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11,998자)

뒤늦게 찾아온 박수

쇼펜하우어의 삶 · 네오

1852년 7월, 예순네 살의 쇼펜하우어는 뮌헨의 도스에게 쓴 편지에서 지지자의 수를 셌다. 도스는 머지않아 대학생들도 선생의 이름을 알게 될 거라고 위로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그 위로를 이렇게 받았다. 마흔 해를 일한 끝에, 예순다섯째 해에 들어서야, 곧 학생들이 내 이름을 알게 될 거라니 참 좋은 위로다. 나만큼 농락당한 사람은 아직 없다. 그래도 사도가 몇 안 되는 대신, 지금까지 그가 아는 일곱 사람은 하나같이 그의 철학에 끝없는 열정을 품고 있다.[주 36-01] 그는 일곱이라는 숫자를 적었다.

아홉 달 뒤, 숫자가 바뀌기 시작했다.

*

1853년 4월, 런던의 평론지 『웨스트민스터 리뷰』에 서명 없는 긴 글이 실렸다. 글은 이렇게 시작했다. 영국 독자 가운데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드물고, 그 이름을 가진 이 수수께끼 같은 사람이 칸트가 죽은 뒤 대학 교수들이 세운 독일 철학 전체를 뒤엎으려고 마흔 해 가까이 일해 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더 드물다. 그리고 필자는 그 마흔 해를 하나의 비유로 묶었다.

“그는 그 긴 수고 끝에 이제 막 자기 목소리를 들리게 하는 데 성공했다. 대포를 쏜 때와 그 소리를 듣는 때 사이에 얼마나 긴 틈이 벌어질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음향학의 원리를 그만큼 놀랍게 보여 주는 예도 없다.”[주 36-02]

필자는 그 마흔 해를 하나하나 짚었다. 1813년 그가 원인과 결과에 관한 새 이론을 내놓았을 때 독일 철학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섯 해 뒤 주저가 나왔을 때도 세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좋은 평도 나쁜 평도 아닌, 그보다 훨씬 맥 빠지는 무평 속에서 일했다.[주 36-03] 그리고 그 사이에 이런 문장이 끼어 있었다. 몇몇 논쟁적인 글로 짐작하건대 그다지 순하지 않은 쇼펜하우어의 기질이 조금 상한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주 36-03]

박수는 이름표와 함께 왔다. 필자는 글 끝에서 독자들이 이 천재적이고 괴짜이고 대담한, 그리고 덧붙이자면 무시무시한 저자의 책을 직접 구해 읽게 되기를 바란다고 하면서도, 그와 같은 힘을 가진 독일 철학자가 자기들의 감정과 신념에 더 맞는 편에 서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글을 닫았다. 그리고 그를 ‘프랑크푸르트의 인간 혐오자 현자’라고 불렀다.[주 36-03] 마흔 해 만에 처음 들린 큰 칭찬은 그를 세상에 알리는 동시에, 사람을 싫어하는 늙은이라는 모습으로 그를 세상 앞에 세웠다.

베를린의 신문 편집자 린트너가 그 글을 독일어로 옮겼다. 프랑크푸르트 대학 도서관의 연표는 이 서평과 그 번역, 그리고 『소품과 부록』이 팔리기 시작한 일을 쇼펜하우어의 명성이 시작된 때로 적는다.[주 36-04]

*

쇼펜하우어는 그 서평을 도스에게 보냈다. 1853년 7월 25일, 도스는 기쁨을 적은 긴 답장 끝에 걱정 하나를 덧붙였다. 스승의 글 곳곳을 흐르는 거친 논쟁은 아직 온 마음으로 그 생각을 따라오지 않은 독자에게, 영국 비평가도 내놓은 짐작, 곧 스승의 기질이 그리 순하지 않다는 짐작을 쉽게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그는 썼다.[주 36-05] 도스는 이제 막 열린 문이 그 거친 말 때문에 다시 닫힐까 두려워했다.

8월 15일,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답했다.

“그 영국 사람 말이 맞습니다. 내 기질은 결코 가장 순한 편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달랐으면 하고 바라지 않습니다. 우유에 물을 탄 것 같은 성품으로는 아무 작품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분노가 없는 사람에게는 재능도 없다는 이탈리아 속담이 있는데, 아주 옳은 말입니다.”[주 36-06]

두 사람의 논리는 둘 다 옳았다. 도스는 박수를 지키려 했다. 세상이 마침내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때에 거친 말은 새 독자를 쫓아낼 것이고, 그것은 스승이 마흔 해를 기다려 얻은 것을 스스로 버리는 일이었다. 걱정에는 근거도 있었다. 서평의 필자부터가 그의 문장을 칭찬하면서 그에게 인간 혐오자라는 이름을 붙였고, 그 이름은 번역을 타고 독일 독자에게도 건너갔다. 쇼펜하우어는 작품을 지키려 했다. 그가 마흔 해 동안 아무 반응 없이 쓸 수 있었던 힘은 순한 기질에서 나오지 않았다. 대학의 철학을 향한 분노가 그를 움직였고, 그 분노를 덜어 내면 작품의 힘도 함께 덜어진다. 둘이 갈라선 자리는 박수를 위해 작품을 다듬어야 하느냐는 물음이었다. 도스는 그래야 한다고 보았고, 쇼펜하우어는 박수 때문에 자기가 바뀌기를 거절했다.

그러나 같은 편지의 다른 줄들은 그가 그 박수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보여 준다. 그는 화가와 사진이 자기 얼굴을 제대로 잡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길게 적었다. 화가 하나는 그가 매 순간 다른 얼굴을 하고 있어서 비슷하게 그리기가 불가능하다고 했다.[주 36-06] 그는 자기에 관해 쓰인 글의 목록을 늘어놓았고, 자기에 관해 쓰인 많은 것을 자기는 끝내 알지 못한다고 아쉬워했다. 그리고 이틀 전 함부르크에서 온 편지 이야기를 했다. 이름을 알아보기 어려운 어느 의사가 그의 철학을 열렬히 따르는 새 사도라고 자기를 소개하며 복음서를 쓰는 사람까지 되겠다고 했다. 그는 그 소식에 이렇게 적었다.

“해 보라고 하십시오. 나는 예순여섯째 해에 들어섰으니 서둘러야 합니다.”[주 36-07]

9월 2일, 도스는 다시 썼다. 스승이 몸과 마음이 다 꺾이지 않은 채로 있으니, 우리 젊은이에게는 이제 겨우 아침노을로 보이는 이 명성의 저녁노을을 앞으로도 여러 해 누리실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주 36-08] 9월 11일, 쇼펜하우어는 그저께 또 한 사람이 자기를 보러 와서 열정을 털어놓고 갔다고 적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렇습니다. 내가 미치는 힘의 표시는 늘어 갑니다. 그러나 더디게 옵니다. 그래서 나는 이탈리아 속담을 되뇔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말아, 죽지 마라, 풀은 돋아날 테니.”[주 36-09]

*

그토록 바라던 인정을 받으면 오래된 상처도 사라지는가? 사라지지 않는다. 박수는 상처 위에 쌓일 뿐 상처를 지우지 못한다.

그는 그 답을 박수가 오기 전에 이미 적어 두었다. 1851년의 「인생의 지혜를 위한 아포리즘」에서 사람이 남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가를 다루는 넷째 장은 명성으로 끝난다. 명성이 남과 견주어 매겨지는 값이라는 생각은 베를린의 빈 강의실 앞에서부터 그를 따라다녔다. 그 장의 끝에서 그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 이렇게 쓴다. 값진 것은 명성이 아니라, 명성을 받을 만하게 만든 그것이다.[주 36-10]

그는 명성을 작품의 그림자에 빗댄다. 명성은 두 번째 것이고, 공로의 메아리이고 그림자이고 징후일 뿐이다. 감탄받는 것이 감탄보다 값져야 하므로, 사람을 정말로 행복하게 하는 것은 명성 안에 있지 않고 명성을 얻게 한 공로 안에, 더 정확히는 그 공로를 낳은 마음가짐과 능력 안에 있다. 그런데 그는 명성이 실제로 사람에게 무엇을 하는지도 숨기지 않는다. 명성은 명성을 얻은 사람에게 주로 바깥의 징후로 작용해서, 그가 자기에 대해 품어 온 높은 생각을 확인해 준다. 빛이 어떤 물체에 부딪혀 되돌아오지 않으면 보이지 않듯, 뛰어남도 명성을 얻고서야 비로소 자기를 확신한다.[주 36-10]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결론을 하나 더 끌어낸다. 명성만 받을 만하고 명성을 얻지 못한 사람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미 가졌다. 판단할 줄 모르고 쉽게 속는 대중이 그를 위대한 사람으로 여기느냐가 아니라 그가 실제로 그런 사람이냐가 그를 부럽게 만든다. 후세가 그를 알게 되느냐가 아니라, 몇 세기를 두고 간직하고 곱씹을 만한 생각이 그의 안에서 생겨난다는 것이 큰 행복이다. 그리고 그 행복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지만, 명성은 그의 힘 밖에 있다. 그는 자기 값어치가 남의 눈에 어떻게 비치느냐에 달린 삶을 비참한 삶이라고까지 부른다.[주 36-10] 이 논증대로라면 그는 박수가 오기 전부터 가장 중요한 것을 가지고 있었고, 박수가 와도 그것은 조금도 늘지 않는다.

그러나 명성을 징후로 본 그의 설명은 1853년의 편지들이 왜 그렇게 쓰였는지도 보여 준다. 서평이 그에게 준 것은 새 작품이 아니었다. 그의 작품은 마흔 해 전부터 거기 있었다. 서평이 준 것은 그 작품을 비춘 빛이 처음으로 그에게 되돌아온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목록을 만들고 사도의 수를 셌다. 되돌아온 빛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의 몸짓이었다.

그는 늦은 명성에 대해서도 써 두었다. 후세까지 남을 명성을 살아서 맛보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것은 늙어서야 오는 일이 드물지 않고 철학자에게는 더욱 그렇다. 이름난 사람들의 초상은 대개 그가 이름을 얻은 뒤에 그려지므로 늙고 머리가 센 모습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행복론의 눈으로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말한다.

“모든 즐거움과 기쁨이 겨울나무처럼 말라 버린 노년에 명성의 나무가 가장 알맞게 싹을 틔운다. 그것은 참된 늘푸른나무다. 노년에 자기 젊음의 힘을 모두 작품에 쏟아부었고, 그 작품은 자기와 함께 늙지 않는다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위안은 없다.”[주 36-11]

그는 그 위안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만 말하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소품과 부록』 제2권의 「독서와 책에 관하여」라는 장에서 그는 다른 대목을 남겼다. 후세의 명성은 대개 같은 시대 사람들의 박수를 잃는 것으로 값을 치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주 36-12] 값은 이미 치러졌다. 마흔 해의 무평이 그 값이었다. 뒤늦게 온 박수는 그 값을 돌려주지 않는다. 예순여섯째 해에 그를 서두르게 한 것은 박수가 아니라 박수를 누릴 남은 시간이었다. 늦게 온 기쁨은 기쁨이었지만, 기다린 세월을 거꾸로 거슬러 가서 채워 주지는 못했다.

*

그 뒤 몇 해 동안 박수는 정말로 늘어났다. 1854년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가 자기가 쓴 『니벨룽의 반지』의 시를 그에게 전하게 했다. 1855년부터 화가 쥘 룬테쉬츠를 비롯한 여러 화가가 그의 초상을 잇달아 그렸다. 1857년 5월에는 극작가 프리드리히 헤벨이 그를 찾아왔다.[주 36-13] 그가 1851년에 써 둔 대로, 그의 초상은 이름을 얻은 뒤에야 그려졌고 늙고 머리가 센 모습이었다.

1858년 2월 22일 그는 일흔 살이 되었다. 그해 베를린 왕립 학술원이 그에게 회원 자리를 제안했고, 그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주 36-13] 서른여덟 해 전 그는 그 도시의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지만 한 학기 만에 그만두었다.[주 36-14] 그를 오래 외면한 도시가 마침내 내민 박수를 그는 받지 않았다. 그 거절이 오래된 상처를 아물게 했는지, 아니면 그 상처가 아직 거기 있다는 표시였는지는 그 자신만 알았다.

명성은 그를 기쁘게 했다. 그는 그 기쁨을 감추지 않았고, 감출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1852년 편지의 한 줄, 나만큼 농락당한 사람은 아직 없다는 말은 박수가 온 뒤에도 지워지지 않았다. 늦게 온 박수가 할 수 있는 일은 남은 날을 밝히는 데까지였다. 지나간 날까지 밝혀 주지는 못했다.

후주

[주 36-01] 쇼펜하우어가 도스에게 보낸 편지, 1852년 7월 22일, 프랑크푸르트. 루트비히 셰만 편 『쇼펜하우어 서신집』(라이프치히: 브로크하우스, 1893), 248쪽(PDF 308쪽). 스캔으로 확인했다. 원문은 Schöner Trost, den Sie mir geben, daß, nach vierzigjähriger Arbeit, in meinem 65 Jahr, doch wohl bald die Studenten meinen Namen kennen lernen werden. So wie mir ist noch Keinem mitgespielt. Aber wenn ich auch nur wenige Apostel habe, bis jetzt, an mir bekannten, nur 7; so sind diese dafür sammt u. sonders von gränzenlosem Enthusiasmus für meine Philosophie beseelt … 의 취지를 옮긴 것이다. 「sammt u.」까지는 스캔으로, 뒷부분은 249쪽 OCR로 읽었다(재확인). 「예순다섯째 해」(in meinem 65 Jahr)는 만 예순네 살이다. 도스가 무엇이라고 위로했는지는 이 답장에서 거꾸로 읽은 것이다.

[주 36-02] [John Oxenford], 「Iconoclasm in German Philosophy」, 『The Westminster Review』 제59권(새 시리즈 제3권) 제2호, 1853년 4월 1일, 388~389쪽. 인터넷 아카이브 sim_westminster-review_1853-04-01_59_2 의 전사 텍스트로 읽었다(2026-10-09). 첫머리(Few, indeed, we venture to assert …)는 취지를 옮긴 것이고, 인용(he has just succeeded in making himself heard—wonderfully illustrating that doctrine in acoustics which shows how long an interval may elapse between the discharge of the cannon and the hearing of the report)은 한국어 의역이다. 서명 없이 실렸다는 것은 스탠퍼드 철학 백과, 필자가 옥슨퍼드라는 것은 서신집 편집자의 주(249쪽).

[주 36-03] 같은 글 389~390쪽. 1813년과 주저에 세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said—nothing), 「좋은 평도 나쁜 평도 아닌, 훨씬 맥 빠지는 무평」(not through good and evil report, but through what was much more disheartening—no report at all), 기질 대목(We marvel not that the Schopenhauer temper, which, we opine, from certain polemical treatises, is not of the mildest, was a little ruffled)의 취지를 옮긴 것이다. 같은 글은 노르웨이 학회의 현상 논문 수상을 1829년으로 적었으나 실제는 1839년이다(쇼펜하우어 협회 연표 1838~1841년 항목). 이 소설은 그 대목을 쓰지 않았다. 「천재적이고 괴짜이고 대담한, 그리고 무시무시한 저자」(this genial, eccentric, audacious, and, let us add, terrible writer)와 「프랑크푸르트의 인간 혐오자 현자」(this misanthropic sage of Frankfort), 더 맞는 편에 선 철학자를 바란다는 끝맺음은 같은 글 407쪽의 취지를 옮긴 것이다.

[주 36-04] 프랑크푸르트 대학 도서관 생애 연표 1853년 항목(영국에서, 이어 독일어 번역으로 나온 그의 철학에 관한 글과 『소품과 부록』의 판매 성공이 명성의 시작). 번역자가 린트너라는 것은 [주 34-02].

[주 36-05] 도스가 쇼펜하우어에게 보낸 편지, 1853년 7월 25일. 서신집 250쪽(PDF 310쪽), 스캔 확인. Es ist allerdings nicht zu übersehen, daß die herbe Polemik, die sich durch viele Abschnitte Ihrer Schriften zieht, jene Leser, die sich noch nicht mit ganzer Seele an Ihren Ideengang hingegeben haben, leicht zu der auch vom englischen Kritiker aufgestellten Vermuthung verleiten könnte, daß Ihr Gemüth eben nicht das mildeste sei 의 취지를 옮긴 것이다. 그 뒤 문장(eine Vermuthung, welche auch ungünstig auf die …)은 251쪽으로 이어지며 확인하지 못했다(재확인). 「열린 문이 다시 닫힐까 두려워했다」는 서술자의 해석이다.

[주 36-06] 쇼펜하우어가 도스에게 보낸 편지, 1853년 8월 15일. 서신집 255~257쪽. 인용은 256쪽(PDF 316쪽), 스캔 확인. 원문은 Der Engländer hat Recht, daß mein Gemüth nicht das mildeste ist: aber ich wollte nicht, daß dem anders wäre: denn eine Milch- u. Waßer-Natur kann keine Werke schaffen: chi non ha sdegno, non ha ingegno sagt ein Ital: Sprichwort, sehr richtig. 한국어 의역이다. 화가와 사진 대목(Der Ausmaler der Kormannschen sagte, es wäre unmöglich, mich ähnlich zu malen, weil ich jeden Augenblick ein anderes Gesicht hätte … Auch die mich darstellenden Daguerrotypen sind sich unter einander höchst unähnlich)도 같은 쪽, 취지를 옮긴 것이다. 자기에 관한 글의 목록(256쪽 아래)은 OCR로 읽었다(재확인).

[주 36-07] 같은 편지, 257쪽(PDF 317쪽), 스캔 확인. 「Gar Vieles über mich Geschriebene erfahre ich nicht. — Vorgestern erhielt ich ein[en] Brief aus Hamburg von einem Dr Abel, oder Dr Buddel, ich kann den Namen nicht dechiffriren, der sich als enthusiastischen Verehrer meiner Philosophie ankündigt, als neuen Apostel, der sogar Evangelist werden will.」은 취지, 인용 「Nur zu! man steht im 66sten Jahr u. hat mithin Eile.」는 한국어 의역이다. 날짜 Frankfurt a. M. d. 15 Aug: 1853 도 같은 쪽 스캔.

[주 36-08] 도스가 쇼펜하우어에게 보낸 편지, 1853년 9월 2일. 서신집 262~263쪽. 263쪽(PDF 323쪽) 첫머리 스캔 확인. 편집자 셰만의 꺾쇠 요약 안에 인용된 도스의 문장 「… Zuversicht, daß Sie sich an diesem Abendrothe des Ruhmes, welches uns Jüngern erst als Morgenroth erscheint, noch viele Jahre laben können」의 취지를 옮긴 것이다. 「몸과 마음이 꺾이지 않은 채로」(ungeschwächte körperliche und geistige Rüstigkeit)는 262쪽 OCR(재확인).

[주 36-09] 쇼펜하우어가 도스에게 보낸 편지, 1853년 9월 11일. 서신집 265쪽(PDF 325쪽), 스캔 확인. 「Vorgestern war ein Dr Kriegskotte aus Kleve-Berg bei mir, um mich zu sehn u. mir seinen Enthusiasmus auszudrücken.」는 취지, 인용 「Nun ja, die Zeichen meiner Wirksamkeit mehren sich; aber es geht langsam u. ich muß das Ital: Sprichwort repetiren: Bel cavallo non morire, Ch' erba deve venire.」는 한국어 의역이다. 이탈리아 속담은 「좋은 말아 죽지 마라, 풀은 올 테니」로 풀었다.

[주 36-10] 쇼펜하우어, 『소품과 부록』 제1권 「인생의 지혜를 위한 아포리즘」 제4장 「남에게 어떻게 비치는가에 관하여」 끝의 명성 대목. 1913년 에른스트 올레판 전자 전사,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47406번. 「Der Ruhm beruht eigentlich auf dem, was einer im Vergleich mit den Übrigen ist. … Also nicht der Ruhm, sondern das, wodurch man ihn verdient, ist das Wertvolle. … wie das Licht gar nicht sichtbar ist, wenn es nicht von einem Körper zurückgeworfen wird; ebenso jede Trefflichkeit erst durch den Ruhm ihrer selbst recht gewiß wird」와 「da unstreitig der Ruhm nur das Sekundäre ist, das bloße Echo, Abbild, Schatten, Symptom des Verdienstes, und da jedenfalls das Bewunderte mehr Wert haben muß als die Bewunderung, so kann das eigentlich Beglückende nicht im Ruhme liegen, sondern in dem, wodurch man ihn erlangt …」의 취지를 옮긴 것이다.

[주 36-11] 같은 장 같은 대목. 「Wenn dennoch einer den Ruhm, welcher zum Nachruhm werden soll, erlebt, so wird es selten früher als im Alter geschehn … am wenigsten bei Philosophen」과 초상 대목은 취지. 인용 「Aber im Alter, wann alle Genüsse und Freuden, wie die Bäume im Winter, abgestorben sind, dann schlägt am gelegensten der Baum des Ruhmes aus, als ein ächtes Wintergrün … Im Alter gibt es keinen schönern Trost, als daß man die ganze Kraft seiner Jugend Werken einverleibt hat, die nicht mit altern.」은 한국어 의역이며, 중간의 겨울배 비유는 생략했다. 1851년에 나온 글이므로 1853년의 명성보다 먼저 쓰였다.

[주 36-12] 같은 책 제2권 제24장 「독서와 책에 관하여」 §305. 1891년 브로크하우스판 인쇄 591쪽, PDF 601쪽. 스캔 대조. 「Hieraus erklärt sich, warum der Ruhm bei der Nachwelt meistens durch Verlust des Beifalls der Mitwelt bezahlt wird, und umgekehrt.」의 취지를 옮긴 것이다.

[주 36-13] 쇼펜하우어 협회 연표 1854년(바그너가 『니벨룽의 반지』를 보냄), 1855년(룬테쉬츠와 다른 화가들의 초상 연작 시작), 1857년(헤벨이 빌헬름 요르단과 함께 방문, 5월), 1858년(2월 22일 일흔 번째 생일, 베를린 왕립 학술원 회원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음) 항목. 학술원 제안을 거절한 까닭은 연표에 없어 쓰지 않았다.

[주 36-14] 1820년 베를린 대학 강사가 되어 한 학기만 강의한 것은 쇼펜하우어 자신이 1851년 에르트만에게 쓴 편지(서신집 332쪽, PDF 392쪽 — 「habilitirte ich mich im Frühjahr 1820 an der Universität zu Berlin」까지 스캔 확인, 뒤 「Ich habe im ersten Semester gelesen u. seitdem nie wieder」는 OCR) 와 생애 연표(1820 베를린 강의 시도).

사료에 근거한 것은 1852년 7월 22일 편지의 「일곱 사도」, 1853년 4월 『웨스트민스터 리뷰』 서평, 린트너의 번역, 도스의 7월 25일과 9월 2일 편지, 쇼펜하우어의 8월 15일과 9월 11일 편지, 1854~1858년의 바그너·초상·헤벨·일흔 살·학술원 제안이다. 편지와 서평의 인용은 모두 실제 문장의 의역이며, 창작 대사는 없다. 도스와 쇼펜하우어의 논리를 견준 문단, 명성을 「되돌아온 빛」으로 읽은 문단, 학술원 거절에 관한 마지막 물음은 서술자의 해석이다. 『아포리즘』과 『소품과 부록』 제2권은 1851년의 글이며, 1853년 이후의 일을 그 글로 비추었다.

36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