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9,904자)

나를 지킨다는 이유로 남을 낮추다

쇼펜하우어의 삶 · 네오

1831년 가을, 마인강 가의 상업 도시 프랑크푸르트에 콜레라를 피해 온 쇼펜하우어는 슐레징어가세 32번지의 셋방에서 베를린 소식을 기다렸다. 그는 8월 말 베를린을 떠난 뒤 이다에게 편지를 두 통 보냈다. 이다는 그가 떠나면 따라오겠다고 약속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답장은 오지 않았다.[주 24-01]

답장이 오지 않는 까닭을 그는 하나로 정했다. 이다가 그를 속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미 한 번 그렇게 믿을 일을 겪었다. 1822년 그가 이탈리아로 떠난 사이 이다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았다. 그때 생긴 의심은 아홉 해 동안 꺼지지 않았고, 편지가 끊긴 가을에 다시 타올랐다.

베를린에서 이다를 살펴 달라고 부탁받은 친구 하인리히 폰 로우초는 10월 13일 이렇게 답했다.

“이다 일로 너무 애태우지 마십시오. 당신의 이다가 당신을 배신했다고 나는 믿을 수도 없고 믿고 싶지도 않습니다. 나는 여자들을 좀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 아가씨가 당신에게 진심이라는 것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그 늙은 고양이 같은 이모가 편지를 가로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 보셨습니까?”[주 24-02]

로우초의 편지에는 그 나름의 일반화도 섞여 있었다. 그는 여자들이란 연애편지를 즐겨 전해 주고 몰래 주고받는 편지라면 무엇이든 사랑 이야기로 여긴다고 덧붙였다. 두 남자는 한 여자를 두고 정반대로 판단했지만, ‘여자들’이라는 묶음으로 말하는 버릇은 같았다.[주 24-02]

*

10월 29일, 로우초는 마침내 이다를 만났다. 이다는 그를 속인 것이 아니라 앓고 있었다. 8월 31일 그녀의 창밖에서 콜레라가 터졌고, 그녀는 하루를 앓은 뒤 네 주 동안 열병에 누워 있었다. 그의 편지 두 통은 그녀를 대신해 일을 봐 주던 노인이 받아 서랍에 넣고 떠나 버리는 바람에 그녀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녀는 같은 날 그에게 편지를 썼다.[주 24-03]

그러나 의심은 소식 한 번으로 풀리지 않았다. 그는 다시 그녀를 탓하는 편지를 보냈다. 11월 10일, 이다는 그가 보낸 편지 한 통을 뜯지도 않은 채 돌려보냈다.

“당신이 나를 부당하게 대한다는 증거로 당신 편지 한 통을 뜯지 않은 채 돌려보내요. 나는 어제야 그 편지들을 받았어요. 이렇게 한다고 당신 앞에서 내 명예를 건지려는 게 아니에요. 내 말이 더는 통하지 않는 곳이라면 나는 거기 있을 자리가 없으니까요. 다만 당신의 모욕이 너무 아팠어요. 이제부터는 증거를 갖기 전에는 아무도 잘못 보지 마세요.”[주 24-04]

봉인이 그대로 붙은 편지는 그녀가 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증거였다. 그녀는 맞춤법이 서툴렀고 생각을 차례대로 늘어놓지 못했지만, 그 짧은 편지에서 할 말은 분명했다. 그는 확인하기 전에 판단했고, 판단한 다음에 확인을 미루었다.

그의 쪽에도 까닭은 있었다. 그는 한 번 배신을 겪었고, 같은 일을 두 번 겪지 않으려 했다. 의심은 그에게 자기를 지키는 울타리였다. 상처받기 전에 먼저 믿지 않으면 상처받을 일도 줄어든다. 이다의 쪽에도 까닭이 있었다. 그녀는 아홉 해 전의 일로 지금의 자기를 재지 말라고 했다. 지난 상처가 남의 지금을 판단할 근거가 될 수는 없었다.

의심이 얼마나 쉽게 자라는지는 그해 겨울 로우초 자신이 보여 주었다. 12월 29일 그는 고백하듯 썼다. 자기를 질투할 만하다고 여기는 한 아가씨가, 그가 이다에게 편지를 전해 주려고 만난 모습을 보았다. 그 일로 다툼이 일었고, 그 끝에 이다에 대한 고발이 그럴듯한 빛깔을 띠고 그의 귀에 들어왔다. 로우초는 한동안 이다가 정말로 부정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샅샅이 알아본 끝에 그는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결론을 냈다. 고발한 아가씨도 일부러 헐뜯은 것이 아니라, 닮은 사람을 보고 착각했을 뿐이었다.[주 24-03] 이다를 가장 믿어 주던 사람조차 닮은 얼굴 하나와 그럴듯한 말 몇 마디에 흔들렸다. 의심은 증거에서 자라지 않고 닮음에서 자랐다.

이듬해 4월에도 그는 그녀에게 경솔하다는 말을 썼고, 그녀는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고 되물었다. 그녀는 가장 엄숙한 맹세로, 자기는 아직 같은 이다라고 썼다.[주 24-05] 그녀는 끝내 프랑크푸르트로 오지 않았다. 그의 의심이 옳아서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맡길 데 없는 아들과 빚과 병이 있었다.

*

상처를 피하려던 태도가 어느새 냉소와 편견이 된 것은 아닌가? 상처를 피하려는 태도는 한 사람에게 머물 때 조심이 되고, 한 무리 전체로 넓어질 때 편견이 된다.

그 가을로부터 스무 해가 지나 그가 펴낸 노년의 글 모음 『소품과 부록』의 둘째 권은 번호를 매긴 짧은 절들이 장마다 묶여 있는 책인데, 그 장들 가운데 「여자에 관하여」라는 장이 있다. 그는 그 장을 이렇게 시작한다.

“여자의 생김새만 보아도 여자가 정신으로든 몸으로든 큰일을 하도록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자는 삶의 빚을 행동으로 갚지 않고 고통으로 갚는다. 아이를 낳는 진통으로, 아이를 돌보는 수고로, 남편에게 따르는 일로 갚는다. 여자는 남편에게 참을성 있고 기운을 북돋는 동반자여야 한다. 가장 격렬한 고통과 기쁨과 힘을 쏟는 일은 여자의 몫이 아니다.”[주 24-06]

그는 이 문장들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따로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순서는 드러난다. 먼저 그는 몸의 생김새를 본다. 다음에 그 생김새에서 그 몸이 무엇을 하도록 정해져 있는지를 읽는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읽은 쓰임새를 그 몸을 가진 모든 사람의 운명으로 넓힌다. 눈에 보이는 것에서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로, 다시 절반의 인류가 할 수 있는 일로 건너가는 사이에, 그는 단 한 사람의 여자에게도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가 아는 여자들은 그 문장에 들어맞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 요한나 쇼펜하우어는 1819년 투자한 상회가 망해 재산의 대부분을 잃은 뒤, 183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글을 써서 생활비의 대부분을 벌었다.[주 24-07] 생각으로 하는 일, 그것도 돈을 받는 일을 한 사람이 바로 그의 어머니였다. 그리고 1831년 베를린의 이다는 콜레라와 열병과 빚을 혼자 견디며 극장 일자리를 다시 구하고 삯바느질로 방세를 메웠다.[주 24-03] 그녀의 삶은 결코 ‘조용하고 대수롭지 않게’ 흘러가지 않았다.

*

그의 철학은 그 편견을 막을 도구를 이미 가지고 있었다. 바로 그 글 모음의 첫 권에 실린 「인생의 지혜를 위한 아포리즘」에는 남을 대하는 준칙들이 따로 모여 있고, 그 첫 번째는 이렇다.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은 자연이 정해 준 어떤 개성도 통째로 내던져서는 안 된다. 가장 나쁘고 가장 딱하고 가장 우스운 개성이라도 그렇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본바탕을 송두리째 단죄하면, 그에게는 우리를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할 원수로 여기는 길밖에 남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지금과 다른 사람이 된다는 조건을 걸고서만 그에게 살 권리를 주겠다는 말이다.”[주 24-08]

그는 이 준칙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썼다. 성미가 고약한 이웃, 말이 통하지 않는 손님, 길을 막는 사람에게 썼다. 그러나 「여자에 관하여」에서 그는 한 사람이 아니라 인류의 절반을 두고, 그들이 지금과 다른 존재일 때만 큰일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자기가 세운 준칙을 자기가 가장 크게 어긴 셈이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 그의 준칙 안에 답의 실마리가 있다. 그는 한 사람의 성격은 타고난 것이어서 바뀌지 않는다고 보았고, 그래서 사람마다 따로 보고 따로 견디라고 했다. 한 사람을 따로 보는 일은 수고가 든다. 그 사람의 사정을 묻고, 그 사람이 지금 무엇을 겪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묶음으로 보는 일은 그 수고를 덜어 준다. 한 번 ‘여자는 이렇다’고 정해 두면, 다음 여자를 만날 때는 묻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묻지 않으면 다시 속을 일도 없다고 믿게 된다. 편견은 게으름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다시 다치지 않으려는 마음이 묻는 수고를 미리 잘라 낼 때 생긴다.

더 깊은 모순은 그의 윤리학에 있었다. 1839년, 쉰한 살의 그는 덴마크 왕립 학술원의 현상 공모에 도덕의 바탕을 묻는 논문을 냈다. 거기서 그는 도덕의 뿌리를 연민에 두었다. 연민이란 남의 아픔이 내 아픔처럼 곧바로 내가 행동할 까닭이 되는 일이다. 그렇게 되려면 나와 남 사이의 벽이 어느 정도 허물어져야 한다고 그는 썼다. 남을 나와 다른 종류의 존재로 보는 동안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주 24-09] 연민은 사람을 묶음으로 보지 않고, 지금 아파하는 이 사람으로 본다. 편견은 그 반대다. 이 사람을 보기 전에 그가 속한 묶음부터 본다.

1831년 가을의 그는 이다를 보기 전에 ‘배신하는 여자’라는 묶음을 먼저 보았다. 그녀가 열병에 누워 있는 동안 그는 그녀를 배신자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가 스무 해 뒤에 쓴 문장은 그 가을의 버릇이 굳어진 모양이었다.

편견에는 값이 따른다. 그 값을 치르는 사람은 편견을 가진 쪽이 아니라 편견을 받는 쪽이다. 의심한 사람은 의심 덕분에 다치지 않았다. 의심받은 사람은 자기가 결백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야 했다. 열병에서 막 일어난 이다가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뜯지 않은 봉투 하나였다. 1851년의 문장도 같은 일을 했다. 그 책을 읽은 여자들은 자기가 큰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따로 증명해야 하는 자리에 놓였다. 그는 자기를 지키려고 판단했지만, 그 판단의 무게는 다른 사람의 어깨에 얹혔다.

*

그 장의 첫머리에도 그 자신을 거스르는 말이 하나 있다. 「여자에 관하여」는 사실 생김새 이야기보다 먼저, 그가 옳다고 인정하며 옮겨 적은 두 대목으로 시작한다. 하나는 프랑스 작가 주이의 말이다. 여자가 없으면 우리 삶의 시작은 도움을 잃고, 한가운데는 즐거움을 잃고, 끝은 위로를 잃는다는 말이다. 다른 하나는 영국 시인 바이런의 희곡 대사다. 사람의 첫 숨은 여자의 젖가슴에서 나오고, 첫 말은 여자의 입술에서 배우며, 남자들이 꺼리고 물러난 마지막 시간을 여자들이 지켜본다는 대목이다.[주 24-10] 그는 이 두 말이 여자의 값어치를 보는 바른 눈이라고 썼다.

그러니 그는 여자가 무엇을 하는지 몰랐던 것이 아니다. 그는 돌보는 일, 견디는 일, 끝까지 곁에 있는 일을 보았고, 그 일들을 ‘큰일’의 목록에서 뺐다. 1831년에 콜레라가 휩쓴 거리에서 남아 앓고 견딘 사람은 이다였고, 떠나서 기다린 사람은 그였다.

그의 통찰을 받아들이는 일과 그의 판단을 모두 따르는 일은 다르다. 연민을 도덕의 뿌리로 세운 사람이 인류의 절반을 생김새로 재었다. 독자는 앞의 것을 받아들이면서 뒤의 것을 거절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자신은 어땠을까? 상처받지 않으려고 쌓은 의심의 울타리 안에서, 그는 지금 눈앞에서 아파하는 한 사람을 끝내 볼 수 있었을까?

후주

[주 24-01] 1831년 8월 25일 베를린을 떠난 것, 그 겨울을 프랑크푸르트에서 지낸 것은 쇼펜하우어 협회 연표 1825~1831년 항목. 슐레징어가세 32번지 주소는 이다의 1831년 10월 29일 편지 겉봉. 그가 편지 두 통을 보냈다는 것, 이다가 따라가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은 아르투어 휘브셔, 「쇼펜하우어의 베를린 연인 — 알려지지 않은 편지들」, 『쇼펜하우어 연감』 1974년호(권 번호 재확인), 39·44·46쪽. 1823년 아들의 출생과 그 뒤의 의심은 같은 글 42~43쪽. 「아홉 해 동안」은 1822년부터 1831년까지를 센 서술자의 말이다.

[주 24-02] 하인리히 폰 로우초가 1831년 10월 13일 쇼펜하우어에게 쓴 편지. 휘브셔 같은 글 45쪽. 한국어 의역이며 앞뒤를 줄였다. 원문은 Bangen Sie doch nicht wegen der Ida. … Daß Ihre Ida perfide sey kann und will ich nicht glauben. Ich glaube die Weiber zu kennen, und habe doch nie daran gezweifelt, daß das Mädchen aufrichtig gegen Sie sey. … Denken Sie doch, wie leicht die alte Katze von Tante die Briefe unterschlagen haben kann. 뒤 문단의 「여자들이란 연애편지를 즐겨 전해 준다」는 같은 편지의 Die Weiber befördern Liebesbriefe ja so gern und jede geheime Correspondenz ist für sie Liebessache의 취지를 옮긴 것이다.

[주 24-03] 로우초의 1831년 10월 29일 편지와 이다의 같은 날 편지, 이다의 11월 10일 편지. 휘브셔 같은 글 45~46쪽. 편지를 받아 둔 노인이 서랍에 넣고 떠났다는 것은 11월 10일 편지의 내용이다. 그녀가 극장과 새해 일자리(Agagement)를 다시 얻었다는 것은 같은 11월 10일 편지, 바느질 일을 밤새 했다는 것은 1832년 2월 21일 편지(Trauer Arbeit … wo ich die Nächte zu hülfe nahm), 방세가 밀려 집주인이 짐을 봉인했다는 것은 같은 편지(같은 글 48쪽). 「삯바느질로 방세를 메웠다」는 이 편지들을 묶어 서술자가 쓴 말이다. 로우초가 질투하는 아가씨의 고발 때문에 한동안 이다를 의심했다가 알아본 끝에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고, 그 아가씨도 닮은 사람을 보고 속았다는 것은 로우초의 1831년 12월 29일 편지(… ist selbst durch Aehnlichkeit getäuscht)의 취지를 옮긴 것이다. 휘브셔 같은 글 47쪽.

[주 24-04] 이다의 1831년 11월 10일 편지. 휘브셔 같은 글 46쪽. 한국어 의역. 원문은 Zum Beweiß das Du mir unrecht thust schike ich Dir einen Deiner Briewe unerbrochen zurük, erst gestern habe ich sie erhalten … ich beabsichtig[e] keinesweges, dadurch bei Dir meine Ehre zu retten, den wo mein Wort nicht mehr gilt, da tauge ich nicht hin, es schmerzte mich nur zu sehr deine beleidigung … verkenne niemand wieder eh Du nicht beweise hast. 그가 어떤 말로 그녀를 탓했는지는 그의 편지가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다시 그녀를 탓하는 편지」는 이 답장에서 거꾸로 짐작한 것이다. 맞춤법이 서툴고 서술이 정돈되지 않았다는 평은 휘브셔(같은 글 45쪽)의 말이다.

[주 24-05] 이다의 1832년 4월 5일 편지 끝의 덧붙임. 휘브셔 같은 글 49쪽. 취지를 옮긴 것이다. 원문은 Du schreibst mir in deinem Briewe von Leichtsin, wie soll ich das nehmen? … mit dem feierlichsten Eide kann ich dirs beschwören, daß ich noch dieselbe Ida bin.

[주 24-06] 쇼펜하우어, 『소품과 부록』 제2권 제27장 「여자에 관하여」. 1891년 브로크하우스판(프라우엔슈테트 편) §376, 인쇄 649쪽, PDF 659쪽. 스캔으로 원문을 대조했다. 한국어 의역이며 마지막 문장(ohne wesentlich glücklicher, oder unglücklicher zu seyn)의 앞부분까지만 옮겼다. 원문은 Schon der Anblick der weiblichen Gestalt lehrt, daß das Weib weder zu großen geistigen, noch körperlichen Arbeiten bestimmt ist. Es trägt die Schuld des Lebens nicht durch Thun, sondern durch Leiden ab, durch die Wehen der Geburt, die Sorgfalt für das Kind, die Unterwürfigkeit unter den Mann, dem es eine geduldige und aufheiternde Gefährtin seyn soll. Die heftigsten Leiden, Freuden und Kraftäußerungen sind ihm nicht beschieden; sondern sein Leben soll stiller, unbedeutsamer und gelinder dahinfließen, als das des Mannes … 본문의 「조용하고 대수롭지 않게」는 이 마지막 문장의 낱말을 가리킨다. 이 장의 견해는 오늘의 관계 지침이 될 수 없는 편견으로 다루었다.

[주 24-07] 1819년 단치히 무역상회 A. L. 뮐의 파산으로 요한나가 그곳에 맡긴 돈의 70퍼센트를 잃었고, 그 뒤 1838년 죽을 때까지 글쓰기가 주된 수입원이 되었다는 것은 프랑크푸르트 대학 도서관 보도자료 「요한나 쇼펜하우어의 연금 이야기」(2008년 5월 16일). 본문의 「재산의 대부분」은 이 70퍼센트를 가리킨다. 요한나가 1838년 4월 16일 예나에서 죽은 것은 프랑크푸르트 대학 도서관 연표 1838년 항목.

[주 24-08] 쇼펜하우어, 「인생의 지혜를 위한 아포리즘」 제5장 C절 준칙 21번. 1913년 올레판 전자 전사,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47406번. 한국어 의역. 원문은 Wer unter Menschen zu leben hat, darf keine Individualität … unbedingt verwerfen; auch nicht die schlechteste, erbärmlichste oder lächerlichste. … Verdammen wir nun sein Wesen ganz und gar; so bleibt ihm nichts übrig, als in uns einen Todfeind zu bekämpfen: denn wir wollen ihm das Recht zu existiren nur unter der Bedingung zugestehn, daß er ein anderer werde, als er unabänderlich ist. 「첫 준칙」은 C절(남을 대하는 준칙)의 첫 번호라는 뜻이다.

[주 24-09] 쇼펜하우어, 「도덕의 기초에 관한 현상 논문」(1840년 제출, 1841년 『윤리학의 두 근본 문제』로 출간) §16의 취지를 옮긴 것이다. 원문 대조는 하지 않았다(재확인 — 전집 제4권 스캔에서 §16 쪽수 미확인). 덴마크 왕립 학술원에 냈고 상을 받지 못한 것은 프랑크푸르트 대학 도서관 연표 1840·1841년 항목. 연민이 어떻게 행동의 동기가 되는지의 자세한 분석은 뒤에서 따로 다룬다.

[주 24-10] 같은 장 §375, 인쇄 649쪽, PDF 659쪽. 스캔으로 바이런 인용의 뒷부분과 그의 맺음말(Beides bezeichnet den richtigen Gesichtspunkt für den Werth der Weiber)을 대조했고, 주이의 프랑스어 문장(sans les femmes, le commencement de notre vie seroit privé de secours, le milieu de plaisirs, et la fin de consolation)과 바이런 인용의 첫 줄은 OCR로 읽었다(재확인). 두 대목 모두 취지를 옮긴 것이다. 바이런의 희곡은 『사르다나팔루스』 제1막 제2장이다.

사료에 근거한 것은 1831년 가을 그의 프랑크푸르트 주소, 편지가 닿지 않은 경위, 로우초의 10월 13일·29일 편지, 이다의 10월 29일·11월 10일·1832년 4월 5일 편지 내용, 요한나의 재산 손실과 글쓰기 수입이다. 그가 이다를 배신자로 의심한 것은 로우초와 이다의 편지가 보여 주는 사실이며, 그 의심이 1822~1823년 일에서 비롯했다는 연결은 휘브셔의 서술에 기댄 서술자의 해석이다. 창작 대사는 없다. 대신 정면의 맞섬을 두 사람이 실제로 주고받은 편지로 세웠다. 1840년의 도덕 논문과 1851년의 「여자에 관하여」·「아포리즘」은 1831년의 그가 한 생각이 아니라 뒷날의 저작으로 비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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