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10,449자)
돈은 얼마면 충분한가?
쇼펜하우어의 삶 · 네오
1852년 6월 26일, 프랑크푸르트의 쇼펜하우어는 유언장에 서명했다. 예순네 살이었다. 그는 자기가 가진 것을 하나하나 적어 나갔다. 고향 단치히 근처 오라 마을에 있는 집안 땅의 사분의 삼, 이율 삼 푼 반짜리 프로이센 국채, 은그릇과 옷가지와 가구, 책과 흉상과 악기와 악보, 금시계와 오페라 안경이 거기 있었다.[주 26-01]
숫자는 꼼꼼했다. 집에서 일하는 하녀 마르가레테 슈네프에게는 그가 죽을 때 아직 그의 집에서 일하고 있다면 해마다 백오 탈러의 연금을 준다고 적었다. 그 연금은 삼천 탈러어치 국채의 이자로 치르고, 국채의 이율이 내려가면 원금에서 모자란 만큼을 채우라고 했다. 그가 죽은 뒤 첫 연금을 받는 날까지는 해마다 사십 굴덴의 품삯과 하루 삼십 크로이처의 밥값을 계속 주라고 했다.[주 26-01]
그는 평생 돈을 벌러 일한 적이 없었다. 그 대신 평생 돈을 지켰다. 돈을 지키는 일이 그에게 얼마나 무거운 일이었는지는 서른한 살 때 이미 드러났다.
*
1819년 5월, 발트해 항구 단치히의 무역상회 A. L. 뮐이 돈을 갚지 못하겠다고 선언했다. 어머니 요한나와 여동생 아델레는 재산의 대부분을 이 상회에 맡겨 두었고, 아르투어도 구천사백 탈러쯤을 맡겨 두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오던 그는 밀라노에서 그 소식을 들었다.[주 26-02]
처음에 그는 나누겠다고 했다. 여름에 그는 어머니와 여동생이 정말로 궁해지면 자기에게 남는 것을 함께 나누겠다고 편지에 썼다. 그러나 같은 편지에 아버지의 재산을 어머니가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탓하는 말을 넣었고, 그 말 때문에 어머니와 그 사이는 더 벌어졌다.[주 26-03]
그해 12월, 뮐 상회는 빚을 진 사람들에게 화의를 내놓았다. 맡긴 돈의 삼십 퍼센트만 세 번에 나누어 갚을 테니 나머지는 포기하라는 제안이었다. 단치히의 채권자들은 대부분 받아들였다. 어머니와 여동생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다만 화의가 성립하려면 채권자 모두가 서명해야 했고, 상회의 관리인은 그가 거절하면 다른 채권자들, 무엇보다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손해를 본다고 설명했다.[주 26-04]
1820년 1월 14일, 아델레는 오빠를 설득하려고 긴 편지를 썼다. 그는 거절했다. 1월 31일 그는 관리인에게 이렇게 답했다.
“나는 이미 마음을 굳혔지만, 설령 그러지 않았더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 거절을 굳혔을 겁니다. 나를 살려 주지도 못할 삼십 퍼센트는 받지 않겠습니다. 상회가 나중에 형편이 나아지면 뮐 씨의 명예심에 기대도 된다고 하셨지요. 나도 그렇게 믿습니다. 다만 나는 명예심이 할 일을 조금 덜어 주는 편이 더 확실하다고 봅니다. 꼭 갚을 수밖에 없게 해 두는 쪽 말입니다. 그리고 나는 하늘과 내 권리에 걸고 내 것인 것을, 아버지가 힘들게 정직하게 번 것을, 남에게서 선물처럼 받고 싶지 않습니다.”[주 26-05]
그는 화의를 막지는 않겠다고 했다. 다만 자기는 서명하지 않고 따로 남아, 맡긴 돈의 어음 기한이 되면 그때 다 받아 내겠다고 했다.
아델레는 2월 9일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오빠는 자기 돈과 자기 말을 걸고 어리석은 놀음을 한다고 했다. 이자도 포기하고 다 걸었다가, 화의가 깨지면 남의 손을 빌려 우리를 망하게 해 놓고도 자기 탓이 아니라고 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잘못 판단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사람의 비정한 냉혹함은 견딜 수 없다고 썼다.[주 26-06]
두 사람의 논리는 다 옳았다. 아델레에게 삼십 퍼센트는 지금 손에 쥘 수 있는 생활비였다. 그녀와 어머니는 당장 이자 한 푼 없이 빌린 돈으로 살고 있었고, 다 받아 내겠다고 버티는 동안 굶을 수는 없었다. 아르투어에게 삼십 퍼센트는 그가 사는 방식을 끝내는 돈이었다. 그 돈으로는 일하지 않고 생각만 하며 사는 삶을 이어 갈 수 없었다. 한 사람에게는 오늘의 밥이 걸렸고, 다른 사람에게는 앞으로의 삶 전체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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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그의 편이었다. 화의는 1820년 5월에 성립했고, 그는 혼자 따로 남아 버텼다. 1821년, 뮐 상회는 그가 요구한 돈을 갚았다.[주 26-07] 그 결과가 처음부터 정해져 있지는 않았다. 뮐은 1820년 2월, 자기는 늙은 사람이니 나중에 갚을 형편이 되리라는 기대는 하지 말라고 그에게 경고했다.[주 26-04] 상회가 끝내 일어서지 못했다면 그는 삼십 퍼센트마저 잃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맡긴 돈의 칠십 퍼센트를 잃었다. 상회는 보상으로 해마다 삼백 탈러의 종신 연금을 주기로 했다. 그 뒤 어머니의 생활은 주로 펜에 기댔다.[주 26-08] 아들은 옳았고, 어머니와 여동생은 가난해졌다. 옳았다는 것과 함께 살아남았다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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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얼마면 충분한가? 돈은 정해진 액수로 충분해지지 않는다. 바라는 것의 크기와 견주어서만 충분해진다.
화의를 거절하고 서른한 해가 지나, 그는 『소품과 부록』의 첫 권에 「인생의 지혜를 위한 아포리즘」을 실었다. 사람이 가진 것을 다루는 그 셋째 장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가진 것에 대해 이성적으로 바랄 수 있는 한계를 정하기는 어렵고, 어쩌면 불가능하다. 이 점에서 사람의 만족은 절대적인 크기가 아니라 상대적인 크기, 곧 그가 바라는 것과 그가 가진 것의 비율에 달려 있다. 그래서 가진 것만 따로 떼어 보면, 분모 없는 분자처럼 아무 뜻이 없다.”[주 26-09]
그는 이 논증을 한 걸음씩 밀고 나간다. 사람마다 자기가 이룰 수 있다고 여기는 지평이 있고, 바라는 것은 그 지평만큼 뻗는다. 지평 밖에 있는 것은 그 사람을 흔들지 못한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부자의 큰 재산 때문에 괴롭지 않고, 부자는 이미 가진 많은 것으로 놓친 하나를 달래지 못한다. 불운이 가진 것을 줄이면 처음에는 아프지만, 사람은 곧 바라는 것도 그만큼 줄이고 상처는 아문다. 행운이 가진 것을 늘리면 바라는 것도 따라 늘어나고, 기쁨은 늘어난 바람에 익숙해질 때까지만 간다.[주 26-09] 그는 괄호 안에 짧게 덧붙인다. 재산은 바닷물과 같아서 마실수록 목이 마르다고 했다.[주 26-09]
돈 걱정이 왜 끝나지 않는지도 그는 설명한다. 다른 재화는 저마다 한 가지 필요만 채운다. 음식은 배고픈 사람에게, 약은 아픈 사람에게, 털외투는 겨울에만 좋다. 돈만은 그때그때 바뀌는 어떤 바람으로든 모습을 바꿀 수 있다. 그래서 돈은 한 가지 필요가 아니라 필요 그 자체에 맞서는, 유일하게 절대적인 재화가 된다.[주 26-09] 돈을 걱정하는 사람은 지금 필요한 것 하나를 걱정하지 않는다. 앞으로 생길지 모르는 모든 필요를 한꺼번에 걱정한다. 그러니 그 걱정은 지금 가진 액수로는 끝나지 않는다.
그는 장의 첫머리에서 사람의 필요를 셋으로 나눈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를 빌려 온다. 첫째는 자연스럽고 꼭 필요한 것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이다. 채우지 못하면 고통스럽지만 채우기는 쉽다. 둘째는 자연스럽지만 꼭 필요하지는 않은 것이다. 셋째는 자연스럽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것으로, 사치와 화려함과 남에게 보이는 겉치레다. 이 셋째 것은 끝이 없고 채우기가 매우 어렵다.[주 26-09] 독립을 위한 돈은 첫째 것을 지키는 돈이다. 과시를 위한 돈은 셋째 것을 쫓는 돈이고, 셋째 것에는 끝이 없다.
그렇다면 아무리 많아도 충분하지 않은가?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같은 장에서 그는 충분함의 기준을 하나 내놓는다.
“태어날 때부터, 가족 없이 자기 한 몸만이라도, 일하지 않고 편안히 살 만큼 가진다는 것은 값을 매길 수 없는 특권이다. 그것은 사람의 삶에 붙어 다니는 궁핍과 고역에서 벗어나는 일이고, 모든 사람이 짊어진 강제 노동에서 풀려나는 일이다. 이런 운을 타고나야만 진짜 자유인으로 태어난다. 그래야만 자기 시간과 자기 힘의 주인이 되고, 아침마다 ‘오늘은 내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해마다 천 탈러를 받는 사람과 십만 탈러를 받는 사람의 차이는, 천 탈러를 받는 사람과 아무것도 없는 사람의 차이보다 한없이 작다.”[주 26-10]
여기서 충분함은 비교로 정해지지 않는다. 남보다 많으냐 적으냐가 아니라, 하루를 자기가 정할 수 있느냐로 정해진다. 천 탈러와 십만 탈러 사이는 과시의 차이다. 천 탈러와 영 사이는 자유의 차이다. 1820년 1월에 그가 삼십 퍼센트를 거절한 까닭이 바로 그 선이었다. 삼십 퍼센트를 받으면 그는 그 선 아래로 떨어졌다. 그에게 그 거절은 욕심이 아니라 아침마다 ‘오늘은 내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지키는 일이었다.
그는 그 특권에 조건도 달았다. 물려받은 재산으로 일하지 않고 살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학문 하나도 제대로 배우지 않는 사람은 그저 날을 훔치는 사람이고 업신여김을 받아 마땅하다고 썼다. 그런 사람은 행복하지도 않다. 궁핍에서 벗어나자마자 권태에 붙잡히고, 권태를 달래려고 돈을 써 버리다가 결국 그 특권마저 잃는다.[주 26-10] 돈이 사 주는 것은 시간이고, 시간을 쓸 줄 모르는 사람에게 돈은 권태를 사 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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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의 기준에는 빈 곳이 있다. 그가 말한 충분함의 선은 처음부터 물려받은 돈 위에 그어져 있었다. 그는 그 선을 ‘운의 혜택’이라 불렀지만, 그 운이 없는 사람에게 무엇이 충분한지는 따로 묻지 않았다. 1820년 겨울, 단치히에서 빌린 돈으로 버티던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충분함은 철학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음 달 집세였다. 바라는 것을 줄이면 상처가 아문다는 그의 말은 가진 것이 넉넉한 사람의 상처에는 맞았다. 가진 것이 바닥에 닿은 사람에게는 줄일 바람이 남아 있지 않았다.
유언장도 그 빈 곳을 비춘다. 그는 자기 재산의 대부분을 베를린에 세워진 기금에 남겼다. 1848년과 1849년의 봉기와 반란을 진압하는 싸움에서 법질서를 지키다 다친 프로이센 병사들과, 그 싸움에서 죽은 병사들의 유족을 돕는 기금이었다.[주 26-01] 그는 거리의 봉기를 싸움으로 막은 사람들과 그 가족에게 평생 지킨 재산을 넘겼다. 그리고 해마다 사십 굴덴을 받던 하녀에게는 백오 탈러의 노후를 마련했다. 그 하녀가 아침마다 ‘오늘은 내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는지는 기록에 없다.
1820년 1월의 편지에서 그는 아버지가 힘들게 번 돈을 선물처럼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돈은 처음부터 그에게 선물이었다. 그는 그 선물을 끝까지 지켰고, 그 덕분에 평생 자기 시간의 주인으로 살았다. 같은 돈을 맡겼던 어머니와 여동생은 그러지 못했다. 그들이 그보다 덜 바라서 가난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충분함은 바라는 것을 줄이는 지혜의 문제일까, 처음에 무엇을 쥐고 태어났느냐의 문제일까?
후주
[주 26-01] 1852년 6월 26일 자 유언장(끝의 서명 날짜. 첫 쪽 머리의 「22/6 52」는 인지 날짜로 보인다 — 서신집 OCR, 재확인). 루트비히 셰만 편 『쇼펜하우어 서신집』(라이프치히, 1893), 547~550쪽. OCR로 읽었으며 스캔 대조는 하지 않았다(숫자와 이름은 재확인). 오라(Ohra) 근처 쇼펜하우어 집안 땅의 사분의 삼(Grundbuch Nr. 38)은 사촌 카를 고트프리트 티츠의 세 자녀에게, 하녀 마르가레테 슈네프에게는 은그릇·옷·침구·가구와 연 105탈러 연금(3000탈러어치 이율 3½% 프로이센 국채 이자로, 이율이 내리면 원금으로 보충), 첫 연금까지 연 40굴덴의 품삯과 하루 30크로이처의 식비, 유언 집행인 마르틴 엠덴 박사에게는 책·흉상·그림·악기·악보·금시계·오페라 안경(Opernkucker) 등을 남긴다고 적었다. 보편 상속인은 「1848년과 1849년의 봉기와 반란 싸움에서 독일의 법질서를 지키고 되세우다 불구가 된 프로이센 병사들과, 그 싸움에서 죽은 이들의 유족을 돕기 위해 베를린에 세워진 기금」이며, 그 기금이 없으면 베를린 상이군인 요양원이다. 유언장 작성 연도는 쇼펜하우어 협회 연표 1852년 항목.
[주 26-02] 뮐 상회가 1819년 5월 17일 지급을 멈춘 것, 요한나와 아델레가 재산의 대부분을, 아르투어가 약 9400탈러를 맡겼던 것, 소식이 밀라노에서 그에게 닿은 것은 아르투어 휘브셔, 「아델레가 아르투어에게 — 알려지지 않은 편지들 I」, 『쇼펜하우어 연감』 1977년호(권 번호 재확인), 139쪽. 밀라노에서 소식을 들은 것은 쇼펜하우어 협회 연표 1818~1819년 항목도 같다. 아델레의 1819년 7월 21일 편지는 그가 잃는 돈을 9033탈러로 적는다(같은 글 140쪽).
[주 26-03] 1819년 7월 이전에 남는 재산을 어머니·여동생과 나누겠다고 제안한 것, 같은 편지에서 「당신들은 아버지라는 정직한 사람에 대한 기억을 그의 아들에게서도 딸에게서도 존중하지 않았다」는 말을 써서 어머니가 격분한 것은 휘브셔 같은 글 139~140쪽이 아델레의 편지와 일기, 요한나가 1827년 카를 콘스탄틴 케일에게 쓴 편지로 정리한 것이다. 취지를 옮겼다.
[주 26-04] 1819년 12월 3일 관리인 조르만스가 「30퍼센트를 세 번에 나누어 지급」하는 화의안을 전한 것, 12월 24일 편지에서 단치히 채권자 대부분이 이미 가입했고 그의 거절이 다른 채권자와 특히 어머니·여동생에게 해가 된다고 설명한 것은 휘브셔 같은 글 142쪽. 화의 보증인들이 채권자 전원의 가입을 조건으로 했다는 것은 뮐의 1820년 2월 19일 편지(같은 글 143~144쪽). 같은 편지에서 뮐은 자기가 늙은 사람이니 뒷날의 지급 능력에 기대지 말라고 했다(Auf seine spätere Zahlungsfähigkeit dürfe Schopenhauer sich keine Hoffnung machen, da er, Muhl, ein alter Mann sei — 휘브셔의 간접화법 정리).
[주 26-05] 쇼펜하우어가 1820년 1월 31일 조르만스에게 쓴 편지. 휘브셔 같은 글 143쪽에서 재인용(PDF 글자층으로 읽음). 한국어 의역. 원문은 Wäre ich nun nicht schon zuvor, wie Sie wissen, fest entschlossen gewesen, die dreißig Prozent, die mir nicht helfen können, nicht anzunehmen, so würde ich eben jetzt erst jenen negativen Beschluß fest fassen. Zwar sagen Sie, daß ich auch nachher, wenn das Haus wieder in eine bessere Lage käme, von Muhl's Ehrgefühl etwas hoffen dürfe, ich glaube es selbst, allein ich halte es für sicherer, dem Ehrgefühl die Arbeit ein wenig zu erleichtern, indem man etwas Nothwendigkeit ihm unter die Arme greifen läßt, und lasse mir überhaupt nicht gerne schenken, was par Dieu et mon droit Mein ist, von meinem Vater sauer und redlich erworben. 화의를 막지 않고 어음 기한에 따로 청구하겠다는 것은 같은 쪽의 정리. 아델레의 1820년 1월 14일 편지도 같은 쪽.
[주 26-06] 아델레의 1820년 2월 9일 일기. 휘브셔 같은 글 143쪽에서 재인용. 취지를 옮긴 것이다. 원문의 핵심은 … er treibt ein törigtes Spiel mit seinem Gelde und mit seinem Worte … Geht der Accord nicht durch, so meint er, sich nicht beschuldigen zu können, wenn er uns so durch dritte Hand zugrunde gerichtet haben sollte. — Und Irrthum ist nichts, aber die unmenschliche Härte! 요한나가 단치히 체류 비용을 지인들에게서 빌린 돈으로 댔다는 것은 같은 글 139쪽. 본문의 「이자 한 푼 없이 빌린 돈으로」는 화의 전 이자가 끊긴 상태(아델레의 1819년 5월 28일 편지, wir sind ganz ohne Geld, 같은 글 부록)와 이 차용을 묶은 서술자의 말이다.
[주 26-07] 화의가 1820년 5월 29일 성립했다는 뮐의 통지는 휘브셔 같은 글 145~146쪽. 1821년 뮐 상회가 그의 청구액을 갚은 것은 쇼펜하우어 협회 연표 1821년 항목(Muhl & Co. zahlt seine Forderungen).
[주 26-08] 요한나가 70퍼센트를 잃고, 뮐 상회가 연 300탈러의 종신 연금을 약속했고(1820년 6월 8일 증서), 그 뒤 글쓰기가 주된 수입원이 된 것은 프랑크푸르트 대학 도서관 보도자료 「요한나 쇼펜하우어의 연금 이야기」(2008년 5월 16일)와 휘브셔 같은 글 142쪽. 보도자료는 그가 그 뒤 어머니에 대한 재정 지원을 거절했다고 적는다.
[주 26-09] 쇼펜하우어, 「인생의 지혜를 위한 아포리즘」 제3장 「사람이 가진 것에 관하여」 둘째 문단. 1913년 올레판 전자 전사,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47406번. 인용은 한국어 의역. 원문은 Die Grenze unserer vernünftigen Wünsche hinsichtlich des Besitzes zu bestimmen ist schwierig, wo nicht unmöglich. Denn die Zufriedenheit eines jeden, in dieser Hinsicht, beruht nicht auf einer absoluten sondern auf einer bloß relativen Größe, nämlich auf dem Verhältnis zwischen seinen Ansprüchen und seinem Besitz: daher dieser letztere, für sich allein betrachtet, so bedeutungsleer ist wie der Zähler eines Bruchs ohne den Nenner. 지평·상처·기쁨의 논증과 바닷물 비유(Der Reichtum gleicht dem Seewasser: je mehr man davon trinkt, desto durstiger wird man)는 같은 문단의 취지를 옮긴 것이다. 돈이 쉼 없이 모습을 바꾸는 프로테우스와 같아 유일하게 절대적인 재화라는 대목(Geld allein ist das absolut Gute …)과 장 첫머리의 에피쿠로스의 세 가지 필요(Diog. Laert. X, 149 인용)도 같은 장의 취지를 옮긴 것이다. 프로테우스라는 이름은 본문에서 뺐다.
[주 26-10] 같은 장 Ich glaube keineswegs etwas meiner Feder Unwürdiges zu tun … 로 시작하는 문단.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47406번. 인용은 한국어 의역. 원문은 … von Hause aus so viel zu besitzen, daß man, wäre es auch nur für seine Person und ohne Familie, in wahrer Unabhängigkeit d. h. ohne zu arbeiten, bequem leben kann, ist ein unschätzbarer Vorzug: denn es ist die Exemtion und die Immunität von der dem menschlichen Leben anhängenden Bedürftigkeit und Plage, also die Emanzipation vom allgemeinen Frohndienst … Nur unter dieser Begünstigung des Schicksals ist man als ein wahrer Freier geboren: denn nur so ist man eigentlich sui juris, Herr seiner Zeit und seiner Kräfte, und darf jeden Morgen sagen: »Der Tag ist mein«. Auch ist ebendeshalb zwischen dem, der tausend, und dem, der hunderttausend Taler Renten hat, der Unterschied unendlich kleiner als zwischen ersterem und dem, der nichts hat. 날을 훔치는 사람(ein bloßer Tagedieb und verächtlich)과 권태 대목은 같은 문단의 취지를 옮긴 것이다.
사료에 근거한 것은 1852년 유언장의 내용, 1819년 뮐 상회의 파산과 각자의 손실, 그가 재산을 나누겠다고 하면서 어머니를 탓한 편지, 30퍼센트 화의안과 관리인의 설득, 아델레의 1820년 1월 편지와 2월 일기, 그의 1월 31일 거절 편지, 1821년의 전액 회수, 요한나의 손실과 종신 연금과 글쓰기 수입이다. 창작 대사는 없다. 남매가 얼굴을 맞대고 다툰 기록은 없고, 아델레는 1814년 이후 오빠를 만나지 않았으므로(휘브셔 같은 글 134쪽), 맞섬은 두 사람이 실제로 남긴 편지와 일기로 세웠다. 1851년의 「아포리즘」은 1820년의 그가 한 생각이 아니라 서른 해 뒤의 저작으로 비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