상회에서 두 해를 버틴 끝에 겨우 공부를 시작한 참이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웃는 손님들이 아니라 자기 고통을 알아보는 한 사람이었고, 그 한 사람이 어머니이기를 바랐다. 어머니는 아들을 알아보았다. 다만 아들이 바라는 방식으로 알아보지 않았다.
그해 봄 요한나는 함부르크의 아들에게 이렇게 쓴 적이 있었다. 너는 지금 바로 무엇에든 온전히 기댈 수 있는 사람이 가장 필요한데, 어쩌면 나 혼자만 너를 이해하고 참을성 있게 들어 주고 달래 줄 수 있을 텐데, 그 사람이 너와 떨어져 있다고. 그리고 지금은 내가 틀린 것처럼 보이겠지만, 한 해 뒤 이 편지를 다시 읽으면 달리 보일 거라고 썼다.[주 4-03] 그 한 해가 지났다. 어머니는 이제 아들 곁에 있었고, 두 사람은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더 멀어졌다.
*
그해 12월 아르투어는 고타를 떠나 바이마르에서 공부를 이어 가기로 했다. 어머니가 사는 도시였다. 12월 13일, 요한나는 아들에게 긴 편지를 보냈다. 같은 도시에 살게 될 아들에게 그녀는 말이 아니라 글로 조건을 내걸었다.
“네가 여기서 나와 어떻게 지낼지에 대해서는, 돌려 말하지 않고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내 마음이 어떤지를 바로 말하는 게 좋겠구나. 그래야 서로를 곧바로 알아들을 수 있을 테니까. 내가 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건 너도 의심하지 않을 거다. 나는 평생 그것을 보여 주었다. 네가 행복하다는 걸 아는 것은 내 행복에 꼭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되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 너와 함께 사는 것은 몹시 어렵다고 나는 늘 말했다. 너를 가까이서 볼수록 그 어려움은, 적어도 나에게는, 더 커지는 것 같다.”[주 4-04]
그녀는 이어서 무엇이 어려운지를 하나하나 적었다. 네 좋은 점을 모르지 않는다. 나를 너에게서 물러서게 하는 것은 네 마음씨나 속이 아니라 네 바깥의 모습, 네 견해와 판단과 버릇이다. 세상일에 관해서라면 나는 너와 어느 것 하나 뜻이 맞지 않는다. 네가 며칠 다니러 올 때마다 별것 아닌 일로 거친 말다툼이 났고, 네가 떠나야 비로소 숨을 편히 쉬었다. 피할 수 없는 일을 두고 늘어놓는 네 한탄, 어두운 얼굴, 아무도 반박하면 안 되는 신탁처럼 내리는 네 괴상한 판단이 나를 짓눌렀다.[주 4-04] 그리고 그녀는 지금의 자기 삶을 그렸다.
“나는 지금 아주 조용하게 산다. 한 해가 넘도록, 너 때문이 아닌 불쾌한 순간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혼자 조용히 지내고, 아무도 내게 반대하지 않고, 나도 아무에게 반대하지 않는다. 우리 집에서는 큰 소리가 나지 않는다. 모든 일이 한결같이 제 길을 가고, 나는 나대로 내 길을 간다. 이것이 내 진짜 삶이고,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 네가 내 남은 해들의 평안과 행복을 아낀다면.”[주 4-04]
그리고 조건이 왔다. 네 집은 네 하숙이다. 내 집에서 너는 손님이다. 반가운 손님이고 언제나 따뜻하게 맞을 손님이지만, 살림에는 끼어들지 않는 손님이다. 손님 모이는 날 저녁에 와서 먹어도 좋다. 다만 그 자리에서 지긋지긋한 논쟁도, 어리석은 세상과 사람의 비참에 대한 한탄도 하지 않겠다면. 그런 이야기를 들은 밤에는 잠을 설치고 나쁜 꿈을 꾸는데, 나는 잘 자고 싶다.[주 4-04]
아르투어는 어머니 집에 들어가 살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 고전 학자 프란츠 파소의 집에 방을 얻었다.[주 4-05]
*
가족인데 왜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가? 가족은 마음을 알아도 그 마음대로 살아 주지 않는다. 알아주지 않는다는 서운함의 상당 부분은, 알아준 사람이 내 뜻대로 바뀌지 않는다는 데서 온다.
노년의 그가 쓴 처세의 글 「인생의 지혜를 위한 아포리즘」의 다섯째 장은 살아가며 붙들 원칙들을 번호를 매겨 늘어놓는다. 그 글이 실린 『소품과 부록』이 나온 것은 1851년, 그가 예순셋이 되던 해였다. 그중 ‘남을 대하는 태도’를 다룬 대목에서 그는 이렇게 쓴다.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은 어떤 개성도, 그것이 자연이 한번 정해 준 것인 한, 덮어놓고 내쳐서는 안 된다. 가장 못되고 가장 딱하고 가장 우스운 개성이라도 그렇다. 그는 오히려 그것을 바꿀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는 부당한 일을 하는 것이고, 상대에게 죽기 살기로 싸우자고 덤비는 셈이 된다. 누구도 자기 본래의 개성, 곧 자기 도덕적 성격과 인식 능력과 기질과 얼굴 생김새를 바꿀 수 없다. 우리가 그의 됨됨이를 통째로 단죄하면 그에게는 우리를 원수 삼아 싸우는 길밖에 남지 않는다. 그가 결코 될 수 없는 다른 사람이 된다는 조건으로만 그가 살아갈 권리를 인정해 주겠다는 것과 같다.”[주 4-06]
그의 논증은 세 걸음이다. 첫째, 사람의 성격과 능력과 기질은 바뀌지 않는다. 둘째, 바뀌지 않는 것을 바뀌라고 요구하면, 그 요구는 상대가 지금 모습으로 있을 권리를 빼앗는 일이 된다. 셋째, 그래서 함께 살려면 상대를 그 사람 그대로 두고 인정해야 하며, 그를 바꾸기를 바라지도, 통째로 단죄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는 이것이 ‘살고 또 살게 하라’는 속담의 참뜻이라고 말한다.
그 잣대로 1807년 12월의 편지를 다시 읽으면 두 사람이 서로에게 한 일이 보인다. 아들은 어머니가 아버지를 잃고도 빨리 웃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것은 어머니의 기질을 통째로 단죄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네가 지금 모습으로 있는 한” 함께 살 수 없다고 썼다. 그것은 아들의 됨됨이를 바꾸라는 요구였다. 두 사람은 같은 잘못을 서로에게 했다. 상대가 다른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녀가 내건 조건은 바로 그 원칙을 따르고 있었다. 너는 너의 하숙에서 너로 살고, 나는 내 집에서 나로 산다. 서로의 살림에 끼어들지 않는다. 그는 같은 대목에서, 이 일은 옳은 만큼 쉽지는 않으며 많은 개성을 영영 피할 수 있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이라고 덧붙인다.[주 4-06] 상대를 바꿀 수 없을 때 남는 길은 거리다. 요한나는 아들을 바꾸려다 실패하고 거리를 골랐다. 거리를 두는 것은 미움이 아니라, 미워하지 않으려는 마지막 방법일 수 있었다.
이해하는 것과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같지 않다. 그는 개성을 인정하라고 했지, 그 사람이 하는 일을 모두 옳다고 하라고 하지 않았다. 손님들 앞에서 남의 말을 끊고 신탁처럼 판결하는 버릇은 성격이 아니라 행동이었고, 어머니는 그 행동을 거절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거절한 것은 아들의 됨됨이였는가, 아들의 행동이었는가? 그녀의 편지에는 둘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아들의 속을 탓하지 않는다고 쓰면서도, 아들이 지금 모습인 한 함께 살 수 없다고 썼다.
*
같은 장에서 그는 한 걸음 더 나간다. 누구도 자기보다 높이 보지 못한다. 사람은 남에게서 자기 자신이 지닌 만큼만 본다. 그래서 남을 평가하는 일은 언제나 평가받는 사람의 값과 평가하는 사람의 눈높이를 곱한 것이 된다고 그는 쓴다.[주 4-07] 그는 이 말을 대개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두고 썼다.
그러나 그 말은 거꾸로도 선다. 어머니가 아들의 깊이를 보지 못했다면, 아들도 어머니에게서 자기 눈높이만큼만 보았다. 그는 어머니의 응접실에서 경박함을 보았다. 그는 그 방이 남편을 잃은 여자가 전쟁을 겪은 낯선 도시에서 처음으로 자기 손으로 지은 삶이라는 것은 보지 못했다. 그 방에 모인 괴테와 빌란트와 페르노프가 자기 삶에서 얼마나 큰 몫을 하게 될지도 아직 몰랐다. 인정받지 못했다는 상처는 상대를 한 사람으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 아들의 눈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잊은 과부였고, 어머니의 눈에 아들은 잠을 설치게 하는 손님이었다.
열아홉 살의 아르투어는 그 편지를 들고 파소의 집으로 갔다. 그가 바란 것은 어머니가 자기 슬픔을 함께 지는 것이었고, 어머니가 준 것은 손님 자리 하나였다. 그 자리가 거절인지 배려인지 그는 끝내 가르지 못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나를 모른다고 느낄 때, 나는 그 사람을 알고 있는가?
후주
[주 4-01] 요한나의 응접실에 일주일에 두 번 괴테·빌란트·페르노프 등이 모였다는 것은 빌헬름 폰 그비너, 『가까이에서 본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라이프치히: 브로크하우스, 1922, 35~36쪽(Ihr Salon versammelte wöchentlich zweimal Männer wie Goethe, Wieland, Heinrich Meyer, Falk, Fernow …). 인터넷 아카이브 전사본(archive.org/details/arthurschopenhau00gwin). 차와 버터 바른 빵만 내놓았다는 것은 셰만 편 『쇼펜하우어 서신집』(1893) 49쪽, 1806년 10월 24일 편지 무렵(ich gebe ihnen Thee und Butterbrod im strengsten Verstande des Worts)의 OCR로 읽은 것이며 스캔 대조는 하지 않았다(재확인). 페르노프가 로마에서 오래 살았다는 것은 같은 서신집 53쪽(Göthe, Fernow und Meyer die lange in Italien waren), 스캔 PDF 105쪽으로 대조. 프란츠 파소는 [주 4-05]. 「1807년 가을」의 방문 날짜와 그날 저녁의 손님 구성은 자료에 없어 소설이 배치했다. 1806년 가을 바이마르 길에 시체가 며칠씩 쌓여 있었다는 대사의 근거는 같은 서신집 47쪽, 1806년 10월 19일 편지(hoch auf einander gethürmt, Tage lang auf der offenen Straße), 스캔 PDF 99쪽 대조.
[주 4-02] 아들이 며칠씩 다니러 올 때마다 다툼이 났고, 세상과 사람의 비참을 한탄하고, 신탁처럼 판결했고, 어머니가 반박하고 싶은 것을 억눌렀다는 것은 1807년 12월 13일 요한나의 편지 내용이다([주 4-04]). 고타에서 공부한 것은 쇼펜하우어 협회 연표 1807~1809년 항목(im Juni 1807 wird er Schüler des Gymnasialdirektors Doering in Gotha).
[주 4-03] 셰만 편 『쇼펜하우어 서신집』 58쪽, 1807년 3월 10일 편지. 스캔 PDF 110쪽을 그림으로 떠서 대조했다. 원문은 Daß dir in der Welt und in deiner Haut nicht wohl ist … ich allein vielleicht verstehe dich, und könnte dich geduldig anhören und dir rathen und dich trösten, und fehle dir gerade jetzt da du ein Wesen an das du dich mit vollem Vertrauen wenden kannst am nöthigsten hast … Es kommt dir jetzt vor als ob ich Unrecht hätte, auch das ist natürlich und wird sich auch geben, wenn dir vielleicht nach einem Jahr diese Zeilen wieder in die Hände fallen. 간접 인용으로 의역. 저녁 장면에서 어머니가 하는 「이 세상과 네 살갗 안에서 편하지 않다」는 대사는 이 편지의 말을 대사로 옮긴 창작이다. 「사람의 비참을 곱씹기 좋아한다」는 대사도 같은 서신집 47쪽, 1806년 10월 19일 편지(denn ich kenne ohnehin wie gerne du über das Elend der Menschen brütest, 스캔 PDF 99쪽 대조)를 대사로 옮긴 것이다.
[주 4-04] 1807년 12월 13일 요한나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 그비너 같은 책 38~40쪽에 실린 것을 인터넷 아카이브 전사본으로 읽었다(쪽 그림 대조는 하지 않음, 재확인). 첫 인용의 원문은 Nun zu deinem Verhältnisse hier gegen mich, und da dünkt mir es am besten, ich sage dir gleich ohne Umschweife was ich wünsche und wie es mir ums Herz ist, damit wir einander gleich verstehen. Dass ich dich recht lieb habe, daran zweifelst du nicht, ich habe es dir bewiesen so lange ich lebe. Es ist zu meinem Glücke nothwendig zu wissen, dass du glücklich bist, aber nicht ein Zeuge davon zu sein. Ich habe dir immer gesagt, es wäre sehr schwer mit dir zu leben, und je näher ich dich betrachte, desto mehr scheint diese Schwierigkeit, für mich wenigstens, zuzunehmen. 둘째 인용은 Ich lebe jetzt sehr ruhig … Dies ist mein eigentliches Dasein und so muss es bleiben, wenn dir die Ruhe und das Glück meiner noch übrigen Jahre lieb ist. 모두 한국어 의역. 그 사이와 뒤의 간접 인용(좋은 점을 모르지 않는다, 바깥의 모습과 견해와 판단과 버릇, 다툼과 숨, 한탄과 어두운 얼굴과 신탁 같은 판단, 하숙과 손님, 논쟁과 한탄을 삼가면 저녁에 와도 좋다, 잠을 설친다)도 같은 편지의 의역이다. 「너 때문이 아닌 불쾌한 순간은 한 번도 없었다」는 seit Jahr und Tag habe ich keinen unangenehmen Augenblick gehabt, den ich dir nicht zu danken hätte를 의역한 것이다.
[주 4-05] 어머니의 뜻에 따라 어머니 집에 들어가지 않은 것, 그리스 고전 학자 파소의 집에 살며 그의 지도를 받은 것은 그비너 같은 책 38·41쪽(Jedoch zog er nicht in die Wohnung seiner Mutter, und zwar nach deren ausgesprochenem Willen; er wohnte in dessen Hause). 쇼펜하우어 협회 연표 1807~1809년 항목도 바이마르의 가장 중요한 스승으로 프란츠 파소를 꼽는다.
[주 4-06] 쇼펜하우어, 『소품과 부록』 제1권 「인생의 지혜를 위한 아포리즘」 제5장 「훈계와 준칙」 C 「남을 대하는 태도에 관하여」 21번. 1913년 에른스트 올레판 전자 전사,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47406번, 장별 파일 A5. 인용 원문은 Wer unter Menschen zu leben hat, darf keine Individualität, sofern sie doch einmal von der Natur gesetzt und gegeben ist, unbedingt verwerfen; auch nicht die schlechteste, erbärmlichste oder lächerlichste. … Hält er es anders; so tut er Unrecht und fordert den andern heraus zum Kriege auf Tod und Leben. Denn seine eigentliche Individualität, d. h. seinen moralischen Charakter, seine Erkenntniskräfte, sein Temperament, seine Physiognomie usw. kann keiner ändern. Verdammen wir nun sein Wesen ganz und gar; so bleibt ihm nichts übrig, als in uns einen Todfeind zu bekämpfen: denn wir wollen ihm das Recht zu existiren nur unter der Bedingung zugestehn, daß er ein anderer werde, als er unabänderlich ist. 한국어 의역(「in den argen Fällen … Käuze」 구절은 줄임). 세 걸음의 정리, 「살고 또 살게 하라」(leben und leben lassen), 「옳은 만큼 쉽지 않으며 … 영영 피할 수 있는 사람은 복 받았다」(Die Aufgabe ist indessen nicht so leicht, wie sie gerecht ist, und glücklich ist zu schätzen, wer gar manche Individualitäten auf immer meiden darf)는 같은 번호의 취지를 옮긴 것이다. 『소품과 부록』은 1851년에 나왔다.
[주 4-07] 같은 장 23번 「누구도 자기보다 높이 보지 못한다」(Keiner kann über sich sehen … jede Wertschätzung ist ein Produkt aus dem Werte des Geschätzten mit der Erkenntnissphäre des Schätzers).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47406번. 취지를 옮긴 것이다.
사료에 근거한 것은 요한나의 응접실과 그 손님들, 1807년 고타에서의 공부, 아들이 다니러 올 때마다 일어난 다툼과 그 내용, 1807년 3월과 1806년 10월 편지의 말, 1807년 12월 13일 편지의 내용과 조건, 아들이 어머니 집이 아닌 파소의 집에 산 일이다. 손님들이 돌아간 밤의 대화와 대사, 찻잔이 놓인 탁자, 「1807년 가을」이라는 방문 날짜는 소설의 창작이다. 대사는 두 사람의 편지와 그비너의 기록에 드러난 관점을 따랐다. 빌란트가 일흔이 넘었다는 것은 그비너 같은 책 44쪽이 1811년의 그를 일흔여덟 살로 적은 데서 셈했다. 1851년의 『아포리즘』은 열아홉 살 아르투어의 생각이 아니라 노년의 저작으로 비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