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12,495자)

상처를 이해해도 용서하지 못할 때

쇼펜하우어의 삶 · 네오

1838년 4월 16일, 요한나 쇼펜하우어가 독일 중부의 대학 도시 예나에서 일흔을 넘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주 32-01] 아들 아르투어는 프랑크푸르트에 있었다. 모자는 1814년 5월 22일 그가 바이마르의 어머니 집을 나와 드레스덴으로 떠난 뒤로 한 번도 서로 얼굴을 보지 않았다. 그날 어머니는 집안의 친구 뮐러 폰 게르스텐베르크를 두고 아들과 크게 다투었고, 아들 때문에 그 친구를 내치지 않았다. 열여섯 살 아델레는 친구에게 오빠가 어머니에게 부끄러운 짓을 했고 어머니는 지금 그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썼다. 어머니는 그 뒤 스물네 해 동안 아들을 다시 보지 않았다.[주 32-02]

그 스물네 해 사이에도 편지는 오갔다. 1819년 발트해 가의 항구 도시 단치히의 한 상회가 무너졌을 때, 어머니와 누이는 그 상회에 맡긴 재산을 거의 다 잃었다. 아르투어도 그 상회에 큰돈을 맡겨 두었다. 빚쟁이들이 받을 돈의 삼할만 받기로 합의할 때 그는 홀로 그 합의에 들지 않았고, 갖고 있던 어음을 나중에 차례로 내밀어 자기 재산을 지켰다. 그 일 뒤로 모자의 편지는 열 해 넘게 끊겼다.[주 32-03]

먼저 손을 내민 쪽은 아들이었다. 1831년 10월, 프랑크푸르트로 옮겨 온 그는 누이에게 편지를 썼다. 누이는 어머니가 모르는 게 낫겠다고 하면서도 그가 원하면 말하겠다고 답했다. 그렇게 해서 1832년 1월 모자의 편지가 다시 시작되었다.[주 32-03] 어머니의 말투는 전보다 부드러웠다. 아들의 건강을 묻고, 콜레라를 피할 방법을 일러 주고, 그의 어두운 기분을 걱정했다. 어머니는 오랜만에 편지 끝에 ‘너의 어머니’라고 서명했다. 그러다 다시 ‘어머니’라는 말을 빼고 이름만 적었다.[주 32-04]

*

1835년 여름, 서른 해 묵은 유산 문제가 단치히에서 올라왔다. 할아버지의 재산 가운데 받지 못한 돈이 있었고, 집안의 오랜 대리인인 형사 법률고문 스케를레가 그 돈을 정리하겠다며 편지를 보냈다. 그는 아르투어의 몫으로 100탈러를, 어머니와 누이의 몫으로 200탈러를 내놓았다. 탈러는 당시 독일 땅에서 쓰던 은화 단위였다.[주 32-05]

7월 22일, 아르투어는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첫 줄은 ‘더없이 존경하는 어머니께’였다. 그는 스케를레의 편지에서 수상한 점을 하나하나 짚었다. 스무 해 동안 남의 손을 빌려 쓰던 사람이 이번에는 넉 장을 제 손으로 썼다. 늘 짧고 퉁명스럽던 사람이 길고 공손했다. 영수증 양식에는 얼마를 받았는지는 없고 충분히 받아 만족한다는 말만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썼다.

“저는 변호사라는 사람들을 대체로 믿지 않고, 형사 법률고문 나리는 특히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는 여기서 빚진 쪽의 대리인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우리 곁이 아니라 우리 맞은편에 서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조심하십시오! 경계하십시오!”[주 32-05]

그는 연금 받을 사람이 죽은 해를 따지면 이자가 붙어 받을 돈이 두 배가 넘는다고 계산했고, 서두르지 말고 함께 움직이자고 했다. 편지 끝에는 이런 덧붙임이 있었다. 당신에게는 슈바벤 나이를 한참 넘겨 아주 영리해지고 세상 물정에 닳고 닳은 아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서 그 의견을 흘려듣지 마십시오. 슈바벤 나이는 마흔 살을 이르는 옛말이다. 서명은 ‘당신의 충실한 아들’이었다.[주 32-05]

이틀 뒤 어머니가 답했다. 그녀는 아들이 늘어놓은 항목에 똑같이 번호를 매겨 하나씩 받았다. 스케를레가 정직하다는 것을 자기는 지금도 믿는다고 했다. 편지 값을 미리 치른 것은 관청 도장으로 봉했기 때문이고, 자기가 받은 그의 편지도 거의 다 그랬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너는 그 사람 삶을 자주 괴롭게 했고, 몽둥이처럼 거칠었다. 숲에 대고 소리치는 대로 메아리가 돌아오는 법이다. 또 그렇게 해 보아라, 겪어 보면 알 거다.”[주 32-06]

어머니는 아들의 계획을 내치지는 않았다. 이자 이야기는 버릴 것이 아니라고 했다. 다만 돈 드는 소송에 끌어들이지 말고 스케를레에게 너무 거칠게 굴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편지를 이렇게 맺었다.

“네 일을 잘 해 보아라. 너에게 모든 것을 맡기마. 하지만 나는 함께 물어뜯고 다니지는 않겠다. 이번에는 지켜보련다.”[주 32-06]

두 사람은 같은 사람을 두고 맞섰지만, 실은 서로를 두고 맞서고 있었다. 아들은 세상을 믿지 않았고, 그 의심으로 1819년에 자기 재산을 지켰다. 어머니는 그 의심이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하는지 알았다. 상대를 거칠게 대한 사람은 거친 대접을 돌려받는다. 아들의 논리는 옳았다. 그해 겨울 그는 자기 요구를 관철했고, 1836년 1월 세 사람은 처음 제안의 두 배가 넘는 750탈러를 받았다는 영수증에 서명했다.[주 32-07] 어머니의 논리도 옳았다. 그 돈 문제가 끝나자 모자를 이어 주던 끈도 끝났다.

1836년 4월과 1838년 1월, 어머니는 두 통의 짧은 편지를 더 보냈다. 둘 다 옛날의 차갑고 형식적인 말투로 돌아가 있었다. 그 사이 1837년 10월 31일, 어머니는 아들을 다시 한번, 세 번째로 상속에서 뺐다. 아들은 그 결정을 법정에서 다툴 수 있었지만 다투지 않았고, 누이를 단독 상속인으로 세우는 데 동의한다는 뜻을 법정 기록에 남겼다.[주 32-07]

마지막 편지는 1838년 1월 30일 예나에서 왔다. 함부르크에 맡겨 둔 옛 책들을 계속 맡겨 두고 보관료를 낼지는 그가 정할 일이지만, 자기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보고 아델레와 의논해 그것들을 짓이겨 세상에서 없애기로 했다고 썼다. 지금은 아무 값어치도 없다고 했다. 편지는 ‘잘 지내라’ 한 마디와 이름으로 끝났다.[주 32-08] 두 달 반 뒤 그녀는 죽었다.

*

상대가 왜 그랬는지 알게 되면 반드시 용서해야 하는가? 왜 그랬는지 아는 것과 용서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그리고 그 둘은 화해하는 것과도, 다시 가까이 지내는 것과도 다르다.

아르투어에게는 이해할 거리가 많았다. 어머니가 그를 상속에서 뺀 까닭을 짐작할 재료는 그의 손에 다 있었다. 1819년 어머니와 누이가 재산을 잃을 때 그는 홀로 자기 몫을 지켰다. 그 뒤 어머니는 글을 써서 살았고, 누이는 기댈 곳이 어머니뿐이었다. 남은 것을 누이에게 몰아주는 일은 그 사정에서 보면 따질 만한 셈이었다. 그는 그 셈을 법정에서 다투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어머니를 용서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가 그 결정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적은 글도 남아 있지 않다.

그가 열세 해 뒤인 1851년, 예순세 살에 펴낸 『소품과 부록』 제1권의 「인생의 지혜를 위한 아포리즘」에는 남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준칙들이 번호를 달고 늘어서 있다. 이 준칙들은 어머니를 두고 쓴 글이 아니다. 그러나 이해와 용서를 가르는 그의 생각이 거기 가장 분명하게 적혀 있다. 그 장을 여는 21번째 준칙은 이렇게 시작한다.

“세상을 헤쳐 나가려면 조심과 너그러움을 넉넉히 챙겨 가는 것이 좋다. 조심은 손해와 잃음에서 우리를 지켜 주고, 너그러움은 다툼과 시비에서 지켜 준다.”[주 32-09]

같은 준칙에서 그는 사람의 본바탕은 바뀌지 않으니 그것을 통째로 단죄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했다. 너그러움은 이해에서 나온다. 저 사람은 저렇게 생겼고, 저렇게밖에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이해가 곧 용서로 가지는 않는다고 그는 29번째 준칙에서 선을 긋는다. 우리와 가까이 지내는 누군가가 우리에게 언짢은 일을 했다면, 그가 같은 일을, 아니 더 센 일을 몇 번이고 다시 겪어도 좋을 만큼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인지만 물으면 된다. 그렇다면 말해 봐야 소용없으니 그냥 넘기되, 그 일을 다시 청한 셈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니라면 그 자리에서 영영 끊어야 한다. 그 사람은 다음에도 꼭 같은 일을 하리라고 그는 보았다. 그리고 그는 괄호 안에 한 줄을 넣는다.

“용서하고 잊는 것은 비싸게 얻은 경험을 창밖으로 내던지는 일이다.”[주 32-10]

그 근거는 그가 노르웨이 논문에서 세운 성격론이다. 사람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지만 자기 자신, 자기 본바탕만은 잊지 못한다. 성격은 고칠 수 없고, 사람은 같은 사정에서 늘 같은 일을 한다. 그는 그 자리에서 자기 현상 논문을 읽고 착각에서 벗어나라고 권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그는 끊었던 친구와 다시 화해하는 것을 약함이라고 부른다. 그 친구가 첫 기회에 꼭 같은 일을 다시 할 때 그 약함의 값을 치른다는 것이다.[주 32-10]

44번째 준칙은 그것을 더 차갑게 다듬는다. 될 수 있으면 아무에게도 원한을 품지 말라. 그러나 각 사람의 행실은 잘 새겨 기억해 두고, 그것으로 그 사람의 값을 매겨 대하는 태도를 정하라.

“한 사람의 나쁜 점을 잊는 것은 애써 번 돈을 내던지는 것과 같다.”[주 32-11]

원한은 품지 않되 기억은 지운다고 그는 쓰지 않았다. 그에게 이해는 상대를 미워하지 않을 까닭이었지만, 상대를 다시 믿을 까닭은 아니었다. 번호를 붙인 절로 나뉜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의 20번째 절에서 그는 그 마음의 움직임을 이렇게 적었다.

“우리가 남에게서 높이 사고 사랑하는 것, 혹은 깔보고 미워하는 것은 바뀌는 것이나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머무는 것, 한번 있으면 내내 있는 것, 곧 그 사람이 무엇인가이다. 그래서 우리가 누군가에 대한 생각을 거두게 되면, 우리는 그가 달라졌다고 말하지 않고 우리가 그를 잘못 보았다고 말한다.”[주 32-12]

그의 생각을 따르면 네 가지가 갈라진다. 이해는 상대가 왜 그랬는지 아는 것이다. 면책은 그 앎 때문에 상대가 한 일을 없던 일로 치는 것인데, 그는 그것을 거절했다. 사람이 무엇인지는 그가 한 일에서 드러나고, 한 일은 지워지지 않는다. 화해는 끊은 관계를 다시 잇는 것인데, 그는 그것을 약함이라고 불렀다. 관계를 이어 가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1832년부터 1835년까지 모자는 화해했다는 말 한마디 없이 견딜 만한 사이로 편지를 주고받았고, 함께 돈 문제를 풀었다.[주 32-04]

*

그의 준칙에는 그 자신에게 돌아오는 날이 있다. 어머니도 경험을 창밖으로 내던지지 않은 사람이었다. 1835년 여름 어머니는 아들이 스케를레에게 몽둥이처럼 거칠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1814년의 다툼도, 1819년의 파산도 그녀는 잊지 않았다. 세 번의 상속 배제는 나쁜 점을 잊지 않는 사람이 내린 결정이었다. 성격은 바뀌지 않고 사람은 같은 사정에서 같은 일을 한다는 그의 이론은 어머니를 설명하는 만큼 그 자신을 설명했다. 그가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었다면, 어머니도 같은 이론으로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둘 다 용서하지 않았다.

그의 준칙이 말하지 않는 것도 있다. 비싸게 얻은 경험을 지키는 사람은 다시 다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람은 상대가 이번에는 다를 수도 있다는 가능성까지 함께 내던진다. 그가 그 가능성을 믿지 않은 것은 그의 성격론이 옳아서일 수도 있고, 그가 그렇게 생겨 먹어서일 수도 있다. 그 둘을 가를 방법은 그의 이론 안에 없다.

기록에는 다른 끝도 하나 있다. 1849년 8월 25일 누이 아델레가 본에서 죽었다. 그녀가 죽기 얼마 전 남매는 마지막으로 만났다.[주 32-13] 1814년 오빠가 어머니에게 부끄러운 짓을 했다고 쓴 누이였다. 어머니와 아들에게는 그런 마지막 만남이 없었다.

그러니 그의 삶과 준칙이 남기는 물음은 용서해야 하느냐가 아니다. 나는 상대를 이해했는가? 그 이해 때문에 그가 한 일을 없던 일로 치려 하는가? 나는 그와 다시 가까워지고 싶은가, 아니면 그저 그를 미워하지 않고 싶은가? 그 넷을 한데 묶으면 사람은 이해하는 순간 용서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받는다. 넷을 갈라 두면, 용서하지 못한 채로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

1838년 1월의 마지막 편지에서 어머니는 함부르크의 옛 책들을 짓이겨 세상에서 없애겠다고 썼다. 아들이 그 책들을 지키려 했는지는 기록에 없다.

후주

[주 32-01] 요한나 쇼펜하우어가 1838년 4월 16일 예나에서 죽은 것은 프랑크푸르트 대학 도서관 생애 연표 1838년 항목(Johanna Schopenhauer stirbt am 16. April in Jena). 쇼펜하우어 협회 연표 1838~1841년 항목도 「어머니의 죽음」을 적는다. 태어난 해 1766년은 스탠퍼드 철학 백과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일흔을 넘긴」은 태어난 해로만 셈한 것이다. 아르투어가 그때 프랑크푸르트에 있었다는 것은 1833년 정착 뒤 계속 산 사실(생애 연표)에 따른다.

[주 32-02] 아르투어 휘브셔, 「아델레가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에게. 미공개 편지 I」, 『쇼펜하우어 연감』 1977년호, 133쪽. 마인츠 대학 쇼펜하우어 연구소 공개본(https://download.uni-mainz.de/fb05-philosophie-schopenhauer/files/2019/03/1977_H%C3%BCbscher02.pdf), 텍스트 층으로 읽었다. 1814년 5월 22일 바이마르를 떠나 드레스덴으로 간 것, 집안 친구 뮐러 폰 게르스텐베르크와의 다툼, 어머니가 친구를 내치지 않은 것, 아델레가 친구 오틸리에 폰 괴테에게 쓴 말(Mein Bruder hat sich schändlich gegen die Mutter benommen … für jetzt will sie ihn nicht sehen), 「Sie sah ihn niemals wieder」는 같은 쪽. 아델레의 말은 한국어 의역이다. 스물네 해는 1814년에서 1838년까지 셈한 것이다.

[주 32-03] 휘브셔, 「요한나 쇼펜하우어가 아들에게 보낸 미공개 편지 제4부」, 『쇼펜하우어 연감』 제57호(1976), 105쪽. 마인츠 대학 공개본(https://download.uni-mainz.de/fb05-philosophie-schopenhauer/files/2019/04/1976_H%C3%BCbscher02.pdf). 단치히 상회 A. L. 뮐의 파산, 어머니와 누이가 재산 거의 전부를, 아르투어가 8000탈러 넘게 맡겼다는 것, 빚쟁이에게 삼할(30%)을 주는 합의에 그만 들지 않고 어음 세 장을 나중에 내밀어 재산을 지킨 것, 편지가 열 해 넘게 끊긴 것, 1831년 10월 아르투어가 먼저 누이에게 편지한 것(Es war dann gleichwohl Schopenhauer, der den ersten Schritt zu einer Annäherung tat), 아델레의 10월 27일 답, 1832년 1월 모자의 편지가 다시 시작된 것은 같은 쪽의 취지. 마지막 문장은 텍스트 층, 나머지는 그림으로 대조했다.

[주 32-04] 같은 글, 106쪽. 그림으로 대조했다. 휘브셔는 1971년 글(『쇼펜하우어 연감』 1971년호, 81쪽, 마인츠 대학 공개본 https://download.uni-mainz.de/fb05-philosophie-schopenhauer/files/2019/05/1971_H%C3%BCbscher.pdf)에서 1832년 이후의 편지가 모자 사이에 「어느 정도의 접근과 견딜 만한 관계」(eine gewisse Annäherung und ein erträgliches Verhältnis)를 가져왔다고 적는다. 취지를 옮긴 것이다(Aber der Ton ist freundlicher als früher. Johanna erkundigt sich nach dem Befinden ihres Sohnes, gibt Ratschläge, wie er der Cholera entgehen könne, zeigt sich betrübt über seine düstere Stimmung … Sie unterzeichnet, was sie seit langem nicht getan hat, mit: Deine Mutter J. Schopenhauer, — bis sie schließlich doch wieder die Mutter fallen läßt).

[주 32-05] 스케를레 건의 경위(할아버지 안드레아스의 유산, 1834~1835년 스케를레의 문의와 1835년 7월 11일의 제안 100탈러·200탈러)는 같은 글 106쪽의 취지. 아르투어의 1835년 7월 22일 편지는 같은 글 107~109쪽(휘브셔에 따르면 그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온전히 남은 유일한 것, 도이센판 서간 D XVI, Nr. 255a). 텍스트 층으로 읽었다. 인용은 한국어 의역이며 원문은 a) Ich traue Advokaten im Allgemeinen u. auch dem Hrn: Krim: Rath im besondern, gar nicht so ganz u. gar; im Gegentheil. b) Derselbe agirt hier als Sachwalter des Gegenparts, des Schuldners: er steht also nicht neben uns, sondern uns gegenüber, welches die feindliche Position ist. Also vorgesehn! en garde! 첫 줄 Geehrteste Frau Mutter!, 서명 Ihr ergebener Sohn, 덧붙임(Bedenken Sie, daß Sie an mir einen nach weit zurückgelegtem Schwabenalter sehr gescheut gewordenen Sohn haben, u. der gerieben ist in der Welt: u. schlagen Sie daher seine Meinung nicht in den Wind!)과 편지의 다른 항목은 취지를 옮겼다. 「슈바벤 나이는 마흔 살」은 서술자의 풀이다. 「형사 법률고문」은 Kriminalrat의 옮김이다.

[주 32-06] 요한나의 답장(휘브셔 번호 XIV, 1835년 7월 24일). 같은 글 121쪽. 그림으로 대조했다. 한국어 의역. 원문은 Du hast ihm oft das Leben sauer gemacht, warst knittelgrob, wie man in den Wald ruft hallts wieder. Machs wieder so, du wirst es erfahren. 그리고 Mach Deine Sache gut ich gebe Dir völlige Freiheit aber ich will mich nicht mit herumbeißen, ich will diesmal zusehen. 번호를 매겨 받은 형식, 스케를레의 정직, 관청 도장, 이자 계획, 소송 금지는 같은 쪽의 취지.

[주 32-07] 같은 글 109쪽. 그림으로 대조했다. 1836년 1월 28·30일 요한나와 아델레가 본에서, 아르투어가 프랑크푸르트에서 750탈러를 받았다는 영수증을 쓴 것, 1836년 4월 15일과 1838년 1월 30일의 두 편지가 「옛날의 차갑고 형식적인 말투」로 돌아간 것(zu der alten, kalten, förmlichen Art zurückkehrende Schreiben), 1837년 10월 31일의 세 번째 상속 배제, 그가 다툴 수 있었으나 다투지 않고 누이를 단독 상속인으로 세우는 데 동의를 법정 기록에 남긴 것(er hat darauf verzichtet und sein Einverständnis zur Einsetzung seiner Schwester als Alleinerbin gerichtlich zu Protokoll gegeben)은 취지를 옮긴 것이다. 「처음 제안의 두 배가 넘는」은 처음 제안(100+200=300탈러)과 견준 서술자의 셈이다. 그가 동의를 남긴 날짜는 자료에 없다. 앞의 두 번의 상속 배제가 언제였는지도 이 자료에 없어 쓰지 않았다(재확인).

[주 32-08] 요한나의 마지막 편지(휘브셔 번호 XVI, 1838년 1월 30일 예나). 같은 글 123쪽. 그림으로 대조했다. 취지를 옮긴 것이다(Willst Du die alten Bücher aufbewahren lassen, und die Miethe dafür bezahlen, so steht das bei Dir; ich halte dieses für völlig überflüssig, und bin mit Adelen übereingekommen sie zerstampfen zu lassen, um sie aus der Welt zu bringen, in der sie jezt ohne allen Werth sind … Lebe wohl. J. Schopenhauer). 「옛 책들」(die alten Bücher)이 집안 상회의 장부인지 책인지는 편지만으로는 알 수 없어 「옛 책들」로 두었다. 함부르크에 맡겨 두었다는 것은 편지의 Hamburg와 휘브셔 주 39(상회 청산인 간스란트)에 따른 짐작이다.

[주 32-09] 쇼펜하우어, 『소품과 부록』 제1권 「인생의 지혜를 위한 아포리즘」 제5장 C 「남을 대하는 태도에 관하여」 준칙 21. 1913년 올레판 전자 전사,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47406번. 한국어 의역. 원문은 Um durch die Welt zu kommen, ist es zweckmäßig, einen großen Vorrat von Vorsicht und Nachsicht mitzunehmen: durch erstere wird man vor Schaden und Verlust, durch letztere vor Streit und Händel geschützt. 「본바탕을 통째로 단죄하지 말라」는 같은 준칙의 뒷부분을 가리키기만 했다.

[주 32-10] 같은 장 준칙 29.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47406번. 인용은 한국어 의역이며 원문은 (Vergeben und Vergessen heißt gemachte kostbare Erfahrungen zum Fenster hinauswerfen.) 소중한 사람인지 묻는 대목, 성격은 고칠 수 없다는 대목(Alles, alles kann einer vergessen, nur nicht sich selbst, sein eigenes Wesen. Denn der Charakter ist schlechthin inkorrigibel), 현상 논문을 읽으라는 권유(Man lese meine Preisschrift über die sogenannte Freiheit des Willens und befreie sich vom Wahn), 화해는 약함이라는 대목(sich mit einem Freunde, mit dem man gebrochen hatte, wieder auszusöhnen, eine Schwäche, die man abbüßt)은 취지를 옮긴 것이다.

[주 32-11] 같은 장 준칙 44.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47406번. 인용은 한국어 의역이며 원문은 einen schlechten Zug eines Menschen jemals vergessen, ist, wie wenn man schwer erworbenes Geld wegwürfe. 앞 문장(Man soll, wo möglich, gegen niemanden Animosität hegen, jedoch die procédés eines jeden sich wohl merken und im Gedächtnis behalten …)은 취지를 옮긴 것이다.

[주 32-12] 「도덕의 기초에 관한 현상 논문」 §20 「성격의 윤리적 차이에 관하여」. 전집 제4권(1891년 브로크하우스판 전집 제4권), 인쇄 256쪽, PDF 482쪽. 스캔으로 대조했다. 한국어 의역. 원문은 Was wir an Andern entweder hochachten und lieben, oder verachten und hassen, ist nicht ein Wandelbares und Veränderliches, sondern ein Bleibendes, ein für alle Mal Bestehendes: das was sie sind: und kommen wir etwan von ihnen zurück; so sagen wir nicht, daß sie sich geändert, sondern daß wir uns in ihnen geirrt haben.

[주 32-13] 아델레가 1849년 8월 25일 본에서 죽은 것은 프랑크푸르트 대학 도서관 생애 연표 1849년 항목. 죽기 얼마 전 남매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쇼펜하우어 협회 연표 1849년 항목(누이가 마지막 만남 직후 죽었다). 만남의 장소와 날짜는 이 자료에 없다(재확인).

사료에 근거한 것은 1838년 4월 16일 요한나의 죽음, 1814년 5월 22일의 이별과 그 뒤 다시 만나지 않은 것, 1819년 파산과 아르투어의 행동, 1831~1832년 편지의 재개와 말투, 1835년 7월 22일과 24일의 편지, 1836년 1월의 750탈러, 1836·1838년의 차가운 편지, 1837년 10월 31일의 상속 배제와 그가 다투지 않은 일, 1838년 1월 30일의 마지막 편지, 1849년 아델레의 죽음과 마지막 만남이다. 창작 대사는 없다. 그가 어머니를 용서했다는 기록도, 화해했다는 기록도 없으며 본문은 화해를 만들지 않았다. 상속 배제의 까닭을 1819년과 이어 짐작한 것, 두 편지를 「서로를 두고 맞섰다」로 읽은 것, 이해·면책·화해·관계 유지의 구분, 그의 이론이 어머니를 설명한다는 것, 마지막 물음은 서술자의 해석이다. 1851년의 『아포리즘』과 1841년의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는 1835~1838년의 그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뜻이 아니라 뒷날의 글로 비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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